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로드무비와 60대 이후 ‘남아있는 날들’
1. 로드무비는 ‘인생’이 전개되는 과정과 닮아있다. 여행을 통한 성장,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바뀌면서 겪게 되는 사건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은 살아가면서 만나는 삶의 단편들에 대한 은유로 이해될 수 있다. 로드 무비를 구성하는 대표적인 구성요소들이 길떠남(여행), 길 위에서 만나는 사건들, 인물들의 배움과 성장이 중심이 라면 로드무비는 결국 우리 인생의 근본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2. 대한민국의 로드무비는 본격적으로 1970년대 중반에서 시작되었다. 이만희 감독의 <삼포가는 길>은 한국 로드무비의 형식적인 특징을 정립하는 작품이었다. 남성 둘과 여성 하나가 동행하는 여행 구조는 이후 등장하는 로드무비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은 본격적인 로드무비는 아니지만, 젊은이들의 성장을 시간과 공간의 변화 속에서 포착하려 했다는 점에서 로드무비적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로드무비가 폐쇄적인 사회적 분위기와 산업의 발전으로 몰락하는 고향의 정서라는 시대적 분위기를 담고 있다면, 1980년대 등장한 대표적인 로드무비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1980년 새롭게 집권한 신군부의 폭력 앞에 사회적 비판의식은 중단되었고, 영화인들은 정부가 허용한 ‘성적자유’의 영역으로 이동하여 상업적인 영화를 만들기도 하였지만, 의식을 지닌 영화인들은 ‘로드무비’를 통해 삶의 본질에 대해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3, 1980년대 로드무비는 양적인 측면에서는 많다고 할 수 없지만, 질적인 면과 실험적인 정신에서는 한국 영화의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 시각을 금지당한 시점에서, 80년대 로드무비는 인간의 근원적인 본질로 눈을 돌렸다. 삶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의문, 인간관계의 본질적인 가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충돌하는 문화적 갈등 등이 영화의 핵심 문제로 제기된 것이다. 어쩌면 ‘사회’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보다 더 큰 근원적인 영역으로 시선을 돌리게 했는지 모른다.
4. 1980년대 로드무비는 관람했던 연령대에 따라 다른 감동과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도전과 포기하지 않은 용기에 대한 위로를 얻고 그 속에서 겪게 되는 사랑의 감정에 주목하였다면, 60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젊은 날의 회고가 아닌 ‘남아있는 날들’에 대한 이정표를 제시해주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젊음에서 찾는 부러움의 감정이 아니라, 여전히 희망과 의지로 재무장할 수 있는 남아있는 날들에 대한 열려진 삶의 열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가치있는 텍스트는 언제든 다양한 방식으로 의미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5. 1980년대 로드무비는 노년의 삶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첫째, “익숙한 것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둘째, “새롭게 만난 사람들을 어떻게 환대하고, 수용하며, 책임질 것인가?”, 셋째, “물질적 자산과 남아있는 인간관계는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가?”, 넷째, “죽음과 어떻게 만날 것이며, 죽음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마지막으로 “개인적 삶은 역사가 주는 무게와 흐름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와 같은 문제들이다.
6. 대한민국은 ‘고령사회’로 진입하였고 조만간 ‘초고령 사회’로 진입할 예정이다. 고령화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고, 노년의 삶에 대한 수많은 조언들이나 지침이 넘쳐나고 있다. 노인빈곤율이나 노인자살율이 세계 최고인 가장 불행한 ‘노인’들의 나라에서 우선 필요한 것은 물질적 지원이나 건강과 같은 현실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사회심리학의 연구가 말해주듯이, 노인들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자존감’의 문제이다. 삶의 통제력을 잃어버린 노인들은 외부의 도움을 결코 달가워만 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감이 상실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노인의 문제에서 물질적 지원은 국가의 당연한 책무이다. 최소한의 복지적 혜택이 필수적으로 지원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이후 노인들에게 가장 큰 화두는 어떻게 ‘내가 나로 존재할 것인가?’가 될 것이다. 1980년대 로드무비는 어떤 장르보다도 이러한 문제에 정직하게 접근한다. 사회적 맥락이 생략되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니 이러한 약점이 오히려 삶의 본질에 대한 고민에 정직하게 접근시킨다고 할 수 있다.
7. ‘1980년대 로드무비’와 ‘남아있는 날들’과의 연결 관계를 살펴보는 작업은 1980년대 젊은이들에게 던졌던 인간의 용기와 희망이 60 이후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오히려 60 이후의 삶이 이러한 가치를 실현하는 최적의 시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일 것이다. 과거의 기억과 텍스트가 현재의 삶에 대한 중요한 지침을 다시 제공하고, 현재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행운일지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던 과거의 회안이 주는 안타까움의 반영일 수도 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로드무비’에 담긴 메시지는 결코 과거의 회상이 아닌 현재의 나를 점검하고 진행시키는 힘이라는 사실이다.
첫댓글 첫째, “익숙한 것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 편안함과 낯섬 사이의 공존
둘째, “새롭게 만난 사람들을 어떻게 환대하고, 수용하며, 책임질 것인가?”, -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셋째, “물질적 자산과 남아있는 인간관계는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가?”, - 무의미 속에서 가치 창조
넷째, “죽음과 어떻게 만날 것이며, 죽음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바람부는 저 들녘 끝에는 ~ 삼포로 가는 길
마지막으로 “개인적 삶은 역사가 주는 무게와 흐름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참을 수없는 존재의 가벼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