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주의
Paul Klee, Saint Germain Near Tunis, 1914, Musse National d'art moderne, Paris
표현주의와 야수주의는 양식 상에서 공통점이 많다. 신인상주의 화가인 반 고호에 대한 공통의 관심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1905년 드레스덴에서 브뤼케 그룹이 결성된다. 브뤼케는 독일어로 다리라는 뜻이다. 교량이라고 쓰면 더 쉽게 이해하실까? 다리란 이름은 니체의 표현을 빌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니체는 인간을 행복한 미래를 향한 다리로 비유했다. 특히 다리 그룹의 화가들은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대가 에드와르 뭉크의 작품에 영향을 받는다.
창립멤버는 키르히너, 헤켈, 로드루프의 세 사람이다. 모두 건축학도이다. 키르히너는 회화, 헤켈은 석판화, 로드루프는 목판화로 전향했다. 키르히너만 정식 회화수업을 받았다. 헤켈과 로드루프는 독학이었다. 나중에 에밀 놀데가 합세했다.
독일의 표현주의 운동은 1911년 뮌헨의 청기사 그룹에서 가장 활발했다. 러시아에서 이민온 칸딘스키가 주축이 된다. 마르크, 마케, 폴 클레 등이 활동했다. 마르크와 마케는 일차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그룹은 곧 해체된다.
마티스
Henri Matisse, Joie de Vivre, 1905-06, Barnes Foundation, Merion, Pennsylvania
#앙리 마티스 춤 1910, 260*591cm, 레닌그라드 에르미타쥬 박물관
##앙리 마티스 호사 정적 관능 - Lux, Calme et Volupté 1904 프랑스 개인소장
Georges Rouault, Head of Christ(passion)1938, Hanna fund, Cleveland Museum of Art, Ohio
그림설명 ; 앙리 마티스 춤 1910, 260*591cm, 레닌그라드 에르미타쥬 박물관
참고도판 1.앙리 마티스 호사 정적 관능 - Lux, Calme et Volupté 1904 프랑스 개인소장
마티스는 포비즘, 즉 야수파의 선봉대장이었다.
야수파란 표현주의의 전위부대라 할만하다. 그리고 표현주의는 20세기 화가의 공동적인 카메라의 감정 없는 재현을 공격했다. 무기는 인간의 감정과 표현이다. 인상주의와는 달리 외관의 뒤에 숨은 감정적 표현과 정신적 가치를 표현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마티스는 또 다리 그룹과 청기사 그룹을 거느렸다. 청기사라는 이름은 칸딘스키의 작품에서 따왔다. 이름들을 조합하면 한편의 우화가 될 듯하다.
야수에 올라탄 마티스가 재현의 미술에 선전포고를 한다. 색채와 붓놀림의 혁명이라는 다리를 건너 칸딘스키가 출판한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이 있는 이상의 땅을 향한다. 거기서 표현주의의 푸른 기사 칸딘스키에게 20세기 미술의 대권을 넘겨준다. 이것이 대권을 향한 가상 드라마이다.
인상주의는 모네를 구심점으로 하는 비정규군의 양상이다. 표현주의는 신화적인 외인부대라 할만하다. 야수파의 마티스는 선전포고를 하자마자 독일에 기습 공격한다. 독일군의 제복인 표현주의로 갈아입자마자 19세기 미술이 전통을 대체한다.
그 저력이 어디 가겠는가. 표현주의는 2차 대전 후에 미국으로 건너갔던 미술의 주도권을 탈환하는 숨은 카드였다. 그것이 신표현주의라는 이름으로 80년대를 풍미했었다. 그러니 마티스의 위력이 대단하지?
마티스의 화면은 단조로운 색면과 심한 굴곡의 윤곽선이 특징적이다. 고갱의 영향을 받았던 원시적인 형태, 자연 그대로의 인간모습 등으로 묘사된다. 고갱의 영향이란 클로아조네를 말한다. 색면에 까만 윤곽선을 그리는 기법이다.
동양에서는 구륵진채라 한다고 했지? 고갱이 영향받은 구륵진채는 일본식 판화에서 왔다. 그러니까 일본판화에서 고갱으로 건너가 다시 마티스로 이어지는 영향관계가 성립된다.
또한 마티스에게 영향을 준 것은 쇠라의 점묘법이다. 그러나 <호사 정적 관능>이라는 작품은 고갱의 클로아조네와 쇠라의 점묘법의 영향을 벗어난다. 음악적인 것, 정신적인 것, 본질적인 것이 대신 자리를 잡는다.
마티스의 이러한 본질지향적인 제작태도는 근본적으로 상징주의에서 온다. 그 영향원은 구스타브 모로이다. 모로는 색채와 형체를 결합함으로써 문학적인 관념을 표현하려고 했다. 모로는 화가로서는 삼류이지만 마티스나 조르주 루오, 샤반느, 르동 등을 길러낸다.
그리고 독특한 테크닉의 실험을 통하여 초현실주의의 형성에 예언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말대로라면 표현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표현주의는 광란적인 색채와 격렬한 붓놀림으로 특징지워지기 때문이다.
마티스에게 표현은 인물이나 대상 및 에워싼 공간 비례 등의 장식적 구성이다. 그 과정에서 음악의 상태가 십분 고려된다. 하모니, 멜로디, 리듬을 살리고 나머지는 모두 제거한다. 이 제거는 본질환원의 과정을 연상케한다.
잘 계산되고 논리적으로 추론 가능한 화면은 현상학적 접근방식으로 극대화한다. 그 결과로 탄생하는 것이 추상화면이다. 현상학이란 본질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언어나 사상 사유 등을 괄호 안에 가두어 나감으로써 현상에서 환원된 선험적인 본질을 찾아나간다.
30년대에 이르러 과감한 개혁적인 시도들과 보수적인 성취가 동시에 각광을 받던 시기이다.
마티스는 지오토의 프레스코를 생각하면서 반스 제단을 위한 춤의 주제 벽화를 두 번 제작한다. 종이 오려붙이기는 레오나르도와 보티첼리를 대립시키던 문제 해결의 단서를 제공한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선과 볼륨을 살리기 힘들지? 마티스는 종이를 오려붙임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단순화의 문제는 마티스의 숙명적인 과제이기도 했다. 생략의 천재이면서도 마티스는 고전적인 이상에 기초한 작품을 삶의 기쁨이라는 주제에 담고 있다. 자연의 기본적인 특성을 파괴하지 않고 얼마만큼 자연의 이미지를 단순화할 수 있는가가 마티스의 숙제였다.
도판: 에드와르드 뭉크 절규 1863 오슬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2016년 補遺
한국근대미술, 한국양화, 한국신미술 등의 이름으로 부르는 양화도입기부터 1988년까지를 비평적으로 조명하는 작업을 추진중이다. 많은 객관적 사료와 견해가 필요하겠지...그 중에 표현주의 야수주의 등이 있다. 신기하지 않아? 한국근대미술에서 사조 혹은 표현파, 야수파 등의 이름 등을 넘어선 기술이 없다. 나아가 왜 이 화가의 이 작품이 왜 그러한 유형에서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비교분석이...글쎄, 전무하다고 하면 좀 과장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