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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093-9140 2011.09.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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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서울연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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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s Theater In Seoul 제12호 2011.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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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잡지에 실린 내용은 서울연극협회나 연극기록실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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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처: 서울연극협회, 연극기록실 발행인: 박장렬 편집인: 오세곤 편집위원: 김의경, 김태수, 백승무, 양기찬, 이연심, 장용철, 조만수, 최은옥 기자: 이정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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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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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인의 글 | 오세곤
1부 Review
- 마지막 여행 | 백승무 - 마지막 여행 | 서진화 - 스팸치즈후라이 | 백승무 - 예술하는 습관 | 백승무 - 오동리 소방서 | 윤민지 - 오동리 소방서 | 이주영 - 욕망의 진화 | 윤민지 - 욕망의 진화 | 이주영 - 푸르케리마 | 윤민지 - 푸르케리마 -가장 아름다운 자- | 이주영 - Antigone : Dear. PEOPLE | 윤민지 - Antigone : Dear. PEOPLE | 이주영 - Romeo & Juliet. live | 윤민지 - Romeo & Juliet. live | 이주영
2부 재수록
- 결혼피로연 | 박정기 - 보이체크 | 박정기 - 우르 파우스트 | 박정기
연극교육
- 쉬반의 신발 | 이연심
정책기록실
- 예술인의 행복 찾기 | 오세곤
편집 후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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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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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바야흐로 결실의 계절입니다. ‘오늘의 서울연극’도 시작한지 어언 1년이 되어 12호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꼭 때를 맞춰 그럴 필요는 없지만 열두 번을 발간하면서 여러 보완점들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13호부터는 뭔가 달라지기 위해 부지런히 의논들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몇몇 섹션이 추가될 예정인데 고맙게도 이번 12호부터 원고가 들어와 반영하는 섹션도 있습니다. 바로 연극교육 섹션인데 연극이 일반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데 있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또 얼마나 많은 연극인들이 학교에서, 복지관에서, 평생교육원에서 일반인들에게 연극을 가르치고 있는지 대부분 잘 아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일반인을 위한 연극 교육은 결코 일부 극단이나 연극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고 전 연극계가 관심을 가지고 발벗고 나설 일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 섹션을 통하여 그 방법론을 공유하고 앞다투어 좋은 의견을 개진하면서 함께 연극교육을 발전시켜 나가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적부터 일생 동안 전 국민이 연극을 하면서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게 되기를 열망합니다. 그래서 전 국민이 연극인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되기를, 연극이 존중받고 연극인이 존경받는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1년 9월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 올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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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여행 - 죽어 울고, 웃다 죽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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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무
극작: 윤미애 연출: 류주연 상연일시: 2011.08.04 ~ 2011.08.21 상연장소: 대학로 게릴라극장 관극일시: 2011.08.20. 15:00
삶, 그저 그런 삶이란 지저분하다. 참으로 추하고 비리다. 사람들이 어째 저러냐 싶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그렇지, 뭐. 인생, 원래. 되짚어보면 남 말할 거 못 된다. 나라고 남다르랴. 오해하고, 불신하고, 매정하고, 분위기 파악 못해 뜬소리하고, 상처주고, 딴 마음 품고, 생떼 쓰고. 그렇다고 그 꼴불견과 추악한 가관을 보고 있자니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내 안에 있고, 우리의 것이고, 모두가 가진 것임에도 너절하고 비루한 삶의 진면목을 볼라치면 힘겹고 쓰라리다. 마지막 여행을 보는 심정이 딱 그렇다. 꽃 같은 나이에 불상사를 당한 한 여인의 비운 때문이 아니다. 죽은 자를 보내는 산 자들의 아픔이 애틋해서도 아니다. 이틀간의 장례식 여정을 그리고 있는 마지막 여행이 힘겨운 것은 그것이 죽음의 공포나 비애, 혹은 죽음의식의 장엄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에 대한, 삶의 남루함에 대한, 더 정확히는 죽음의 충격과 상실감조차도 구원해주지 못하는 삶의 불구성과 일그러짐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슬픔이 배어있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추함이 어려 있다는 것, 그것이 마지막 여행이 껴안고 있는 갑갑함의 본체이다.
죽음을 넘어서는 삶 인간의 죽음은 의학적 사망진단이나, 생물학적 차원의 활동정지선고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 관습과 전통적 의례를 통해서 사회적으로, 집단적으로 인정되어야 비로소 완료된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어떤 현상이나 선언이라기보다 하나의 사건에 가깝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시신수습부터 매장까지의 제도화된 의례와 상실의 슬픔에서 그 극복까지 이르는 심리적 궤적을 모두 포괄하는 상징적 장치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흔히 장례식이라 일컫는 전통적 애도행위는 면도칼로 그어진 것 같은 삶과 죽음의 거리를 시간적으로 정서적으로 완화시키고 완충키는 사회적 제도이다. 상례와 통념이 만들어놓은 그 최적 거리 속에서 산 자들은 견디기의 여유를 찾고, 이기내기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망자의 저승행을 최대한 유예시키면서 산 자들의 숨통을 풀어주는 것이다. 3일장의 시간적 안배와 염습, 통곡, 문상, 상여, 매장 등의 엄격한 절차는 삶과 죽음의 중간단계를 설정, 저승으로의 전이과정, 산자들과의 별리과정을 가상적으로 재현하는 일종의 놀이이다. 장례의 유예기간이 슬픔의 완충작용으로 기능하는 본질적 원리는 죽음 사건을 하나의 입사의식으로 가공하는 데에 있다. 이를 통해 망자는 존재의 본질적 탈각을 넘어 저승으로 무사히 진입하고, 제례 대상으로 승격됨으로써 산 자들과의 영적 통합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장례의식에 재생의 상징물이 넘쳐나는 것은 죽음 사건이 단순한 결별이 아니라, 분리-재통합의 통과의례를 통해 삶과 죽음의 새로운 관계형성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상실감을 애도로 승화시켜주는 일련의 상징행위를 통해 산자들은 죽음의 공포를 견디고 삶의 의미를 갱신하게 되는 것이다.
죽음보다 슬픈 삶 장례의 이런 근원적 의미를 배경으로 할 때 마지막 여행이 그려놓은 파탄의 음영이 얼마나 암울한지 알 수 있다. 마지막 여행은 망자를 놓아주지 않는다. 입사의식의 신성함도 없다. 산 자를 자책하게 만드는 상실감도, 죽은 자를 위무하는 애도도 없다. 제목처럼 ‘마지막’ 순간의 파열음만 고동칠 뿐이다. 마지막 캠핑과 저승길이라는 양가적 의미는 막장의 몰락처럼 허망하다. 어이없는 실소와 쓴웃음만이 잔향으로 남는다. 산 자들의 악다구니는 망자를 욕되게 한다. 삶은 결코 죽음을 넘어서지 못한다. 갱생과 재통합의 희원은 바닥에 깔린 쓰레기 더미처럼 무의미하고 무력하다. 그 아비규환의 진창은 고스란히 삶에 대한 모욕으로 전화한다. 이처럼 마지막 여행은 제목의 낭만성과는 달리 차가운 세태론으로 무장하고 있다.
파탄 난 세계 장례식장을 점령하고 있는 인물군상들의 면면은 하나같이 몰상식하고 몰인정하다. 하지만 이것이 이들의 사악한 본성이나 타락한 심성에 연유한 것은 아니다. 마지막 여행이 상정하는 세상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는 규명할 수 없다. 이들은 고단한 삶의 풍파에 뒤틀리고 일그러진 사람들이다. 팍팍한 삶의 분란에 할퀴고 찢겨진 사람들이다. 전쟁 같은 삶이란 말이 은유가 아니라, 실재가 되어버린 세상에 거적 하나 없이 내팽개쳐진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동정이 필요한 하층민도 아니다. 구휼의 대상인 빈민도 아니다. 그들은 사회의 다수를 점유하는 평범한 서민들이다. 2011년을 사는 우리의 평균치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일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이기에 마지막 여행의 비애는 비수처럼 쓰라리고 아리다. 병원비, 양육비, 사업자금, 보험금, 장례비 등 삶의 모든 가치는 돈의 문제로 수렴된다. 삶의 다른 가치를 알지 못한다. 이들이 못나서가 아니다.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민의 몰락이 낳은 2011년 오늘의 모습이다. 그들은 진짜 삶을 알지 못하기에 진짜 죽음도 영접할 수 없다. 죽음은 그저 번잡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삶이라는 참사 삽화 처리되는 파탄 난 죽음은 삶의 파탄을 부른다. 이들이 서로 소통을 거부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장례식장 직원의 일방적 통고에는 셈법만 있고, 시아버지의 전화기도 소통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괴리만큼이나 인물 간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고 깊다. 단말마처럼 끊어지는 대화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칼날처럼 쇳소리를 낸다. 소통의 장벽은 애도의 분위기까지 잠식한다. 망자를 두 번 죽이는 꼴이다. 가끔씩 대사와 대사가 겹치는 부분은 오해의 여지도 없지 않다. 대화의 단절이 대사의 누락으로 오인되지 않도록 좀 더 효과적인 연기기법이 개발돼야할 것이다. 의례는 오랜 시간을 거쳐 상징의 수준으로 응집된 행위체계이다. 마지막 여행은 의례의 그 응집성을 순식간에 해체시켜버린다. 성스러움은 상스러움으로 추락하고, 애도의 슬픔은 그로테스크하게 왜곡된다. “너 나 할 것 없이 풍습을 멜 힘이 사라지면 풍습에 뒤덮이게 마련이다.”(박경원, 식물의 장례 중). 이들은 풍습을 떠받칠 의지도, 능력도 없다. 관례에 종속되고, 형식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장례식은 그저 부담스럽고 불편한 의식일 뿐이다. 허위와 가식이 판을 치고, 위선과 위악이 득세한다. 죽음보다 못한 삶이라 구차하고, 어떤 누구도 그 구차한 삶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도 참 궁색하다.
짠맛 나는 웃음 그러면서도 웃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마지막 여행이 주는 두 번째 비극이다. 천수를 누린 호상의 경우 장례는 삶과 죽음, 웃음과 울음, 금기와 해방(주연, 폭식 등), 문화와 자연, 일상과 축제 등이 어우러진 한 판의 놀이와도 같다. 상주를 웃겨야 제대로 된 문상이라는 경구! 반면 상주가 없는 절명(소위 무자귀신)은 예전엔 빈소도 차리지 않았다. 장례 행위 자체가 고역이고 고통인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여행은 수시로 웃음이 터진다. 인물들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는데, 객석은 쉼 없이 키득거린다. 추악한 묘미, 그로테스크의 극치이다. 특히 이서방과 상식이 싸우는 장면은 어떤 코미디에서도 본 적 없는 포복절도와 박장대소가 압권을 이룬다. ‘눈물을 통한 웃음’이라는 희비극의 정수를 과시한다. 망자를 앞에 두고 벌이는 이 어이없는 악다구니는 역설적이게도 ‘살아남은 자’, 성진에 대한 모함과 음해로 점철되어 있다. 죽음보다 못한 삶이 죽어 마땅한 삶을 거론하는 것이다. 웃겨도 웃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연이다. 관객의 웃음에도 독약을 발라놓는 극작가 윤미애의 잔혹함은 더 큰 함정이 되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남편 성진에 대한 복잡다단한 묘사가 그것.
미스테리 히스토리 평화롭고 여유로운 첫 장면의 목가적 분위기는 매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어지는 윤정의 느닷없는 죽음! 하지만 죽음의 사인에 대한 궁금증은 양가식구들의 어처구니없는 처신에 이내 묻혀버린다. 처가에 대한 성진의 경제적인 헌신이 공개되고 보험사기에 대한 의구심이 똬리를 튼다. 그날 밤, 성진과 윤정이 마지막 여행을 떠난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윤정의 자살일까, 성진의 살인일까. 자살이라면 아이를 갖고 싶다는 윤정의 소박한 꿈은 무엇이며, 사고사라면 왠지 어두운 구석이 있고, 초점을 맞추지 못해 시선을 회피하는 성진의 연기는 연출의 트릭이란 말인가? 뿐만 아니다. 성진의 의처증은? 이대리 문상은 그렇다 쳐도 남편 것이 분명한 썸씽 판타지는 뭔가? 윤정의 죽음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 자고 일어나니 윤정이 죽어있더란 성진의 진술과는 달리 그는 윤정의 죽음을 목격한다. 아니, 방조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류주연 연출은 자살도, 사고사도, 살해도 아닌 어중중한 지점에서 슬그머니 손을 놔버린다. 가장 논쟁적인 부분에서 침묵을 선택한 것이다. 승자도 패자도, 선도 악도 없는 제로섬 게임 논리로 숨어버렸다. 갈등과 절규의 파토스보다는 훨씬 세련된 방식이다. 목격자도, 당사자도 알 수 없는 미스테리! 꼭 우리네 삶의 꼴과 닮아있다. 누가 성진에게 돌을 던지랴. 우리는 어느 정도는 성진이 아닌가. 우리가 죽은 자들을 뒤로 하고 여태 살아있는 것 자체가 그것을 증명한다.
“예술은 기법의 총합이다.”(시클롭스키) 문제는 무엇을(what)이 아니라, 어떻게(how)에 있다. 마지막 여행은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하는 기법의 영역에서 관객들을 압도된다. 류주연 연출의 결말에 수긍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가 과시하는 냉철한 관찰과 섬뜩한 표현력 때문이다. 과장이 없으면서도 자극적 묘사에 능하고, 절제하면서도 다채로운 형상화를 이룩하며, 단순하면서도 섬세한 표현을 달성하고 있다. 폐부를 찌르는 날선 대사를 모나지 않게 다독거릴 줄 알고, 무력하게 잦아드는 리듬을 유의미한 설정으로 포장해낼 줄 안다. 자칫 요절복통의 풍자극이나 보험사기 추리물로 빠질 위험성을 유유히 극복하고 누추한 삶의 풍경, 그 잔인하고 무정한 살풍경을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하얀 라인으로 구획하여 그 비율로 죽음조차 압박하는 삶의 야비함을 그려내는 공간상징 작업도 무난하다. 탐욕과 속물성으로 물든 산 자들의 공간이 하룻밤을 지나며 우측 영역을 침탈하지만 남은 것은 쓰레기 더미뿐이다. 남겨진다는 것은 이긴 것이 아니라, 서러운 것이다. 윤정의 죽음보다 성진의 삶이 더 애처로운 것. 류주연 연출의 날렵한 손길은 홍상수식 다중관점을 활용한 병원 장면에서도 돋보인다. 서로 다른 관점을 영유하는 이 영화적 터치는 사태의 비밀에 접근하는 첩경을 열어주고 있다. 단, 사태의 객관적 기록자인 진경이 이 프레임을 장악하지 못하고 겉도는 듯해서 반복과 차이의 묘미를 살리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인물의 행위나 표정을 집중적으로 응시하게 만드는 클로즈업 장치, 페이드인-아웃처럼 영상편집의 테크닉을 연상시키는 잦은 암전도 영화기법의 흔적이다.
마지막 여행은 시종 불편하다. 웃어도 웃는 게 아니다. 하지만 추악한 삶의 살풍경에 질리고 체하더라도, 그것이 삶의 진실이라면 쓴 약 삼키듯 받아들이고 인내해야 한다는 사실. 그것이 예술에 힘입는 삶의 비밀이고, 바로 그것이 삶에 빚지는 예술의 미덕이다. 허나 걱정이다. 이제 상갓집 국밥을 어이 먹나. 문상도, 의례도 먹고살자 하는 인사(人事)라지만,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우거적우거적 고깃살을 씹어대는 시아버지의 그 역겨운 얼굴이 이리 아른거리는데, 어찌 속 좋게 내 탐욕스러운 빈속을 채우려할 것인가. 참 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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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여행 - 평범한 삶에 대한 진지한 관찰과 약간의 장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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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화
윤미애 작, 류주연 연출의 <마지막 여행>은 발단부터 주인공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던져 놓고 이 사건에 대한 관찰자들의 관심과 반응을 기다린다. 관찰자들이란 장례식장에 하나, 둘 나타나는 인물들과 이중으로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이다. 무대 위의 인물 중에는 관찰자임을 자처하면서 글과 동영상으로 상황을 기록하고 대사로 평가하기도 하는 작가 진경도 있다. 이 극의 장례식은 진경의 말처럼 죽은 사람이 아닌 산 사람을 위한 의례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장례식은 그의 말뜻처럼 산 사람에게 누군가 죽었음을 상기시키고 이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전통적인 역할과는 다른 것을 수행한다. 바로 죽음에 대한 부정, 연극의 시작과 동시에 펼쳐지는 삶에 대한 강조, 지난날의 재조명이다.
의문 하나. 삶은 미스터리인가, 혹은 윤정은 어쩌다 죽었을까?
인물들은 윤정의 죽음을 애도할 겨를이 없다. 그들은 아픈 자기 몸을 돌봐야 하고 그런 어머니를 돌보면서 철없는 남편과 아이들도 챙겨야 한다. 2세도 없이 혼자가 된 아들 걱정에, 급하게 달려온 탓에 손이 없어진 농사일 걱정도 해야 한다. 드라마에서 본 대로 울고 있기는 하지만 글 소재로 쓸 생각에 못내 사람 구경이 재밌다. 덕분에 상복을 입을 새도 없었지만, 거금을 들여 양복을 차려 입은 유일한 가족은 조의금을 자기 주머니에 챙기느라 바쁘고 술판에 싸움질도 해야 한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만큼 침착하게 각자가 살아온 방식으로 윤정의 죽음을 부인한다. 윤정이 죽었다는 소식은 관객에게도 갑작스럽고 당황스럽다. 앞날의 행복한 모습을 그리는 부부의 웃음소리가 잠깐의 암전을 사이로 곡소리로 반전이 된 데다, 앞 장면에서 풀지 못한 궁금증에 새로운 궁금증까지 부가되었기 때문이다. 극은 인물이 다리에 깁스를 한 까닭을 설명해주지 않더니, 이번에는 다른 인물들을 동원하여 사망 원인을 여러 모로 추측하게 할 뿐 명확한 제시를 보류한다. 이 와중에 관객이 논리적이지만 임시적으로 내리는 결론은, 함께 여행을 갔던 남편이 기억을 못하니 인물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 길이 없어 보인다는 것. 마지막 순간에 옆을 지키지 않았던 남편의 무심함이 부른 우발적 사고든 보험금을 노린 남편의 계획적인 범행이든, 빈소의 인물들이 당연시 하는 부부의 불화를 관객은 아직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관극은 계속된다.
의문 둘. 삶은 트릭인가, 혹은 누가 숙련된 코미디언인가?
작품은 이렇게 궁금증을 조장하고 대단원까지 답을 미루면서 극의 시간을 연장한다. 이런 장치와 더불어 관객의 시선을 붙잡아 두는 것은 다름 아닌 재미있는 광경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원작이 가진 재미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장례식장의 인물들을 살아있는 수다쟁이로, 즉 볼거리, 들을 거리로 현현시키고 무대를 쓰레기장으로 시각화한 연출 솜씨가 좋았기에 가능했다. 원작에서 나아가, <마지막 여행>의 무대에는 ‘사이’가 느껴질 만한 침묵이 없다. 무대는 암전이 되는 동안에도 주로 소음으로 분류되는 큰 음량의 음향효과를 고집하고, 인물들이 대사를 주고받는 간격에는 어색하지 않은 길이의 기다림이라는 것도 없다. 원작이 다른 인물의 조리 없는 개입을 도구로 다른 차원의 조리 있는 대화, 즉 소통을 시도하는 몇 장면은 체호프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희곡 <마지막 여행>에는 인물들 사이에 오해는 있지만 불통은 없다는 점(그들은 끼어든 인물에게 주목하고 반응한다), 또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는 점, 오히려 맥락에서 격리된 대사를 주위의 놀란 반응으로 의도적으로 부각시킨다는 점이 체호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런데 류주연 연출의 <마지막 여행>은 자연스러운 맥락 속에 서로 다른 대화 그룹의 대사를 배열하면서 체호프와 유사한 방식에 접근했다는 인상을 준다. 나아가 이 작품은 체호프와 달리 침묵은 없으나, 오히려 이로써 몇 장면에서 속도감 있는 블랙코미디를 연출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인다. 다만 불편한 유머의 주인공인 윤정과 성진이 정작 코미디와 무관한 만큼, 즉 작품이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데 자신감이 부족한 만큼 관객도 웃음에 주저하게 되는 점이 아쉽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진지함을 쓴 웃음의 소재로 삼으면서도 특정 영역의 진지함에는 웃음의 면책권을 주고 있다. 아쉬움을 덧붙이자면 마지막까지 관객의 관심을 붙잡아둔 만큼의 보상이라고 하기에는 비로소 공개된 사망 관련 정보가 주는 정신적 충격 혹은 쾌감의 정도가 미미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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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실험의 현장: 스팸치즈후라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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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무
연출: 임세륜 극작: 김묘진 공연일시: 2011.08.08-09.02. 공연장소: 서커스 싸구려 관람석
최근 들어 소극장을 중심으로 공연 공간을 새롭게 인식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객석에 맥주나 커피를 제공한다거나 핸드폰을 끄지 않고 공연을 진행하는 등의 시도가 그것이다. 어둡고 조용한 공간에 관객들을 가둬놓고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공연을 펼치는 기존의 관극행위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관객들을 공연 내용과 이격시켜 관음증의 쾌감을 극대화하는 전통 공연과는 달리 새로운 공연 시도들은 관객들의 자연스러운 참여를 유도하고, 좀 더 자유로운 친관객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른바 非아리스토텔레스적 연극에서 관객들과의 동화, 관객들의 교화를 목적으로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지우는 시도는 낯익지만, 최근의 시도들은 관극 공간 자체를 이질적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런 시도들도 전혀 낯설고 새로운 실험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카바레’로 알려진 퍼포먼스 공간이 바로 이러한 시도들의 선배 격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좀 색다르게(!) 이해되고 있지만, 실제로 카바레는 유럽에서 19세기 말부터 하나의 대안문화공간으로 크나큰 역할을 수행했다. 관능적인 쇼비즈니스부터 치열한 정치격론장까지 카바레가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분화되고 진화되었기 때문에 단의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유럽의 카바레는 기존의 전통적 공연양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중과 소통하고,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는 문화적 발전소가 되었다. 특히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부흥한 카바레 문화는 그 파급력과 지배력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유입된 러시아 카바레는 대중의 정치적, 사회적, 예술적 에너지를 급속도로 흡수하면서 발달했다. 주로 조그만 레스토랑이나 카페에 개설된 카바레 공연들은 소규모 연극이나 퍼포먼스, 팬터마임, 인형극, 춤 등 연희장르 뿐만 아니라, 시낭송, 정치토론 등 문학적, 철학적, 정치적 영역까지 포괄하면서 발전했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카바레 숫자가 유럽 전역의 카바레 숫자보다 더 많았다는 사실은 이 러시아적 현상의 특수성을 잘 설명해준다(불행히도 1917년 혁명 후 대부분의 카바레들은 순식간에 일소된다). 질적인 측면에서도 아흐마토바, 만델시탐, 구밀료프, 마야콥스키, 발몬트, 블로크 등 당대 최고 예술가들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카바레는 유흥보다는 고급예술의 향유지, 새로운 담론들의 발생지, 혁신적 예술의 실험실이 되어주었다. 정부의 과도한 검열과 탄압이 예술 엘리트들을 카바레 지하 공간으로 내몰았다는 점, 기존 예술형식에 비해 카바레에서는 신속한 예술실험과 즉각적인 관객반응을 유도할 수 있었다는 점, 출판대란 때문에 인쇄용지가 부족해 카바레를 통한 작품 활동이 훨씬 더 유용했다는 점 등이 그 성황의 이유가 될 것이다.
젊은 연출가 임세륜, 정범철, 김정근이 시도하는 ‘임범근 프로젝트’는 많은 면에서 러시아식 카바레를 닮았다. ‘대안공간연극’의 개념이나, 저예산 실험극의 정신, ‘연극의 초심’을 강조하는 태도도 그렇다. 특히 프로젝트의 첫 공연을 장식한 스팸치즈후라이는 공간조차도 ‘밤주막’을 선택하여 마치 1910년대 러시아 지하카페를 방문한 듯한 감흥마저 느껴진다. 물론 러시아 카바레 같을 수도 없고, 같아서도 안 된다. 하지만 유흥과 예술의 접목이라는 카바레의 정신은 새로운 시대양식을 잉태하기에 모자람 없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 아직 부족함이 많고 채울 것이 더 많지만, 그만큼 가능성도 많다는 얘기다. 그 가능성 중 하나는 즉흥연기의 실험이 될 것이다. 관객들이 맥주잔을 기울이며 공연에 참여하는 ‘주점극’은 철저하게 배우중심의 공연이 되어야 하며, 배우와 관객간의 자연스러운 접촉과 대화가 즉흥적으로 시도되어야 한다. 배우는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고 시공간을 지배해야 하며, 그 속에서 공연의 플롯이 자연스럽게 발현되어야 한다. 카바레식 주점극의 두 번째 가능성은 마임과 퍼포먼스, 노래, 춤, 마술 등 다양한 형식의 볼거리가 지속적으로 제공될 수 있다는 점이다. 기존의 연극 방식의 거부와 다양한 볼거리의 혼합은 쇼와 연극 연행 사이의 폭넓은 진폭 속에서 새롭고 자유로운 공연 형식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카바레식 주점극은 일상과 연행 사이의 간격을 극도로 좁힐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형식면에서 주점극 공연은 같이 술자리를 한 동료의 행위나 주점에서 우연히 목격한 사건이 될 수 있고, 내용면에서는 관객들이 일상적으로 접하는 시사적이고 시의적인 주제가 들어올 수 있다. 주점극은 어떤 면에서는 시사적 정치평론이나 만평, 혹은 풍자의 무기가 될 수 있다. 그만큼 주점극의 내용은 관객 중심적으로, 관객 우선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관객이 궁금해 하고, 관객이 공감하고 싶어 하고, 관객이 듣고 말하고 싶은 것이 그 내용을 형성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카바레식 주점극을 비롯하여 대안공간연극의 가능성은 아직 확정되지도, 충분히 시도되지도 않은 상태다. ‘임범근 프로젝트’가 새로운 실험연극의 전초기지가 될지, 술도 파는 이색공연에 그칠지도 아직 미지수이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아방가르드의 심장이 되었던 러시아 카바레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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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예술에 삶이 있었네: 예술하는 습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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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무
극작: 앨런 베넷(Alan Bennett) 연출: 박정희 상연일시: 2011.06.22 ~ 2011.07.10 상연장소: 명동예술극장 관극일시: 2011.06.30. 20:00
두 거장의 만남 ▷ 위스턴 휴 오든(Wystan Hugh Auden, 1907-1972): 20세기 전반부 영국시단을 이끈 위대한 시인. 지성적이고 철학적이며 풍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하였다. 1939년 보수적인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 1973년 비엔나 호텔에서 객사했다. ▷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 1913-1976): 영국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 다채롭고 다양한 작곡 경향을 가졌으나 항상 절제와 중용을 고수했다. 테너가수 피터 피어스와 40년 넘게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다.
유력한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였던 오든과 20세기 영국 최고의 작곡가였던 브리튼. 이들이 (가상적으로) 만났다. 1972년, 오든이 죽기 1년 전의 일이고, 브리튼은 죽기까지 4년의 유예기간을 남겨둔 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한때 자신들의 예술혼을 함께 불사르던 동지였으며, 한때 서로에게 소중한 연인이었던 이 둘의 만남은 단순히 노년기의 추억어린 해후도 아니며, 묵은 감정을 씻어내는 화해의 랑데부도 아니었다. 작품 속 극작가 닐의 필치로 그려낸 이들의 만남은 인간과 인간의 상면을 넘어서는 거대한 우주적 접촉, 하나의 예술 세계가 다른 예술 세계와 강한 자기장을 형성하며 결합하는 웅장한 예술적 교섭의 순간이었다. 이 예사롭지 않은 만남의 현장에는 두 거장의 우정과 예술정신뿐만 아니라, 문학과 음악, 삶과 예술, 과거와 현재, 예술가와 대중, 창작적 자유와 규범적 절제 등 섞일 수 없는 것과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이 빛과 향기를 내며 때론 충돌로, 때론 어울림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비록 한국 관객들에겐 주석 없이 접근할 수 없는 이름들이지만, 이들의 삶과 예술의 궤적은 20세기 예술사에 등재된 수많은 미학적, 철학적 주제들에 발을 담그고 있다. 베넷의 상상력으로 엮어 올린 이 가상의 만남이 전기적 드라마나 인생극장의 우화가 아니라, ‘예술하는 습관’, 예술적 삶에 대한 드라마적 탐색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찰과 충돌의 향연 예술하는 습관, 더 정확히는 그 속에 극중극으로 삽입된 칼리반의 날이 제기하는 첫 번째 예술적 주제는 미학적 아름다움과 윤리적 진실간의 괴리, 즉 이른바 진선미로 일컬어지는 삶의 가치에 대한 문제이다. 참이고 선한 것이 아름다울 수 있는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진)과 실천이성비판(선) 이후에 제기한 ‘미적 대상에 대한 주관의 심미적 자율성’(판단력비판) 개념이 지향하는 것처럼 예술은 진리나 도덕의 문제와 별개인가? 아름다움이 그 자체로 세계 구원의 메시지가 될 수 있는가? 푸시킨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서 던진 질문은 어떤가. 신이 내린 천재지만 개차반인 악동 모차르트와 재능은 떨어지지만 성실한 노력파인 살리에리 중 우리는 누구를 모델로 삼을 것인가? 세종대왕이 500년 후 서정주를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는 평가와 그의 친일행위는 양립가능한 것인가? 예술하는 습관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도널드의 대사 “이 세상에 위대한 사람들, 그들의 결점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는 앞으로 전개될 오든의 형상 속에 바로 이 진선미의 논쟁이 기저텍스트로서 잠복해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입 안 가득 독기를 품고 칼을 세운 험구를 날려대고, 타인을 조롱하고 야유하는 데에 서슴없는 오든의 본모습이 철학적이며 관념적인 그의 시정신과 일으키는 마찰은 어떠하며, 개수대에 소변을 마구 지리며, 자신의 거처를 먼지와 쓰레기의 은신처로 바꿔버린 오든의 실제 삶이 고상하고 이지적인 그의 문학세계와 일으키는 충돌은 어떠한가. “작가의 사생활은 가족 그리고 친구들 말고는 다른 사람의 관심거리가 되면 안 되는 거야.”라고 항변하는 오든의 방어막은 예술은 삶의 반영이고, 예술작품은 창조자의 품성과 세계관에 대한 표상이라 주장하는 역사주의비평 앞에서는 힘을 잃고 만다. “실제 삶을 통해서 오든을 표현하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이 있나요?”(극작가 닐)라는 베넷의 반박을 상기한다면, 오든의 시적 진실은 구질구질한 진창에서 핀 연꽃으로 간주할 일이거나, 혹은 그의 시적 아름다움은 일반적 상식으로 규정할 수 있는 삶의 진실과는 거리가 먼 초월적 가치라고 치부해버릴 일이다. 그렇다고 베넷이 고상한 예술과 추악한 삶 간의 모순 양상 자체만을 보여줄 뿐이라고 때 이른 결론을 내리는 것도 섣부른 일이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도스토옙스키) 예술하는 습관에서 미추와 선악의 아이러니는 오든의 삶에 대한 자연주의적 접근(실제 삶의 ‘진실’한 반영)을 넘어서는 내재적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다. ‘실제 삶을 통해 오든을 표현하는 것’은 ‘오든을 통해 오든의 문학세계를 표현하는 것’과 동일한 술어논리이다. 즉, 예술하는 습관을 지탱하고 있는 진선미에 대한 논쟁은 오든이 자신의 문학행위를 통해 증명하고자 한 예술과 삶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너무나 예민해서, 세계 반대편에 고통까지도 느낄 수 있는 분이 왜 자기 이웃의 고통에 대해서는 귀를 틀어막고 있는 걸까요?”라는 카펜터의 질문은 일찍이 도스토옙스키가 인간본성을 탐구하기 위해 꺼내든 화두였다. 베넷은 도스토옙스키에 의지해 오든의 삶과 예술 간의 모순이 어떻게 그의 문학세계로 투영되고 있는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아름다움(美)의 우위는 진과 선이 가진 세계 구원의 권능을 참칭하는 것이 아니라, 진과 선이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종교적 예술론에 대한 옹호였다. “詩란 아무 일도 발생시키지 못한다”는 예술 무력론(無力論)에 빠져 점차 기독교 사상에 깊이 침윤되었던 오든의 궤적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오든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예술)은 진과 선의 영역을 넘어서는 종교적 초월의 세계에 거주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그의 종교적 성향이 강화되었다는 사실로 미뤄볼 때, 예술이 현실을 전혀 개선시키지 못한다는 비관적 판단이 오든을 사로잡았을 공산이 크다. 그래서 오든이 1944년 완성한 바다와 거울은 “예술이 놀이에 불과”하다는 오든의 예술관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술하는 습관은 삶이 예술에 반영되는 양상보다는 예술이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사유에 경사돼야함이 타당하다. 만약 아직도 오든의 추악한 모습이 그의 예술세계를 얼룩지게 한다거나(피츠의 ‘두려움’을 상기하라), 예술하는 습관이 삶과 예술을 난전 펼치듯 보여주는 전기적 드라마라고 믿고 싶은 분이 있다면 “진짜 예술가들은 좋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의 지고한 감정들은 작품으로 가고, 실제 삶에 남은 것은 찌꺼기뿐이다.”라는 오든의 경구를 참조하시길.
예술의 몰락 오든이 삶이 예술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예술이 삶으로 흘러나오는 그 역작용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은 바다와 거울의 이해에 도달하는 첩경을 제공한다. 바다와 거울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란 슈제트(=내용)가 남긴 것, 템페스트라는 예술형식(=연극)이 남긴 것에 대한 사유로 채워져 있다. 여기서 ‘남긴 것’이란 예술이 제공하는 변화와 영향에 대한 질문이다. 바다와 거울 대부분을 무대관계자들(2장)과 칼리반(3장)에게 헌정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템페스트에서 프로스페로는 자신의 마법으로 일군 섬을 벗어나 다시 밀라노로 복귀하는 도중에서 마법지팡이를 부러뜨려 바다에 던져버린다. 마법이 그의 예술이고, 자신이 쫓겨난 섬이 그가 상상력으로 일군 미학적 유토피아라면, 마법지팡이 투척은 예술의 종결을 의미한다. 프로스페로에게 밀라노 복귀는 예술을 중단하고 삶으로 진입하는 상징행위이다. 마술(이 구축한 섬)은 꿈이고 환상이며, 예술이고 현실도피다. 용서와 화해의 축제 뒤에는 유일하게 길들여지지 않은 야만인 칼리반이 남겨져 있다. 프로스페로의 마술(예술)로도 결코 교화되지 못한 인물 칼리반. ‘칼리반이 관객에게’란 부제를 지닌 3부의 발언권이 칼리반에게 있는 것은 ‘남겨진 삶’에 대한 작가의 입장을 반영한다. 아름답고 근사한 프로스페로의 미학적 유토피아에서 추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남겨진 칼리반은 결함과 모순투성이인 인생 자체를 의미한다. 칼리반의 존재는 예술이 삶을 교정할 수 없다는 논리에 대한 증거이다. 바다와 거울에서 오든이 은밀하게 노정하는 예술의 궁극적 목표는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를 깨닫는 것, 즉, 칼리반의 존재를 승인하는 것이다. 프로스페로의 조화로운 마술세계가 화려할수록, 그의 예술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그것은 삶과 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거울’은 바로 이 미학적 유토피아 속에서 삶의 추악상을 보는 도구이다. 결국 칼리반은 프로스페로 예술의 추악상을 증명하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삶과 멀어져야 하는가, 아니면 삶과 밀착하기 위해 덩달아 추해져야 하는가. 예술은 진퇴양란에 빠진다. 예술가가 이뤄낸 결과물이 삶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그 예술이 망가질 수밖에 없다. 아름다움은 추할 때 완성되는 것, 이것이 예술이 가진 자멸의 공리이다. 예술은 침묵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침묵이 오히려 진실에 가까운 것이다. 오든의 바다와 거울은 예술 덕분에 예술가의 삶은 화려해졌지만, 과연 그 예술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질문하고 있다. 예술하는 습관에서 오든의 행위는 일종의 퍼포먼스이다. 자신의 예술을 몰락시키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추한 삶의 퍼포먼스! 오든에게 ‘예술하는 습관’은 삶의 추악함으로 예술의 몰락을 선언하는 방식인 것이다.
텍스트의 천국, 저자의 지옥 예술의 종말은 주관의 심미적 자율성이 일종의 방종이고 망상임을 내포한다. 삶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예술은 정신의 방황이고, 목적지향성을 상실한 텍스트는 기호의 횡포이다. “예술의 신비는 사람들에게 경험을 줄 수는 있지만, 그 경험을 이용하도록 지시할 수는 없다.” 오든의 이 도저한 절망의 제스처는 복잡하게 뒤엉킨 실타래처럼 예술하는 습관을 옭아매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명작 태풍과 그에 영감을 받은 오든의 난해한 연작시 바다와 거울, 이를 토대로 남은 자들에게 발언권을 주고자 집필한 극작가 닐의 칼리반의 날, 그리고 이 공연의 연습과정을 내용으로 삼는 예술하는 습관. 이 물고 물리는 지난한 꼬리찾기 놀이는 수수께끼 같은 지적 유희도 아니며, 저자의 현학을 과시하기 위한 요설도 아니다. 예술하는 습관은 현실과 삶의 관계를 끊임없이 유추하게 만든다. 예술을 참조하는 삶, 삶을 흉내 내는 예술, 삶과 예술의 그 끈질긴 불원관계, 승패 없는 영원한 길항관계, 뫼비우스띠처럼 겉과 속이 드러나지 않는 순환관계를 어지럽게 추적하게 만든다. 예술하는 습관은 한마디로 오든의 문학세계에 대한 주석이다. 오든에게 가기 위해서, 오든의 문학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심원한 텍스트들의 계곡과도 같다. 그렇다면 예술하는 습관은 과연 누구의 텍스트인가? 엘런 베넷이라고 쉽게 단정하지 말자. 예술하는 습관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헷갈림의 습관을 먼저 가져야 한다. 그것이 이 작품의 미덕이다. 마치 ‘저자의 죽음’(바르트)을 대면하는 것과 같다. 끊임없이 저자의 저작권을 쫓다보면 저자의 흔적은 없어지고 오직 텍스트라는 공허만 남게 된다. 저자란 기호와 문화가 만나는 일종의 공간이다. 예술하는 습관의 (저자라고 추정되는) 베넷은 험프리 카펜터의 전기를 “상당히 많이 활용했”고, 너무 많이 의존한 나머지 결국 카펜터 본인이 작품 안으로 진입하는 것을 제어하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카펜터를 분한 도널드가 극작가 닐의 원작에 자신의 공연을 추가하고, 연출가의 무자비한 각색에 저항하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카펜터의 진입을 베넷조차 막아내지 못하지 않았던가. 끝이 없는 텍스트의 고리는 무한 반복하는 텍스트의 쳇바퀴를 형성한다. 텍스트가 참조(reference)하는 어떤 외적 실체란 존재하지 않고, 끊임없이 텍스트가 텍스트를 물고 이어지는 텍스트(만)의 유토피아가 완성되는 것이다. 결국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데리다)게 된다. 이것은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고 어떻게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하는 프로스페로(바다와 거울)의 한탄과 맞닿는다. 오든 식으로 말하면, 고통 없이 어떻게 고통을 이야기할 것이며, 예술적이지 않고서 어떻게 예술에 파탄을 선고할 수 있냐는 것이다. There is nothing outside of the art!
말하는 형식, 보여주는 내용 아이러니와 역설을 통해 진선미의 고전적 카테고리를 파괴하는 예술하는 습관이 형식과 내용의 전통적 규정, 즉 내용이 말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형식이라는 명제를 뒤집는 것은 이상할 것 없다. 예술하는 습관이 보여주는 복잡한 마스크놀이 형식은 이미 그 속에 내용을 포함시켜놓고 있다. 메타드라마의 자기반영성이 그러하듯 형식이 스스로 말을 하는 형국. 이것은 또한 오든과 브리튼의 입장도 반영하고 있다. 브리튼은 관객을 배려하고 주제의 제약을 의식하는 반면, 오든은 창작의 자유와 예술가의 상상력을 절대화한다. 오든이 내용을 본다면, 브리튼은 형식을 본다. 문학이 내용에 가깝고, 음악이 형식에 가까운 것과 같은 이치다. 내용과 형식의 문제는 예술가와 대중의 문제를 거쳐 예술형식의 본령인 음악과 문학의 변증법적 결합으로 다가가고 있다. 니체가 비극의 본질을 ‘음악의 시각적 상징화’라 한 것, 상징주의가 문자언어 너머에 있는 초월적 본질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음악적 감성에 의탁한 사실도 오든과 브리튼의 만남 이면에 담긴 기저텍스트의 목록이다. 물론 베넷이 브리튼의 형식주의를 소아성애(pedophile)를 은닉하기 위한 회피 수단으로 설정한다든가, 음악의 우월성 주장을 오든에 대한 열등감에서 발원한 콤플렉스로 묘사하는 측면도 있지만, 이들의 대립과 대결이 바그너의 음악극(음악+문학)이 추구한 총체예술(Gesamtkunstwerk) 개념에 기여하는 담론임에는 틀림없다. 칼리반의 날이 트리스탄과 이졸데(바그너)에 나오는 사랑의 이중창으로 개시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베넷이 작품 속에 등장시킨 음표와 문자의 앙증맞은 놀이도 오든과 브리튼의 만남과 이 만남이 은유하는 음성기호(음악)와 문자기호(문학)의 변증법적 결합(혹은 대결)을 염두에 두고 있다. 베넷은 이 장면이 지닌 동화적이고 애매모호한 양가성에 대한 지적에 “뭔가 비현실적인 걸 몰래 반입해 보려는 시도”라며 “가벼운 농담”일 뿐이라 둘러대고 있지만, 이것이 내용과 형식에 대한, 음악과 문학에 대한, 청각기호와 시각기호에 대한 고전적 논쟁의 연장이라는 혐의를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이 둘의 만남은 한 시대를 풍미한 두 거장의 만남일 뿐만 아니라, 세계와 세계의 만남, 총체예술을 받드는 두 기둥축의 만남이라는 예술적 해석에 도달하게 된다.
체호프의 그림자 다양한 예술장르와 다채로운 예술담론들의 집적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 예술하는 습관이 자신의 선배 체호프의 잔향을 깊이 간직하고 있는 점 또한 눈여겨볼만하다. 문자와 문자 사이에 놓인 음표처럼 짙은 공명을 울리는 휴지라든가, 포괄극과 극중극의 교체로 인해 발생하는 대화의 단절과 소통의 실패, 인물들 모두가 동등하게 주인공의 권리를 주장하는 구도, 보이지 않는 주인공/에피소드의 존재 등이 그것이다. 체호프의 극에서 트레플레프의 자살(갈매기), 투젠바흐의 결투(세 자매) 같이 중요한 에피소드나, 이반 뉴힌의 아내(담배의 해독에 대하여), 디셴카(벚꽃동산) 등은 무대에 등장하지 않지만 극의 분위기와 정조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특히 세 자매의 ‘모스크바’ 같은 경우는 수시로 극적 긴장감을 리부팅하는 무형의 존재로서, 부재의 대상으로 인해 유발된 잔혹한 시간을 견디고 버티게 만드는 텅 빈 기호로 작동한다. 이것이 고도를 기다리며나 대머리 여가수의 긴장조성 원리로 변전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술하는 습관에서 이에 호응하는 설정은 연출의 부재인데, 마치 섬을 떠난 프로스페로의 경우처럼 미학적 절대의지가 부재한 상황 속에서 배우들은 각자의 목소리로 삶의 권리를 요구한다. 섬에 홀로 남겨진 칼리반과 에어리얼이 프로스페로의 마술적(예술적) 질서와 다른 방식으로 삶을 유지하듯이, 연출이 부재하자 배우들은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으로, 예술이 아닌 삶의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한다. 문제는 연출의 부재로 야기된 미학적 ‘주관’의 상실이 삶과 예술의 아이러니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멋진 도상이 된다는 점이다. 예술하는 습관이 벌어지는 시공간은 관객이 보아서는 안 되는 연습장면이다. 배우들은 대사도 정확히 암기하지 못하고, 미장센도 제대로 결정되지 못한 상태이다. 이는 삶(배우)이 예술(배역)로 넘어가기 전의 단계, 혹은 예술이 삶의 때를 벗겨내지 못한 상태, 삶과 예술이 뒤엉켜 치열하게 주도권을 다투는 경합의 현장이다. 오든이 암시한 예술의 교착상태에 대한 은유로서 이보다 더 적절한 선택이 있을까. 예술이 아름다워질수록 삶은 추해진다는 역설적 시소운동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예술하는 습관이 메타드라마로 직조된 것은 필연에 가깝다.
스튜어트, 구멍 난 인물 예술하는 습관은 참으로 까다로운 텍스트이다. 잘해도 본전, 퉁치면 밑지는 작업이다. 달고 실한 알곡이 숨어 있지만, 그 깍지를 벗겨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듣기 좋고 보기 좋은 공연을 만들어낸 박정희 연출에게 일단은 박수! 입에 착착 감기는 번역을 뽑아낸 고영범의 수완에도, 세련되고 예쁜 무대를 쌓아올린 여신동의 재치에도 박수! 단, 박정희 연출은 내용과 형식, 문자(희곡)와 소리(공연), 자유와 격률, 선과 악, 예술과 삶 등 이 텍스트가 응집시키고 있는 양가적 대립소를 정작 자신의 창작물에 적용시키는 것에는 소홀한 게 아닐까? 희곡 속에는 두 세계가, 두 개념이, 두 가치가 충돌하고 불을 뿜는데, 정작 무대는 우아하고 다소곳하다. 오든식의 예술적 교착도, 베넷풍의 수수께끼 같은 미궁도 사그라졌다. 행여 박정희 연출은 관객을 의식하지 않는 오든의 자유분방한 타락 대신 브리튼의 ‘타락한 순수성’을 더 선호한 건 아닐까. 1막 후반부에서 오든과 브리튼이 논쟁하는 장면에서 보여준 그 옴팡진 긴장감과 팽팽한 템포에 무대 전체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게 맞을 성 싶다. 한 가지 더. 예술하는 습관의 무대화 작업에서 가장 애매한 계륵 같은 존재는 아마도 ‘스튜어트’일 것이다. 오든의 바다와 거울에서 주인공으로 등극한 칼리반을 다시 오든 앞으로 호출하여 가공한 인물 스튜어트는 일면 칼리반의 날의 숨겨둔 주인공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술사(예술가) 프로스페로 뒤에 남겨진 인물인 칼리반, 오든 같은 위대한 예술가 뒤에 남겨진 인물 스튜어트는 그 처지와 위상에 있어서 유사한 것은 사실이며, 일면 오든이 바다와 거울에서 시도한 예술의 종말, 예술의 무력함에 대한 해명을 위해 적절히 성격화된 인물인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오든이 템페스트의 대단원에 대해 “너무 말쑥하게 마무리 지었다”라고 언급한 것이 극작가 닐이 해석한 것처럼 뒤에 남겨진 자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을까? 칼리반의 날에서처럼 그들에게 발언권을 주고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진정한 오든식 정의였을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극작가 닐의 작품 칼리반의 날이 훌륭한 희곡인가에 대해서 판단해야 한다. 예술하는 습관에서 칼리반의 날 연습이 계속 중단되고 흐름이 끊어지는 유일한 이유는 극작에 대한 문제 때문이다. 연출가와 배우들의 반란 앞에서 극작가는 주석가 이상의 역할을 떠맡지 못한다. 자신의 작품을 수호하지도, 배우들을 설득하지도 못하는 극작가는 그저 예술하는 습관에 등장하는 ‘투덜이’ 중 하나일 뿐이다. 연출의 작위적 첨삭과 배우들의 불평불만은 그저 연극 연습에서 흔히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을 보여주고자 하는 ‘장치’인가, 아니면 희곡 칼리반의 날의 불완전성과 미비함을 반영하는 ‘평론가’ 베넷의 날카로운 조롱인가? 후자일 공산이 크다. 배우들에게 적응하기 힘들다는 닐의 불평에서 그가 문청 딱지를 갓 땐 초년생 작가임을 알 수 있다. 연출이 대본에 대해 전횡을 부려도 될 만큼 만만한 상대였던 셈이다. 닐이 마지막 장면에서 케이에게 묻는다. “내가 맞죠, 그렇죠? 누군가는 항상 뒤에 남게 되잖아요. 어떤 식으로든.” 닐, 자기 확신도 부족하고 줏대도 없다. 물론 한 인물의 캐릭터가 명확하지 않다고 해서 칼리반의 날을 졸작으로 내몰 수는 없다. 베넷은 콜보이 스튜어트가 자신의 작품에서 줄곧 등장하는 인물 유형, “자기가 사람들 바깥으로 밀려나 있다고 느끼는” 부류 중 하나라고 언급하고 있다. 베넷 스스로도 “이 인물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고 딴청을 부린다. 하지만 분명히 하자. 스튜어트를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부분, “이 작품에서 심장”과도 같은 부분, 바다와 거울에 대한 해석을 쏙 빼버린 것도 결국 베넷이다. “스튜어트가 자아를 찾은 후에 관객들과 얘기 하는 부분”을 위해 필수적인 이 시 해석을 등장하지도 않는 연출가의 짓이라며 빼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관객들에게 칼리반의 날은 ‘구멍 난 텍스트’(위베르스펠트) 정도가 아니라, 앙꼬 빠진 찐빵 같은 텍스트가 아닌가. 원작이야 어떻든 관객들이 본 칼리반의 날은 졸작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극작가 닐의 책임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칼리반의 날을 다 읽었던 연출가가 보기엔 그건 불필요한 부분이었고, 관객들은 이 작품의 ‘심장’을 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칼리반의 날에 후한 평점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찌됐든 스튜어트의 형상이 베넷에 의해 의도적으로 ‘구멍 난’ 인물인 이상, 관객들이 목격한 칼리반의 날은 그리 좋은 작품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스튜어트를 통한 훈화적 메시지가 칼리반의 날의 함정이고, 바다와 거울에 대한 오독(오든이 칼리반이라 생각한 스튜어트가 스스로 칼리반임을 거부하는 것을 보라)이라면, 새삼 다시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이 바로 오든의 예술 무력론이다. 칼리반을 교화시키지 못해 슬퍼하는 프로스페로처럼 극작가 닐에게 오독을 허용한 것도, 베넷에게 그 오독의 현장을 극화하게 만든 동인도 결국 오든의 몫이 아닐까. 그래서 베넷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칼리반의 날의 (연습)실패와 그로 인해 선연히 드러나는 삶과 예술의 불화를 통해 예술의 효용성에 대한 오든의 무기력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었을까.
無用之用 김현의 말을 약간 비튼다면, “우리는 연극을 함으로써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비록 “연극은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연극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연극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평생을 시와 함께 한 오든의 예술 무력론은 어쩌면 예술을 보다 높은 초월경으로 승화시키고자 한 그의 수사학적 전략일지도 모른다. 평생 그가 쓴 수많은 작품들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란 믿음에 대한 증거로서 부족함이 없다. ‘쓸모없음의 쓸모’, 無用之用(노자)의 전략이 그러한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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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리 소방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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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지
관람일시 : 2011. 8. 31. (수) 8시 장소 : 노을소극장
몇 년 전인가. 한 TV 프로에서 소방관들을 주인공으로 한 프로그램을 내보낸 적이 있었다. 불이 났을 때 우리는 전화 한 통으로 그들을 쉽게 부른다. 그러나 신속히 화재 현장에 도착하기 위해선 밥 한 번 느긋이 먹지 못하고 항상 긴장해야만 하는 소방관들의 애환과 그럼에도 보람을 느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 프로를 보며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말이 있다. 프로그램 진행자가 한 젊은 소방관에게 “나중에 아들을 낳으면 소방관을 시키실 건가요?”라 묻자 그가 대답했다. “딸을 낳겠습니다.” PADAF의 대미를 장식한 <오동리 소방서>(이연기 작, 석성예 연출)는 이렇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타인의 생명을 구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동료애를 그렸다. 충청도의 한적한 마을에 오래된 소방서인 ‘오동리 소방서’가 있다. 선친에 이어 이 작은 소방서에서 일하는 소방관 맹성기, 박인서. 이 둘은 소방서의 존폐 문제로 심한 갈등을 겪는다. 오동리 소방서를 없애고 새로운 소방서를 짓는다는 계획 때문이다. 낡은 시설 때문에 아버지를 잃었다고 생각하는 박인서는 오동리 소방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고, 맹성기는 소방서를 지키기 위해 그와 대립한다. 영상과 사실주의 연극이 결합한 이 작품은 탄탄한 구성이 돋보인다. 군더더기 없는 내용과 맛깔진 대사로 1시간 남짓한 공연을 순식간에 지나가도록 만든다. 무대 양쪽에 설치한 스크린에선 소방관의 우정을 다룬 영화와 맹성기, 박인서 두 인물의 추억을 비춘다. 무대 위에서 나타내기 힘든 장면들은 영상을 통해 관객에게 더욱 아련하게 다가온다. 이 작품은 연극의 모든 구성요소가 훌륭히 어울린 수작이다. 완성도 있는 대본에서부터 배우들의 개성 있는 연기, 소품, 음향, 세련된 영상까지 한 마을이 통째로 내게 다가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위에서 언급한 소방관은 자식이 나와 같은 고생을 안 하길 바랐을 것이다. 그래서 딸을 낳겠다고 에둘러 대답한 것일 테다. 여자라고 소방관이 되지 말란 법은 없지만 그만큼 힘든 직업인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을 걸고서 타인에게 향하는 사람들의 그 귀한 마음은, 결국 오동리 소방서가 앞으로도 마을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처럼 대대손손 이어질 거라 믿는다. 맹성기, 박인서의 자식들도 아버지들을 이어 마을의 불을 끄게 되지 않을까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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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가치를 지키는 방법, <오동리 소방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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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영
작가 : 이연기 연출 : 석성예 극단 : Gowithus PAC 공연기간 : 2011.08.30~09.04 공연장소 : 대학로 노을소극장 관극일시 : 2011.09.03(토) 저녁 7시
<오동리 소방서>는 오동리 소방관들과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따뜻하고 유쾌한 이야기이다. 제1회 PADAF의 마지막 참가작인 <오동리 소방서>는 앞서 공연된 작품들과 비교해 가장 대중적 취향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사건의 빠른 전개와 선악의 구도, 코믹스런 대사와 행동, 그리고 행복한 결말 등 대중 취향의 요소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작품의 서사가 분명하고 난해하지 않기 때문에 관객의 극 접근이 용이하다. 무대 앞 왼쪽에 작은 스크린이 있다. 이 스크린에 배경을 알리는 ‘오동리 소방서’라는 글자가 뜬다. 잦은 무대 변화에 이 스크린은 유용하게 활용된다. 인물들이 무대에 오른다. 배우들은 관객들에게 말을 건다. 관객석의 조명이 환해진다. 무대와 관객석이 하나가 된다. 이런 조명의 연출로 인해 작품이 관객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요구할 것 같지만 특별히 관객의 참여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오동리 마을의 소방서는 정치판의 장난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놓인다. 옥천 군수는 군의 소방대장에게 오동리 소방서 제거에 협조할 것을 제안한다. 이상적 소방관의 이미지를 강하게 뿜어내는 박인서 소방대장은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결국 군수의 검은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상적인 모습에 배반하는 행동이지만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박 대장의 이 배반이 다시 긍정적으로 바뀔 것을 예상할 것이다. 소방서가 사라질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오동리 마을의 주민들은 소방서를 지키기 위해 하나가 된다. 오동리 소방서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서울에서 감사원이 오동리 마을을 찾아온다. 마을 주민들은 감사원에게 연기를 통해 오동리 소방서가 마을에 ‘꼭’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마을에 화재가 발생한다. 마을의 모든 주민들의 연기가 필요해지는 순간이다. 주민들 모두는 오동리 소방서에 기댄다. 소방관들은 신속하게 빠르게 화재를 진압한다. 화재가 일어난 곳은 개집이다. 코믹스런 상황과 재미난 반전에 관객들은 웃음으로 응한다. 주민들은 비록 거짓된 상황을 연기하지만, 이 연기 과정에서 인간적인 따뜻함을 보여준다. 감사원은 오동리 소방서가 마을에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마을 사람들의 연기가 통했다기보다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통한 것이다. 감사원의 결과에 옥천 군수와 박인수 대장은 승복하지 않는다. 박인수 대장은 모의 훈련으로 오동리 소방서의 존폐 여부에 대해 재평가하자고 제안한다. 모의 훈련 과정에서 오동리 소방관은 무능력함을 드러낸다. 상황은 오동리 소방관들에게 최악으로 돌아간다. 오동리 소방서는 철거 위기를 넘어 철거 확정이 된 듯하다. 산불이 났다. 거짓 화재가 아닌 이번엔 진짜 산불이다. 오동리 소방관은 산불 장소로 출동한다. 산불 진압 과정에서 오동리 소방서의 대장 맹성기는 불길에 휩싸인다. 이때 박인수 대장에게 가졌던 기대가 실현된다. 박인수 대장은 죽음의 위험 앞에 맹성기를 구하기 위해 화마 속으로 뛰어든다.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오동리 소방서가 마을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작품은 오동리 소방서의 역사와 유서 깊음을 이유로 철거를 저지한다. 하지만 이 역사와 유서의 실체가 확실하지 않다. 단순히 오래되었다 의미로 역사, 그리고 유서를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상의 의미화된 실체를 작품은 말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품은 아버지의 상처 입은 역사를 회상한다. 박인수와 맹성기는 친구사이이다. 이 둘의 아버지 또한 전직 소방관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두 아버지는 정치판의 희생양이 되어 죽는다. 오동리 마을 사람들에게 이 두 아버지는 이상적 소방관이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박인수는 권력을 선택하지만, 맹성기는 아버지의 역사를 잇는다. 의로운 아버지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오동리 소방서는 지켜져야 한다, 라고 평가내리기엔 이 역사의 실체와 무게감이 약하다. 이러한 역사 외에 의미를 갖는 또 다른 역사는 없는가. 더 이상 작품에는 또 다른 역사가 나오지 않는다. 아니, 없는 듯하다. 이해의 폭을 넓혀 아버지의 상처 입은 역사만으로 역사와 유서 깊음을 논하자. 그래도 오동리 소방서의 존립에 대한 문제는 남아 있다. 모의 훈련 과정에서 오동리 소방관은 많은 약점을 노출한다. 소방관의 일차적 임무는 신속한 화재 진압이다. 이어 또 하나의 임무는 화재 현장에서 위험에 빠진 생명을 안전하게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의 훈련에서 보여준 오동리 소방관의 모습은 불안하기만 하다. 허둥지둥하는, 실수투성이의 오동리 소방관에게 소방관의 임무는 먼 나라 이야기이다.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했을 때, 오동리 소방관은 소방관으로서 자격 미달이다. 그래도, 자격 미달이라고 해도, ‘착한’ 오동리 마을 주민들은 오동리 소방서가 마을에 있길 간절히 원한다. 작품은 오동리 소방관을 약자로 끊임없이 분류하여, 동정의 시선을 덧씌운다. 자격 미달은 슬쩍 가로에 묶어두고, 약자의 의미만이 부각된다. 여전히 왜 오동리 소방서가 철거되지 말아야 하며, 오동리 소방서의 무엇이 마을 주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오동리 소방서>는 구체적으로 답하지 않는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인물의 변화가 급작스럽다는 것이다. 특히 박인수의 변화가 그러하다. 앞서 말했듯 극 초반부 박인수는 악의 편에 서있지만, 긍정적인 인간으로 변할 것이라는 믿음(혹은 예상)을 갖게 하는 인물이다. 이 믿음은 완벽히 충족된다. 하지만 변화의 과정은 덜 완벽하다. 약간의 극적인 행동-아버지의 과거와 맹성기 구출-을 제외하고는 박인수의 인물 변화에 대해서는 다소 설득되기가 힘들다. 그나마 빠른 사건의 전개가 이 불안한 인물 변화의 논리를 덮어준다. <오동리 소방서>는 의용소방서라는 자격으로 오동리 마을에 남을 수 있게 된다. 이는 오동리 마을 주민의 적극적인 노력과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웃이란 단어가 낯설게 사용되는 오늘날, 오동리 마을 주민들의 모습은 반성의 시간을 제공해 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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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진화 Evolution of Desi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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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지
관람일시 : 2011. 8. 10. (수) 8시 장소 : 노을소극장
우리는 ‘진화’라는 단어를 ‘발전’과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일례로, 인간은 동물과 다름없었던 유인원에서 ‘진화’해 두 발로 걷고 문명을 일으켰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과연 인간에게 ‘진화’가 가능할까? 더군다나 욕망이 ‘진화’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옛날 우리가 미개인이라 부르는 사람들로부터 퇴보하거나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현재의 문명화한 사회에서 비극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PADAF의 네 번째 작품 <욕망의 진화 Evolution of Desire>(강경호 연출)은 ‘진화’가 환상이라는 점을 곱씹게 만든다. PADAF에서 유일하게 연극과 무용이 결합한 이 작품은, 배우들이 춤을 추지만 대사는 거의 하지 않는다. 욕망은 언어 이전의 욕구이다. 욕망을 이성적인 말로 표현한다는 자체가 ‘둥근 사각형’과 같을 것이다. 몸짓 하나 하나가 내용 파악이 쉽도록 직접적이고 명확했다. 거의 무용극에 가까운 작품이지만 연극성을 느끼게 했던 부분이다. PADAF 작품 중 관객 반응이 가장 뜨거웠다. 유쾌한 장면에선 관객들은 박장대소 했고, 어두운 장면에선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무대에는 발가벗은 마론 인형이 박제된 미소를 띠며 하이힐 속에 놓여있다. 천장에도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처음에는 여자 네 명이 등장해 구두를 향한 욕구를 말한다. 그 구두는 때론 남자를, 때론 돈과 허영심을 은유하며 여자들의 혀를 옮겨 다닌다. 그러다 흔히 여성의 욕망으로 상징되는 구두, 성적 매력이 풍기는 몸을 춤으로 표현한다. 다음 장면에서는 남자 다섯이 등장한다. 이들은 여성에 대한 성적인 욕구를 드러낸다. 또한, 작은 의자를 서로 가지려고 싸우는 데서 권력욕을 볼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변을 누며 옆 사람의 성기를 힐끗힐끗 보는 장면은, 남성들의 생존 경쟁이 결코 문명과 정비례하게 진화하지는 않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세 번째 장면에선 두 여인이 등장해 무대 위 마론인형처럼 기계적인 몸짓만을 반복했다. 마치 고장 난 인형마냥 두 팔을 무기력하게 흔들고 몸을 움직였다. 텅 빈 눈빛으로, 그렇지만 온 몸이 지칠 정도로 격렬하게 움직이는 그들이 과연 욕망을 가진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남녀 배우 모두 나체로 뒤엉켜 있는 모습을 실루엣으로만 보여준다. 욕망이 ‘진화’한다는 제목과는 달리 오히려 인간은 욕망에 의해 더욱 말을 하지 못하고 더욱 단세포적인 움직임을 계속하게 될 뿐이다. ‘인간이란 자연과는 사뭇 멀리 떨어져 있는 듯 하다’란 연출의도와는 달리, 인간은 아무리 문명이 발전해도 원초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자연 그 자체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사회는 욕망에 의해, 또 욕망 때문에 무너지고 일으켜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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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에 대한 경고, <욕망의 진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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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영
연출 : 강경호 안무 : 유민경, 안진주 극단 : ART Factory 'KKun', 툇마루 무용단 공연일시 : 2011.08.09~08.14 공연장소 : 대학로 노을소극장 관극일시 : 2011.08.14(일) 오후 4시
<욕망의 진화>는 인간의 욕망을 신체 언어로 표현한 극이다. 이 작품은 PADAF의 네 번째 참가작으로 앞선 작품들과는 표현 방식에 있어 차이점을 갖는다. 선행된 작품들이 연극적 요소가 강하거나(<서울 땐스홀을 許하라>), 연극 공연 후에 무용을 공연하는 방식으로(혹은 그 반대) 작품의 주제를 표현했다면(<공생관계>, <Why? Here and Now!>) 이 작품은 무용의 요소를 무대 전면에 드러낸다. 이 축제가 연극과 무용의 만남의 장이라는 점에서 <욕망의 진화>와 같은 무용극(탄츠테아터)은 기다렸던 작품이면서도 걱정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걱정하는 이유는 관객과의 소통의 문제 때문일 것이다. 연극과 달리 무용은 신체의 언어를 사용해 관객과 소통을 시도한다. 연극이 주로 등장인물들의 대화, 즉 말을 통해 극의 서사를 진행시킨다면 무용은 인간의 몸을 이용해 극의 흐름을 이끌어 간다. 관객에게 신체의 언어는 말의 언어 비해 추상적이고 상징적 언어로 다가온다. 무용에서 사용하는 신체 언어의 문법체계를 모르거나 이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무용극을 관극한다는 것은 마치 이해하기 힘든 추상화를 보는 듯한 경험과 같을 것이다. <욕망의 진화>는 인간의 욕망을 표현함에 있어 무용극이 갖는 이러한 어려움을 어떠한 방법으로 해결하는가. 이 극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여성의 욕망과 남성의 욕망, 마지막으로 인간의 욕망과 이 욕망이 부른 파국의 무대 순으로 진행된다. 극의 처음은 여성의 욕망으로 시작한다. 남성의 욕망과 인간의 욕망의 무대가 등장인물들 간의 대화를 철저히 배제시켰다면, 여성의 욕망을 표현하는 무대에서는 대화뿐 아니라 노래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 작품은 여성의 욕망을 구두와 연결한다. 아름다운 것을, 예쁜 물질을 가지려는 욕망은 여성들을 춤추게 한다. 이들 여성은 자신에게 꼭 맞는, 자신이 원하는 구두를 소유한다. 이들이 신은 구두는 ‘높은’ 굽의 하이힐이다. 네 명의 여인들은 치마를 입고 머리에 꽃을 꼽는다. 모든 ‘치장’이 끝난 그녀들은 자신의 모습과 어울리는 곳으로 이동한다. 행복한 모습을 하는 네 명의 여성들은 경쾌한 노래(약간 트로트풍인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 이때 이들 여성의 여성성은 최대한 부각된다. 노래는 끝이 나고 여성들은 무대에서 사라진다. 영화 <대부>의 OST가 흘러나온다. 다섯 남성이 등장한다. 무대에 긴장감이 흐른다. 여성의 무대와 비교해 확실히 분위기 무겁고 어둡다. 극은 남성의 욕망을 여성의 욕망에 비해 좀 더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표현한다. 다섯 명의 남성들은 서로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않는다. 이들은 몸을 통해 대화를 시도하며, 방식 또한 거칠다. 입을 통해 나오는 소리는 경쟁이 빚어낸 거친 숨소리뿐이다. 이들 남성에게 있어 성기의 크기는 경쟁력이다. 소변 보는 소리가 짐승 소리에 가까운 남자일수록 영웅 대접을 받는다. 여자들이 치장과 소유의 욕망을 보였다면 남성의 욕망은 경쟁과 권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의자는 권력을 표현할 때에 좋은 오브제가 된다. 다섯 남성들은 의자를 차지하기 위해 몸싸움을 벌인다. 권력을 향한 이들의 욕망은 뜨겁고 거칠고 폭력적이다. 권력의 장으로 끝내 진입하지 못한, 남성 네 명과의 싸움에 진 한 명의 남성은 철저하게 사회로부터 버림 받는다. 남성들의 욕망은 희생자를 낳는다. 무대 위의 두 여성은 소음에 가까운 기계소리에 맞춰 반복된 움직임을 한다. 빠른 몸동작, 이 움직임에는 끝이 없어 보인다. 이 두 여성의 움직임은 끊임없이 반복될 뿐 그 어떤 멈춤과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다. 앞으로의 질주만 있는 움직임, 멈추어 되돌아보기를 허락하지 않는 이 처절한 몸부림, 이 눈 먼 욕망의 끝에서 천장에 매달린 사람 모습의 인형들은 무대 바닥으로 추락한다. <욕망의 진화>는 이처럼 인간의 욕망을 남녀로 나눠 해석한다. 인간을 남과 여로 나누는 방식이 다소 극 해석의 고민에 있어 평이하다는 인상을 가질 수 있으나 무용극이 갖는 어려움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구분 방법은 관객과 극이 빠르고 쉽게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탁월했다고 본다. 또한 이 작품은 처음부터 무용적 요소를 강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점진적으로 말의 사용을 줄이고 신체의 언어를 부각시켜 일반 관객이 익숙하지 않은 무용극의 문법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런 배려와 자상함이 있었기 때문에 관객은 극을 보고 웃고 즐길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주제를 풀어내는 방식뿐 아니라 웃음의 코드를 적극 활용해 관객의 극 접근을 용이하게 한다. 극 초반부 여성들의 유쾌한 노래와 춤은 극의 분위기를 말랑하게 하는 역할을 했으며, 여기에 코믹한 춤동작이 더해지면서 희극적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다소 이들의 움직임과 춤동작이 과장되게 표현되긴 하지만 이런 과장들이 관객의 웃음으로, 이 웃음이 적극적인 관극 참여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코믹한 과장된 몸동작은 나름의 긍정성을 획득한다. 이런 웃음의 방법 외에 이 작품은 성적인 코드를 극 중간 중간에 삽입해 관객의 웃음을 유도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남성들이 모여 소변을 보는 장면이다. 다섯의 남성들이 각자의 성기 크기를 비교하거나 소변 줄기의 세기를 경쟁하는 모습들은 앞서도 밝혔듯이 남성들의 과도한 경쟁 심리를 표현하는 장면들이다. 굳이 이 장면이 아니더라도, 이후 진행되는 성적인 코드가 배제된 장면에서도 남자들 간의 경쟁 심리가 충분히 표현되고 전달된다. 이 장면은 성적인 체스처로 관객의 웃음을 유도하려는 의도된 연출이라는 점에서 방점은 주제적인 측면이 아닌, 웃음 유발에 강하게 찍혀있다. 이 외에도 이 작품은 여성의 신체를 강조하거나 이용해 관객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러한 장면들 중에는 작품의 주제와의 긴밀히 연결되기보다는 관객의 관심과 흥미를 끌기 위한 일종의 성적인 제스처인 경우가 많아 아쉬움이 남는다. 인간의 욕망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덩치를 키워나간다. 욕망이 채워지는 지점에서 또 다른 욕망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매커니즘 안에서 바동거린다. <욕망의 진화>는 이 바동거림의 최후가 어떠할지를 우리에게 경고한다. 무대 바닥으로 추락하고 싶지 않다면 그릇된, 혹은 지나친 욕망을 과감히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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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케리마 가장 아름다운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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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지
관람일시 : 2011. 8. 28. (일) 4시 장소 : 노을소극장
내가 10살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우리 가족은 강원도 어딘가로 여름 휴가를 떠난 적이 있었다. 대관령 고개를 구비구비 돌아 올라가느라 난 멀미를 심하게 하고 있었는데, 속이 너무 답답하지만 그렇다고 차에서 내릴 수도 없어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속이 부풀어오르는 듯한 멀미를 날려버릴 모습을 보게 됐다. 쏟아질 듯 하늘에 무수히 매달려 있었던, ‘별’이었다. 평생을 도심지 한 가운데서 살고 있는 난 그때로부터 거의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이 뚜렷이 기억난다. 말 그대로 ‘별이 빛나는 밤’이었던 어렸을 적 대관령 밤하늘은, 달조차도 맑게 빛나지 못하는 서울 하늘 아래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련한 그리움으로 내게 남아있다. PADAF의 여섯 번째 작품 <푸르케리마 가장 아름다운 자>(이태근 연출)은 한 목동의 아름다운 한 순간을 그리고 있다. 소중한 순간을 영원히 붙잡고 싶은 목동의 마음을 보여주듯 매 장면마다 예쁘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가득했다. 알퐁스 도데의 『별』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라틴어로 ‘가장 아름다운 자’란 뜻을 담은 <푸르케리마>를 제목으로 달았다. 연극과 무용이 결합되거나, 연극과 무용이 따로 나뉘었던 지금까지의 공연들과는 달리 극 내에 무용수와 배우가 함께 등장한다. 원작에서는 목동과 주인댁 아가씨 둘만 등장하고 그나마도 목동의 시점으로만 서술된다. 그러나 <푸르케리마>에서는 원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주인댁 아가씨의 심리와 그 밤하늘의 분위기가 무용수의 몸짓으로 채워진다. 세 명의 무용수는 때로는 요정으로, 때로는 밤하늘의 별로, 때로는 목동과 아가씨의 하얀 마음이 되어 두 인물의 내면을 풍성하게 묘사한다. 특히 길을 잃고 산장으로 돌아온 아가씨가 목동의 어깨에 기대어 잘 때, 별처럼 빛나는 금가루를 뿌리며 등장했던 세 사람은 대관령의 그날 밤이 떠오를 정도로 아련했고 아름다웠다. 신지원 안무가의 안무의도처럼 ‘몸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미묘하고 솔직한 감정들’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표현은 항상 말로, 그것도 논리정연한 말로 해야만 한다고 주입 받아 왔다. 그러나 이 작품을 보면서, 이성적인 말은 그저 한 수단일 뿐 진정한 소통은 어쩌면 몸짓으로 가능한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음향, 무대, 연기, 소품, 의상 등 이 작품에 참여한 제작진 모두가 하늘에 별을 쏘아 올리려는 마음으로 만든 듯 예쁜 마음이 묻어져 나왔다. 개인적으로 PADAF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공연이다. ‘여러분 마음속에 묻힌 반짝이는 순간들을 떠올리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는 그런 작품’(연출의도)을 만나 반갑고 고맙다. 대관령의 별을 떠올리게 해주어서 고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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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별’의 반짝거림, <푸르케리마 -가장 아름다운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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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영
작/연출 : 이태근 안무 : 신지원 극단 : 천둥 / 남수정무용단 공연기간 : 2011.08.23~08.28 공연장소 : 대학로 노을소극장 관극일시 : 2011.08.28(일) 저녁 7시
<푸르케리마 -가장 아름다운 자->(이하 <푸르케리마>)는 알퐁스 도데의 「별」을 극화한 작품이다. 이번 무대는 큰 작가의, 그것도 희곡이 아닌 소설을 각색해 무대화했다는 점에서 기대반 걱정반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소설을 무대화(혹은 영화화)한 작품이 성공하기란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작품은 이런 부담감 외에 또 다른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푸르케리마>는 연극과 무용을 분리해서 올린 작품이 아니다. 이 공연은 작품 진행 과정에서 연극과 무용, 두 장르를 한 작품 안에 녹여내야 하는 작업을 선택했다. 이런 점에서 <푸르케리마>는 두 “장르 간의 융합을 생성해 냄으로 인해서 장르융합의 정체현상의 해소를 꾀”하려는 PADAF의 취지에 적극 동조한 작품이다. 이 이중의 부담을 <푸르케리마>는 서두루지 않고 천천히 극복하려 한다. 하얀 옷을 입은 세 여자가 하얀 우산을 들고 춤을 춘다. 양의 울음소리가 효과음으로 무대를 채운다. 춤추는 세 여자의 표정은 밝다. 관객들은 세 여자들의 움직임에서 양의 노는 모습을 본다. 이 세 마리의 양들은 춤으로 양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과 현재의 감정을 표현한다. 양들은 “울타리를 넘어 와 즐겁게 뛰”논다. 이때 굳이 이 극은 무대에서 연출되고 있는 상황을 인물들의 대사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극을 이해하는 데에 이들의 춤 하나면 충분하다. 무용은 더 이상 연극의 각주로 취급되지 않는다. 춤은 연극의 수식어로서의 역할에서 탈출한다. 이 작품에서, 특히 이 장면에서 연극과 무용은 대등한 표현의 가치로 마주한다. 무용 연출의 놀라움에서 정신을 차린다. 무대가 시야에 들어온다. 완성도 있는 무대에 다시 한 번 놀란다. 무대는 목동이 지내는 공간이다. 적당히 남루하고 아늑하다. 뤼브롱 산(원작의 배경)의 느낌은 아닐지라도, 무대 저편에 양떼가 실제로 있을 것 같은 무대이다. 무대 안과 밖의 연결이 어색하지 않다. 앞선 참가작들의 무대도 좋았으나. 이 작품의 무대가 확실히 완성도 면에서 강한 인상을 준다. 목동은 사람이 그립다. “아예 올 사람이 없다면 그렇지도 않겠지만, 보름에 한번 사람이” 찾아온다는 걸 알기에 목동은 사람이 그립다. 목동은 아가씨의 수건을 주머니에서 꺼낸다. 그는 아가씨가 보고 싶고, 아가씨를 좋아하며, 사랑한다. 아가씨가 목동을 찾아온다. 아가씨의 방문에 목동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용무를 마친 아가씨가 목동을 떠나 마을로 내려간다. “목동은 혼자 남아 아가씨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든다.” 소나기로 물이 불어나 계곡을 건너지 못한 아가씨가 비에 흠뻑 젖은 채 목동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 둘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원작은 아가씨가 목동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드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때 아가씨는 별이다. <푸르케리마>는 원작의 기본 서사에 바다 장면을 삽입한다. 아가씨는 목동을 바다로 데리고 간다. 목동은 눈을 감는다. “발가락 사이로 들어오는 모래들이 간지”럽다. 아가씨는 물통을 들고 와 목동에게 물소리를 들려준다. 목동은 파도를, 푸른 바다를 느낀다. 아가씨는 목동의 발에 물을 뿌린다. 목동은 황홀하다. 서정적인 내용과 따뜻하고 아늑한 무대가 관객의 감성을 자극한다. <푸르케리마>는 바다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는 원작 알퐁스 도데「별」의 내용을 충실하게 무대에 재현한다. 이미 알고 있는 유명한 이야기, 그것도 매우 서정적이고 정적인 이야기를 단편 소설이 아닌 시간이 정해진 긴 호흡의 연극으로 본다는 것은 서정적 감정이 지속되거나, 아니면 지루함으로 빠질 수 있다. 물론 이 작품은 관객에게 하모니카 연주를 들려주거나, 춤을 보여줌으로써 지루함을 차단하려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첫 장면의 춤 말고 뒤에 나오는 춤들은 연극의 내용을 수식할 뿐이다. 춤의 이야기성은 약해진다. 금가루 날리는 춤을 선보일 때에 잠깐, 환상에 빠지는 경험을 한다. 원작에 없는 바다 장면이 추가된다. 이 장면이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내지만 무대 분위기를 전환하거나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연출자와 관객 모두에게 연극에서 극적 긴장감이 없다는 것은 여러 점에서 힘든 일이다. “인생에서 별처럼 빛나는 어떤 순간을 얘기”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모든 것을 조금이라도 더 생생히 전달”받기에는 작품의 정적인 기운이 막강하게 작용한다. 이 작품의 내용이 보편적 공감을 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 내용이 연극성을 확보해 준다거나, 흥미로운 상황 전개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푸르케리마>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서정성의 지속과 지루함의 중간에서 위태롭게 서정적 감정을 유지한다. 원작 「별」이 서정성이 극대화 되는 지점에서 작품의 결말을 지었다면, <푸르케리마>는 아가씨가 다음날 아침 마을로 떠나는 결말로, 서정성의 극대화보다는 여운을 선택했다. 아가씨가 떠나고 짖는 개를 향해 목동은 “너 바다 본 적 있어? 눈 감아봐.”, 라며 말한다. 목동은 바다를 가본 적이 없지만 아가씨와 함께 보낸, 아가씨에게 어깨를 빌려 준 별이 빛나는 밤에 바다를 다녀왔고, 파도와 모래가 주는 감각을 느꼈다. 아가씨가 떠난 뒤, 목동은 다시 바다의 공간으로 가 아가씨를 추억하려 한다. “감정의 순간을, 그리고 상황을 더욱 확대해 본다면 그 어떤 상황도 잔잔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잔잔하게만 보았던 상황이나 감정의 순간에서도”(‘연출의도’ 중에서) 목동의 마음은 요동친다. 목동은 외부와 차단된, 외부와의 접촉이 적은 공간에서 살지만 다른 누군가들처럼 사랑 앞에 설레고 마음 조린다. 누구를 돌보기엔 현대의 삶은 너무도 빠르고 무섭게 변화한다. 현대인은 외부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외부(타인)에 큰 관심을 갖지 않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이 작품을 통해 주위의, 혹은 스쳐지나간 ‘가장 아름다운 자’와 ‘반짝이는 순간’을 생각해보자. 그 순간 자신에게 보이지 않았던 소중한 ‘별’이 ‘반짝’, 빛나지 않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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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gone : Dear. PEOP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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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지
관람일시 : 2011. 8. 5. (금) 8시 장소 : 노을소극장
안티고네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그도 아니면 무엇을 들려주고 싶었던 걸까. PADAF 세 번째 작품 <Antigone : Dear. PEOPLE>(안수환 연출)은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신념 있는 여인 안티고네를 21세기로 불러들인다. 제목과는 달리 우리 마음에 강요는커녕 강렬한 정열을 남긴 무용극 <마음에 강요하다>. 이 작품이 끝난 후 쉬는 시간 동안 젊은 청년들이 무대 위에 흰 소금을 뿌리기 시작했다. 이미 이 때부터 공연은 시작되었다. 소금처럼 하얗지만 소금처럼 무너져 내릴 소녀는 이미 무대에 올라와 있던 것이다. 공연은 하나의 프리젠테이션 같으면서도, 한 편의 클럽 영상인 듯했다. 전통적인 고대 희랍극처럼 보이면서도, 다양한 색채를 잃어버린 회색빛 현대극 같았다. 소금밭에 누워 있는 안티고네 뒤로 아이패드와 맥북을 든 연출자가 등장한다. 최첨단 기기를 든 그는 무력하게 누운 안티고네의 운명을 쥔 신처럼 보였다. 그는 무대 뒤편에 앉아 빔 프로젝터를 이용해 한 장 한 장 슬라이드를 넘겼다. 배우들의 프로필(이름, 성별, 나이, 키, 심지어 몸무게까지)뿐만 아니라 <안티고네>의 줄거리까지 작은 화면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영상을 보는 듯하면서도 연극을 체험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시종일관 클럽 음악으로 가득했던 공연은 마지막 슬라이드에 일본 연출가 타다 준노스케를 향한 존경심을 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안티고네와 이스메네처럼 거대 권력에 스러져갈 수 밖에 없는 여인들에게는 하얀 셔츠를, 나머지 배역과 코러스를 겸한 배우들에게는 권력의 색인 검은색 의상을 입혀 대조를 이뤘다. 또한, 배우들의 열연은 어느 공연을 봐도 큰 울림은 준다. 작은 극장에서 이뤄진 작은 공연이었지만 무대만큼은 대형 극장을 능가했다. 소금 여러 포대를 아낌없이 쓰고, 곳곳에 있던 큐브는 법을 상징하는 등 작은 것 하나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의미를 담아내는 데에 노력한 점이 보였다. 클럽 음악에 맞춰 리듬감 있게 넘어가는 슬라이드는 클럽에 온 듯한 분위기를 냈다. 이 작품은 미디어와 고전극의 결합이라는 시도를 세련된 감각으로 풀어냈다. 그러나 스타일리쉬한 슬라이드와 음악이 ‘안티고네’의 비극과 얼마나 잘 맞아떨어졌는지, 그녀의 비극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형식과 내용이 잘 어울리지 않았다. 배우들과 안티고네란 비극이 오히려 떠들썩한 클럽 음악의 소품으로 보였다. 공연은 1시간 10분이었지만 이야기를 여섯 파트로 나누어서 몰입도를 떨어뜨린 점도 아쉽다. 공연 초반 10여 분을 슬라이드로 보여준 점, 작은 화면에 <안티고네>의 줄거리를 빽빽이 적는 등 미디어와의 결합은 좋았지만 연극성이 다소 떨어지는 점 또한 아쉽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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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판에 대한 비판, <Antigone : Dear. PEOP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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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영
작 : 소포클래스 연출각색 : 안수환 극단 : Team. 7o'clock Studio 공연기간 : 2011.08.02~08.07 공연장소 : 대학로 노을소극장 관극일시 : 2011.08.06 오후 4시
<Antigone : Dear. PEOPLE>(이하 <Antigone>)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PADAF의 세 번째 참가작으로 ‘Why? Here and Now!’란 제목 아래 연극 <Antigone>와 무용극 <마음을 강요하다>가 공연되었다. 연극이란 장르의 독자성을 확보한 <Antigone>는 지금까지 공연된 네 편의 참가작 중 가장 실험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시작부터 강렬한 사운드·비트의 음악과 속도감 있게 처리된 스크린의 자막이 관객의 주목을 끈다. 오프닝을 알리는 스크린의 자막. 안티고네는 “Hello / My name is Antigone / 안녕하세요 / 반가워요 / 당신들을 / 만나고 싶었어요”, 라며 현대 관객과의 접촉을 시도한다. 그녀가 현대의 관객을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안티고네>는 고대 그리스의 작가 소포클레스가 쓴 비극 작품이다. 안티고네는 오이티푸스왕의 딸이다. 그녀의 두 오빠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왕권 문제로 죽고, 안티고네의 외삼촌 크레온이 왕권을 차지한다.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주지만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는 짐승의 밥이 되게 한다. 안티고네는 오빠인 폴리네이케스를 묻으려 했지만 이 사실이 발각되어 감옥에 갇힌다. 크레온은 법을 어긴 안티고네에 대해 천장이 있는 무덤에 가두는 방식으로 처형을 명한다. 처형하기 전 안티고네는 목을 매 자살하고 그녀를 사랑한 하이몬(크레온의 아들)도 칼로 자신의 배를 찔러 죽는다. 아들에 관한 슬픈 소식을 들은 크레온의 아내 에우리디케도 충격에 칼로 자신을 찔러 자살한다. 여기까지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서사이다. <Antigone>는 이 소포클레스의 서사를 독특한 무대를 통해 해체·공연화한 작품이다. 무대 중앙에는 염화칼슘으로 채워진 네모난 틀의 또 다른 무대가, 무대 후면에는 대형 스크린이 있다. <Antigone>의 배우들은 <안티고네>를 연기하는 배우이면서 관객이다. 배우들은 네모난 틀의 무대에서 <안티고네>를 연기한다. 네모난 틀 무대의 양 옆에는(무대의 상수와 하수) 의자들이 놓여 있다. 연기를 하지 않는 배우들은 이 의자에 앉아, -자유로운 자세로,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기도 하면서- 자신의 동료들이 연기하는 <안티고네>를 감상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연기할 차례가 오면 의자에서 일어나 네모난 틀 무대 안으로 들어간다. <Antigone>는 네모난 틀 무대에서 <안티고네>의 중요한 부분만을 보여준다. 서사의 빈공간은 대형 스크린의 자막이 채워준다. 관객들은 바쁘게 사고한다. <Antigone>의 관객들은 부분적으로 공연되는 <안티고네>를 보고, 스크린의 자막을 읽고, 최종적으로 전체의 <Antigone> 극을 본다. 부분적으로 공연되는 <안티고네>는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실연하지 않는다. <Antigone>의 <안티고네>는 해체재구성되고, 상징으로 덧씌어진다. 배우들의 연기, 오브제(대표적으로 큐브cube) 등에는 서사의 해석 이외의 해석이 요구된다. 중층의 무대와 다양한 해석점들로 꽉 차 있는 <Antigone>. <안티고네>의 주제에 관해서 여러 해석이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해석은 헤겔의 해석일 것이다. “그는 <안티고네>의 주제가 가족의 권리와 국가의 권리의 알력이라는 고전적인 해석을 내리고 두 가지 권리 어느 쪽도 전적으로 정당화 혹은 부당화할 수 없는 것이라 주장했다. 바인슈톡은 이를 종교와 국가의 알력이라 표현했고, 슈밋드는 관용과 자기억제라는 두 가지 논리의 표출이라 보는가 하면, 동작품에 아무런 관념의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라인하르트의 견해도 있다(김진경, 「소포클레스와 아테나이의 정치」).” <Antigone>는 이런 다양한 해석들을 수용하면서 대립 관계의 판단에서는 정확한 자신의 의견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안티고네에 방점이 찍혀있다. 안티고네의 행위에 대해 정당성 혹은 긍정적인 시각을 나타낸다. 작품의 의도에서도 드러난다. “소녀는 자신에게 죽음을 선물했다 / 소녀는 죽음을 알고 있고 / 소녀는 죽어야만 했고 / 소녀는 죽기 위해 노력했다. / 의지로 노래하는 소녀, Antigone / Antigone. She is Dead(프로그램 중에서).” 이 작품은 안티고네의 죽음을 긍정한다. 안티고네는 죽음을 통해 그릇된 권력의 “추악함의 진실 위에 진정한 객관적 사실”을 제시한다. 그녀의 죽음은 “부정에 항거”한 행위이다. 절대 권력이 나은 절대적 폭력에 안티고네는 피하지 않고, 죽음으로 대응한다. 절대 권력은 불안해진다. 아들은 아버지를 부정한다. 하이몬은 아버지 크레온에게 말한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세요. 시련과 고통을 말씀하시지만, 그들의 고통은 아버지의 고통을 뛰어넘어요.아버지의 오만이 아버지를 흔들고 있다구요. 결국 안티고네는 왕의 권력에 짓밟힌 희생자에 불과한거라구요.” “왕의 의지”가 “나라를 병들게” 한다. <Antigone>는 이렇게 현대의 관객들과 접속한다. 스크린에 자막이 뜬다. “보기 싫어/ 듣기 싫어/ 보지 못 해 / 듣지 못 해 / 봐선 안돼 / 들어선 안돼 / 볼 수 없어 / 들을 수 없어”라는 메시지는 무대 밖 현대의 관객들을 향한 것이다. 여기서 현대사회에 대한 <Antigone>의 비판적 시각은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이 작품의 비판 대상은 절대권력에 한정하지 않는다. 네모난 틀 무대를 비판 없이 관람하는, 아니 바라보는 관객/배우는 곧 우리의 모습임을 <Antigone>는 비판한다. 이 작품의 제목에 Dear. PEOPLE이란 단어가 오는 이유가 명확해진다. 무비판에 대한 비판과 경계이다. <Antigone>는 매우 다양한 실험들과 상징들로 꽉 찬 무대였으며, 메시지도 분명한 작품이다. 하지만 이 메시지가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느냐에 대해선 다소 의문이 든다. 무대와 소품, 그리고 연기들이 상징들로 벅차다. 그런데 관객들은 스크린 자막이라는 활자까지 읽고 해석해야 한다. 스크린 자막은 관객들이 해석할 때까지 여유 있게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이 자막들은 스크린에서 매우 속도감 있게 나타나고 사라진다. 이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를 전달받기란 관객들은 숨이 차다. 물론 안티고네가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까지 오는 것만큼 숨 가쁘고 힘들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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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eo & Juliet. li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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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지
관람일시 : 2011. 8. 19. (금) 8시 장소 : 노을소극장
PADAF 다섯 번째 작품 제목인 <Romeo & Juliet. live>(최정환 연출)는 이중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하나는 콘서트 실황을 말할 때 쓰는 ‘live’이다. 관객에게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콘서트를 기대하게 만든다. 다른 하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록 죽지만 둘은 영원히 살아있다는 ‘live’이다. 흔히들 <로미오와 줄리엣>을 비극이라 본다. 그러나 두 사람이 모두 사랑 때문에 이승을 등진다는 데서 어쩌면 영원한 사랑으로 맺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이러한 두 의미를 모두 만족시키는 새로운 스타일의 무대를 선보였다. 무대 뒤편에는 키보드, 그 앞에는 전체적인 이야기를 서술해나가는 서사(정이슬 분)가 앉아있다. 무대 양쪽으로 기타, 드럼 등 밴드가 자리해 마치 남미의 한 까페에 온 듯한 분위기를 냈다. 열 명 남짓한 밴드는 연주자이면서도, 무대 중앙에서 이뤄지는 천태만상 인간사를 관조하는 관객이었다. 고대 희랍극의 코러스이자 등장인물들을 거침없이 비웃고 때로는 동정했던 마당극의 구경꾼이었다. 연주자들은 음악을 연주하다가도 어느새 약 파는 사람이 됐다. 역할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연주자들은 슬픈 사랑이야기를 심정적으로 편안하게 볼 수 있게 만들어 좋았다. 공연 시작하기 전부터 연주와 노래가 이어지던 무대는 곧 개성 강한 인물들로 채워졌다. 이 작품에선 배우들이 큰 역할을 차지한다. 인물 한 명 한 명이 원작의 인물과는 다른 성격과 다른 스타일을 갖고 있다. 서사는 이 비극의 결말을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신처럼 장면을 설명하고, 인물들의 심정을 대변했다. 로미오(박일우 분)은 왠지 철 없어 보이는 그러나 순수한 꽃미남이었고, 줄리엣(이슬기 분)은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그러나 마음은 누구보다 예쁘고 진실했던 사랑의 포로였다. 캐퓰렛 부인(전다정 분)은 빨간 입술이 강렬했던 고혹적인 미녀였고, 여자 목사 로렌스(김은지 분)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점술사 같았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파격적인 인물설정이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클레어 데인즈 주연의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을 무대로 옮겨놓은 듯 영화의 이미지를 거의 그대로 가져온 점은 아쉽다. 단적인 예로, 머큐시오(김형록 분)과 티볼트(고근섭 분)은 영화의 인물과 의상이나 이미지가 거의 비슷했다. 이 정도의 무대를 만들 수 있는 여력이라면 얼마든지 새로운 스타일의 고안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공연 전반적으로 영화의 그늘을 거둘 수 없었다. 또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처럼 영원한 고전은 시대를 거듭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주된다. 그러나 겉옷을 아무리 바꿔 입는다 해도 주제의식의 중요성은 여전하다. <Romeo & Juliet. live>은 스타일 표현에만 치중한 듯해서 아쉽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양쪽 집안의 복수, 죽음 등 이러한 이야기가 음악, 새로운 스타일과의 관련성을 보여줄 수 있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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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재탄생, 고전의 현대화 - <Romeo & Juliet. li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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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영
원작 : 윌리엄 셰익스피어 연출 : 최정환 극단 : neu(노이) 공연기간 : 2011.08.16~08.21 공연장소 : 대학로 노을 소극장 관극일시 : 2011.08.20(토) 오후 4시
PADAF의 다섯 번째 참가작 <Romeo & Juliet. live>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색한 작품이다. 이번 제1회 PADAF 참가작 중에는 고전 작품을 무대화한 작품들이 많다. <하세요>, <Antigone : Dear. PEOPLE>, <푸르케리마> 등이 원작이 있는 작품들이다. 고전은 관객들에게 신뢰감을 준다. 고전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내용이 궁금해서가 아니다. 고전 작품을 보러가는 관객들은 이미 작품의 내용이 무엇인지 숙지가 된 상태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작품을 평가할 때에 내용, 즉 이야기는 평가에 중요한 기준이 된다. 하지만 고전 작품을 관람할 경우는 작품의 내용(줄거리)보다는 어떤 새로운 감각으로 작품이 무대화되었는가, 원작과의 차이는 뭔가, 내지는 공연이 얼마만큼 원작의 가치를 충실히 표현했는가가 관전의 포인트가 될 것이다. <Romeo & Juliet. live>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이 유명한 고전을 어떠한 방식으로 무대화했는가. <Romeo & Juliet. live>의 무대는 원작을 생각한다면 확실히 파격적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음악적 요소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공연에서 사용되는 음악은 라이브로 연주된다. 음향효과까지 라이브 연주로 처리된다. live가 작품 제목에 왜 있는지 분명해진다. 매우 신선하고 음향의 효과가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관객들은 객석에 앉기 전부터 무대에서 연주되는 음악을 듣는다. 라이브 카페 같은 무대가 눈에 띈다. 관객들은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그리고 약간은 이국적 느낌을 받으며 공연 보기에 임한다. 해설자의 노래로 작품은 시작한다. 약간은 끈적한 해설자의 노래가 매력적이다. 무대는 좋은 연주와 노래가 있는 여유로운 카페의 분위기이다. 작품에서의 노래 사용은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배우들은 주요 장면에서 노래를 부른다. 춤의 요소가 좀 더 강했다면 뮤지컬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하지만 배우들은 연기할 때에 많은 동작을 취하지 않는다. 코믹한 요소가 나올 때 정도를 제외하고는 배우들의 움직임은 그다지 크거나 많은 편이 아니다. 특히 노래를 부르는 대부분의 장면에서 배우들은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이때 움직임이라 하면 약간의 제스처와 상대방과의 눈빛 교환 정도일 것이다. 비좁은 무대에서 큰 동작을 하기는 무리일 것이다. 라이브 무대를 살리기 위해 무대 뒷면과 양 옆쪽이 연주자 공간으로 채워져 있다. 실질적으로 배우들이 연기할 수 있는 공간은 무대 중앙 밖에 없다. 이 작품은 관객에게 라이브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서 배우들의 동작을 어느 정도 포기한 셈이다. 굳이 연극이라고 해서 움직임이 많을 필요는 없겠지만, 노래만 듣기에는 어딘지 심심하고 어색한 느낌을 주는 무대이다. 줄리엣이 차도녀(차가운 도시 여자)로 변신했다. 이 작품에서 원작의 인물과 비교해 변화가 가장 큰 인물은 줄리엣일 것이다. 짧은 치마에 선글라스를 착용한 그녀의 비주얼은 화려하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줄리엣의 청순함을 <Romeo & Juliet. live>의 줄리엣에게서는 찾기 힘들다. 고전적 느낌의 줄리엣도 좋지만 도도하고 차가운 줄리엣도 새롭고 흥미로워 좋다. 줄리엣은 자신의 사랑을 표현함에 있어 적극적이다. 로미오의 키스를 기다리기보다는, 로미오의 키스에 수동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줄리엣은 자신이 먼저 로미오에게 다가가 키스를 한다. 차도녀 줄리엣의 모습에 신선함을 느꼈다면, 코믹한 인물들의 등장에 유쾌하게 극을 즐기게 된다. 이 작품의 대부분의 인물들이 희극적 요소를 갖고 있다. 특히 그중에서 머큐시오와 티볼트, 그리고 유모는 단연 웃음을 유도하는 데에 있어 눈에 띄는 인물이다. 유모의 수다스러운 말투와 반복적인 대사, 머큐시오와 티볼트의 코믹한 대화와 과장된 표정 연기, 그리고 행동은 제대로 관객을 웃겨보려는 듯하다. 간혹 재미만을 위해 강조된 성적인 표현이나, 지나치고 불필요한 욕설은 웃음보다는 반감을 준다. 예를 들어 로미오와 티볼트의 결투에서 ‘찐따’와 ‘쪼다’를 섞어가며 나누는 대화는 가벼운 느낌이 들어 보기에 다소 민망하다. 하지만 이런 장면을 제외한다면 이 작품에서 희극적 요소는 분명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변화된 캐릭터, 웃음이 강조된 인물이 대다수 등장한다고 해서, 이 작품의 결말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Romeo & Juliet. live>의 로미오와 줄리엣, 이 둘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난다. 작품의 시작과 끝에서 해설자는 이 작품이 “슬픈 이야기”임을 강조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를 간절히 원하지만, 사랑을 나누는 방법에 있어 서툴고 성급하다. 이 서툴음과 조급함이 사랑을 비극으로 치닫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둘의 사랑에 대한 욕망은 서로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리고 이 죽음으로 인해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이루어지고, 두 가문은 평화를 맞이한다. “셰익스피어의 아름다운 말이나 내용”을 최대한 살리고, 형식을 “색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Romeo & Juliet. live>(<프로그램> 중에서>). 이렇듯 이 작품의 과거와 현재는 내용과 형식을 통해 만난다. <Romeo & Juliet. live>은 인류의 공통된 감정 ‘사랑’을 세련되고 현대적인 감각의 무대에 담아내어 모든 세대의 공감을 얻어낸다. PADAF는 젊은 예술인들이 참여한 젊은 무대이지만, 모든 세대와 소통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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