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종소(鄭從韶)
본관은 영일, 자는 가정(可貞)이다. 고조는 봉익대부 행전공판서(奉翊大夫行典工判書)인 인언(仁彦)이고, 증조는 영일 정씨 영천 입향조인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 판서(工曹判書) 광후(光厚)이다.
조부는 사정(司正)을 지낸 위(瑋)이며, 부친 문예(文裔)는 생원(生員)으로 영산유학교도(靈山儒學敎導)를 역임하였으며, 모친은 영양 이씨(永陽李氏)는 부사직(副司直) 이현실(李玄實) 따님이다.
경상북도 영천시 대전동 제일봉 아래에서 태어나 외숙인 대전(大田) 이보흠(李甫欽)을 쫓아 수학하여 문예가 일찍 창달되었다. 세종(世宗) 29년(144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1448년(세종 30)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가 되고 이해 가을에 중시(重試) 을과(乙科)에 성삼문(成三問)과 동반 급제, 집현전으로 옮기고 다시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배되었다.
단종이 손위(遜位)하고 이어서 사육신(死六臣)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때 외숙인 이보흠도 살육되자 정종소는 더 이상 벼슬길에 머물 뜻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에 그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였다.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내직을 제수하였으나 그때마다 병을 빙자하여 불취(不就)했다. 외직으로 제수되자 부임하여 부모 봉양에 힘을 다하였다.
의성 현령(義城縣令), 영천 군수(榮川郡守), 예천 군수(醴泉郡守), 함양 군수(咸陽郡守) 등을 역임하였으나 모두 오래 머물지 않았고 선정(善政)의 치적을 남겼다. 영천 군수 재임 시에는 무릇 시정(施政)의 모든 동정과 이합집산이 자로 잰 것처럼 하여 오직 진실하고 엄격했다.
신실(信實)로 상부를 받들고 깊은 정과 따뜻함으로 백성을 사랑하여 강직하게 질투와 비리를 물리치는 등 1년도 못되어 민정이 바로잡히고 백성들이 서로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
저서로는 「팔준도(八駿圖)」가 있다.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원당리에 있으며, 9세손 정중기(鄭重器)의 묘지문(墓誌文)이 있다.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에 있는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어 있으며,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원당리의 묘소 아래 묘재(墓齋)인 원당재(元堂齋)가 남아 있다.
先祖成均館司成府君墓誌
公諱從韶字可貞。貫迎日縣。上祖高麗樞密院知奏事諱襲明。有文章經術。事仁毅兩朝。勁直不見容。事在史氏記。後六世皆登第躡顯仕。或至卿宰。七世而有諱仁彥典工判書。居永川。卽文忠公圃隱先生諱夢周之叔曾祖也。是生諱光厚。仕我朝爲工曹判書。葬郡東元堂里負震原。配益陽郡夫人李氏。葬郡西唐旨山負坎原。寔公曾祖考妣也。祖諱瑋文科司正。配宜人徐氏。並祔先夫人墓前。考諱文裔生員靈山敎導。有詩名。妣孺人永陽李氏。副司直玄實之女。大田先生甫欽之姊也。並葬郡北三歸洞子坐之兆。公生於郡北大田村第一峯下。幼容姿秀朗。聰敏有英氣。從母舅大田李公受學。文藝夙暢。同門者莫能及。年甫舞勺。讀書于公山銀海寺。時尹公統以旁郡太守來遊。騶從冠盖甚盛。公率伴童。鳴小鼓曰山堂晩到。在古風有罰。尹公佯怒曰汝以小竪子。敢侮長者。若能作詩。罪可贖。否則當撻汝矣。遂占韻督賦。公操筆立就。語頗驚人。尹公嘖嘖稱奇。竟以其女妻之。正統丁卯春。登文科補成均學諭。是秋捷成三門榜重試。英廟方重文學。此科極一時選。爲搢紳所榮。大田李公獻詩于敎導公以相賀。成公旣爲榜首。朴公彭年,李公塏,柳公誠源亦在榜中。公遂與定交。硏經籍礪名節。結爲莫逆契。旣去館。歷敭臺府。遷吏曹佐郞。世皆以公輔器期焉。乙亥端廟遜位。及六臣獄起。大田李公繼戮。公益無意仕進。而第以親在之故。恐禍延庭闈。緘口囚舌。不敢露崖岸。朝廷屢除諫憲職。公輒託疾固辭。及授郡符。則以親命黽勉赴任。爲便養計而非其所樂也。歷義城榮川醴泉咸陽等邑。多不久棄歸。而所到皆有聲績。其在榮也。凡所設施動合繩尺。恂恂以奉上。喣喣以愛民。侃侃以嫉邪。不期年而政通人和。於是乃以餘力增建樓院。以迎使華。一毫不以勞於民費於帑。雖在郡朝者。不知有是役。又作鄕序堂。每於佳節。延鄕父老及大夫士。行鄕飮鄕射儀。與之習禮讓敦風化。且聚里子弟才俊者。使讀書游藝於斯。勸課不少懈。仍著鄕規若干條。爲永久遵行地。又撰郡誌。記古迹以垂後。郡中翕然。佔畢金文𢂴公嘗記榮之小樓曰。是邑賢守表表在人耳目者。惟河浩亭洎,崔公元濡,鄭公習仁三人。今守烏川鄭先生。亦其齊驅者也。觀乎此。可徵公莅榮之治。而於義醴咸。亦皆用是法。其後並見錄於各邑名宦。今於輿地勝覽可考也。辛卯爲全羅賑恤使從事官。後除成均館司成。葢末職也。宗孫漂泊。家牒不傳。生年卒歲。無由考諗。前後履歷次第。皆莫之詳。遺文亦散逸。只有詩四,策二,書箋跋各一。儘典雅有法。策又健麗宏博。實有經綸之具。若使任宰樞登廟堂。則必能做大事業。垂名竹帛。而不幸阨於時。不得少展其所蘊。庸非天歟。其志潔其迹危其行苦。隱忍沈晦。以求無詒罹於親。而顧其守於中者。終始耿耿也。何秉心之艱哉。孔子謂柳下惠,少連降志辱身矣。言中倫行中慮。知此義者。可以見公之心事矣。葬在元堂里艮坐坤向之原。卽曾祖考判書公墓右麓也。淑人尹氏祔。上下相去十步許。尹氏貫平山。父統官至參判云。公有三男一女。男長以揮長水察訪。佔畢翁稱爲詞客。多與之唱酬。葬三龜洞生員公墓下。次以僑以銓郞捷重試。止弘文校理。次以諶。女適權欽祖。察訪生五男。長次諄直長。次曰次諴,次諧並無後。次曰次誠,次謹。校理生五男。長公徵庶尹。次公虔僉正,公弼郡守,公淸縣監,公藝參奉。以諶生四男公英,公傑,公俊,公亨。曾玄以下寢益蕃。今雲仍見存者。殆至二百餘人。而觚墨簪冕迭不絶。其名德最著者。次謹之子參奉允良。孫贈判書世雅。曾孫贈承旨宜藩。玄孫文牧使好仁。公徵之來孫統制使后亮。公弼之子佐郞昌武。曾孫獻納維藩。公藝之玄孫承旨繼胄。其餘庳官小科。不可盡記 < 梅山先生文集卷之十一/墓誌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