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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거짓이다 (막 16:1~14)
심우갑 목사
1.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찌기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눈을 들어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9.예수께서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11.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2.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13.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4.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의 집권자를 멸하시는 권능의 부활이요, 죽음의 노예에서 해방시키는 생명의 부활이요, 심령을 변화시키는 변화의 부활이요,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는 의로움의 부활이요, 영생의 길을 보여주는 천국의 부활입니다. 오직 부활은 하늘과 땅이 하나되며, 영과 육이 하나되며, 영원과 시간이 하나되며, 절대와 상대가 하나되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구원과 죄사함과 영생의 징표요, 보증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 : 25-26)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 인간은 영생과 부활과 천국의 소망이 없습니다.
(고전 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한사람도 없으므로 죄와 마귀의 종된 자리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며,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서 피할 수 없으며, 죄 값으로 지옥에 분명히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거짓의 종교요, 기독교인들은 사기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실하게 구세주로 믿으시면 아멘합시다. 부활로 죄와 마귀와 사망과 사탄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높여드리는 박수를 쳐드립시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자 예수님을 따랐던 모든 제자들과 “호산나”라고 찬미하며, 예루살렘 입성 시에 환영했던 모든 사람들은 도망가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막달라 마리아와 몇몇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부어드리려고 무덤을 찾아 갑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유대인의 왕을 따르는 것”이기에 로마에 대항하는 반역자로 처형될 수 있는 상황이었고, 더군다나 예수님의 무덤은 로마 군병들이 지키고 있었으며, 무덤은 돌로 막혀져 있었으며, 거기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요구로 봉인까지 되어 있었기에 이른 새벽 공동묘지를 찾아 간 것은 목숨을 건 용기를 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이 여인들이 무덤에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같이 사랑에는 위대함이 있습니다. 사랑은 무서움과 죽음까지도 뛰어 넘어 무덤을 찾아가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또한 사랑은 모든 조건을 초월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은 국경만 없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생명을 초월하게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있었기에 목숨을 걸고 향유를 예수님 시체에 부어드리고자 하는 헌신이 있었고,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는 용기가 생겨나 발걸음을 옮기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장은 이러한 주님께 대한 사랑이 믿음의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부활의 사건마져도 모두 믿어야 진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부활에 대해서 여러번 언급되어 있지만 제자들과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갔을 때에도 천사들이 예수님은 부활하셨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반응은 8절에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100% 믿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본문 10~11절에도 제자들의 신앙이 나옵니다. 마리아의 부활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제자들도 믿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2절에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도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설명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직접 동행하시며, 선지자의 글은 인용해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두 제자가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증언합니다. 13절에 여전히 부활의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14절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살아나신 말을 믿지 않음을 인해 11제자가 음식 먹을 때 찾아오신 주님께서 믿음이 없음을 꾸짖었습니다. 이상의 예수님의 부활사건과 관계된 일련의 내용들을 보면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1. 부활은 믿기 쉬운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땅에서 필요한 것은 물질도 필요합니다. 명예도 필요합니다. 지위, 권세도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이와 같은 것들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우리의 생명이 끝나는 그 순간 이와 같은 것들이 무슨 의미나 힘이 됩니까?
오늘 우리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영원한 생명이 요구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야말로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이런 뜻에서 불신자들이 세상적으로 아무리 성공하고, 출세하고, 화려한 삶을 산다하여도 그들의 마지막은 죄에 대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고, 영원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면 불쌍한 영혼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비록 헐벗고, 못 입고, 초라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부활의 신앙으로 산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마지막에는 승리요, 영광이요 생명을 얻게 되므로 진정한 성공인 줄로 믿습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처럼 우리들도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기에 소망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른 아침 천사들의 음성을 통해서 들려주신 우리 주님의 부활의 복된 소식을 오늘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 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리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주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활사건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의심될 것이 없습니다.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진다고 하는 자연 질서보다도 훨씬 더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우리 주님의 부활이 너무나도 이해하거나 믿기 어려운 비밀스러운 사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부활에 대해 위대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도다.” 바로 이 말씀 가운데 복음의 능력이 있습니다.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주님처럼 부활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2천년 전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으로서 부활사건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 바로 이 시간 우리가 우리 주님의 부활 사건을 믿으므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신앙사건으로서의 부활사건은 더욱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어야 참된 신앙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의 결론도 예수님의 부활로 종결됩니다.
사도행전 2장 31절에서도 예수님은 부활하였으며, 자신들이 그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고친 후 4장 10절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능력의 근원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라고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사건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부활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은 요한복음11장25-26절에서 마르다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질문에 여러분은 무어라고 대답하실 것입니까? 마르다는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바로 이 신앙고백이 오늘 우리들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부활은 단순히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신분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과 영생은 같은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부활 신앙에 굳게 선다면 우리들은 능력의 사람으로 변화되며, 승리의 감격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부활을 믿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부활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나약했던 옛 모습을 다 벗어버리고 용감하게 주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결국 로마의 참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부활의 신앙에 확고하게 서 있다면 어떠한 어려움이 닥친다 할지라도 우리는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가정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 있습니까? 사업문제 때문에 근심, 걱정하는 사람 있습니까? 자녀문제로 번민하십니까? 계획했던 일이 잘 되지 않아 절망 가운데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모든 문제와 고민을 다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부활신앙으로 우리의 삶을 다시 한번 설계해 보십시다. 그러면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이 생길 것입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힘이 솟아나게 될 것 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동시에 부활의 증거들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2. 부활에 대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33절에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이같이 초대교회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부활을 믿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또한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같이 부활은 기독교의 초석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증거들을 주셨습니다.
1) 부활의 첫째 증거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예언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눅 18: 31-33).
그러나 성경을 깊이 연구해 보면 아이러니컬하게도 부활의 증거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부활을 부정할 증거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곳곳에서 무려 401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고서야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사실은 부활이란 엄청난 사건입니다. 인류역사 가운데 부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일어난 전무후무한 역사적 단회적 사건입니다. 물론 죽었던 사람들이 소생한 일은 몇 번 있었지만 우리 주님처럼 부활하신 사건은 없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사건이기에 부활은 상상할 수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사실을 쉽게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연구해 보면 아이러니컬하게도 부활의 증거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부정할 증거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사건 조작은 제자들이 한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들이 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마태복음 28장 11-15절 이하에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자들이 갈 제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께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 도적질하여 갔다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2) 두번째 증거는 빈 무덤입니다. 부활은 그의 빈 무덤에 관한 가장 합리적인 설명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확실하게 부활하셨다는 증거로 '빈무덤'을 들고 있습니다. 사복음서는 한결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무덤이 비어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 : 2-6).
사실 부활이란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서 정말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빼 놓고서는 빈 무덤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요, 오늘날까지 역사적으로 검증받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인류역사 가운데 부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일어난 전무후무한 역사적 단회적 사건입니다. 물론 죽었던 사람들이 소생한 일은 몇 번 있었지만 우리 주님처럼 완전한 죽음 후에 부활하신 사건은 없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사건이기에 부활은 상상할 수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사실을 쉽게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장사지내셨던 그 돌무덤이 비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빈무덤을 놓고서 사람들은 크게 3가지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① 첫 번째 가능성으로는 가사설(假死說)로 예수님께서 완전히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충격으로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잠깐 기절한 것이고, 시간이 지나자 정신이 들어서 그 무덤을 빠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실신했다가 다시 살아 났다고 하는 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6시간이나 십자가 위에 계셨고, 운명 후 로마 군인이 옆구리에 창을 찔러 물과 피를 나오게 하여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주님의 제자이지만 죽은 것이 확인되니 무덤에 장사했을 것입니다. 로마 병정도 죽은 것이 확인되니 시체를 내어 주었고 제자들도 확인되니 흩어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 군데에서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완전히 돌아가셨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는 유대교의 전례를 따라 십자가에 달린 자들은 다 뼈를 꺽어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좌우편의 강도와는 달리 죽음이 확인되어 뼈를 꺽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확실한 확인을 위해 허리에 창을 찔러 피와 물을 모두 쏟게하는 확인 과정을 거쳤습니다.
또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빌라도 총독 자신이 백부장에게 예수의 죽음을 확인시키게 했고, 죽음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아리마대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 주어서 장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 가능성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② 두 번째 가능성으로는 도거설(盜去說)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다가 숨겨두고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헛소문을 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부활하시지 않았는데 그의 추종자인 제자들이 궤계를 꾸며서 다시 산 것처럼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 전체를 꿰뚫어 볼 때 그 일을 실행할 만한 용감한 제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해 가고는 돈을 주고 예수가 살아났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훔쳐 갔으면 무엇 때문에 여자들과 베드로가 무덤에까지 찾아갔겠습니까? 로마 병정들이 인봉을 하고 지키는데 어떻게 접근했겠습니까? 나아가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순교하기까지 부활의 주님을 증거했겠습니까? 도리어 대제사장들이 로마 군인들에게 돈을 주면서 훔쳐 갔다고 거짓 증거하라고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음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고 이야기를 했으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도대체 믿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부활사건을 보고 이야기를 해 준 여인들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아니한 제자들이 어떻게 부활사건을 조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당시 제자들의 수준과 아이큐 정도, 용기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볼 때, 두 번째 가능성은 불가능 그 자체입니다.
③ 그 외에 환상설도 있으며 유령설도 있으며 가지가지 거짓 증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가 베드로, 야고보 외에도 500명이나 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기독교회가 세상에 끼친 영향으로도 증거하고도 남으며, 교회확장과 박해국가들이 기독교 국가로 변하며, 현재의 역사를 통해서도 주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불란서의 볼테르는 50년 후에는 교회가 다 없어진다고 하면서 무신론과 성경을 반박하는 책을 많이 출판했습니다. 그러나 50년 후에 교회는 없어지기는 커녕, 신기하게도 그 무신론의 책을 출판하던 출판소가 성경을 찍어내는 인쇄소가 되어서 마루에서 천정까지 성경책으로 꽉 찼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생명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죽은 것이나 다름 없고, 우리의 구원 또한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피흘려 죽으신 주님은 그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죽은 것처럼 보이거나 기절한 것 같은 가사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머리는 가시면류관에, 손과 발은 대못에, 허리는 로마 군병의 창에 찔려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더 이상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과 조금도 다름없이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해가 져서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덤 속에서 그의 생애를 끝마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전 15 : 17-18)일 것입니다.
3) 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매일 크고, 작은 사건들을 접하게 되는데, 그 사건을 풀어 가는데 목격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자동차 사고도 목격자가 있느냐 없느냐? 또 목격자가 어떻게 증언하느냐에 따라서 사건의 판도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그런데 주님의 부활의 목격자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에 이 사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막달라 마리아에게(막 16 : 9).
여인들에게(마 28 : 9).
베드로에게 (고전 15 : 5).
두 제자에게(눅 24 : 15-31).
열 제자에게(요 20 : 19).
도마에게(요 20 : 26-28).
일곱 제자에게(요 21 : 1-24).
열 한 제자에게(마 28 : 16-17).
500명에게 (고전 15 : 6).
열 한 사도에게(행 1 : 2-9).
야고보에게(고전 15 : 7).
바울에게(행 9:1-5, 고전 15:8) 부활하신 주님께서 만나주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부활의 목격자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에 이 사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증거는 예수님이 500명이나 더 되는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절에서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열두제자와 500명이나 더 되는 사람에게 직접 나타나셨고 지금까지도 500명이나 살아있다고 증거하였습니다. 만일 부활이 지어낸 거짓이라면 500명이나 더 되는 사람들이 입을 맞추어 거짓말을 할수 있겠니까? 이에 더 나아가 거짓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보았다고 하면 혹 잘못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이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에 걸쳐서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아침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또 500여 형제들이 일시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달리 더 증인이 필요합니까? 증인이 더 있어야만 주님의 부활을 믿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도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분명하고, 목격자들도 충분한 이 부활사건도 이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부활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주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인 동시에 신앙적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부활은 구체적인 역사 가운데 일어 났지만 이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오직 믿는 자에게만 의미를 주는 신앙적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부활에 대해 위대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4) 부활에 대한 증거는 천사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 6~7절에서도 천사들이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여러가지의 메신저 통해서 부활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5) 부활에 대한 최고의 증거는 제자들의 변화입니다.
겁쟁이 제자들이 용감한 순교자로 바뀐 것입니다. 무엇이 이들을 180도 달라지게 만들었을까요? 그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기에 이같이 담대해질 수 있었습니다.
6) 마지막으로 부활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내 안에 있는 예수님입니다.
평생을 대학생 선교에 바친 "보슈 맥도르"는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최고의 사기극이다. 부활이 사실이라면 그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3절에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부활을 확신하는 믿음을 가질 때 어떤 능력이 나타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이 예언하고 그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실 때 인생들을 위해 대신 죽으시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것에 대해 거듭거듭 말씀하셨습니다(마 16 : 21).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모든 것 다 버리고, 놓칠지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고 믿어야 합니다.
1)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더라면 그는 평범한 종교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병 고침도 요술로 취급되었을 것이고, 그의 죽음도 하나의 비극적인 순교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고, 예수님의 병 고침이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되었으며, 그의 죽으심이 인류를 구속하는 대속제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죄를 속함. 즉, 구원의 보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은 인류의 죄값인 사망을 대신 짊어지시기 위함인데,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죄값을 치르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살아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모든 죄 값이 다 청산되고 우리는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우리가 얻을 부활에 대한 확증이 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고전 15 : 13).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예수님의 시체가 놓여졌던 무덤자리는 비어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누가 훔쳐 갔다는 설, 예수님이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났다는 기절설, 그리고는 사람들이 환상을 보았다는 환상설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부활을 부정하는 공격들은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는 주장들일 뿐입니다.
4)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역경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부활의 능력을 통하여 죄와, 죽음과, 마귀를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장차 다가올 부활은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끄는 소망이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해 주는 것이요, 우리 죄속함의 보증이 되며, 우리도 장차 부활할 것이라는 확증이 되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절망을 소망으로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증을 위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른 보혜사 성령을 선물로 주셨고, 주시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생령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인간은 영혼이 있는 존재로 태어났지만 아담의 범죄로 인해 그 영혼의 죽께 됩니다. 생령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잃었던 생령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 부활의 믿음을 통해 절망에서 희망을 죽음에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며 생명의 종교입니다. 부활은 사망을 이기게 만듭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구상' 이라는 믿음의 시인은 주님의 부활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진리는 있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정의는 이기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헛되지 않으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삶은 허무의 수렁이 아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이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여러분!
십자가 속에 놀랍고 큰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되어 있고, 부활사건 속에 우리는 의롭다하시는 증거가 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부활의 약속을 믿고 십자가의 사건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며 오늘 내가 지는 십자가 속에도 더 많은 신비로운 의미가 있음을 순간순간 해석하면서 살아가야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을 바라보았기에 십자가를 쉽게 편하게 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조금 있으면 나를 못보겠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고 가는 그 길에 십자가라고 하는 사건은 아무 별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러한 신앙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이땅에서도 그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은 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교만한 자를 겸손하게 하며, 무서워 떠는 자를 담대하게 만듭니다. 뒤따라 가던자들이 앞장서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며, 헌신하게 합니다.
이러한 부활의 신앙으로 고난과 시련속에서도 이겨내고 극복해내는 능력있는 삶을 사시고, 그리스도와 교회와 사명을 버리거나 떠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무덤 문을 여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힘입음으로 정욕과 이 세상과 사탄마귀와 죽음을 이기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의 복을 누리는 모든 성도들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복빌어 드립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보혈로 우리를 구속하셨고, 우리에게 부활을 통하여 확실한 죄사함과, 의로움과, 하나님 자녀됨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건만 부활의 확신이 부족하여 우리는 때때로 믿음이 흔들려서 이 세상에 좌로 우로 치우치고 세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리에 빠지곤 했던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여 주옵소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에게 동행하시고, 베드로가 흔들릴 때에 갈릴리 바다에까지 찾아오셔서 함께 하신 것처럼 사도 바울이 약해질 때에 힘을 도와주신 것 같이 우리에게 부활신앙을 다시 확증해 주시사 이 거친 세상에서 흔들림이 없는 신앙인이 되게 하옵소서. 자유인으로 부활의 증인으로 사망권세를 넘어서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지고 헌신하며, 늘 믿음으로 승리생활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