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회 거리에 나온 고교생 / 공수부대 만행에 중고생도 분노
당시 대동고 3학년 학생이었던 李덕준씨의 증언이다. 일요일 공수부대원 들의 잔혹성을 보고 느낀 고교생들의 당시 상황을 잘 보여준다.
19일 학교에 가니 전날 자행되었던 공수부대의 잔악한 만행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 졌다. 수업할 분위기도 아니었고,선생님들도 조회시간이 되어도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들은 이쪽 반에서 저쪽 반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주위상황 에 대해 누구 형이 어쨌다더라,누구의 외삼촌은... 옆집 사는 사람은...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분위기는 고조되어 있었다. 누구의 선동이랄 것도 없이 1교시 시작을 전후 해 3학년들이 전부 복도로 나왔다. 말리는 선생님들을 밀치고 자연스럽게 1,2학년 교실을 돌아다니면서 선동했다.
우리의 형과 누나가 죽어가는데 우 리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등학생들이 총궐기하여 나가자는 요지의 말 을 하면서 운동장에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은 우리를 제지 할 힘이 없었다.우리는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돌면서 전두환이 물러가라를 목청껏 외쳤다.
오전 11시께 시내 진출을 위해 우르르 밀고 나가는데 군인들이 학교앞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어 나가지 못하고 다시 운동장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조를 짜서 요령껏 학교를 빠져나가 시내로 진출,시위대에 합류하기로 했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샛길로 빠져나갔다. 나도 친구 몇명과 샛길 로 나와 25번 버스를 탔다.
당시 대동고 교사였던 朴행삼씨(당시 43세)의 증언에는 교사로서의 심정 을 잘나타낸다. 19일,암울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학교에 출근했다. 1교시 수업이 있어 교실에 들어갔더니 어떤 학생 하나가 울부짖듯이 말했다.
선생님,지금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합니까. 우리들의 부모형제가 죽어가는데 원수를 갚아야 하지 않습니까? 나도 똑같은 심정이었으므로 선생이라는 입장도 잊어버리고 분필을 집어 던지며 함께 울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비극의 역사속에서 눈물만 흘리고 살아야 합니까? 순식간에 교실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때부터 학생들은 의자를 부숴 몽둥 이를 만들어 들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민주교사 합세하라, 민주학생 합세하라, 광주 시민 학살한 공수부대 때려죽이자
이렇게 외치면서 많은 학생들이 운동장을 돌았다. 교무실에 돌아와 울고 있는데 교장선생님이 찾아와 학생들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다급하게 말했 다.
공수부대가 학교 밑에까지 진주해 있고,하늘에서는 헬리콥터가 빙빙 돌 고 있다는 것이었다. 순간 학생들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운동장으로 뛰 어나갔다.
여러분들의 심정은 내가 충분히 압니다. 그렇지만 지금 여러분들이 나간다는 것은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의 아가리에 거저 몸을 주는 것이나 마 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의 생명도 귀중합니다. 그래도 나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나를 밟고 가십시오.
그러면서 나는 교문앞에 누워 버렸다. 학생들은 땅바닥을 치면서 통곡을 했다. 그렇게 학생들을 달래놓고 학급별로 담임이 연락해 학부모들을 오시 게 했다.학생들을 무사히 귀가시킨 후 집에 왔는데 아무래도 불안해 다음 날 해남으로 피신했다. 전남도교육위원회에서는 20일부터 각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풀빛刊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중에서 발췌)
19일 오전 11시 15분께 대동고 2학년 3반 학생 60여명은 교실에서 수업 을 거부한채 노래를 부르며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계엄사 상황일지)
대동고생들의 학내시위가 가열되던 오전 10시께 중앙여고에서도 일단의 학생들이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에 분노했다. 전교사 작전일지는 이날 중앙여고 앞에서는 학생회장 박찬숙을 비롯한 학생 6백여명이 민주주의가 말살되었다. 학생이 많이 죽었다고 외치며 교내시위를 기도,학교당국이 자체적인 제지로 낮 12시께 귀가조치됐다고 기록했다.
반면 계엄사 상황일지에는 오전 10시 광주 중앙여고 1천4백여명이 교내 집결-경찰 4/179명 교문대기로 기록,중앙여고생들의 시위에는 대다수 학생들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중앙여고 학도호국단 연대장은 교실을 돌아다니며 대학생 언니,오빠들이 데모를 하다 다치고 죽었다. 조의를 표하기위해 교복의 칼라를 떼자고 선동했다.
연대장의 선동에 학생들은 칼라를 떼고 한 두시간 수업을 받 은뒤 운동장에 모여 시위했다. 이들은 몇몇 교사들의 만류에 곧바로 해산했 다.
이후 광주지역 고교생들의 시위상황에 대한 기록은 이렇다.
낮 12시20분:광주일고생 2천여명 교내시위 기도,학교당국 자체 제지,시차 별 귀가조치(전교사 작전일지)
오후 2시25분:대동고 3학년생 2백명 운동장에서 시위 농성 (계엄사 상황일지)
오후 2시35분:송정리 광산여고 학생회장 3학년 김영란(18)은 정광고 학생 회장과 점심시간에 만나 5교시가 끝나면(오후 2시35분) 교외로 나가자고 합의하고,다시 동교 실장 5명을 소집하여 행동통일토록 결의함 (계엄사 상황일지)
오후 3시35분:대동고1,2,3학년생 1천여명이 운동장에서 농성중이며 교외로 진출할 예정임
오후 4시:대동고,19일 오후 3시를 기해 무기한 가정학습에 들어갔으며,학생 들은 2개 파트로 나눠 1개 파트 5백명씩 짝을 지어 스크럼을 짜고 정의가 를 부르면서 운동장에서 시위중
오후 4시30분:대동고,전원 귀가 상황끝(이상 계엄사 상황일지)
광주민중항쟁기간 고교생들의 역할은 참으로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항쟁 기간 시위대,시민군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물론 유인물을 몰래 제작해 배포 하기도 했고 여학생들 중에는 교련구급낭을 메고 부상자를 치료하는 학생도 등장했다.
이 기간 숨진 고교생들의 확인된 공식 사망자수는 모두 14명으로 집계됐 다. 고교생들의 현실 참여행동은 당시 朴正熙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80년 서 울의 봄의 해빙무드로 대학등은 물론 고교까지 이같은 영향을 받아 학내민 주화를 요구하면서부터인 것으로 분석된다.
당시 일부 사립고교에서 일기 시작한 교내 민주화운동의 주요 이슈는 학 생회장 직선,보충수업폐지등이었으며 일부 학생들은 의식화수준까지 올라 19일 교내시위를 주도하게됐다.
첫댓글 역사는 쉬지않습니다.
잔인한 그날이 다가오고 잇습니다.
39년이란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원흥은 지금도 골프 치고 다니는 현실
이게 정의로운 국가 인지 묻습니다.
자료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