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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1절-9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인간은 자기가 가진 기본재산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어요. 물질이라든지, 지식이라든지,(자기가 아는 것) 기본재산이 있는데 이것보다도 하나님의 찾아오신 말씀 이것을 자기가 귀하게 여기고, 가치 있게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지 못할 때는 계시록에 보면 거기에 대한 보복이 자기에게 온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신랑인데 신부는 상당히 많지요? 교회는 신부라고 그랬으니까! 그 많은 신부들 중에 예수님께서 마음에 두고 부르는 신부의 이름이 있을 거란 말이요. 아가서에 보면 솔로몬의 여자가 있지요? 술람미 여자! 이게 그걸 가르쳐주는 거거든요. 솔로몬의 여자가 몇 명이라고 그랬지요? 이제 그것이 예수님과 교회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거거든요. 예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 사건을 동원시킨 거거든요.
우리가 실질적으로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요. 솔로몬의 여자가 천 명 정도 되다보니 소위 솔로몬의 아내라고 하면서도 솔로몬에게 손목 한 번도 잡히지 못한 아내도 있을 것 같아. 참 그거.
가령 예수님이 많은 신부들 가운데서 ‘내 사랑 아무개야’ 하고 부른다면 그 많은 여자들 중에 누굴 불렀는지 알지 못할 거 아니야? 그런데 그 중에 한 여자가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네, 서방님’ 하면서 미소를 지으며 나갔는데 신랑이 ‘너 말고 저 여자’ 라고 한다면 그 여자가 얼마나 무안하겠어. 이게 표현상 강력한 인상을 주게 되는데 그게 보복이 아니겠어요?
우리가 세상에서 안수나 안찰을 왜 받으려고 그러지? 뭐가 이루어지는 걸 기대하고 받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면 설령 그게 이루어진다고 한들 그게 천국이겠느냐? 육이고 세상이지 천국은 아니잖아요.
기독자는 진동되지 않을 것을 건설하는 것이 기독자다. 갈대아 우르에 있는 그 전부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더 가치가 있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자는 가치 평가력이 아주 명확해야 되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성도들 중에 그런 거 많이 보는데 얘기할 때 ‘저 사람이 가치 평가력을 좀 가지고 귀한 걸 잡았나’ 하고 가만 들으면 그 뒤에서 돌아가는 것을 보면 딴 것을 붙잡고 있거든. 그걸 우리가 많이 보지요.
가치 판단을 잘 하려면, 말씀을 붙잡으려면 말씀이 있는 곳으로 가야 된단 말이요. 범을 잡으려면 범이 있는 곳으로 가야지요. 성경에 있지요? ‘예수님을 찾더라, 나의 뒤를 따르라’ 라는 이런 말들이 그 때는 존재적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보여주는 계시적 사상은 진리를 잡고 따르라는 거지요. 그거 놓치면 안 되지요.
그러니까 교역자 입장에서 교훈적인 측면에서 보면 말씀이 좋으면 반드시 그리로 옮겨야 된다는 이게 원칙이란 말이요. 목회자의 욕심이 아니고 예수님의 하신 사상이 그런 겁니다. 그래요. 그건 뭐 다 나타나는 거니까!
‘옳다, 이거다’ 그러면 그걸 잡아야 될 거 아니요? 한 시라도 놓치면 안 되거든요. 원리원칙이 그래요. 그거 놓치게 되면 말씀을 따르는 게 아니지요.
하나님을 붙잡으려면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붙잡은 것은 곧 하나님을 붙잡은 겁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충만히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브라함의 경우를 놓고 볼 때에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 자체보다도 갈대아 우르 속에는 아브라함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잖아요. 전 재산이 다 들어 있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을 붙잡았으니 그건 하나님을 붙잡은 것이니까 이 하나님 안에는 갈대아 우르의 것보다도 더 희귀한 것이 많이 들어 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붙잡고, 또 하나님을 또 붙잡고 갔는데 여호와의 그 말씀 안에는 약속이 들어 있는 거지요. 그러니 아브라함의 가치 평가력이 얼마나 명확하냐? 잘 내렸다. 그렇게 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니 큰 민족이 이루어지지요.
아브라함이 말씀을 붙잡기 위해서 버린 논과 밭과 일가친척이 얼마나 될까요? 떠날 때는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떠났지요?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러나 버린 것은 그 당시에 상당히 많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하는 하나님의 그 조건 때문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했어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버린 일가친척이 한 5만 명이 된다고 본다면 그것도 하나의 세상인데 이 5만 명이나 되는 일가친척이 아브라함에게 언제까지 일가친척노릇을 할 수 있겠어. 고작 해 봐야 죽을 때까지야. 살아생전이야. 분량은 5만 명이요, 가치는 혈육이고, 또 임시적으로 시간이 한정이 돼 있고. 그렇지요?
그런데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하는 그 말씀을 들여다보면 큰 민족이란 이 세상의 모든 성도를 말하는 것이야. 성도라! 그러니까 갈대아 우르의 5만 명의 일가친척보다도 이 지구상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더 많을까요, 적을까요? 엄청나지. 그렇다면 잃은 것이 많을까요, 얻은 것이 많을까요? 얻은 것이 많지요. 그런데 그렇게 많아질 것을 아브라함 자신도 알았을까요? 몰랐지!
시간적으로는 무한이요, 가치적으로는 생명적이요, 물질계에서도 그 민족이 많고, 신령계에 가서도 보니 많습니까? 많지요. 그러니 버린 것이 많겠느냐, 얻은 것이 많겠느냐? 굉장한 거란 말이요.
신약성경에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잖아요? 뭐라고 되어 있지요? 너의 일가친척이나 부모형제보다 누구를 더 사랑하면 금생 내세에 상이 있다고? 그게 다 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거든요. 현세교회와 미래의 천국의 성도들을!
사실 이 세상에도 보면 예수 안 믿는 불신자의 형제 집에 가서 밥 한 끼 얻어먹는 것보다 믿는 자의 형제 집에 들어가서 한 끼라도 밥 얻어먹는 그게 마음이 편하고 내 집 같지요? 그런 느낌이 들어요? 믿는 자의 집에서는 흉허물이 없어. 안 믿는 자의 형제 집에 가서 밥 먹으려고 하면 ‘왜 그렇게 못 사느냐, 왜 그렇게 말랐느냐’ 노상 그 소리야.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어찌하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연관을 지어요. 그러면 그것이 다 내 부모 내 형제요, 아닌 말로 이 세상에서의 내 생활적인 수단이 그 속에 다 들어 있어요. 문제는 내가 얼마나 말씀에 가치력을 가지고 평가를 바로 하고 사느냐는 그게 문제지. 그냥 교회만 들락날락 해 봐. 세상에서도 대우 못 받고, 교회에서도 대우 못 받고 그렇지요.
국가에서 이건 잘 하는 것인데 옛날에는 죄 없이 감옥에 갖다 나오면 보상이 없었는데 요즘은 어느 정도 보상을 해 주지요? 얼마 안 해준다고요? 하나님은 에누리가 없지요.
‘이름이 크게 난다, 크게 불리워진다’고 하는 이거 우리 성도들에게 참 복입니다. 아브라함의 이름이 창대케 된다고 했지요. 크게 불리워진다, 이름이 난다 그 말이요. 그 이름이 물질계에만 있습니까, 신령계에도 있습니까?
누가복음 19장인가에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있지요? 거기 보니까 아브라함의 이름이 어디까지 알려져 있지요? 그래, 지옥에까지! 그러니 모르긴 해도 여러분들이 예수를 잘 믿는다면 그 이름은 분명히 지옥에까지 알려진다. 왜냐? 그 날에 탁 봤을 때 지옥에 있는 자 중에 그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여러분들의 증거를 받았는데도 안 받고 지옥에 들어가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이 여러분들을 못 알아보겠어? 부자와 거지 나사로처럼 말이지. 그와 똑같아요.
우리가 우리를 모르면 자기가 자기를 축소시킬 수도 있고, 예수를 믿고 깨닫고 살면 자기가 자기를 얼마든지 생명적으로 확대, 활동적으로 확대시킬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믿는 나를 세상에 만들어 놓고 눈에 보이는 세상 것 전부 다를 우리의 정복권으로 준 것이란 말이요. 그러니 우리가 영적 실력적인 면으로 깊이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하겠어요.
세상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살다가 가서야 되겠느냐, 이것 가지고 만족해서야 되겠느냐’ 하고 세상을 가지기 위한 포부가 있잖아요. 그래서 세상에 대한 한이 맺혀서 집에 화장터를 만들어놓은 사람들(주-지존파 사건)도 보면 물론 죄악적인 짓을 한 거지만 그 속의 포부성만 쏙 뽑아서 생각해 보면 그거 굉장한 거요. 그 포부성이 엄청난 거요. 악한 것도 그런데 우리가 선한 포부성을 가지고 살아야지요. 아브라함에게 말한 것도 그런 것 아니요? 물론 믿음으로, 신앙으로 사는 것도 여러 가지인데 인간 자기에게 그거는 펼쳐져 있다 그 말이지요.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습니다. 그래, 그 약속이 아브라함에게만 주어진 축복입니까, 아직까지 그 축복의 효력성이 계속적으로 있습니까? 그 때 아브라함이 살았을 때만이 아니고 그 약속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은 계속 증가되고 있습니까? 이거 참 멋있잖아요. 그 믿음이 우리들 마음을 지금 정복을 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가난이 오던 불행이 오던 그거와 상관없이 나는 간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는 간다’ 하는 이 약속을 붙잡고 가야지요.
사람에 따라서 불행이나 역경이 달리 오겠지만 이 약속을 잡고 가는 인물은 하나님의 특수적인 인물입니다. 이건 보통 신앙의 인물이 아니요. 제 2의 아브라함이 아닌가 싶어집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통과하여 가나안 국경선을 넘었습니다. 그곳이 세겜인데,(창33:)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20년을 살다가 제단을 쌓기 위해 이 세겜에 와서 15년을 산 것 같습니다.
이 세겜은 단순히 지명에서 나온 게 아니라 사람의 이름이에요. 하몰의 추장의 아들 이름이 세겜인데, 하몰이 아들 세겜에게 그 벌판을 유산으로 주었기 때문에 그 들을 세겜뜰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야곱의 큰 처가 레아이고, 작은 처가 라헬인데 큰 처에게서 디나가 나왔고, 라헬에게서는 요셉이 나오게 된 거지요. 둘 다 나이는 같은 모양이에요. 그리고 들이 좋기 때문에 양이 아마 1년에 새끼를 두 번 냈는지 수익이 아주 좋다 그 말이지요. 그렇게 되니 돈 좀 벌고 가자는 생각이 난 거지요.
그래서 세겜에 머물러 살고 있는 중에 꿈에 안고 살았던 딸 다나가 15, 6세가 되니까 밖으로 돌기 시작하거든. 그래서 들판에 나가 돌아다니다가 하몰의 아들에게 당하고 말았지요. 그러니까 이 세겜은 성도의 길을 지연시킨 곳이다 그렇게 보아집니다.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고, 딸은 하나이니 그 딸에게 비단 옷을 입히고, 옷고름에 고리도 채우고 했는데 이런 차림으로 하몰 동리를 구경을 하고 다니다가 해가 지니 강간을 당했다 그 말이요. 해가 지면 자동적으로 올빼미가 나오고, 고슴도치가 나오기 마련이라고. 세상에 나쁜 사람이 많을 때 돌아다니면 큰 해를 당해요.
그래서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의 남자들을 할례 받게 해서 모두 죽여 버리지요. 이 일이 있은 후에 야곱이 회개하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세겜은 성도의 길을 지연시킨 곳이니 이 세겜을 가만 보면 구원이 중단되었고, 구원이 중단되면 복수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할례를 받게 했으니 계명을 남용하는 곳이 돼 버렸습니다. 창34:25-에 나와요.
두 번째는 그 세겜 땅을 야곱이 은 20에 샀고, 세 번째는 삿9: 뒤로 보면 기드온에게는 첩도 많고 기생들도 많았는데 이 기드온이 죽은 후에 세겜에서 기드온의 아들 중에 하나인 아비멜렉이 자기 형제들 70명을 죽였어요. 그러고서 그 뒤로 보면 시가행진을 한 모양인데, 그 때 한 여인의 맷돌에 깔려서 죽은 사건도 있고, 네 번째는 이 세겜에서 제사장들이 길에 엎드려서 강도짓을 한 곳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세겜은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길에 세겜이 왔습니다. 즉 불행이 왔다 그 말이요.
이 길을 통과하려면 죽음이 오고, 피를 흘려야 됩니다. 이 길을 가려면 직장에서 해고가 올 수도 있고, 바로 살고 잘 믿으려다 보면 바울처럼 감옥이 올 수도 있고, 또 이혼도 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겜을 통과해야 만이 되는 겁니다. 그런 사건들을 다 통과해야 된다.
그리고 또 보면 그 세겜을 통과한 다음에는 반드시 벧엘이 오는 건데, 벧엘천국이 온다. 하나님의 집이지요. 그럼에도 세겜이 오면 그 세겜을 뚫고 벧엘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만 뒤로 돌아간단 말이요. 그러니까 다른 각도로 보면 세겜은 신앙의 전환기라고 볼 수도 있어요.
우리에게는 지식적 세겜이 있고, 사건적 세겜이 있고, 존재적인 세겜도 있다. 이럴 때 ‘이거냐 저거냐, 어떤 것이 내 나라냐’를 빨리 평가를 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오늘날 교회가 그런 세겜이 올 때에 대부분 인본주의를 쓰라고 많이 가르칩니다. 인본주의를 쓰라!
‘신앙의 전환기에서는 두렵고 떨리지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길을 가자’ 하는 것이 빌라델비아 교회에서 말하는 작은 능력이라 그렇게 보아집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작은 능력을 써먹으면 하나님의 큰 능력이 온다 그 말이요. 이 작은 능력을 모세도 써먹었는데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가 있었지요.
싸움은 내가 걸어놓고 그 싸움을 하나님과 붙여버리라 그 말이요. 싸움은 내가 걸어놓고 하나님과 싸움을 붙인 자가 누구지요? 모세! 나중에 공주가 자기 아버지하고 싸우지요. 그런 식이야. 공주가 모세를 주워오니까 아버지는 버리라고 그러고, 딸은 안 버리려고 그러지요. 그것도 일종의 싸움이요. 하나님이 싸워주지요.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보고 ‘나가서 싸우라 싸우라’ 해서 이스라엘이 나가서 싸워 이긴 것을 보면 그 싸움에 순종은 이스라엘이 해요. 그러나 그 결과를 보면 하나님이 다 해 봤어. 그거 보거든요. 그러니까 겁내지 말라고!
기도온의 싸움도 봐봐. 살살 기어가서 벌떡 일어나서 항아리 부수고, 괭과리 두드린 것뿐이지 싸우긴 뭘 싸워. 안 싸웠지. 하나님이 적군들끼리 싸우게 해서 자기들끼리 죽이고 죽고 했지요.
명령에 순종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 결정이 되는 건데, 순종을 하면 꼭 죽을 것 같거든. 우리가 그런 계산을 늘 하거든. 그게 참 탈이야. 아무리 좁고 험악해도 바른 길로 가야 됩니다.
여러분들, 평지에는 길어갑니까, 두 발로 서서 갑니까? 그런데 깎아 비탈을 올라갈 때는? 두 발로 서서 갑니까, 네 발로 기어갑니까? 그러니까 어려울 때 네 발로 걸어가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시련과 시험이 오니 그 얼마나 어렵겠어. 그게 깎아 비탈 아니야? 그럴 때 신앙으로 바로 살겠다는 그 모습이 기도하는 모습이 아니냐 그 말이요.
깎아 비탈이나 벼랑이 괜히 있는지 알아? 그런 걸 우리에게 보여주지요. 보면 참 산 타는 사람들이 벼랑을 탈 때 무슨 줄을 잡고 내려가지요? 생명줄이지.
넓은 길은 신사 숙녀도 많이 가지요. 그리고 ‘니나노’ 하면서 걸어가지. 전도자의 말은 ‘바른 길을 가자’ 그거지요. 적은 능력. 옳은 믿음을 붙잡고 가는 것!
또 실지로 그렇게 걸어가면 힘이 나요. 산에 오를 때는 힘이 들겠지. 끙끙하다가 중간쯤 올라갔을 때 노래가 나오지. 중간에 걸터앉아서 휴식할 때 노래가 나오지요. 성도의 휴식처는 천국.
여러분들, 예수 믿다 보면 눈물도 나고, 한숨도 나오고 그럴 때가 있는데 그 때에 찬송을 불러도 즐겁지요. 그럴 때 천국이 환한 찬송을 불러요, 슬픈 찬송을 불러요? 고통에서 나온 그런 느낌으로 부르지 않아요?
같이 예수를 믿어도 세겜을 넘은 찬송인지, 넘지 못한 찬송인지? 세겜을 넘은 자는 찬송이 달라지고 생활이 달라진다. 찬송에 그런 것도 있습니까? ‘나와 세상은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그게 뭐요? 세겜을 넘은 찬송 아니요?
세겜을 지나면 벧엘천국이 옵니다. 그걸 통과치 못하면 벧엘천국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전환기를 넘어야 벧엘천국이 온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들의 성화구원 이룰구원을 염려하셔서 이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사건 환난 역경을 우리들에게 많이 붙여주시는 줄 압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이 성경에서 바로 깨닫아 세겜뜰에서 있을 일들을 하나하나 통과할 때마다, 순간마다 벧엘을 쳐다보고 갈 수 있는, 또 넘어갈 수 있는, 이기고 갈 수 있는 신앙의 위치들을 다 가질 수 있도록 축복을 해 주시옵소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저희들에게도 허락된 약속이고, 아브라함의 그 걸음걸이를 보니 역시 우리들의 신앙의 걸음걸이도 그 속에서 보여집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남방으로 내려가는 그 일만큼은 없도록 저희들을 꼭 붙잡아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궁하고 극진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충만하심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말씀을 붙잡고 가는 당신의 자녀들 머리 위에 영원히 함께할지어다. 아멘.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