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지술
인류가 불을 사용하여 문명을 발전시킨 이래 번개처럼 변화한 기술이 축지술이다. 축지술은 공간개념이지만 공간 축소는 시간 연장을 동반한다. 바야흐로 인공지능이 자동차를 운전하여 사람을 실어 나르는 시대가 되었다. 비 내리는 야간에 운전을 할라치면 인간능력의 한계를 절감함과 동시에 인공지능에 심오한 감사를 느낀다.
고급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우러러보면서, 실용적인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초라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 아이들마저 브랜드 신이 아니면 기가 죽는다. 나에게 있어서 차는 바퀴 달린 신이다. 안전도와 경제성을 선택의 우선순위로 삼는다. 자동차 가속페달을 밟아 앞뒤로 움직이는 것은 기술이다. 그러나 운전을 기술로 여기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적절한 위치에 차를 세울 줄 아는 것은 교양이다. 운전면허는 운전 기술을 증명하기보다 교양인이라는 증표로 발급되어야 마땅하다. 평소 안 그러던 사람도 운전대만 잡으면 욕쟁이가 된다. 그렇게 욕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욕을 많이 먹는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다. 운전을 잘하는 사람 위에 운전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드라이브는 이동수단을 넘어 즐거움을 주는 스트레스 해소책이 되기도 한다. 드라이브란 자동차와 함께하는 산책이다.
운전을 즐기는 사람은 마주 오는 차가 건네는 신호를 알아보고 답을 할 줄도 안다. 뒤따라오는 차가 보내는 신호도 금방 안다. 걸어 다니는 행인과도 대화를 나눈다. 비켜서 기다릴 때를 알고 서행하는 미덕을 안다. 빨리 달리지 않아도 도착 시간을 단축할 줄 안다. 좋은 차란 용도에 맞는 차를 일컫는다. ‘얼마 전까지 큰 차 탔는데 작은 차로 바꾼 지 얼마 안 됐다’며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혼잣말처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있다. 세태를 읽지 못하는 아둔함으로 인격을 옷이나 차에 기준 하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입음새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을 아부꾼 만큼이나 혐오한다.
가성비로는 국산 차도 외제 차 못지않다. 차 가격보다 운전을 얼마나 고상하게 하느냐가 자랑거리가 되면 선진국민이다. 야간에 앞차가 방향지시등을 켠 채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깜빡이를 꺼주면 뒤차 운전자가 편안하다. 마찬가지 이유로 뒤차가 전조등을 꺼주면 앞차 운전자는 눈부심이 줄어든다. 법 이전에 드라이브 에티켓 이다. 운행 중 다섯 지점을 동시에 살필 수 있으면 방어운전이 수월하다. 앞차와 그 앞차 그리고 좌, 우, 후방을 한꺼번에 스캔하여 운전하면 사고를 줄일 수 있다. 신호대기 중일 때 앞차와의 거리를 넉넉히 유지하면서 뒤차가 접근해오는 상태를 주시할 줄 알면 베테랑이다.
운전을 하다보면 별별 경우를 다 겪는다. 시간이 촉박하면 교차로마다 정지신호를 더 오래 그리고 자주 받는 느낌이다. 차를 가진 모든 사람이 이 거리에 한꺼번에 모인 것 같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주차공간이 없다. 빈 공간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율운전 기능이 교차로 신호를 바꾸지는 못한다. 주차공간을 자동으로 만들지도 못한다. 꼭 그럴 때면 어디쯤이냐며 먼저 도착한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온다. 헐떡거리며 걷는 사람이 벨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며, 차와 차의 틈새에 겨우 주차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이 전화가 온들 받을 수 있겠는가.
동승자가 협력해야 운전하기가 수월하다.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신문을 펼쳐 들면 운전자는 한쪽 눈을 감고 운전하는 꼴이 된다. 뒷좌석 가운데 오뚝하니 앉으면 운전자는 후방 상황을 알기 어렵게 된다. 운전자에게 음식을 권하는 것은 특히 삼가야 한다. 운전자를 자극하는 언행은 대형사고로 직결될 위험이 있다. 경적은 ‘여기 차 있습니다.’라는 알림이지 ‘비켜라.’라는 명령이 아니다. 쌍 깜빡이는 ‘잠시 정차 중’ 또는 ‘미고사’표시다. 인공지능 자동차라 할지라도 이런 것까지 자율적으로 표시해 주지는 않는다. 끼어들기 양보 받으면 인사를 빠뜨리지 않는 게 사람 일이다.
결혼을 결심하기 전에 예비신랑의 운전습관을 살펴보자. 정지선을 정확히 지키지 않으면 결혼 후 외박이 잦을 공산이 크다. 급출발 습관이 있으면 소화장애가 우려된다. 노란불에 멈출 줄 모르면 안정적 직장생활을 하지 못한다. 불법 주차를 일삼으면 지출통제가 어렵다. 운전 중 욕을 자주 하면 내로남불이 심하다. 자동차를 아끼지 않는 사람은 자기애가 부족하다. 깜빡이를 제대로 켜지 않고 차로를 자주 바꾸는 사람은 운전이 서툰 것이 아니라 막무가내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동차 축지술을 잘못 쓰면 저승 가는 축지법이 된다. 그리고 본인이 실기시험에 세 번 이상 낙방하면 자존심 이전에 운동신경에 문제는 없는지 냉정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앞차가 후진 기어를 넣어도 모르는 뒷차 운전자는 운전면허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앞질러 가는 차가 마음에 거슬려서 기어이 다시 추월한다면 교양과목을 다시 이수해야 한다. 교차로가 막혀도 신호를 빙자하여 도로 중앙을 가로막는 꼬리 물기는 준법을 가장한 몰염치다. 자율주행보다 아름답기로는 신사도가 으뜸이다. 지하자원도, 노벨 과학상도 하나 없으면서,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올림픽과 월드컵은 억지춘향 이었을지 몰라도 토목, 조선, 반도체, 인터넷은 세계를 제패하고 있다. K-팝이 수출 깜이다. 아리랑과 판소리가 파리 한복판에 울려 퍼지고 있다. 자동차 수출국 다섯째 반열에 섰다. 운전교양도 수출 좀 해보자. 고급 차 앞에서 주눅 들면 세익스피어를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자동차문화라고 하는 축지법과 전통문화가 헝클어진 시대상에 오금이 저려온다. 운전도 궁극은 인문이다. 우리는 바야흐로 인문학 결핍시대에 디지털을 만끽하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