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도 그렇게 무식하지 않았다.
언젠가 아버지가 자기보다 훨씬 충녕을 사랑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읽던 책을 덥고 충녕을 찾아갔다.충녕은 큰 형인 양녕보다 작은 형을 더 좋아했다.
"충녕아!내가 생각이 짧았던 모양이야.충녕이 나라를 다스릴 재목인데 내가 그동안 욕심을 부렸던 것 같아."
효령의 말에 충녕은 벌떡 일어나 형에게 절을 올리며 말했다.
"형님.형이아버지의 위업을 받으셔야죠."
"아니다.내가 생각하기에는 나보다는 네가 적격자로 생각해.형도 같은 생각이고."
이렇게 말하고 돌아선 효령대군의 마음은 찹찹하기만 했다.
"모든 욕심을 버리자" 생각하고 자주 찾았던 회암사로 들어가서 밤새도록 북을 두드렸다.
얼마나 북을 쳤던지 소가죽으로 만든 북이 축 늘어질 정도였다.그래서 '효령이 북치 듯'하는 속담마저 생겼다.
효령대군은 절에서 열심히 수도하고 있었다.이에 사헌부에 부당함을 상소하자 세종은 "엎드려 교지(敎旨)를 받자오니,
'효령대군이 잠깐 회암사에서 불사(佛事)를 베풀 것이니 금지하지 말도록 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신하들은 "호승(胡僧) 순도(順道)가 부진(符秦)으로부터 고구려(高句麗)로 들어오고 마라나타(摩羅那陀)가
진(秦)나라로부터 백제(百濟)에 왔사온데 이로부터 축리(祝釐)를 행하여 국운을 돕게하고 부처를 섬겨 복을 구한다는
설이 세상에 한껏 성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공경히 생각하옵건대 우리 태조께서 개국(開國)하신 이래로 열성(列聖)께옵서
서로 계승하시면서 이 도(道)의 허탄(虛誕)함을 깊이 아시는 바이나,다만 행한 지 이미 오랜 것을 갑자기 폐할 수 없어
오교(五敎)를 줄이고 토지와 노비를 감하고는 도첩(度牒)이 없이 나이 40이 된 자는 머리를 길러 군대에 충당하게 하고,
첩자(帖子)가 없이 서울에 들어온 자는 원적(原籍)으로 돌려보내는 등 승도(僧徒)를 이같이 도태해 버린 사실은 천년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습니다.그러나 관습과 풍속이 오히려 없어지지 않고,천당 지옥설에 현혹되어 죄를 두려워하고
복을 사모하여 부처에 아첨하여 구하는 자가 간혹 있어도 선비들이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법령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이제 효령 대군 이보(李補)가 종실 지친(至親)의 장(長)으로 몸소 불전(佛殿)에 나아가 법연(法筵)에서
강연하여 이를 서민들에게 보이게 되면,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이를 본받고 사모할 것이니,근년의 일을 상고하여 볻더라도
임자년 봄 한강에서 있었던 일은 곧 그의 징험이 되는 것입니다.신 등은 아름다운 법이 폐기되고 행하지 못할 것이 장차
이로부터 비롯될 것을 깊이 우려하는 바입니다."
"세종은 윤허하지 아니하였다.현재 양종(兩宗)에 거처하는 자는 성안의 사찰에서 배불리 먹고 시정(市井)의 여염집을
왕래하면서 여색(女色)과 더물어 난잡하게 거처하고 있으니 어찌 능히 도로써 물욕을 제어하여 그 도를 정수(精修)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전하께옵서 저 중호 보혜 조연 신위 등을 유사(有司)에 내리시와 법에 의하여 죄를 과(科)하게 하시고
<선종 교종의> 양종을 혁파하고 선직(選職)을 폐지하며 40세 이상의 승도로 하여금 산수(山水) 좋은 곳으로 나가 거하게 하여
불도를 닦게 하고는 그 전토를 삭감하여 군수(軍需)를 보충하고 그 노비를 빼앗아 잔폐(殘弊)한 역(驛)에 예속하도록 하소서.
그밖에 도반승도(道伴僧徒)들이 온 세상 백성을 속여 미혹시키고 심지어는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가세를 기울여 파산(破産)에
이르게 하면서도 부처에게 재를 올리리는 승도들은 누워서 받고 편히 앉아서 먹으니 백성을 해롭힘이 너무 삼하옵니다.
오형(五刑)에 속하는 것이 3천 가지에 이르오나 그 죄가 불효보다 큰 것이 없고 또 불효의 죄는 부모의 과실을 고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는데 지금 사람들은 어버이가 죽으면 크게 불공을 베풀고서 매양 죄 없는 부모를 죄가 있는 것처럼 부처와
시왕(十王)에게 고하고,그 죄를 면하기를 비니 그 불효함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설사 부처와 시왕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한 그릇 밥의 공양으로 죄 있는 사람을 용서할 이치가 있사오리까.그 허탄함이 또한 심합니다.
그 지각없는 백성은 족히 말할 것이 못되나 밝고 지혜 있다고 이르는 자도 또한 속임과 꼬임에 미혹되어 죄를 두려워하고
복을 사모하여수륙제(水陸齋)를 베풀고 친히 정례(頂禮)를 행하니 진실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신 등이 마음 속으로 두려워하기를
이것이 다만 명목 없는 허비일 뿐 아니라 이 불도의 행함도 또한 이로 말마암아 폐하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40세 이하의 각 사찰의 도반승도는 모두 머리를 기르게 하고 다시 머리를 깍지 못하게 하여 그 근본을 금하게 하며
무릇 대소 인민의 상재(喪祭)의 예를 한결같이 <문공가례(文公家禮)>에 의하여 불공을 베풀지 말도록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엄중히 법으로 다스리도록 하소서."
<이소는>형조에 내리게 하고중호 등은 율을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라."하였다.
신하들은 효령대군의 불교숭배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세종에게 고했으나 형이 불자가 된 것을 존중하여 훈민정흠 창제 후
가장 먼저 편찬된 산문 작품은 <석보상절>입니다.세종의 명으로 왕자인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편찬한 <석보상절>은
'<석가의 족보> 즉 석가의 일대기 상절은 중요한 것 외에 줄인다.'는 뜻이다.석가의 중요한 일대기를 적은 이 <석보상절>을
읽은 세종은 기뻐하며 석가의 공덕을 칭송하는 <월인천강지곡>을 직접 짓기도 하였다.
한편 양녕대군은 술과 여자를 좋아했다.필체가 뛰어난 양녕은 술 한잔에 글을 써주고 미색이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그냥 넘기는
일이 없었다.한번은 양녕이 세종을 찾아와서 평안도를 유람하겠다고 했다.세종은 형에게 "제발 여색을 조심하십시요"하고 당부를
드렸다.양녕이 물러난 후 세종은 평안도 관찰사를 불러 말했다."만일 양녕대군이 기생을 가까이 하거든 즉시 그 기생을 역마에
태워 올려 보내라"라고 명했다.양녕은 세종과의 약속을 꼭 지키겠다고 다짐을 하고 평안도 유람길을 떠났다.
평안도로 가는 길에는 수많은 고을의 원들이 나와 아주 잘 생긴 기녀를 준비했다며 유혹하였으나 오히려 꾸중을하고
돌려보냈다.그러나 평안북도 정주에 이르렀을 때 그만 양녕의 마음을 사로잡는 절세의 미인이 나타난 것이다.양녕은 그날로
동침을 하고 귀신도 모르리라 자신했다.그래서 시를 지어 하룻밤 풋사랑을 읊기를 "아무리 달이 밝다하나 우리 두 사람의 베개를
들여다 보진 못할 것이다.그런데 바람은 어이해서 신방을 가린 엷은 휘장을 걷어 올리는가"라고 하였다.
이튿날 정주수령은 이 기생을 역마에 태워서 서울로 보냈다.
양녕대군은 사냥을 좋아했다.양녕은 매일같이 사냥을 하여 잡은 짐승을 효령대군이 거처하고 있는 연주암에 두고 갔다.
(관악산의 최고봉인 연주봉(629m) 절벽에 연주대가 있고 연주암은 연주대에서 남쪽으로 약 300m지점에 있다.연주암은 본래
관악사로 의상대사가 현재의 절터 너머 골짜기에 창건했으며 이성계가 신축했다.그후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태종의 뜻을 알고 유랑하다 이곳 연주암에 머물게 되었다.암자에서 내려다보면 왕궁이 바로 보여 옛 추억과
왕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괴로워 한 나머지 왕궁이 안보이는 곳으로 절을 옮겼다.연주암이란 이름은 이들 왕자의 마음을
생각해서 세인들이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절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했다.1868년(고종 5) 중수작업 때는 극락전과
용화전을 새로 신축했으며 그뒤에도 여러 차례 중수했다.이성계가 무악대사의 권유로 국운의 번창을 위해 연주봉 절벽 위에 석축울
쌓고 그 위에 암자를 지은 것이다.연주대에 응진전이라는 현판이 있는 불당이 있고 효령대군의 초상화가 보존되어 있다.)
불교신자인 효령대군은 양녕이 짐승을 잡아와서 놓고 가는 것을 보고 "살생을 그리 즐겨하면 지옥이 두렵지 않느냐"고 물어보자
양녕대군은 "살아서는 임금(세종대왕)의 형이요,죽어서는 보살(효령대군)의 형이니 지옥이 무섭겠는가?"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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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마포구자료총서 제2집 <금성당은 살아있다>에서 옮겨온 것암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