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먹자
김미옥
하루 세끼 어김없이 다가오는 식사 시간. 여지는 꼬박꼬박 상을 차린다. 어느 시구詩句처럼 나와 밥을 가장 많이 먹은 남자와 마주 앉는다. 가끔 대충 넘어가고 싶을 때도 있지만 아무리 간식을 넉넉히 먹어도 어디까지나 간식은 간식일 뿐인 남자이기에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어쩔 수 없다.
밥 먹자. 삶에서 먹는 것의 소중함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는 만큼 참 듣기 좋은 말이다. 밥 한번 먹자는 말은 술 한잔하자, 자 한잔하자는 말과 따스함의 농도가 다르다. 싫은 사람과 차는 마실 수 있어도 밥은 먹을 수 없다던가. 밥을 함께 먹는다는 건 서로 수저를 부딪쳐가며 마음을 여는 시간이고 숟가락 수만큼 정이 쌓인다고 했다.
그런데 그 좋은 말이 야속하게 들릴 때가 있다. 여자가 아파서 끙끙거리는 중에도 밥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짓눌려 있을 때, 남자가 방문 열고 들여다보며 “밥 먹자!” 소리치면 여자는 기가 막혀 대꾸도 하기 싫다. 아픈 줄 뻔히 알면서 밥이라도 좀 안쳐 놓고 하는 말이면 그리 서운하지 않을 것이다. 여자가 허리도 못 펴고 간신히 일어나 싱크대 앞에 서면 섭섭함이 쌀바가지 너머로 흘러넘친다. 그런 날은 밥그릇 가득 꾹꾹 눌러 담아준다. 혼자 실컷 먹으라고.
한가할수록 끼니때는 더 잘 챙긴다. 남자는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수시로 맛집 정보를 메모하고, 계절 음식을 노래한다. 요즘 한창 바지락 캘 때네. 주꾸미가 제철이지 요새 시장에 생멸치 안 나던가? 꽃게 살이 제대로 찼을 텐데, 전어가 한창때지 요즘 갈치 비싸던가? 물메기 날 때가 되지 않았나. 서대는 남해 서대가 맛있는데….
고기보다 해산물을 좋아하는 남자네 식탁엔 좀처럼 생선이 빠지지 않는다. 어쩌다 보이지 않으면 수저를 들고 내려다보고 있다. 아무리 정성들여 상을 차려도 생선이 빠지면 반찬이 없는 셈이다. 하다못해 조갯살이라도 올라야 한다.
뿐만 아니다. 고춧가루를 더 넣어라, 청양고추를 더 넣어라, 위가 약한 여자는 안중에도 없다. 기름에 굽지 말고 쪄라. 갈치조림에도 감자를 넣어라, 호박을 넣어라, 찌개 국물이 많다, 적다. 군대 다녀온 사람은 콩나물을 싫어한다. 국민 찬거리인 콩나물도 남자네 식탁엔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못한다.
어쩌다 전자레인지에 찬밥이라도 데우면 남자는 또 한마디 던진다. 차라리 찬밥을 먹겠단다. 보온밥통 밥도 싫다. 반찬도 꼭 한 끼 먹을 만큼만 해라. 즉석 반찬만 선호하는 남자는 밑반찬인 멸치볶음까지 따끈따끈한 걸 요구하니 여자는 그만 손들고 싶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가 아니라 ‘쉬어라’도 괜찮다. 세끼 꼬박꼬박 차리는 것도 당연한데, 종일 입을 닫고 사는 사람이 유독 식탁에서 이러니저러니 하면 여자는 숫제 밥맛이 달아난다. 간혹 밥하기 어중간할때 라면이라도 들먹이면 남자는 인스턴트식품이며 밀가루 음식은 해롭다며 퉁을 준다. 수만 가지 발암물질이 들었다는 담배를 밤낮 물고 사는 남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여자는 어이없어 말도 나오지 않는다. 달리 남편 시집살이일까.
식사 시간도 정확해야 한다. 어쩌다 여자가 다른 데 정신 팔려 때가 지나갈라치면 알람 시계가 따로 없다. “밥 먹자!” 외친다. 여자는 이내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서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여자도 문제가 없지 않다. 사십 년 가깝도록 아직 그 비위를 딱 맞추지 못했으니 말이다. 솜씨 탓을 하기에도 너무 긴 시간 여태 한사람 비위도 못 맞추다니. 외양엔 전혀 신경 쓸 줄 모르는 시골 아저씨 같은 사람이 유독 음식 까탈이 끝이 없으니 여자는 이제 지친다. 요즘엔 귓등으로 흘려버린다. 식사는 제때 제대로 해야 한다는 남자와 세상 따라 좀 간편하게 살아도 되지 않느냐는 여자. 어쩌면 어깃장 같은 둘의 실랑이는 영원한 평행선일지도 모르겠다.
술 담배를 그렇게 즐기는 남자가 아직 무탈한 걸 보며 이해 안 된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특수 체질이라놀리기도 한다. 물론 타고난 건강이 절대적이겠지만 밥을 잘 챙겨먹는 것도 큰 몫을 하는가 싶다. 연일 술에 절어 늦게 들어와도 정확하게 제 시간에 일어나 한 그릇 뚝딱이다. 밥 남기는 걸 본 적 없다. 내일은 알 수 없지만 아직까지 속 쓰리다고 한 적도 없으니 그나마 고맙다. 밥이 보약이라는 말, 불변의 진리다. 늘 부실한 여자가 토를 달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자가 식사 약속이 있는 날이면 여자는 굴레라도 벗은 듯 홀가분해진다. 수시로 그의 스케줄을 확인하고 속으로 한끼 건너뛸 달콤한 휴무를 꿈꾼다. 그 해방감, 시간이 노다지로 쏟아지는 느낌이다. 예고 없는 외출에는 돌아서서 웃는다. 문을 나서는 뒤통수가 곱다. 어쩌다 약속이 취소라도 될 때면 주방으로 가는 걸음이 무겁다. 끼니를 대신할 알약 같은 건 대체 언제쯤 나오게 될까.
여자가 얼마 전에 만난 지인이 부쩍 살이 빠져서 이유를 물었더니 못먹어서 그렇다 해서 웃은 적이 있다. 애들이 독립해 나간 뒤 자신만을 위해 시장 보기도 음식 만들기도 소흘해졌단다. 몇 달 사이 눈에 보이게 축이 났다. 주부들은 대체로 자신은 뒷전이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 음식을 장만한다.
아무튼 남자 덕분에 여자도 끼니를 제대로 챙기는 셈이다. 혼자 있을 때면 과일이나 우유로 대충 때우고 마는 여자에게 밥 먹자고 채근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다만 세월 따라 남자가 조금만 느슨해진다면 더 바랄게 없겠는데….
여자는 남자가 부러운 게 한 가지 있다. 뭐든 입맛대로 척척 주문하는 당당한 특권. 자기 입만 입인 줄 아는 남자에게 오직 밥일 뿐인 여자는, 자기에게도 그런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래도 ‘밥 줘’가 아니라 ‘밥 먹자’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까. 어쩌면 “밥 먹자!”는 무뚝뚝한 남자 나름의 사랑 표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좀 가벼워질까. 밉든 곱든 세상 끝까지 마주 앉아 밥을 함께 먹어야 할 남자.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으니 숟가락 정이라도 더 쌓으려면 볼멘소리 그만하고 시장에나 나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