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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 속에서 찾는 은혜 ④
(신 28:35) 여호와께서 네 무릎과 다리를 쳐서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를 생기게 하여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이르게 하시리라
(신 28:36)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 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신 28:37)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 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람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신 28:38) 네가 많은 종자를 들에 뿌릴지라도 메뚜기가 먹으므로 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
(신 28:39) 네가 포도원을 심고 가꿀지라도 벌레가 먹으므로 포도를 따지 못하고 포도주를 마시지 못 할 것이며
(신 28:40) 네 모든 경내에 감람나무가 있을지라도 그 열매가 떨어지므로 그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신 28:41) 너와 함께 자녀를 낳을지라도 그들이 포로가 되므로 네게 있지 못할 것이며
(신 28:42) 네 모든 나무와 토지 소산은 메뚜기가 먹을 것이며
(신 28:43) 너의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점점 높아져서 네 위에 뛰어나고 너는 점점 낮아질 것이며
(신 28:44) 그는 네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그에게 꾸어주지 못하리니 그는 머리가 되고 너는 꼬리가 될 것이라
(신 28:45)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고 네게 명령하신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와서 너를 따르고 네게 이르러 마침내 너를 멸하리니
(신 28:46)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징과 훈계가 되리라
지난 시간에는 대적의 정의와 대적에게 패하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대적이요 또한 나의 대적이기도 한 원수 사탄의 계략과 노략질을 이길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은 ‘아가페’(ajgavph)적인 사랑인 아가파오(ajgapavw)를 드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는 믿음은 흔들리기 쉽고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는 소망과 결단은 깨어지기 쉽습니다. 2012년 우리나라 이혼부부는 11만 4,300쌍으로 OECD회원국 중 이혼율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많은 일가친척 앞에서 서로가 일평생을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건만 세월이 흘러 어떤 문제가 봉착하면 쉽게 갈라서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왜 사랑이 지속되지 못할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사람의 약속은 헛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환경과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끝까지는 이 세상의 종말이 올 때까지를 말합니다. 세상의 종말이 지나고 심판의 과정을 거쳐 영생과 영벌로 나뉘어져 영벌이 잇는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면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도 끝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신’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지옥을 면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 사랑인 아가페 사랑은 영혼구원에 있습니다. 초점을 흐리면 안 됩니다. 나와 연관된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영원구원에 대한 불타는 마음이 있으면 내가 억울해도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통하여 주님의 사랑이 흘러가야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하였습니다. 능력은 ‘뒤나미스’(duvnami")입니다. 이것은 바위와 같은 단단한 것도 깨트려 버리는 힘과 능력을 말하는데 하나님 나라는 그런 능력을 말합니다. 사람들의 단단한 마음은 다른 무엇으로 무너트릴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깨트리지 않으면 할 수 업습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신 그 주님으로부터 사랑의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이 대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됨을 지난 시간 나눈바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 끊기면 저주가 임함을 말씀합니다. 오늘 말씀은 “여호와께서 네 무릎과 다리를 쳐서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를 생기게 하여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이르게 하시리라” 무릎은 ‘레베크’(&r,B)입니다. 이 단어는 축복을 말하는 바라크(&r'B;)에서 유래되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겸손한 모습을 보일 때 가능합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존경의 대상을 향하여 최상의 경의(敬意)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예배란 ‘프로스퀴네오’(proskunevw)란 단어를 사용했는데 '땅에 엎드리다, 부복하다, 무릎을 꿇고 경배하다'를 의미합니다. 예배의 행위에 있어서 무릎과 다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마련입니다. 무릎을 꿇고 예배의 장소에 나가야 되는데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를 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종기란 ‘셰힌’(@yjiv)인데 피부질환의 일종으로 애굽에 내린 열 재앙 중의 하나로 문둥병과 같이 살이 썩어 들어가는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주고 이통증은 발바닥서부터 정수리까지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가져다줍니다. 도무지 예배드릴 형편이 못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나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끊기면 예배할 마음도 사라지고 예배의 자리에 나올 수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4:23에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예수 믿는 성도에게 성령을 보내시고 그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후에 증거로 예배를 받으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분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예배를 통하여 입증한다는 말입니다. ‘찾다’는 ‘제테오’(zhtevw)인데 ‘발견하거나 얻기 위해 찾거나 구하다’라는 의미와 ‘아무개의 유익을 진척시키고자 힘쓰다,’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배 자리에 서면 그 사람의 본질이 나타납니다. 헬라 사람들이 갖는 철학 사상에는 ‘아다나시아’(ajqanasiva)라는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순수 생명체가 있는데 이 생명체가 이 땅에서 물질과 혼합되어 육체 안에 갇혀 있다가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돌봄으로 완벽한 하늘의 생명체로 변화되어 육체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죤 칼빈은 1534년 초까지에 별안간의 회심 (Sudden conversion)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성경을 읽다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은 하나님의 사랑에 바탕을 두고 그 분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하여 결정되었음을 깨닫고 사랑 중에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고 버리기로 작정하신 사람을 두었다는 이중예정론을 <기독교강요>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챨스 웨슬레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셨는데 그 아들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을 미리 아신다는 예지예정론을 말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구원관이 다르게 보일 수 있으나 깊은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 보면 하나의 귀결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가 임할 때에 그 영혼이 반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을 은혜 안에 있으면서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거부하는 영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은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오면 은혜를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거부하고 도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큰 은혜를 주십니다. 똑 같은 열기로 양초에 비취면 녹아내리지만 진흙에 비취면 딱딱하게 굳는 것처럼 예배의 자리에도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수 없이 반복되어지는 예배의 자리를 베풀어 주시고 은혜를 주셨는데 그 은혜를 체험치 못하면 더 이상 은혜의 자리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저주스런 종기가 무릎과 다리에 생겨 하나님께 나올 수 없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올 수 없는 자가 겪는 저주가 본문 신명기 28:36~37에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람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경배의 대상은 오직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한 분 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 즉 그 하나님께 굴복하여 무릎을 꿇고 경배하지 아니하면 자기 힘으로도 어찌할 수 있는 힘에 이끌려 전혀 경험한바 없는 이방족속들의 문화에 젖어들고 그들의 목석으로 만든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른’은 ‘아헤르’(rjeea)로서 ‘또 다른’이란 의미로 하나님을 흉내 낸 비슷한 신을 일컬어 말하지만 근본이 다른 신을 말합니다. 이단(異端)이란 용어는 다를 이와 바를 단을 사용합니다. 바름에서 벗어난 것이 이단인데 겉보기에는 그럴듯합니다. 바른 예배에서 벗어나면 거짓의 영에 사로잡혀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람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신을 섬길 때에 오는 것은 놀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놀람이란 황폐함을 말합니다. 정신세계가 평안을 잃어버리고 황폐해지며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돌이켜봐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흘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바른 믿음에서 온전한 예배가 교회 안에서 이뤄졌다면 성도의 삶이 바뀌어져야 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바른 예배가 드려지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 수는 많고 성도의 수는 많이 늘었다고 하지만 예배의 진정성이 없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전적이 자기 부인이요 회개하는 자만이 갖는 모습인데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 진정한 회개의 눈물이 그쳤습니다. 겸손이 사라졌습니다. 교만의 얼굴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가 끊어지면 신명기 28:38~40 “네가 많은 종자를 들에 뿌릴지라도 메뚜기가 먹으므로 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 네가 포도원을 심고 가꿀지라도 벌레가 먹으므로 포도를 따지 못하고 포도주를 마시지 못 할 것이며 네 모든 경내에 감람나무가 있을지라도 그 열매가 떨어지므로 그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내 안에 내가 그 분 안에 있음을 고백하고 내 안에 있는 모든 힘을 합쳐 하나님을 사랑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나의 주관자 되심과 그 분의 인도를 따라 사라겠다는 고백이 있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런데 정작 주인의 자리에 엉뚱한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잠언서 16:3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행사는 ‘마아세’(h`,[}m)인데 이것은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들’을 말합니다. 내가 농사를 짓든 사업을 하든 공부를 하든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였습니다. 맡기다는 ‘갈랄’(ll'G)인데 ‘~의 아래로 구르다’라는 뜻으로 우리의 행사를 하나님께 떠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자칫 오해하기 쉬운 것은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주시거니 하고 기다리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경영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면 우리는 하나님게 나의 행사를 맡긴다는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경영하다는 ‘마하샤바’(hb;v;j}m')로 ‘생각하고 계획하다’의 의미로 내 생각과 계획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지혜로 다스림을 받아야 나의 하는 일이 모두 형통하고 잘되어집니다. 이런 지혜와 다스림을 예배를 통하여 공급받는데 그 통로가 단절되면 애를 쓰고 수고한다 하더라도 모든 것이 허무로 돌아갑니다. 다른 신을 섬기면서 내 마음이 황폐한데 환경인들 어찌 기름지고 윤택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모든 축복은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시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부요로운 환경이 있기 전에 부요로운 마음이 있어야 하고 행복스럽고 화평한 환경이 주어지기 전에 내 영혼이 먼저 행복해져야합니다. 진정과 신령의 예배는 바로 우리들의 마음에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을 말씀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멀리하면 그 부모의 자식은 부모로부터 멀리하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신명기 28:41 “너와 함께 자녀를 낳을지라도 그들이 포로가 되므로 네게 있지 못할 것이며” 부모의 허물로 자식은 포로로 잡혀가서 수치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14:12-20, 18:4에서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죄로 자기가 죽고 자기 의로 자기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20:5-6에서는 아비의 죄가 3, 4대까지 넘어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통합하여 정리하면, 죄와 의는 유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말하면 아버지의 죄를 자식이 따라 짓게 되니 그 자식의 죄는 유전이 아니고 자기가 본보고 자기가 따라 한 자기의 죄입니다.
하나님께 예배가 단절된 사람의 행위는 그 자녀들이 그대로 본받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나 선한 것 보다 악한 것은 더욱 쉽게 답습합니다. 프랑스 정치인이자 군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자식들의 운명은 언제나 그 어미가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부모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자녀의 앞날이 결정된다는 것인데 데살로니가전서 5: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악은 ‘포네로스’(ponhrov")인데 ‘괴롭게 하고 슬픔을 초래하는 것, 재난이나 재앙을 가져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행하고 말하는 것이 슬픔과 재앙을 가져오도록 뿌려 놓고 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모두 버리라는 것입니다. 모양은 ‘에이도스’(ei\do")인데 ‘가시적 형상, 외관(양), 형태’를 말합니다. 그 안에 있는 것이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진실함이 없는 사람은 사람에게서도 자신에게도 진실할 수 없습니다. 진실함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위선이 나오고 그 위선적인 행동은 자식에게 그대로 물려주게 됩니다.
신명기 28:43~46 “너의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점점 높아져서 네 위에 뛰어나고 너는 점점 낮아질 것이며 그는 네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그에게 꾸어주지 못하리니 그는 머리가 되고 너는 꼬리가 될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고 네게 명령하신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와서 너를 따르고 네게 이르러 마침내 너를 멸하리니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징과 훈계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래가 높고 존귀하신 분이신데 우리가 무엇을 더 높여 드린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을 높인다는 말은 그 분의 행하신 사랑의 손길을 내가 인정하고 고백함을 말합니다. 그 분을 높이기 위히여 나는 낮은 자리에 앉는 것이 바로 예배의 자리입니다. 마태복음 23:12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높이는’은 ‘휩소오’(uJyovw)로 ‘주권자의 지위로 올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없이 나는 살 수 있고 하나님 없이 영화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내 마음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게 되면 하나님도 내 일에 관여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지위는 점점 낮아지고 꼬리가 되어 이끌림을 당합니다. 꼬리는 땅바닥을 기어 다닙니다. 추한 모습으로 전락되어지는 것이지요. 믿음의 사람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시라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하는 사람인데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사람에게 의지하게 되고 사람의 도움을 받으려고 합니다. 경기도 화성에서 70대 노인이 형과 형수를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남양뉴타운이 착공되면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100억 가까운 보상액을 형이 동생에게 나눠주지 않고 혼자 독식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동생이 일을 저지르게 된 사건입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은 그 마음에 다른 우상을 섬기게 되어 있어 거기에 휩쓸려 살다가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됩니다. 골프계의 황제라 일컬은 타이거 우즈는 젊은 나이에 엄청난 부와 명성을 쌓았지만 음주 교통사고로 인하여 그의 치정사건이 발각이 되어 무려 20명의 여자와 불륜 스캔들이 터지고 거약의 위자료를 지불하고 아내와 이혼하고 나락으로 떨어져 1위에서 66위까지 떨어지는 등 이제는 그의 명성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할 때입니다. ‘낮추다’는 ‘타페이노오’(tapeinovw)를 사용했습니다. 플루타크(PIutarch)는 ‘타페이노오’의 어원은 제사와 기도를 드릴 때 머리를 가림으로써 신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관습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예배는 절대적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계시면 나도 없습니다. 그 분이 나를 돕지 않으시면 나는 살 길이 막막함을 고백 드리는 것이 진정한 낮아진 자의 예배입니다.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와서 너를 따르고 네게 이르러 마침내 너를 멸하리니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징과 훈계가 되리라” ‘모든 자주’란 ‘켈랄라’(hl;l;q)인데 선택받은 사람이 그를 통하여 얻어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언약의 축복을 놓쳐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잃어버림의 아픔을 아십니까? 그동안 누려왔던 부와 사랑, 그리고 관심을 잃어버릴 때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 줬던 건강을 잃어버릴 때 오는 상실감이 얼마나 우리를 괴롭게 하던가요?
백주년 기념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이재철 목사님의 간증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전립선 암 수술을 받고 수술 부위를 보호하기 위해 정자세로 꼼짝 없이 천장만 보고 반듯이 누워 있어야 했고, 혈전이 생기지 않도록 아내와 아이들이 번갈아가며 그의 다리를 주물러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팠고, 퉁퉁 부어오른 다리는 고통이 심해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야 했다고 했습니다. 수술 후 나흘 동안은 아무 것도 먹거나 마실 수 없었고 수술 후 닷새째 상반신의 모든 호스를 제거하고서야 비로소 스스로 이를 닦고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걸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고통을 겪은 후에 “여러분이 잠자리에서 원하는 대로 몸을 이리 저리 뒤척일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십니까. 비록 남의 손을 빌려서일망정 매일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 은혜라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매일 먹고 마시고 싶을 때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십니까. 우리가 우리 손으로 이를 닦고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두 발로 걷는 것이 그저 되는 일 같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내가 길 위에 서 있어도 두 발로 걸을 수 없고, 내가 목욕탕 안에 있어도 내 두 손으로 이를 닦고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할 수 없습니다. 앉고 싶을 때 어디든 당연히 앉고, 식탁에 당연한 듯 앉아서 식사하는 것이 절대로 당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것도 하나님 은혜 속에서만 가능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분명 이재철 목사님에게 임했던 고통은 저주입니다. 그러나 그 저주 속에서 자기를 낮추고 거기서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그 주님께 돌아가는 것이 예배자의 참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돌아오지도 않고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은 저주가 따라다닌다고 했습니다. ‘따른다’는 ‘라다프’(#d'r;)입니다. 이 단어는 사람이나 집단이 전쟁을 하거나 복수를 할 목적으로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추적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지겹도록 저주가 달라붙습니다. 떨쳐 버리고자 하지만 버릴 수 없습니다. 이 저주는 당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후대 자손까지 미치고 영원까지 따른다고 했습니다. 그 영원은 바로 지옥의 형벌입니다. 쉴 새 없는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전능자 하나님께 나와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신 예수님의 흘리신 보혈만이 이 저주의 틀을 깨트릴 수 있습니다. 그 분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마침내 너를 멸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이 있습니다. 그 시간대를 놓치면 돌아갈 기회가 영원히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찾고 그 분의 위로와 회복을 잃어버리는 것을 ‘멸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샤미드’(dm'v)라는 단어는 그 근원까지 말라 전혀 회생할 근거조차 없는 전멸(全滅)을 일컬을 때 쓰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참으로 무서운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흙은 먼지, 티끌을 말합니다. 육의 근원은 티끌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은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가치 있게 하셨습니다. 이 생기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명을 말합니다. 그런 귀한 생기를 무시하고 살면 결국 아무런 가치도 없고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티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티끌로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생하는 생명이 저주를 받아 영원토록 고통의 좌절을 맛보아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막히게 만듭니까?
하나님은 모세의 입을 통하여 피를 토하듯 말씀하시는 핵심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사람이 살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자의 삶을 살지 않고는 스스로 존귀함을 받을 수 없음을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른 예배자의 삶을 살아갑시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경배하고 그 분의 이름을 높이겠다는 결단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아로새겨지시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