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서흥김씨 대종회 원문보기 글쓴이: 편집자
[기조논문] 한훤당 김굉필 도학의 전승 양상 | |||
Ⅱ. 한훤당(寒暄堂)의 도학(道學) 전형 『경현록』을 편집할 때 수집된 약간의 시문 외에, 성종 연산조의 대사성(大司成) 옥계(玉溪) 반우형(潘佑亨 생몰년 미상)이 전한 것으로 알려진 「한빙계(寒氷戒)」*註1) 등 십 수 편으로, 그 저술이 매우 적다. 당초 『경현록』을 편찬할 때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구암(龜巖) 이정(李楨 1512-1571) 등의 제현은, 그 당시 수습된 13수의 시와 1편의 부(賦)와 2편의 제문(祭文) 등 한훤당의 저술 시문을 뒤로밀어 두고, 「사실(事實)」, 「행장(行狀)」, 「서술(敍述)」 등 한훤당의 행적에 대한 전문(傳聞)을 맨 앞에 내어 두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당초에 『경현록』 편찬자들이 드러내고자 한 한훤당의 도덕과 학문의 실체이다. 그들은 한훤당이 남긴 문자 저술보다는, 오히려 소학계(小學契)를 결성한 사우들 사이에서 소학동자로 자처하며 소학의 실천과 교수(敎授)에 정진하는데 모범이 되었던 그의 행적과, 당대 사우 문생과 후학들의 증언을 통해 전해진 그의 수신(修身) 제가(齊家) 및 차시(處事) 경륜(經綸) 등, 그가 성취한 도덕과 언행의 규범 및 그 감화의 실제를 드러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훤당이 죽은 지 13년 뒤인 중종 12년에 성균 생원 권전(權磌) 등이 상소(上疏)하여 포은 정몽주와 한훤당 김굉필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여 풍속을 순화하고 선비들의 기풍을 일신할 것을 청하였다.
스스로 도를 책임지고 멀리 정몽주의 실마리를 이어서 염락(濂洛)의 근원을 깊이 연구한 이로는 김굉필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김굉필의 사람됨은 기국(器局)이 단정하고 성품이 깨끗하며 성학(聖學)에 독실히 뜻을 두고 힘써 실천하여,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함에 어디서나 경건하였으며, 엄연히 꿇어앉아 있어도 다가가면 따뜻하고 사람을 가르침에 친절하여 지극한 정성을 보였으니, 배우러 가는 이가 있으면 모두 『소학』 『대학』을 우선하여, 규모가 이미 정해져 있고 조목에 질서가 있었습니다. 정치가 어지러운 시대를 당하여 환난에 고생하면서도 태연히 처신하여, 독실하고 경건한 공부를 해이하지 않고서 처음 그대로 밤낮으로 계속하여 죽은 뒤에 그쳤습니다. 풍채를 우러러 사모하여, 지금의 학자들이 태산북두로 여겨, 아직도 덕행(德行)을 귀하게 여기고 문예(文藝)를 천박하게 여기며, 경술(經術)을 존중하고 이단(異端)을 누를 줄 알고 있으니, 전하께서 호오(好惡)를 밝히고 취사(取捨)를 살펴서 기강을 정돈하고 풍화(風化)를 펼치려 하시는 것도 실로 김굉필의 힘입니다.*註2)
한훤당이 갑자사화를 당하여 죽은 지 불과 13년 만에 그를 문묘(文廟)에 종사하 자는 이 논의는, 효순(堯舜) 공맹(孔孟) 이래 도학(道學)의 전수가 주렴계(周濂溪)와 이정(二程)과 주자(朱子)의 성리학으로 천명되었고, 동국에서는 기자(箕子)의 팔조교(八條敎) 이래 포은 정몽주가 동방의 유종(儒宗)인데, 그 단서를 계승한 것이 김굉필이라는 전제로 제기되었다. 미덕을 실천함으로써 하나의 훌륭한 인격을 성취하였고, 그 처신이 엄정하고 온화하며 교육에 규모가 있고 정성을 다함으로써, 이로 인하여 명리(名利)를 취하는데 급급한 문예(文藝)를 천박하게 여기고 덕행(德行)을 무엇보다 우선하는 기풍을 진작하였다는 사실에 놓여 있었다. 퇴계선생 이황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행장에서 한훤당을 도덕 학문을 형용한 취지 역시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대개 우리 동국의 先正 가운데는 道學에 대하여는 비록 文王의 시대가 아니라도
흥기하는 있었지만, 그러나 그 귀결은 끝내 節義와 章句와 文辭의 사이에 있었는데,
오로지 爲己의 학문을 찾아 종사하여 정직하고 진실하게 학문을 실천한 이로는 오직
한훤당만이 그러하였다.*註3)
퇴계는 조선의 도학 연원을 논하면서 절구(節義)와 장구(章句)와 문사(文辭)에 국한되어 있었던 종전의 학문 풍토에서 진정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실천을 보여준 모범이 한훤당(寒暄堂)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사(政事)의 사공(事功)도 그것을 제대로 행할 사람이 있으면 시행되지만 그 사람이 사라지면 그 정사도 종식되듯이, 도덕의 모범도 그 사람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기에 그 사람이 사라지면 그것은 언어 문자의 그림자로 남을 뿐이다. 규모와 대체가 알려져 있고, 그림자로나마 그 성취한 도덕을 형용하여 전하는 말들이 남아 있는데다, 도덕을 성취한 그 사람의 덕행을 직접 보고 들으며 따라서 배우고 행한 자취가 면면히 이어져 간다면, 이를 통하여 그 본디의 모습을 상상하고 뒤쫓아 배우면 또한 크게 어긋나지 않을 수 있다. 학문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가장 충실한 근거이다. 「事實」은 구암 이정(李楨)이 여러 기록을 모아 정리한 초고본을 바탕으로 퇴계 이황이 한훤당의 손자인 김립(金立)과 외증손인 정곤수(鄭昆壽) 등의 기록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이니, 대개 가전(家傳)의 전문(傳聞)을 근간으로 편찬된 것이다. 행장은 한훤당의 문도인 이적(李勣)이 서술한 것으로 그가 직접 견문한 학문과 교학(敎學)의 규모와 차서가 대략 언급되어 있다. 「서술」은 한훤당과 동년생으로 『소학』으로 율신(律身)한 한훤당의 ‘독행무비(獨行無比)’한 행적과 그 사우(師友) 및 문도들과도 교유가 있었던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기록인 「추강냉화(秋江冷話」와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서 발췌한 것이니, 당대 한훤당이 교유하였던 학자들 사 이의 여론을 대략 잘 보여준다. 성인을 준칙으로 삼아 자신의 몸을 닦아서 다른 사람들이 견줄 수 없는 독실한 행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그는 평소에 그 자신의 몸가짐을 엄격하게 단속하여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저녁 늦게 자면서 언제나 의관을 정제하였다. 그는 서른이 넘어 다른 책을 탐독하였으나, 세상을 만회할 수 없음을 알고 관직에 나가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의 스승 점필재 김종직이 이조참판이 되었을 때 시국을 위하여 건백(建白)하도록 권하는 글을 올렸다. 윤신(尹信), 이적(李績), 허반(許磐), 민귀손(閔龜孫), 강소(姜訴) 등 문도들과, 한훤당과 지취를 같이 하였던 정여창(鄭汝昌), 안우(安遇), 이분(李坋), 노조동(盧祖同) 등의 조행(操行)을 함께 거론하여 놓았다. 남효온의 기록을 요약하면 한훤당은 남효온의 교우 인물 가운데 가장 모범이 되었던 인물로서, 그는 『소학』의 규범을 실천하여 율기(律己)의 조행(操行)이 독실하였고, 출처의 의리에 분명한 태도를 가졌으며, 후학들을 계도하는 데 부지런하여 그를 추종하는 문도들이 많았다. 만년 행적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행장에서는 한훤당을 조선에서 ‘도학을 일으킨 유일한 사람[倡起道學 惟公一人]’이라 하면서, 그의 학문은 “날마다 『소학』『대학』을 외워 규모를 세우고 육경(六經)을 탐색하여, 성경(誠敬)을 견지하고 존양성찰(存養省察)을 체(體)로 하며 제치평(齊治平)을 용(用)으로 삼아 대성(大聖)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기약하였다”고 하였다. 요령을 강론하고, 젊은이들에게 하학(下學) 공부를 말하고 어른에게는 의리를 강론하였으며, 저녁에는 다시 문안을 드리고, 밤이 깊어서 강론을 파하여, 이렇게 30여 년 동안 힘썼다”고 하였으며, 덧붙여서 “형조좌랑이 되어 옥송(獄訟)을 판결함에 지성으로 하여 모두들 공정함에 심복하였고”, “무오사화 뒤로 유배되어 평소대로 태연하게 처신하고 순천에서 조용히 죽음을 받았다”고 하였다. 내용을 포함하여 가정과 사우들이 전하는 견문을 토대로 제가(齊家)와 교유와 종명(終命) 등의 일화가 수집되어 있다. 명륜(明倫)의 도리로는 엄격한 모부인을 지성으로 섬긴 일화가 있고, 「가범(家範)」을 지어 자손에게 훈시하였는데 그중 내외의 직분을 분간하고 상벌을 시행하며 매달 삭망(朔望)에 독법(讀法)의 예를 직접 시행한 일을 특별히 드러내었고, 증조비 곽씨(郭氏)의 선세(先世) 분묘를 수호하는 일로 각씨(郭氏) 일족에게 분묘 수호를 겸하여 묘제(墓祭) 및 강목(講睦)의 규례를 깨우친 일, 그리고 일두 정여창과 도의를 서로 강론하였으며 금잔(金盞)을 두고 깨우친 일화를 적어 놓았다. 마지막에는 갑인년(1494) 유일(遺逸)로 천거된 이후 관직을 지내며 직분에 충실하였던 일과, 갑자년 순천에서 종명(終命)할 때 손으로 수염을 입에 물고 형을 받은일화를 들어 놓았다. 언행과 그 학문 강학의 규모 및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법도를 묘사한 것인데, 그 내용은 모두 유가의 고대 경전과 성리학의 사상 이념에 근거를 둔 것으로 『소학』 및 『가례』에 그 구체적인 실천 방침이 대략 제시되어 있었다. 엄격하였다는 점, 날마다 『소학』 『대학』을 외어 학문의 규모를 정하여서 가르쳤다는 점, 그리고 『가범』을 지어 자손을 훈계하고 직분을 나누어 삭망에 독법의 예를 행하였다는 점 등 몇 가지 사례는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몇가지 사항은 한훤당의 출현으로 인하여 나타난 조선전기 학문 사상 내지 사회 기풍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징표들이기 때문이다.
|
☞논문출처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제22호(2012년 12월)
정경주 경성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전자우편 mokjae@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