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암울했던 시기에 4차례에 걸쳐 교정과 종정으로 추대되며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선승(禪僧)으로 꼽히는 한암 스님(1876~1951). 선과 교의 가르침을 넘어 한 치의 어긋남도 허용하지 않는 수행자의 결기를 평생의 삶으로써 보여주며 한국불교의 위대한 고승으로 추앙받고 있다. 깨달은 뒤에도 열반에 들기 직전까지 팔정도의 삶을 살며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남긴 붓다의 삶을 실천한 스님이 한암 스님이다.
한암스님은 평생 조석예불에 빠지지 않았고, 이후 2시간의 관음 정근을 올곧게 서서 참여했으며, 오후에는 음식을 먹지 않는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했다. 또한 잠자는 시간 외에는 선원의 대중방에서 언제나 반듯하게 지냈다고 한다. 자현스님은 “기후위기가 가속화되고 전염병이 창궐하며 4차 산업 시대가 목전인 이때,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관점에서 우리가 되새기고 따라야 할 가장 귀감이 되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고 평했다.
특히 한암 스님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평가받는 경허선사의 마지막 제자다. 그러나 두 스님이 살아온 삶의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경허선사가 자유로운 초탈을 추구했다면, 한암 스님은 엄숙한 성자로서의 삶을 견지했다.
한암 스님은 <경허행장(鏡虛行狀)>에서 “경허의 가르침은 배우되 행실은 답습하면 안 된다.”며 스승인 경허선사를 비판한다. 경허선사의 걸림 없는 언행인 무애의 행동방식으로는 한국불교의 미래가 존재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한암 스님은 깨침에서는 경허선사를 계승하지만, 삶의 방식은 붓다와 닮아있는 만큼 시대를 초월하는 한국불교의 진정한 사표(師表)로 꼽는다.
사진은 한암 스님의 생전 모습
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자현스님이 동국대 국어교육과에서 취득한 다섯 번째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엮은 ‘시대를 초월한 성자, 한암’을 출간했다.
자현스님은 “최근 종교가 우리 사회에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을 전하며 평온과 행복으로 이끌어야 하는데, 오히려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비이성적이며 비상식적인 종교계 문제로 사회가 종교를 걱정한다.”면서 “이러한 현상은 여러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종교계에 진정한 어른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존경할 만한 어른과 사표가 없는 집단은 슬플 수밖에 없는데, 이들은 목적과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며 “그래서 우리는 시대를 초월해서라도 어른으로서의 스승을 요청하게 되고, 이런 어른이 바로 일제강점기에 한국불교를 이끌었던 한암 스님”이라고 의미를 전했다.
이 같은 한안스님의 진면목은 생전에 여러 감동적인 일화를 통해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치열했던 1951년 1.4후퇴 과정에서 국군이 오대산의 모든 사찰을 소각하고 상원사를 불태우려고 찾아왔다. 이때 한암 스님은 가사 장삼을 수하고 법당에 정좌한 후, “군인은 명령을 따르면 되고, 승려는 죽은 후 화장하는 것이니 어서 불을 지르라”고 했다. 스님의 높은 기상으로 상원사와 문화재를 지켜낸 일화는 이후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또한 한암 스님은 1930년 일제의 불교통합 음모를 분쇄하는 차원에서 통합종단인 ‘해동조계종’을 제창했다. 이때 도의를 종조(宗祖), 지눌과 보우를 중흥조(中興祖)로 제시했다. 이러한 스님의 주장은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의 창종에까지 계승돼 이어진다. 때문에 자현스님은 “이러한 일화들은 단 한 가지도 일반인들이 따라 하기 어려운 거룩한 성자의 자취로 한암 스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불교도 없을지 모른다.”고 강조했다.
이어 스님은 “한암 스님의 선(禪)·교(敎)·율(律)을 아우르는 청정한 행동양식과 수행력, 승가교육에 대한 열정은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독보적인 경지”라며 “스님이 살아온 삶의 자세와 역정은 그 자체로 현대 한국불교가 본받아야 할 이정표가 된 만큼 한국불교에 북극성과 같은 밝은 좌표가 보다 뚜렷해지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출처 : 불교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