대구공항에서 휴식하는 일행1
제주국제공항2
향토음식점(덤장)3
덤장은 육지 가까이 설치해 놓은 지금의 정치망으로 타원형 모양의 입구가 v자 형으로
되어있다. 쉽게 고기가 들어오지만 빠져 나가기는 힘들다. 일반 그물로 잡은 고기는 죽
지만 덤장으로 잡으면 죽지않고 1년 내내 싱싱한 고기를 먹을 수가 있다.
항몽 유적지(사396호)(제주 애월읍 상귀리)(사인보드)4
-삼별초군의 항전과 항파두리의 역사-
강화의 삼별초군은 근거지를 진도로 옮겨 대몽항전을 펼쳤다. 그러나 1271년(고려 원종12년)5월
진도가 여몽 연합군에게 함락되자 김통정장군은 제주 항파두리성에 진지를 마련하고 내.외성을
구축했다. 특히 외성을 토성으로 길이가 6km에 달했고 토성위에 나무를 태운 재를 뿌려 연막전술
을 폈다고 한다. 적이 나타났을 때 말꼬리에 빗자루를 매달아 달리게하면 자연히 재가 하늘로 날아
올라 연막이 되었다고 한다. 또 바닷가에는 환해장성을 쌓았다. 몽골과 고려조정의 회유에도 불구
하고 삼별초군이 굴복하지 않자 고려의 김방경(金方慶) 몽골의 흔도가 이끄는 여몽연합군 1만2천이
1273년(고려원종14년)4월 공격했다. 혈전을 벌였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마지막까지 항전하던
김통정장군은 붉은오름으로 퇴각한뒤 자결함으로 40년여년에 걸친 삼별초군의 투쟁은 끝이났다.
제주도에서 최후까지 항쟁한 2년6개월의 자취가 곧 이 항파두리성 사적지이다.
항몽유적지 입구(순의문)5
항몽순의비6
항몽유적지 전시관7
삼별초 최후 항전지와 항파두리성 내성지(사인보드)8
삼별초의 대몽항전 결의9
세계를 정복한 몽골도 끈질긴 고려의 항전으로 원종11년(1270년)에 몽골군은 강화를 맺었다.
39년간 항전하던 강화도에서 개성으로 환도하게되자 몽골과 싸우던 중심세력인 삼별초군은
굴욕적인 강화를 반대하여 반기를 들고 배중손을 중심으로 진도에 들어가 계속투쟁했다.
그러나 원종12년(1271년)5월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도가 함락되자 새로운 지도자 김통정장군이
제주도로 들어가 최후의 1인까지 싸울것을 굳게 결의하였다.
항파두리성 축성10
삼별초군의 적의 상륙 예상지인 함덕포와 명월포의 지세를 고려하여 그 중간지역인
항파두리에 둘레15리에 달하는 토성을 쌓고 성내에 건물을 짓고 삼별초의 근거지로
삼았다.
여.몽연합군의 함덕포 상륙11
고려 원종14년(1273년) 4월28일 몽골의 흔도가(炘都) 이끄는 여.몽군은
군선160척과 약1만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함덕과 비양도로 상륙했다.
치열한 공방전이 함덕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여.몽의 병력이나 병기가 월등히 우세해서 삼별초군은 패퇴하고 말았다.
삼별초의 최후 혈전12
여.몽연합군을 맞아 함덕과 파군봉.항파두리성에서 격렬히 방어전을 폈으나
병력의 열세로 부장급 70여명은 항파두리성을 탈출, 붉은오름에 올라 모두
장렬히 전서하고 홀로남은 김통정(金通精)장군은 한라산으로 들어가 자결했다.
몽골인이 제주인을 괴롭히는 모습13
삼별초군을 평정시킨 몽골군은 다루가치 총관부를 설치하고 제주도를 직속령으로
만들어 1세기 동안 지배했다. 그후 수많은 공물을 바쳤으며 몽골의 일본징벌 준비로
목마장을 설치하여 군마를 기르고 나무를 베어 함선을 건조하는 등 어려운 군역에
제주민을 동원해 수많은 고통을 겪게했다.
고려인이 몽골인을 몰아내는 모습14
목마관리를 위해 파견된 목호(牧胡)들은 원이 멸망한 뒤에도 그대로 남아
행패를 부리다가 고려의 사절이나 제주목사를 살해하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공민왕23년(1374년) 8월 고려는 최영장군으로 하여금 전함314척에 2만5천의
대군단을 끌고 상륙해 명월진에서 3천여기의 몽골군을 격멸하고 범선까지
쫓겨간 수괴들을 섬멸해 1세기를 괴롭힌 몽골의 침략을 완전 종식시켰다.
삼별초 이동경로15
수정사지와 돌쩌귀16
항파두리 성17
항파두리 성18
(2015.11.03)
첫댓글
김종태 15.11.20. 17:33 제주도는 언제 갔는가 잘 보았네
여행매니아 15.11.21. 10:36 집안모임에서 11월3일에서 11월6일(3박4일)까지 다녀왔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