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편 좌측 임도로 오름
▲좌측 임도로 간다
▲임도로 올라 임도 버리고 좌측으로 140봉에 올라 보니 저 아래 벌통이 보인다.
▲벌통을 바라보며 희미한 족적을 따라간다.
▲지맥능선에 수십개의 벌통 좌측 통과하는데 좌측 공동묘지로 내려갔다가 다시 벌통 뒤 절개지로 내려 가는데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묘지로 내려와 헤매는 중
▲묘지에서 다시 양봉장으로 올라 양봉장 뒤쪽에서 임도로 내려간다.
▲양봉지대를 지나면 샵티마을로 가는 임도길이 나온다.
▲건지화 삽티길.(예산군 응봉면 지석리)에서 건너 길이 보이지만 시간이 6시30분 1시간 더 가면 7시30분, 여기서 마으로 내려 마무리한다.
▲마을로 내려간다.
▲마을회관에 들려 택시 콜 하여 삽교역으로
간다.
▲산행 후기...이번 구간은 29번 국도에서 619번 지방도까지로 도상거리는 약 20 km이다. 29번 국도에서 능선 분기점까지는 홍성군 홍동면과 홍성군 장곡면의 경계를 따라 산줄기가 이어지고, 능선 분기점에서 마사리 도로 전의 봉우리까지는 홍성군 홍동면과 예산군 광시면의 경계를 따라 산줄기가 이어진다. 아울러 마사리 도로 전의 봉우리에서 내상산 갈림길까지는 홍성군 금마면과 예산군 광시면의 경계를 따라 산줄기가 이어지고, 내상산 갈림길에서 비티고개까지는 홍성군 금마면과 예산군 대흥면의 경계를 따라 산줄기가 이어진다. 또한, 비티고개에서 204.5m봉까지는 홍성군 금마면과 예산군 응봉면의 경계를 따라 산줄기가 이어지고, 204.5m봉에서 619번 지방도까지는 예산군 응봉면을 가로질러 산줄기가 이어진다. 이번 구간은 잡목이 더러 있고 초롱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봉수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경사가 제법 가파른 편이며, 건지리 도로 직전의 능선 분기점에서는 독도에 주의를 해야 한다. 마루금이 지나가는 홍성군 홍동면, 금마면과 예산군 광시면, 대흥면, 응봉면의 지명과 마을의 유래를 홍성군과 예산군에서 제공하는 자료를 토대로 살펴보면... 홍성군 홍동면 금당리는 조선 말엽에는 홍주군 금동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상금리, 하금리, 호암리, 삼거리, 신대리, 백동, 가죄리, 별산리, 성당리, 한사리, 영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홍동면에 편입시키면서 상금리와 하금리 및 성당리의 이름을 따서 금당리 하였다. 홍성군 금마면 월암리는 본래 홍주(홍성)군 평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월굴리, 신대리, 마사리, 봉암리, 천동 일부를 병합하여 홍동면에 편입시키면서 월굴리과 봉암리의 이름을 따서 월암리라 하였다. 금마면 봉서리와 인산리 역시 홍주군 평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봉서리는 한동, 호동, 임곡리와 천동, 양지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금마면에 편입시키면서 봉이 깃들어 있는 형국이라 하여 봉서리라 하였고, 인산리는 인흥리, 석산리, 양지리, 강월리, 용당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역시 금마면에 편입시키면서 인흥이와 석산리의 이름을 따서 인산리라 하였다. 예산군 광시면은 마한의 거친국인 지금의 홍주에 속하였고, 백제시대에는 임존성에,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는 대웅천 소관인 임존군 지역이었으며, 고려 태종 2년에는 임존군의 개칭인 충주군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현재의 광시면이 되었다. 광시면의 광시리는 본래 대흥군 일남면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역말이 있어 광세역, 역말, 역촌, 광시 등으로 부르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대광시리, 웅산리, 탑동 등을 병합하여 광시리라 하였다. 광시면은 광시리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광시면의 구례리 역시 본래 대흥군 일남면 지역으로 구례골 또는 구례동으로 부르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강진리, 상구례동, 하구례동, 상촌, 황곡리를 병합하여 구례리라 하였다. 구례란 협곡사이에 넓은 들이 발달한 곳을 말하며, 수렁배미논이 많고 물이 풍족하여 예전에는 상답으로 여겼다. 광시면 마사리 역시 본래 대흥군 일남면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망를 먹이던 곳이라 마사, 마새, 매사라 부르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가막사리, 상마사리, 하마사리, 내상산리, 점촌리를 병합하여 마사리라 하였다. 예산군 대흥면은 신석기시대 말부터 사람들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며, 청동기시대에는 스키토시베리언 계통의 부족이 이주하여 청동검과 점파형동검, 마제석총 등의 유물을 남겨 놓았고,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한 지침국의 지심현으로, 임존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임존은 ‘님이 계신 곳’이란 뜻으로 부족장이 거처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임존성은 서기 60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과 전쟁을 할 때, 3만 여명의 백제군이 이곳에 입성하여 항거하였으며 사비성 함락 후에도 의자왕의 조카인 복신과 승려 도침, 흑치상지 장군 등이 임존성과 주류성을 근거로 백제부흥운동을 펼쳤던 곳이다. 백제멸망 후, 웅진도독부가 설치되면서 예산에는 마진현, 덕산에는 이문현, 대흥에는 지심현을 두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다음에는 통일신라가 당과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북방으로 요새를 옮기면서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위상을 잃게 되었다. 그 후 전형적인 고을 형태를 유지해오다가 고려 명종 2년에는 감무를 두었고, 고려 말기에는 예산현, 덕산현, 대흥현(대흥, 광시, 신양, 응봉 지역)을 설치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홍주(홍성)목 소속으로 있다가 태종 13년에 다시 대흥현으로 변경하였다. 숙종 때는 대흥면이 대흥군으로 승격되었다. 예산군 응봉면은 조선시대에는 대흥군 지역으로 내북면과 외북면으로 분할되었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대흥군 내북면, 외북면의 2개 면과 예산군 우가산면의 일부를 병합하여 봉산면이라 하였고, 1916년에 다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응봉면이 되었다. 응봉면 지석리는 원골, 장구뫼, 고인돌의 3개 자연부락으로 나눠져 있으며, 마을에 고인돌이 있어 고인돌 또는 지석이란 이름으로 부른다. 큰말, 승지물, 삽티, 새터, 안말, 윗골, 윳골, 저들이, 중상골 등의 자연부락을 가지고 있고 품질이 좋은 쌀 생산지로 유명하다. 응봉면 평촌리는 원래 대흥군 군내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세곡리, 둔대리를 병합하여 응봉면에 편입시켰다. 벌판이 있어 들말 또는 평촌이라 부르며, 임진왜란 때는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둔턱골, 신대, 세곡, 남산골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