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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덮어두고 전선으로
송서규 대령은 1933년 5월 11일에 일본에서 태어나 1945년 광복 후 귀국하였다.
원래 조상은 당시 남제주군 성산면 온평 리에서 대대로 살아왔으나 일본에서 귀국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송서규 소년의 아버지는 남제주군 서귀면 서귀리(현 서귀포시 서귀동)에 터전을 잡았다.
송서규 소년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귀 농업중학교에 진학하던 중 1950년 6월 4학년이 되었을 때 북한군의 남침으로 전단은 열리고 9월이 되자 송서규를 비롯한 많은 학생들이 대거 학도병으로 지원하여 전장에서 피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렇게 북한군을 몰아내고 그 뒤를 쫓아 북진하다보니 이번에는 중공군이 개입하여 또다시 새로운 전쟁 국면에 접어들었다.
1951년 초 아군은 평택~영월~삼척선까지 일단 물러났으나 다시 북진하여 삼팔선부근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며 격전을 치르던 6월이 되었다.
바로 전쟁발발 1주년이 되어가던 무렵 육군간부후보생 모집이 있었다.
당시 응모했던 그룹들은 학도병 출신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 전투경험을 많이 쌓은 고참병, 월남 중 현지 입대한 사병, 1.4 후퇴 때 조급히 편성됐던 국민방위군 장교 등으로 구성되었다.
송서규도 이에 응모하여 선발되었고 1951년 6월 24일 당시 부산 동래에 소재한 육군보병학교 갑종간부 제 7기생으로 입교하였다.
그 때는 전쟁이 치열할 때라 일선에서 소대장이 부지기수로 죽어가서 초급 간부가 절대 부족한 시점이었다.
이 갑종 간부 제 7기에는 보병 117명, 포병 9명, 병기 13명, 기타병과 30명 등 도합 169명이 입교하였다.
그 당시 학교장은 이한림 준장이었고 연대장은 김희준 대령이었다.
그 밑에 대대, 중대와 4개구대로 편성되었다. 그들은 천막 안에 볏짚을 깔고 그 위에 매트리스를 깔아 기거하였다.
그 날부터 뜨거운 태양이 내리 쬐이는 야전 교정에서 A고지 B고지 공격훈련과 연병장에서는 온 힘을 쏟아 붓는 총검술 훈련을 배웠다. 그리고 화기학과 일반 학 등 총 1,056시간이나 되는 혹독한 교육훈련을 받으며 후보생들이 지나가는 발자국마다 무수한 땀방울을 쏟아내야 했다. 그런 무더위 속에 설상가상으로 식수마저 좋지 않아 후보생들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보병과에 속한 117명은 11월 10경 20주간 교육훈련을 마치고 부산해운대에서 수송선에 승선하였다. 그 후보생들은 목포에 상륙하여 광주소재 상무대에서 나머지 교육훈련을 이수하고 드디어 12월 8일 수료와 동시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특히 송서규는 만 18세도 못된 어린 나이에1개 소대를 지휘할 육군 소위가 되었다.
이 때 갑종 제 7기 임관자 중에는 송서규 소위와 같은 남제주군 출신인 강승우 소위와 김홍수 소위도 있었다. 송서규 소위는 당시 남제주군 서귀면 서귀 리 에서 강승우 소위는 남제주군 성산면 시흥 리 에서 김홍수 소위는 남제주군 남원면 태흥리에 살았다.
당시 전황은 휴전회담이 진행 중이었고,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전에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해야하는 간절한 필요에서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후일 강승우 소위는 1952년 101월 12일 백마고지전투에서 육탄돌격을 감행하고 산화하여 육탄 삼용사의 한 분이 되었고
송서규 소위는 중령 때 월남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둘 다 시기와 장소는 다르나 다 같이 백마부대(보병 제 9사단)에서 전공을 세운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갑종 제 7기는 전쟁영웅을 배출한 자랑스러운 기수로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송서규 소위는 보병학교를 졸업 후 육군 특수부대에 배속되어 빛나는 전공을 세웠고, 휴전 후에는 야전 지휘관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 격전장인 월남 땅으로
그러다 시간이 흘러 1966년 중순 정부는 맹호부대(보병수도사단)에 이어 월남에 백마부대(보병 제 9사단 사단장 소장 이소동)를 파월키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에서 제 9사단을 재편하였으며 제 1야전군 산하 각 사단에서파월대상자를 추천받아 정예요원으로 편성하였다. 이 때 육군본부작전참모부에서 근무하던 송서규 소령도 지원하여 백마부대에 편성되었다. 이 부대는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용문산에서 유격 훈련을 실시하였다.
때 마침 방한 중이던 주 월 미군사령관 웨스트모얼랜드 대장이 이 유격훈련을 참관하고 마음 든든하다고 격찬한 일이 있었다.
1966년 9월 16일 수송선단은 부산항 제 3부두를 떠나 9월 22일 월남 남동부해안인 나트랑에 상륙하여 인근에 있는 닌호아에 주둔하였다.
송서규 소령은 도착즉시 백마부대의 수색대장으로 임명되어 정글을 누비며 적진을 샅샅이 수색 정찰하여 아군이 적을 격파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66년 12월 10일 중령으로 진급하며 보병 제 9사단(사단장 박현식) 제 29연대(연대장 대령 홍상운) 제 2대대장이 되었다.
오작교작전, 비마작전, 부루도자 작전 등 수 많은 전투에서 날쌘 사자처럼 앞장서 연전연승을 거듭하는 전과를 남기면서 그 임기를 마치고 귀국을 2일 앞두고 있었다.
신임대대장인 신상철 중령이 업무파악을 위해 신. 구대대장이 합동근무 중 1967년 11월 6일 닌호아군 닌다마을에 월맹군 18연대소속 1개 중대(150여명)가 침투해 왔다.
아군은 불리한 지형인 늪지대에 고립되고 송 중령은 후임대대장이 부대 실정도 잘 모를 뿐 아니라 적정도 잘 몰라 대대지휘를 자청해서 맡았다. 그날 12시 송서규 대대장은 홍상운 제 29연대장의 명령에 따라 4개 중대를 출동시켜 일제히 공격에 나섰다.
우선 제 5중대장 민규식 대위로 하여금 제 2소대를 마을 서북쪽으로 투입하여 공격을 개시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군이 1번 도로로 통하는 개활지에 이르렀을 때 적의 사격을 받았다.
그 때 앞에서 돌진하던 안 병호 중사, 손인학 하사, 이선기 일병, 이여택 일병이 전사하였고, 3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제 2소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 5중대장은 그 즉시 제 3소대로 하여금 적진을 돌파 하도록 하였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앞으로 진격할 수 없었다.
다급해진 민규신 중대장은 맨 선두에 나서서 제 3소대를 이끌고 적진을 공격하던 중 적탄을 맞고 중상을 당하였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송서규 대대장은 부 중대장 이승환 중위로 하여금 제 5중대를 지휘하고 공격을 재개 토록하였다. 이때 교전에서 손의선 하사는 적군을 3명이나 사살하였지만 그 역시 전사하였고 소대원 2명도 부상을 당하였다. 한편 제 6중대장 국순섭 대위도 제 5중대와 더불어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 1소대와 제 2소대를 1번 도로로부터 동쪽으로 전진시켜 닌다마을에 접근하자 적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그러나 용감한 장병들은 계속 돌격을 감행하여 적과 치열한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최병철 병장은 적을 수류탄으로 폿하 시켰고 유일관 상병은 M19유탄을 발사하여 적군 2명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최기준 병장도 적을 3명이나 사살하였으나 아군도 차경수 일병, 채희태 일병이 전사하였다.
제 3소대는 수로와 물이 흐르는 논 때문에 전진이 쉽지 않았고 오히려 적으로부터 완강한 사격을 받아 그만 소대장과 대원
3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그러나 홍순 병장은 야자나무 위에서 아군을 저격하고 있는 적에게 M19유탄을 발사하여 적을 3명 이나 사살하였다. 이렇게 피아간에 죽고 죽이는 총격전이 한동안 전개되다가 아군이 공격을 잠시 멈추게 된다.
□ 앞장서서 돌격하다 최후를 맞다.
그 당시 상황으로는 적군을 11명이나 사살하였으나 아군도 6명이나 전사하고 11명이 부상을 입는 피해를 당했다.
그 순간 송서규 대대장과 사단의 작전 참모가 현지에서 달려왔다. 그들은 아군의 희생에 적개심이 일어났고 이를 응징하려하였다. 이에 송서규대대장은 선제공격을 감행키로 하였다.
소대장이 부상으로 사기가 침체되어있는 제 6중대 제 3소대를 직접 지휘키로 하였다.
작전은 일몰 전에 종결되어야했고 밤에는 야행성이 강한 적이 내습할 우려가 더 높을 때였다. 당시 시각은 벌써 오후 5시를 가르키고 있어서 조금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 즉시 송서규 대대장은 적의 진을 치고 있는 목표를 향하여 일제히 돌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그와 동시에 송서규 대대장은 M 16소총을 쏘며 비호처럼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아군은 비오듯하는 적탄을 뚫고 100여 미터를 전진하였다. 그러나 적이 전 화력을 제 3소대에 집중하여 퍼부어오자 송서규 대대장은 급히 M79유탄발사기를 사병에게 달라고 하여 직접 적진에 발사하면서 돌진하였다.
이렇게 송서규 대대장은 적진으로 계속 공격해 가던 중 한 농가에 숨어있던 적병으로부터 집중사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정부는 충렬의 표상인 송서규 중령의 업적을 기려 1계급 특진을 시켜 대령으로 진급시키고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지금 송 대령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5-18묘역에 안장되어있다.
□ 고향땅 제주에 동상건립
또한 2006년 11월 6일 제주시 노형동 산 19-2번지 제주시 충혼묘지입구에서 고 송서규대령 제 39주 추모식과 함께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 이동상은 제주특별자치도 보훈청이 기금을 지원하고 제주특별자치도가 땅을 제공하여 이루어졌다.
1991년 1월 31일 펴낸 온평리 마을지에도 “호국의 별 송서규 육군대령”이라는 제하에 송대령의 장렬한 전사 장면을 게재하였다.
미망인 허록여사는 육군 간호장교 대위 출신으로 대한 적십자사에서 30년간 보건 강사와 의료봉사활동을 하여왔으며 대한 적십자사 총 재상과 전쟁미망인회에서 주는 국민포장을 수여받았다. 그 후 여사는 건강악화로 2007년 11월 20일 타계하였다. 그의 외아들인 송재용은 현재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발췌> 정수현[한라의 영웅들] 제주특별자치도재향군인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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