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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마리 용이 살고 있다는 용유담은 상부에 큰 여울이 시작되는곳 부터 용유교까지 810m의 구간을 말한다. 네곳의 여울중 세번째에 외나무다리(약작) 흔적이 있고, 석각은 그곳에서 하류쪽에 분포되어 있다.
인명 석각은 강현각자 주변이 제일 많고 다음으로 약작을 건너는 심진대와 방장제일강산 석각주변이다.
위성지도에 표시된 석각은 구룡정 옆에 1곳, 계곡 아랫쪽에 6곳, 약작 건너편에 4곳이 있다.
석각은 사람들의 동선에 따라 석각을 해놓았고 더러는 크기가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것도 있다.
천왕당,제석당,백무당 그리고 용유담에 용왕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반야정사 위치가 아니었나 싶다.
비가 오는날 석각을 더 잘볼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번 답사를 시작했는데 이끼가 있는 곳은 판독하기 더 어려웠습니다.
사전에 자료를 충분히 검색하고 갔지만 바위가 젖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고, 답사후 세장의 사진을 합성하여 석각의 위치를 표시하였으니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신대(洗新臺)
용유담 북쪽 시냇가 바위에 있다. 세신(洗新)이라는 말은 ‘씻어 내어 새것처럼 깨끗하다’는 뜻으로, 『주역』의 ‘세심(洗心)’을 염두에 두고 붙인 이름인 듯하다. 몸과 마음이 티끌을 씻어 내 산뜻한 마음을 갖는다는 의미로 근세 인근의 어떤 인물이 붙인 명칭인 듯하다.
용유동천(龍游洞天)
용유담 북쪽 시냇가 바위에 새겨져있다. 용유담 일대의 뻥 뚫린 공간을 의미하는 말이다. 동천(洞天)은 사방에 산이 빙 둘러 있고, 중간에 허공이 뻥 뚫려 하늘만 보이는 곳을 말한다. 그러니까 동천이란 명칭은 산과 물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고, 입체적인 공간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심진대(尋眞臺)
용유담 북쪽 시냇가 바위에 있다. ‘진경(眞景)을 찾는 대’라는 뜻으로, 예전에는 속세의 티끌이 묻지 않은 깨끗한 곳을 심진동(尋眞洞)이라 하였다. 즉 용유담을 심진동으로 본 것이고, 그곳에 있는 바위를 ‘심진대’라고 한 것이다. 홍상준(洪相俊) 등 16명의 이름이 그 밑에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구한말 이곳에서 시회(詩會)를 하고 새겨 넣은 듯하다.
영귀대(詠歸臺)
용유담 남쪽 시냇가 바위에 있다. 영귀대는 앞에서 언급한 영귀소(咏歸所)와 같은 의미로 붙인 명칭이다. 영(咏)은 영(詠)과 같은 뜻으로 시를 읊조린다는 말이다. 이 영귀대는 구한말 지역 인사들이 모여 계회를 하고 붙인 것으로 그 밑에 김희곤(金熙坤) 등 10명의 이름을 써놓았다.
용유담(龍游潭)·방장제일강산(方丈弟一江山)
용유담 북쪽 시냇가 한 바위에 두 개의 각자가 나란히 새겨져 있다. 뒤의 각자는 ‘방장산(方丈山, 智異山)에서 제일 빼어난 산수’라는 뜻이다.
용유대(龍游臺)
용유담 북쪽 도로(60번 지방도) 가에 있는 구룡정(九龍亭) 동쪽의 바위 벽면에 있는 각자이다. 그 밑에 여러 사람의 성명을 써 놓았다.
독조대(獨釣臺)
용유담 남쪽 시냇가 초입의 덩그런 바위 밑에 새겨져 있다. 독조대는 ‘홀로 낚시질을 하는 대’라는 뜻으로, 용유담 아래쪽에 있다. ‘독조’라는 말은 당나라 때 문장가 유종원(柳宗元)의 『강설(江雪)』이라는 시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강설(江雪)_유종원(柳宗元, 773~819)
千山鳥飛絶 : 온 산에는 새 한 마리도 날지 않고,
萬徑人踪灰 : 모든 길에는 사람의 발자취 끊어졌네.
孤舟蓑笠翁 : 한 척 거룻배엔 도롱이에 삿갓 쓴 노인,
獨釣寒江雪 : 홀로 낚시질하는데 찬 강에 눈이 내리네.
조선 후기 최북(崔北)은 이를 소재로 『한강조어도(寒江釣魚圖)』를 그렸는데, 이 그림을 보면 유종원의 시가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연상이 든다.
인묘은사혜평강공현지지(仁廟恩賜惠平姜公顯之地)
용유담 남쪽 중간쯤의 바위에 있다. 이 각자가 있는 곳이 용유담 기암괴석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이 각자의 내용은 ‘인종(仁宗 : 재위 1544~1545)이 혜평(惠平) 강현(姜顯) 공에게 하사한 땅’이라는 뜻이다. 강현은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판서를 지낸 인물로, 호는 신안(新安), 시호는 혜평(惠平), 본관은 진양이다. 용유담에 이 각자가 새겨지게 된 것은 인종이 용유담을 강현에게 하사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것을 드러내려고 후대에 이 글자를 새긴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고사가 있다.
당나라 때 시인 하지장(賀知章)이 비서감(秘書監)으로 있다가 사직을 하고 귀향하려 하자, 현종(玄宗)이 그에게 회계(會稽)의 경호(鏡湖)와 섬천(剡川)의 한 굽이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후대 이백(李白)이 「술을 대하고 비서감 하지장을 추억하며[對酒憶賀監(대주억하감]」라는 시에서 “폐하께서 조칙으로 경호의 한 굽이 물 하사해, 그대의 대와 못이 영광되게 하셨네.[勅賜鏡湖水. 爲君臺沼榮]”라고 노래하였다. 강현의 후손 강지주(姜趾周)의 『적은유고(跡隱遺稿)』에 실린「용유담수계서(龍游潭修契序)」에 “신안 선생과 같은 분은 또 임금의 신임을 받아 옛날 당나라 때 비서감 하지장에게 경호를 하사한 것처럼 왕명으로 이 용유담을 하사하셨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근거하여 강현의 후손들이 19세기에 이 글귀를 새겨 넣은 것이다. 이 각자 밑에 ‘16세 종손 순기(順基)’ 및 ‘11세손 재성(在誠)’등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는데, 이들은 모두 19세기 말의 인물로 추정된다.
강대수(姜大遂)의 영귀소(詠歸所) 용유담 남쪽 중간쯤의 바위에 있다. 일두·탁영·남명 선생 각자 왼쪽에 ‘한사 강선생 영귀소(寒沙 姜先生 詠歸所)’라는 각자가 있다. 이는 강대수의 후손들이 강대수가 이곳에 찾아와 소요하다가 시를 읊조리며 돌아갔다는 고사에 의거하여 그의 유적을 기억하려고 새긴 것이다. 영귀(詠歸)는『논어』에 보이는 공자의 문인 증점(曾點)의 말에서 취한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공자는 자로(子路)·증점(曾點)·염구(冉求)공서적(公西赤) 이렇게 네 명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때 공자가 “너희들은 평소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데, 만약 누가 너희들을 알아주어 관직에 등용한다면 어떻게 너희들의 재주를 펴 볼래?”라고 물었다. 그러자 성질이 급한 자로가 불쑥 일어나 대답하길 “어느 나라가 주변국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을 받고, 또 기근까지 들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 제가 그 나라를 다스린다면 3년 만에 백성들로 하여금 용기를 갖게 하고, 또 나아갈 방향을 알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자가 빙그레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제자들은 감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 공자는 “염구야 너는 어찌 해 볼 거니?”라고 염구의 포부를 물었다. 염구는 어쩔 수 없이 “만약 제가 작은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면 3년 만에 백성들을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마는 예악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자는 다시 공서적에게 “너는 어찌 해 볼래?”라고 물었다. 공서적은 “종묘의 제사를 지내거나 임금이 다른 나라 임금과 회합할 적에 작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자는 이 두 제자의 대답에 대해 이렇다 할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인 증점에게 “너는 어찌 할래?”라고 물었다. 그때 증점은 한쪽에서 비파를 타고 있었는데, 비파를 내려놓고 말하기를 “늦은 봄날 봄옷이 지어지면 저는 어른 대여섯 명, 동자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沂水)에 가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가서 바람을 쏘이고,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자는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인정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기수에 가서 목욕하고, 무우에 가서 바람을 쏘이고,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고자 한다.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한 말은 인욕(人欲)이 다한 곳에 천리(天理)가 유행하는 것을 보고서 그런 삶을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세속적인 삶을 추구하지 않고 산수에 묻혀 본성을 기르며 성명(性命)을 온전히 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이 삶으로 여기는 인식을 낳았다. 이런 정신을 주자(朱子)에 의해 구현되었고, 조선시대 사인(士人)들에 의해 유행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산천의 산수가 좋은 곳에 학자들이 소요하던 곳은 어김없이 욕기암(欲沂巖)·무우대(舞雩臺)·영귀대(詠歸臺) 등으로 이름을 붙였다. 증점처럼 인욕을 멀리하고 천리를 보전하며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이라는 정신을 드러낸 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이 영귀(詠歸)라는 말인데, 그 속에는 앞에 있는 내용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강대수의 영대소도 마찬가지이다. 강대수는 합천 출신으로 강익문(姜翼文)의 아들이며,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에게 수학하였다. 1612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등을 지냈다. 영창대군을 죽이지 말라고 간언하였고, 제주로 유배된 정온(鄭蘊)을 구원하다가 유배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등용되어 우승지 등을 지냈다. 강대수의 동생으로 강대적(姜大適)·강대연(姜大延)이 있는데, 강대연의 후손 강지주(姜趾周)가 지리산 엄천 가에 살았다.
점필재(佔畢齋), 일두(一蠹), 탁영(濯纓), 남명(南冥) 장구소(杖屨所)
용유담 남쪽 중간쯤의 바위에 있다. ‘인묘은사혜평강공현지지’ 각자 좌우에 조선 전기의 학자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일두 정여창(鄭汝昌), 탁영 김일손(金馹孫), 남명 조식(曺植) 네 선생이 이곳을 찾아 노닐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후인들이 차례로 이 분들을 새겨 넣은 것이다. 오른쪽에는 ‘문충공 점필재 김선생(文忠公 佔畢齋 金先生)’이라 새겼고, 왼쪽에는 ‘문헌공 일두 정선생(文獻公 一蠹 整先生)’, ‘문민공 탁영 김선생(文愍公 濯纓 金先生)’, ‘문정공 남명 조선생(文貞公 南冥 曺先生)’을 나란히 새겨 넣었다.
김종직은 밀양 출신으로 부친 김숙자(金叔滋)로부터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로 이어진 도통을 이어받았으며, 15세기 후반 신진개혁 세력인 사림파의 종장 역할을 하였다. 1459년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근무하다가 외직을 청해 함양군수·선산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482년 특명으로 홍문관 응교에 제수되었고, 그 이듬해 동부승지로 승진하여 병조참판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별세한 지 6년 뒤인 1498년 유자광(柳子光) 등이 「조의제문(弔義帝文)」의 내용을 문제 삼아 무오사화를 일으켜 부관참시 되었다.「조의제문」은 중국 초(楚)나라 의제(義帝)를 조문하는 형식을 빌려 단종을 죽인 세조를 의제를 죽인 항우(項羽)에 은근히 비유해 지은 글이다.
김일손은 청도 출신으로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면서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교유하였다. 1486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등을 지냈으며, 언관으로서 훈구파의 부패와 비행을 비판하였다. 그가 춘추관 기사관으로 재직할 때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빌미가 되어 무오사화 때 처형되었다.
정여창은 함양 출신으로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김굉필(金宏弼)·김일손 등과 친밀하였다. 1490년 문과에 급제하여 안의현감 등을 지냈으며,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1504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되었다. 정여창은 김굉필과 함께 소학군자(小學君子)로 일컬어지며 조선 도학의 도통을 이은 인물로 평가된다.
조식은 경상도 삼가(三嘉) 출신으로 어려서 부친을 따라 한양으로 가서 그곳에서 학문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의 길을 걸은 인물이다. 이후 김해 처가 근처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성리학에 침잠하였으며, 1545년 모친상을 당한 뒤 고향 삼가로 돌아와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강학하였다. 1561년에는 다시 지리산 천왕봉 밑으로 이주하여 산천재(山川齋)를 짓고 깊숙이 은거하며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는 한편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쳤다. 조식은 이황(李滉)과 함께 조선 도학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은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문하에서 남명학파가 형성되어 안동권의 퇴계학파와 함께 영남의 양대 산맥이 되었다. 조선의 선비정신과 선비문화를 정착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장구소(杖屨所)’라는 말은 ‘지팡이를 짚고 찾아와 직접 발로 밟은 곳’이라는 뜻으로, 선인들이 찾아와 탐방한 장소적 의미룰 드러내는 말이다. 흔히 ‘장구지소(杖屨之所)’라고 한다. 명승은 사람을 통해 드러난다고 한다. 예컨대 소동파(蘇東坡)가 「적벽부」를 짓지 않았다면 중국 적벽(赤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명승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논리이다. 그래서 유명한 선인들이 직접 찾아와 발자취를 남기거나 글을 지어 남긴 곳은 그 장소적 의미가 크기 때문에 장구지소라고 하는 것이다.
동일면에 세분의 장구소가 새겨진 것으로 보아 후대에 쓴것이 생각된다
용유담(龍遊潭)
용유담 남쪽 중간쯤의 바위에 있다. 예서(隸書)로 참하게 쓴 각자이다. 이 각자가 있는 곳이 예전 사람들이 찾아와 기괴한 바위들을 감상하던 곳이다.
경화대(庚和臺)
용유담 남쪽 시냇가 바위에 있다. 경(庚)은 태어난 해를 의미하고, 화(和)는 동(同)과 같은 의미로 같다는 뜻이다. 경화는 태어난 해가 같다는 뜻이니, 동갑내기들이 모여 계회를 하고서 그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이다. 구한말에는 마을이나 고을에 동갑계가 유행하여 이런 계회를 많이 하였다.
글은 최석기교수 참조
용담입문(龍潭入門)
#심진대
#세신대
첫댓글 강선대
용유입문
유몽인의 석각이 없는걸 보면 당시엔 석각이 없었고 대부분 근대에 새겨진듯하다
나귀바위는 어디쯤있을까?
용유담9마리 용의기운을 받아 칠성님도 빠른회복이될겁니다,
탐방속김일손은 나의선조어른 인데 많은아쉬움이 많은역사의 인물이지요
그랬군요
훌륭한 선조에 멋진 후손입니다.
속두류록에 금강대가 나옵니다. 단속사에 대해서도 자세히 적고있습니다
비가 와서 사진이 선명합니다.
그래도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