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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 시인
1962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으며, 1991년 계간 「시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버마재비 사랑」「새에 대한 반성문」등이 있으며, 1995년 편운문학상 신인상, 2000년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을 수상했다.
- 복효근論
유성호(문학평론가, 한국교원대 교수)
1. 지속성 속의 변화
최근 우리 시단은 생태주의 시편과 여성주의 시편 그리고 실험성 짙은 내면 지향의 시편들이 주류를 구축했던 시기를 지나, ‘서정(성)’의 근원적 몫이 무엇인가를 깊이 되묻는 분위기를 광범위하게 취하고 있다. 예컨대 ‘서정(성)’이라는 것이 사물과의 호혜적 경험 속에서 우러나오는 인식과 정서를 시적으로 드러내는 원리임을 자각하면서, 시인들은 ‘서정(성)’을 통해 사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자기 성찰의 견고한 의지에 이르려 하고 있다. 이때 시인들은 ‘시적인 것’이 어떻게 ‘서정(성)’을 통해 발원하며 완성되는가를 자신들의 개개 시편을 통해 꿈꾸고 사유하고 표현한다. 말할 것도 없이 ‘시적인 것’은 시를 구성하는 ‘의미’와 ‘소리’의 각별한 어울림에서 발원한다. ‘의미’로 무게중심을 할애했을 때 그것은 전언(傳言)을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사유의 깊이를 가져오고, ‘소리’의 손을 들어주었을 때 그것은 시적 형식 자체를 심미성의 중요한 요건으로 삼게 된다.
등단 15년을 맞고 있는 복효근(卜孝根) 시인의 시세계는 ‘의미’와 ‘소리’의 각별한 어울림을 통하여 ‘시적인 것’의 지경(地境)이 어떻게 완성되어가는가를 아름답게 보여주는 뜻깊은 실례이다. 그동안 그는 일정한 시간을 주기로 ꡔ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ꡕ(시와시학사, 1993), ꡔ버마재비 사랑ꡕ(시와시학사, 1996), ꡔ새에 대한 반성문ꡕ(시와시학사, 2000), ꡔ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ꡕ(문학과경계사, 2002) 등 모두 네 권의 시집을 단정하게 상재한 바 있다. 시집 제목에 잠시 의탁하여 그의 시세계를 추슬러보면, 시는 그에게 일관되게 ‘사랑’과 ‘반성’의 ‘(방)법’이 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시에 표현되는 목소리들은 한결같이 타자를 향한 ‘사랑’과 자신을 향한 ‘반성’의 주체로 나타난다. 요컨대 타자를 향한 ‘사랑’과 자신을 향한 ‘반성’의 에너지가 그의 시적 성층(成層)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축인 것이다.
이번에 3년 만에 출간되는 시집 ꡔ목련꽃 브라자ꡕ(천년의시작, 2005)는, 복효근 시인의 이러한 오랜 시법(詩法)을 충실하게 심화시키고 있으면서도, 그로서는 불혹 이후에 새롭게 맞이한 언어들을 갈무리해 들인 의미 있는 결실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알 수 있듯이 이 시집에 실린 시편들은 그의 이전의 시편들처럼, 자연 현상을 삶의 어떤 깨달음을 가능케 하는 매재(媒材)로 비유하는 방식, 경험적 직접성을 사물 안에 내재한 속성으로 간접화하는 방식, 직접 내면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상관물을 시의 표면에 불러들여 그것들로 하여금 발화(發話)의 주체가 되게 하는 방식 등을 지속적으로 취하고 있다. 그 점에서 이번 시집은 그동안의 복효근 시학과 날카로운 단층(斷層)을 형성하기보다는 완만한 지속성을 견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드럽고 간명한 언어와 심미적 상상력 속에서 생성되고 펼쳐지는 그의 시편들은 이번에도 일관된 흐름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세계는 많은 평자들에 의해서 “존재론적 서정시의 한 가능성”(김재홍, 「해설」, ꡔ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ꡕ)을 보여준다거나 “혼탁한 현실 세계를 비판하기보다는 혼탁해지는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고형진, 「해설」, ꡔ버마재비 사랑ꡕ)하는 세계로 평가되어왔고, ‘시’라는 것이 “일상 속에서 삶의 묘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남에게 이야기하며 공감을 얻어내는 일”(우한용, 「해설」, ꡔ새에 대한 반성문ꡕ)이며 “일상의 체험을 평이한 언어로 옮겨놓는 일”(전정구, 「해설」, ꡔ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ꡕ)임을 증명해주는 뚜렷한 사례로 해석되어왔다.
하지만 이러한 지속성 못지않게 이번 시집에서는 불혹을 넘긴 시인이 바라보는 다른 생의 형식들이 깊이 가로놓여 있다고 보인다. 그래서 이 글은 ‘일상’과 ‘서정(성)’의 견고한 결합이라는 시적 방법론을 줄곧 유지하면서도 서정(성)의 심화를 통해 보다 더 근원적인 생의 형식을 묻고 있는 이번 시집을, 복효근 시학 내부에서의 ‘지속성 속의 변화’라는 관점으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이다.
2. 자연 사물 속에서 듣고 보는 생의 형식들
먼저 이번 시집의 전반부에 배치된 시편들이 보여주는 일차적 외관은, 자연에 미만(彌滿)해 있는 생명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일종의 ‘신성(神聖)’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리려는 시인의 의지와 상상력으로 채워져 있다. 시집 첫머리에 실려 있는 다음 시편은 그 뚜렷한 예인데, 가령 자연 현상이 피어나고 이우는 역동적 과정을 신성한 ‘비밀’이라고 노래하는 시인의 태도는, 일찍이 “꽃핌의 저 고요로운 파열음이 실상은 신(神)의 중얼거림일진대”(「시인의 말」, ꡔ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ꡕ)라고 노래한 바 있는 복효근 시학의 중요한 수원(水源)을 재차 심화시켜 반영한 결과라 할 것이다.
어느 비밀한 세상의 소식을 누설하는 중인가
더듬더듬 이 세상 첫 소감을 발음하는
연초록 저 연초록 입술들
아마도 지상의 빛깔은 아니어서
저 빛깔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초록의 그늘 아래
그 빛깔에 취해선 순한 짐승처럼 설레는 것을
어떻게 다 설명한다냐
바람은 살랑 일어서
햇살에 부신 푸른 발음기호들을
그리움으로 읽지 않는다면
내 아득히 스물로 돌아가
옆에 앉은 여자의 손을 은근히 쥐어보고 싶은
이 푸르른 두근거림을 무엇이라고 한다냐
정녕 이승의 빛깔은 아니게 피어나는
5월의 느티나무 초록에 젖어
어느 먼 시절의 가갸거겨를 다시 배우느니
어느새
중년의 아내도 새로 새로워져서
오늘이 첫날이겠네 첫날밤이겠네
― 「5월의 느티나무」 전문
시인의 시선에 5월에 피어나는 느티나무의 모습은 곧바로 “어느 비밀한 세상의 소식을 누설하는” 신성한 풍경으로 보인다. 그것은 마치 다른 시편에서 “큰 등 같은 연못가 배롱꽃나무가/명부전 쪽으로도 한 가지 뻗어/저승 쪽 하늘까지 다 밝히고 나서/연못 속/잉어의 뱃속까지를 염려하여/한 잎 한 잎/물 위에 뛰어드는데/그 아래 수련이 그 비밀을 다 알고는/떨어지는 배롱꽃 몇 낱을/가만 떠 받쳐주네”(「배롱꽃 지는 뜻은」)라고 말할 때의 “비밀”을 둘러싼 자연 사물 사이의 상응(相應)과 고스란히 의미론적 등가를 이룬다. 말하자면 자연의 움직임이 ‘스스로[自] 그러한[然]’ 것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신성한 “비밀”이 담겨 있고, 자연 사물들은 그 “비밀”을 누설하고 표현하는 주체로 현상하는 것이다. 본디 “계시(啓示, revelation)”라는 말이 ‘누설하다(reveal)’에서 연원했음을 상기할 때, 신의 ‘계시’는 이처럼 ‘자연 사물’의 육체를 통해 그 비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시인은 느티나무의 초록빛을 “더듬더듬 이 세상 첫 소감을 발음하는/연초록 저 연초록 입술들”이라고 비유한다. 그 연초록의 아름다움은 시인으로 하여금 “아마도 지상의 빛깔은 아니어서/저 빛깔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그리고 “햇살에 부신 푸른 발음기호들을/그리움으로 읽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어떤 기표로도 그 눈부신 절정들을 표현해낼 수 없을 것이라 노래하게 한다. 그래서 시인은 “초록의 그늘 아래/그 빛깔에 취해선 순한 짐승처럼 설레는 것을” 그리고 “푸르른 두근거림을” 재차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정녕 이승의 빛깔은 아니게 피어나는” 오월의 초록 느티나무들 안에서 시인은 “어느 먼 시절의 가갸거겨를 다시 배우”면서 “중년의 아내”와 새로운 첫날밤을 상상함으로써 오월의 느티나무와의 살아 있는 신생(新生)의 소통을 완성하고 있다. 말하자면 느티나무의 초록은 신의 비밀스러운 전언처럼 시인의 두터워진 육체를 비집고 들어와 새로운 생의 형식을 실감있게 부여하게 되고, 시인은 그 초록이 번져오는 오월의 한복판에서 상상적 신생의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의 악보는/딱히 오선은 아니어서/더더구나 직선만은 아니어서/넌출넌출 산 능선과/그 사이로 굽이굽이 사라져/보이지도 않은 강줄기가 그것이리라”(「음악」)라는 관찰과 표현에 그대로 이어지는 시적 상상력의 한켠이라 할 것이다.
이렇듯 신성의 자기 표현으로 자연 현상을 읽고 있는 복효근 시인의 시선은, “귀, 잎사귀라 했거니/봄 새벽부터 가을 늦은 저녁까지를/선 채로 귀를 열고 들어왔나니/비바람에 귀싸대기 얻어터져가며 세상의 소리소문/다 들어왔나니 그리하여 저 귀는/바야흐로 제 몸을 심지 삼아 불 밝힌 관음(觀音)의 귀는 아닐까”(「가을 잎사귀」)라든가 “매화 한 송이는/저 산 하나와 그 무게가 같고/그 향기는 저 강 깊이와 같은 것이어서/그냥 매화가 피었다고 할 것이 아니라/어머, 산이 하나 피었네!/강 한 송이가 피었구나! 할 일이다”(「매화 찬(讚)」)에서처럼 자연을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적 통일체(organic unity)’로 보고자 하는 태도를 깊이 반영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딸의 성장과 자연의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포개놓은 아름다운 시편에서 시인은 “목련꽃 목련꽃/예쁘단대도/시방/우리 선혜 앞가슴에 벙그는/목련송이만할까/고 가시내/내 볼까봐 기겁을 해도/빨랫줄에 널린 니 브라자 보면/내 다 알지/목련꽃 두 송이처럼이나/눈부신/하냥 눈부신/저……“(「목련꽃 브라자」)라면서 아버지로서의 사랑과 자연의 아름다움 그리고 딸아이의 수줍음을 모두 ‘목련꽃’의 심상에 얽어놓는 유기체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자연 사물 속에서 밝게 발견하는 생명의 약동과는 다른 목소리가 이번 시집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은 새겨둘 만하다. 그것은 생명과 죽음이 서로 안팎을 이루고 있는 생의 형식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시선과 관련된다. 곧 시인은 “상처가 서로를 끌어안는 소리/다시 실뿌리 내려 먼 강물을 끌어오는 소리/어머니 자궁 속에서 듣던 그 모음 같은 것 자음 같은 것”(「수선화에게 묻다」)을 들으면서 “잠시 내 죽음의 자세를 생각”(「매천사당에서」)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도 하 따뜻하지 싶다”(「풍경(風磬)」)라면서 말이다. 다음 시편에 이처럼 ‘죽음’의 흔적들을 통해 생의 형식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잘 나타나 있다.
잘라놓은 연어의 살 속엔
나이테 무늬가 있다
연하디 연한 연어의 살결에
나무처럼 단단한 한 시절이 있었다는 뜻이리라
중력을 거부하고 하늘로 솟구치던 나무를
눈바람이 주저앉히려 할 때마다
제 근육에 새겨넣은 굴렁쇠 같이 단단한 것이
나무의 나이테이듯이
한사코 아래로만 흐르려는 물길을 거슬러
폭포수를 뛰어넘는 연어를
사나운 물살이 저 바닥으로 내동댕이칠 때마다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솟구쳐
여린 살 속에 쓰라린 햇살이 나이테로 쌓였으리라
켜놓은 원목의 나이테가
제가 맞은 눈바람을 순한 향기로 뿜어내놓듯이
그래서
연어의 살결에선 강물냄새가 나는 것이다
죽은 어미연어의 나이테를 먹은 새끼연어가
폭포수를 뛰어넘어 몇 만 년을 두고
다시 그 강에 회귀하는 것은 다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 「연어의 나이테」 전문
“잘라놓은 연어의 살 속”에서 시인은 “나이테 무늬”를 발견한다. 그것은 “연하디 연한 연어의 살결에/나무처럼 단단한 한 시절이 있었다는 뜻”을 표현한다. “중력을 거부하고 하늘로 솟구치던 나무를/눈바람이 주저앉히려 할 때마다/제 근육에 새겨넣은 굴렁쇠 같이 단단한 것이/나무의 나이테”로 각인된 것이라면 “한사코 아래로만 흐르려는 물길을 거슬러/폭포수를 뛰어넘는 연어를/사나운 물살이 저 바닥으로 내동댕이칠 때마다/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솟구쳐/여린 살 속에 쓰라린 햇살이” 쌓인 것이 바로 그 “나이테 무늬”였다고 시인은 해석한다.
이때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그 “나이테 무늬”의 단단함이다. 왜 ‘단단함’일까? “연하디 연한 연어의 살결”과 “나무처럼 단단한 한 시절”을 대비함으로써 시인은 나무들이 “제 근육에 새겨넣은 굴렁쇠 같이 단단한 것”으로 나이테를 두르듯이 오랜 죽음에의 유혹을 견뎌낸 연어의 살 속에서 생명의 위대한 역리(逆理)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시적 발견과 해석은 “죽은 어미연어의 나이테를 먹은 새끼연어가/폭포수를 뛰어넘어 몇 만 년을 두고/다시 그 강에 회귀하는” 과정과 연결되면서 눈바람과 몇 겹의 ‘죽음’을 건너서 견고한 생의 형식에 이르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나아가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일상적 삶에 대한 충실한 개관을 하면서도 ‘죽음’의 태도에 대해 깊이 사유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준다. “바로 옆에 있는 꽃에게로 가기 위해서도 죽음의 관문을 거쳐야 한다. 내가 어찌 나인 채로 꽃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까. 꽃의 중심에 가 닿기 위해서는 죽어서 꽃이 되어야 하리라. 그래 일생에 죽음이 어찌 한 번뿐이랴. 저 나무 한 그루에 다가가기 위해서도 일생이 걸린다.//나의 시는 다생多生의 내 죽음의 기록인지도 모른다.”(「自序」)라는 다소 충격적인 고백이 이러한 시사(示唆)를 주고 있는데, 가령 시인은 “삶과 죽음의 자세가 우주보다 어렵다”(「음악」)라든가 “저 주검이, 저 죽음이 아름답다면/이 살아있음이 아름답지 않으면 안 된다는 역설일까”(「누란의 미녀 - 비단길 3」)라면서 “애(愛)와 증(憎), 삶과 죽음의 자웅동체이다 어느 것 하나로는 심장은 뛰지 않는다 내 사랑도 죽이고 싶을 만큼의 똑같은 전압이 아니었다면 너와 나와의 온몸에 저릿저릿 피를 흐르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제 몸에 꼭 맞는 관(棺) 속에 누운 건전지가 죽을힘으로 피워내는 아름다운 불꽃”(「생(生)」)이라고 삶과 죽음의 동시성 혹은 상동성(相同性)을 강렬하게 노래한다. 이는 오래 전에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ꡔ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ꡕ)들을 노래한 세계, 곧 누구나 자신의 생의 형식 속에 ‘죽음’을 거느리고 있고 그 생은 ‘죽음’에 빚지고 있다는 생각을 편재화(遍在化)한 결과인 셈이다. 그러니 “나의 시는 다생多生의 내 죽음의 기록”(「自序」)이라는 역설이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과 한계성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분명한 사건은 물론 ‘죽음’일 것이다. 그만큼 ‘죽음’은 인간의 경험 속에서 모든 관계와 기억들을 단절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근원적인 지점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우리의 몸과 경험 안에 ‘죽음’의 가능성을 증식시켜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갖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친숙하게 맞아들여야 하는 측면이 존재하게 된다. 복효근 시인의 불가적(佛家的)이고 포용적인 시적 세계관은 이번 시집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 안에 ‘죽음’의 흔적과 가능성이 편재해 있다는 발견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러한 시적 해석이 그의 시편들로 하여금 일정하게 ‘지속성 속의 변화’를 갖게끔 하는 근원적인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3. 구체적인 사물 속에서 발견하는 삶의 이법(理法)들
우리가 잘 알듯이, ‘시적인 것’을 통해 시인들이 빈번하게 취하는 태도 가운데 하나는 사물 속에 깃들여 있는 혹은 자신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시간’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일일 것이다. ‘시간’만이 모든 인간의 욕망에 평등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시간’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증언하고 규정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생의 형식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시대의 시에 나타난 서정의 내질은, ‘시간’ 경험과 그것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내면의 파동으로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복효근 시인은 “혼자서 날아온 먼 길과 다시 혼자서 가야 할 먼 길 사이/단 한 번뿐인 이 시간”의 순간성 속에 오래도록 누적되어 있는 “삶과 사랑의 무게”(「잠자리에 대한 단상」)를 가늠하고 표현하려는 지향을 줄곧 보여준다. 그래서 시인은 사물 안에 쌓여 있는 오랜 시간의 흔적들을 응시하고 채집하고 표현한다.
잘 빚어진 찻잔을 들여다본다
수없이 실금이 가 있다
마르면서 굳어지면서 스스로 제 살을 조금씩 벌려
그 사이에 뜨거운 불김을 불어넣었으리라
얽히고설킨 그 틈 사이에 바람이 드나들고
비로소 찻잔은 그 숨결로 살아있어
그 틈, 사이들이 실뿌리처럼 찻잔의 형상을 붙잡고 있는 게다
틈 사이가 고울수록 깨어져도 찻잔은 날을 세우지 않는다
미리 제 몸에 새겨놓은 돌아갈 길,
그 보이지 않는 작은 틈, 사이가
찻물을 새지 않게 한단다
잘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 벽도
양생되면서 제 몸에 수 없는 실핏줄을 긋는다
그 미세한 틈, 사이가
차가운 눈바람과 비를 막아준다고 한다
진동과 충격을 견디는 힘이 거기서 나온단다
끊임없이 서로의 중심에 다가서지만
벌어진 틈, 사이 때문에 가슴 태우던 그대와 나
그 틈, 사이까지가 하나였음을 알겠구나
하나 되어 깊어진다는 것은
수많은 실금의 틈, 사이를 허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네 노여움의 불길과 내 슬픔의 눈물이 스며들 수 있게
서로의 속살에 실뿌리 깊숙이 내리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 「틈, 사이」 전문
“잘 빚어진 찻잔” 속에는 “실금”이 수도 없이 많은데, 이는 “마르면서 굳어지면서 스스로 제 살을 조금씩 벌려/그 사이에 뜨거운 불김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그 틈, 사이들이 실뿌리처럼 찻잔의 형상을 붙잡고” 있음으로써 찻잔은 자신만의 견고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틈, 사이’는 찻잔 속에 새겨져 있는 일정한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불김/바람/숨결”을 오래도록 맞아들인 찻잔 내부의 시간을 은유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 미세한 틈, 사이가/차가운 눈바람과 비를 막아”주고 “진동과 충격을 견디는 힘”을 오래도록 찻잔에게 가져다준 것이다.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서로의 중심에 다가서지만/벌어진 틈, 사이 때문에 가슴 태우던 그대와 나” 역시 오랜 시간을 격리해서 혹은 맞붙어서 살아온 ‘미적 거리(aesthetic distance)’를 사이에 두고 있음으로써 “그 틈, 사이까지가 하나였음을” 알게 되었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그래서 “하나 되어 깊어진다는 것은/수많은 실금의 틈, 사이를 허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시인이 도달한 삶의 지혜가 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사물에 대한 가없는 “연민과 애련의 시간”(「어느 연민의 시간」)을 통해 구축된 지혜이기도 하다. 사물을 향한 그 “알량한 자비심”(「새대가리 변명」)이라고 시인은 표현했지만, 그 연민의 시간이야말로 복효근 시학을 숙성시키는 필연적인 발효 시간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발효의 시간이 축적된 후에야 비로소 시인은 “죽음이 푸른 풀잎처럼 반짝이는 순간”(「잔디에게 덜 미안한 날」)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과연 ‘연민’은 위대한 시적 순간의 결정(結晶)이다.
전주에 가면 다문(茶門)이라는 찻집이 있어
그 쥔장은 야생차를 고집하는데
그 냥반 따라 순창 회문산 야생차를 따러 갔다
여린 찻잎 다시 말하면 차의 잎
차의 입, 차의 입술
햇살과 바람과 이슬을 마시는 차나무의 입을
그 야들야들한 갓난아이의 입술 같은 찻잎을
잔인하게 또옥똑 따는 것을 보고
다시는 차를 마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 어린 잎순들을 달구어진 가마솥에 넣고 덖어서
꺼내어 덕석 위에 쏟아놓고
손으로 부벼서 찻잎에 상처를 낸다
찻물이 잘 우려나오게 하기 위함이리라
그러기를 아홉 번이라
아아 잔인하고 모진 제다법이여
다시는 차를 마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완성된 차를 시음해보시라
갓 만든 차를 다관에 담고 물을 붓자
영영 죽어버린 줄 알았던 찻입들이
잘 익은 물 속에
제가 마신 회문산의 하늘과 구름과 바람을
다 풀어내 놓는데
아홉 번의 가마솥 모진 연단을 연록색 향기로 빚어내 놓는데
그리곤 아무 일 없다는 듯
애초 나무에 매달렸던 그 형상으로 돌아가
물고기처럼 다관 속에 노니는데
그 차를 마시고도
그 찻잎의 흉내를 한 자락이라도 내지 못할 량이면
이승에서건 저승에서건
다시는 다시는
차를 마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 「어떤 제다법(製茶法)」 전문
시인은 야생차를 따러 갔다가 “여린 찻잎” 곧 “차의 입, 차의 입술/햇살과 바람과 이슬을 마시는 차나무의 입”인 “야들야들한 갓난아이의 입술 같은 찻잎”이 잔인하게 떼어지는 것을 보고는 “다시는 차를 마시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이때 ‘잎/입’의 언어유희(pun)를 통해 “찻잎”이 ‘햇살’과 ‘바람’과 ‘이슬’을 마시는 “찻입”으로 현상하고 있다. 그런데 떼어진 찻잎을 “달구어진 가마솥에 넣고 덖어서/꺼내어 덕석 위에 쏟아놓고/손으로” 부비는 과정을 시인은 “찻잎에 상처를” 내는 과정으로 읽는다. 그 푸른 상처들은 “찻물이 잘 우려나오게 하”는 인간적 욕망의 산물인 셈이다. 이 과정을 두고 “잔인하고 모진 제다법”을 발견한 시인은 더더욱 “다시는 차를 마시지 않으리라 생각”하게 된 것이다.
뭇 생명들을 감싸안으면서 연민과 애련의 시간을 쌓아온 시인으로서는 자연스럽게 내보이게 된 ‘위대한 거절’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연민의 시간들은 황사먼지 뒤집어쓰고 피어난 목련을 두고 “어디엔가 늘 대신 매 맞아 아픈 이가 있다/목련에게 미안하다”(「목련에게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순간이나 “누천년을 이어온 비단카펫 직조 공장에 가서/크게는 몇 천 달러를 호가하는 그 아름다운 카펫, 수공직조기술에 놀라/꽃스런 처녀에게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지긋지긋하다는 듯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한다/제발 이 길에서 벗어나고 싶어요”(「비단길」)라면서 이역(異域) 땅 타자의 삶에 대해 연민하는 순간으로 충실하게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어떤 제다법(製茶法)」의 묘미는 ‘찻잎’의 상처에 대한 연민을 자신의 시업(詩業)에 대한 그것으로 변용하면서 생겨난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갓 만든 차를 다관에 담고 물을 붓자/영영 죽어버린 줄 알았던 찻입들이/잘 익은 물 속에/제가 마신 회문산의 하늘과 구름과 바람을/다 풀어내 놓는” 것을 깊은 느낌을 갖고 발견한다. 이때도 “하늘과 구름과 바람을/다 풀어내 놓”기 위해서는 ‘찻잎’이 아닌 ‘찻입’이라는 기호가 필요하다. 그 “아무 일 없다는 듯/애초 나무에 매달렸던 그 형상으로 돌아가/물고기처럼 다관 속에 노니는” 찻잎들을 보면서 결국 시인은 “그 차를 마시고도/그 찻잎의 흉내를 한 자락이라도 내지 못할” 경우 절대로 “차를 마시지 않으리라 생각”하게 되는데, 이때 차를 마시지 않겠다는 결의는 시를 쓰지 않겠다는 결의의 우의(寓意)로 고스란히 읽히게 된다. 곧 시인은 상처와 죽음 속에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신의 오랜 시간을 풀어놓고 있는 찻잎들처럼 자신의 육체와 정신 속에 깃들인 오랜 시간들(“하늘과 구름과 바람”)을 펼쳐놓지 못할 바에야 시인일 수 있겠느냐는 가혹한 자기 질문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찻잔/찻잎’의 이중적 속성을 통해 그 안에 녹아 있는 오랜 시간을 응시하고 발견해내는 시인의 감각은 구체적인 사물 속에서 삶의 보편적 이법(理法)을 읽어내는 시적 혜안으로 더욱 심화되어간다.
한때는
하얀 꿈결 같은 면사포였다 첫날밤처럼
얇은 겉포장지가 벗겨지고부터
제 살을 뜯어
뉘 더러운 밑을 닦거나
뉘 죄지은 입술을 닦거나
세상 더러운 얼룩을 닦는데
짧은 한 평생이 다 갔다
그래, 한때는
뼈대 있고 탄력이
통통 튀는 시절도 있었지만
그 하얀 꿈의 마디마디 잘려나가
휴지통에 버려진 뒤
비로소 남는 텅 빈 뼈 한 토막
다 써버린 두루마리 화장지
재활용 불가능 우리나라
골다공증 여자의 일생
― 「두루마리화장지에 대한 단상」 전문
‘두루마리화장지’라는 구체적 사물의 외관과 속성을 원용하여 시인은 한때는 그것이 “하얀 꿈결 같은 면사포였다”는 것 그렇지만 “첫날밤처럼/얇은 겉포장지가 벗겨지고부터/제 살을 뜯어/뉘 더러운 밑을 닦거나/뉘 죄지은 입술을 닦거나/세상 더러운 얼룩을 닦는 데” 쓰이면서 “짧은 한 평생이 다 갔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한때는/뼈대 있고 탄력이/통통 튀는 시절도 있었”건만 “그 하얀 꿈의 마디마디 잘려나가/휴지통에 버려진 뒤”에는 “텅 빈 뼈 한 토막”으로 남는 두루마리화장지는 “재활용 불가능 우리나라/골다공증 여자의 일생”으로 핍진하게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사물의 속성을 통해 “우리나라/골다공증 여자의 일생”을 비유하고 있는 이 시편은 그래서 한결 우의적이고 사물 해석의 투명성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안목은 가령 “저 호화빌라에 조난깃발 하나 매어져 있어/가서 보니 베란다에 걸려있는 시래기 한 두름//여기, 절해고도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니!”(「향수」)라든가 “하늘의 별은/사람들이 켜든 지상의 별에 대한/한 응답”(「별」)이라는 비유를 통해 자연 사물 속에서 신성한 빛과 기운을 찾으려는 의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모두들 저 위를 향하여/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을 때/저 빙점 이하의 낮은 곳으로/쓸쓸히 계단을 내려서는 이들”에 대한 비유로 “거꾸로 매달려/이내 목을 툭 떨구는 순교의 아침을 꿈꾸었을까/저 무모하게 투명한 피”(「고드름」)라고 ‘고드름’을 노래하는 것 역시 이 같은 태도의 연장선상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구체적 사물 속에서 삶의 보편적 이법을 발견해내는 복효근 시인의 시적 시선은, 이번 시집에서도 완성도 높은 개개 시편들을 통해 다양하고도 풍부한 심미적 형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시세계는 서정시인 복효근만의 고유한 방법론적 주춧돌이자 그를 다른 시인들과 선명하게 구별해주는 유력한 존재론적 표지(標識)인 것이다.
4. ‘사랑’과 ‘반성’의 언어
서정시의 존재 원리는, 상품 미학의 규율을 통해 자기를 완성하는 문학 시장의 생리와 치명적으로 불화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시인이라는 정체성 역시 나날이 점증(漸增)해가는 제도, 관행, 담론들의 완강한 일방통행에 의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 점에서 우리는 ‘서정(성)’ 자체에 대해 깊이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시인의 상(像)이 여전히 소중하고도 강력한 서정시의 존재 근거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관점과 태도는, 전자 문명의 가공할 문화 통합 능력과 그에 따른 불안과 공포에도 불구하고 서정시라는 존재 양식을 지켜가는 근원적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왔듯이, 복효근 시세계의 핵심은 일상적 사물과 자신의 삶을 ‘사랑’과 ‘반성’의 시선으로 통합하여 성찰하는 서정(성)에 있다.
커다란 정치 이념이나 질서에 귀속되지 않는 다양하고도 구체적인 일상 체험들을 삶의 보편적 이법으로 확산하여 형상화하는 것은, 이제 누가 보아도 복효근만의 고유한 시적 브랜드라고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화려한 비평적 조망이나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제 낱낱의 사물들이 품고 있는 시적 비의(秘義)를 발견하고 형상화하는 그의 시적 태도와 역량에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시집 안의 어느 시편을 인용해도 좋을 것 같은 시편들끼리의 균질성(均質性)과, 낱낱 시편의 심미적 완결성은 복효근 시를 읽는 독자들을 한결 안도케 할 것이다.
또한 복효근 시는 서정시의 소통 가능성을 가장 부드럽고 친화력있는 소재, 어법을 통해 구현하고 있다. 그의 시에 차용된 소재들은 한결같이 인간적 삶의 그 무엇을 환기하는 상관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 그 자체를 물신적으로 송축하고 절대화하는 일부 생태주의 시편과 그의 시가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인데, 여기서 우리는 그가 삶의 거짓됨과 이중성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사랑’과 ‘반성’이라는 시선으로 수렴해들이는 놀라운 자기 회귀성을 가진 시인임을 알게 된다. 그의 미더운 시선을 따라 우리도 이제 그 ‘사랑’과 ‘반성’의 언어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인은 “지금까지 나는/연꽃의 아름다움과 연향의 꽃다움만을 노래해왔다”(「연잎의 마음」)라면서 “제 몸을 저 아닌 것들에게 내주”(「나무의 전모」)는 ‘나무’의 모습 속에서 ‘죽음’과 ‘사랑’의 등가적 원리를 새롭게 발견한다. 그리면서 동시에 “하느님이 계시다면/너 오늘 어디서 무얼 했느냐, 이놈의 쌀벌레 하시며/나를 하수구구멍에 쏟아넣지나 않으실지……/한 그릇 밥이 무섭다”(「쌀벌레」)라면서 가열한 자기 반성적 시선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이번 시집을 통해 복효근 시인은 삶과 죽음, 사랑과 반성, 연민과 깨달음의 시간을 구체적인 사물 속에서 깊이 응시하고 표현하는 서정(성)의 심화를 통해 보다 더 근원적인 생의 형식을 탐구하였다. 그가 지리산 자락 요천가에서, 정령치에서 다짐하고 있을 ‘낮은 목소리’가 (내게는) 참으로 각별하게 들린다. “한 고비 거쳤으니 이젠/깊어져, 아득히 깊어져야 한다”(「정령치」)는 다짐 말이다.
삶의 온전성, 시의 시다움을 위하여
-복효근 첫 시집 발문
김재홍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완강하던 이데올로기의 대립 시대가 종언을 고하면서 그야말로 참다운 삶이 소중한 시대, 시다운 시가 그리워지는 연대에 접어들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 가깝게는 일제강점기와 분단시대를 살아오면서 우리는 고단한 역사에 시달리고 핏발선 눈초리들에 주눅들어 삶의 온전성을 제대로 간직하기 어렵기만 했다.
이제 새로운 연대가 시작되면서 이 땅에도 새봄의 기운이 넘실거린다. 빼앗겼던 들에도 봄은 왔건만 이봄이 진정한 역사의 봄, 생명의 봄으로 개화하고 결실을 맺어갈 수 있을 것이런가?
90년대 이땅의 시는 하나의 혼돈기 또는 모색기에 처해 있는 듯하다. 역사주의/ 순수주의 또는 민중시 / 해체시의 대립구도가 와해되면서 이 땅의 시는 하나의 새로운 전환기에 접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기성 이데올로기나 사회학적 논리의 일방통행성이 지양 극복되면서 삶의 알맹이로서 진실과 개성을 예술적인 형상성으로 담보해내는 노력들이 소중하게 평가되기 시작한 것이다. 시다운 시란 과연 어떤 것일까? 그것은 보편적으로 말해서 사상성과 예술성, 실천성과 문학성이 탄력 있게 조화를 이룬 것을 일컬을 수도 있으리라. 아니면 낱낱의 삶의 중요성을 바탕으로 하면서 그것이 사회와 역사를 향해 열려가야 한다거나 형이상적 깊이 또는 신성사적 높이를 함께 포괄해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한 일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진정한 시는 구호이거나 추상적인 논리 혹은 관념 그 자체일 수 없다.
시의 본도로서 서정성이 샘물처럼 굽이치면서 삶의 알맹이로서 생명력을 감싸안아야만 한다. 그러기에 90년대에 참된 시를 지향하는 노력이 어려울 수밖에 없고, 많은 시인들이 새로운 모색의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으리라. 특히 이즈음의 신인들은 어떻게 자신의 방향을 모색해가야 할지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보고 배우며 흉내내려 하던 70~80 년대적인 시의 우상들이 이제는 더 이상 바람직한 전범으로 여겨지기 어려울 뿐더러, 그러한 우상들조차도 많은 경우 동어반복의 수준에서 크게 진전하기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유행처럼 성행하던 모작이나 아류화 성향이 이제는 극복될 조짐이 현저하다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수많은 신인들이 시단에 청운의 뜻을 품고 등장하지만, 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가기에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시인이란 온갖 종류의 편견과 개성으로 형성되는 집단들, 즉 문학동네들의 총집합이기 때문에 그 어느 곳에라도 속하지 않으면 작품 발표 하나도 쉽지 않으며 더구나 눈에 띄거나 주목받는 일이란 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역량 있는 신인들이 좌절하기 쉬우며 뿌리 뻗어 나가기가 쉽지 않다. 사실 등단이란 이제부터 시를 쓸 수 있다는 하나의 고독의 자격증 또는 허무의 면허증을 얻는 일에 불과한 것이기에 처절한 고독과 허무와의 격투를 벌이는 것이 당연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역량 있고 성실한 신인을 새롭게 발굴하고 적극적으로 육성해 가는 일은 매우 긴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한 신인으로 필자는 복효근 시인을 꼽고 싶다. 이제 막 출발하는 선상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그이기에 섣불리 평가하고 자리매김을 하는 일은 쉽지 않다. 다만 그의 시적 개성과 방법적 특성 그리고 가능성을 슬며시 진단해 봄으로써 90년대 우리 신인시의 예후를 읽어보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복효근의 시는 기본적으로 식물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전원심상 또는 천체심상을 섭수해 들이면서 민중적 생명력 또는 생명사랑의 실마리를 열어가고 있는 것이 주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시에는 ‘쑥/ 용담꽃/ 며느리밑씻개풀/ 엉겅퀴/떡갈나무/ 갈대/ 삐비꽃/ 양파’등 무수한 식물심상들이 ‘직녀성/ 숲/ 눈길’ 등 천체심상 또는 전원심상과 연결됨으로써 하나의 식물적 상상력의 상징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식물상상력의 체계가 모두 ‘아내/ 며느리/ 어머니/ 할머니’등 소외된 삶의 서글픈 생명감각 혹은 끈질긴 민중적 생명력과 연결됨으로써 목숨의 무게를 담보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입덧하는 아내와/ 솜털 뽀얀 쑥을 캐면서/ 곰 한 마리를 생각했어// 해마다 칼끝에 잘려도/ 젖빛향기로 돋아나/ 내 어머니의 어머니…어머니의/어머니가 사람이 되리라/ 사랑이 되리라” 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섬세한 전원서정이 굳건한 생명력과 결합됨으로써 민족적인 삶 또는 민중적인 생명력의 끈질김을 잘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사랑’이라는 은유 등식에서 인간사랑 또는 생명사랑의 정신이 선명히 각인된다. 그러면서 『용담꽃』에서 보듯이 “가을 산자락 후미진 곳에서/ 그저 수줍은 듯 잠시/ 그대 눈망울에 머무는 일/ 그렇게 나는/ 그대 슬픔의 산높이에서 핀다”처럼 인간 본질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서 근원적인 슬픔의 정서를 잘 형상화한다.
또한 『며느리밑씻개풀』에서처럼 “우리나라 서러운/ 서러운 풀이름/ 며느리밑씻개풀을 아는지요”와 같이 민족적인 삶의 원형성과도 접맥되어 있는 것이다. 온갖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되어 온 이 땅의 역사와, 그 속에서 고단하게 살아온 민초들의 애환이 며느리밑씻개풀이라는 해학적이면서도 안쓰러운 서정적 상징으로 구상화된 것이다. 또한 “수없이 밟히고 베인 자리마다/ 돋은 가시를 보리라// 누군가 잃고 또 떠나/ 앓는 가슴 있거든/ 그의 끓는 약탕관에 스몄다가/ 그의 가슴 속 보라빛 꽃으로 맺히거라”(『엉겅퀴의 노래』 부분)처럼 척박한 이 땅의 삶을 견디며 살아온 민중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떡갈나무 겨울나기』에서는 “떡갈나무 잎사귀 뒤에는/ 사마귀 알이나/ 송충이 알 혹은 풍뎅이/ 알이 매달려 있어요// 떡갈나무 잎사귀는/ 성프란치스코 누더기 옷 같습니다”처럼 알이 표상하는 생명사상 또는 사랑의 정신이 민중적 생명력과 서로 감싸안으며 밀고 당기고 있기에 시인의 시가 단순한 민중시에 떨어져 버리지 않고 그 서정적 내질을 심화하게 되는 구조적 견인력을 이룬다. 『삐비꽃』, 『까치밥』에 보이는 배고픔이나 외로움 길들이기 그리고 “나무가 나무에 기대어 숲을 이루다/ 저희가 가진 것 없어 엉키어/ 온몸으로 내가 너다”라는 『숲』의 내용도 결국은 이러한 생명사랑의 정신을 표상한 것이 분명하다. 특히 『인월장에서』라는 작품에 보이는 호남장터에 와서 영남사투리로 석류 파는 영남 할머니의 “셍뉴 사이소”라는 구절 속에는 이 시대를 짓누르고 있는 온갖 종류의 분단을 극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담겨져 있다고 하겠다.
삶의 구체성에 맞닿은 서정성이 사회·역사성으로 삼투해 들어감으로써 서정적 힘을 획득한 좋은 예라고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시인의 시에는 존재에 대한 내성과 그 극복의지가 내밀하게 잠재해 있어서 관심을 끈다.
눈이 내린다/ 오던 길 지워버리고/ 돌아갈 꿈 꾸지 말라고/ 어머니 탯줄을 떠나듯/ 뒤돌아보지 말라고/ 눈 내린다 길을 떠나/ 길 아닌 길 위에서 길 잃고/ 나마저 지우며 눈이 내린다/ 내가 지워진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인지 묻지 말라고/ 앞산도 집들도 그리운/ 사람도 지워버리고/ 눈 내린다 비로소/ 내가 나의 길이 되어/ 길 밝혀 가라고/ 눈이 내린다/ 어느 눈 그친 새 세상/ 길 잃어 스스로/ 길이 된 사람들 함께/ 지친 어깨 나란히 가라고/ 온 세상 지우며 눈이 내린다
『눈길, 청학동 가는』 전문
이 시는 ‘눈’과‘길’의 상징성을 통해서 잃어버리고 새로 생기는 것으로서의 삶의 과정, 즉 소멸과 생성, 만남과 이별의 변증법적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삶과 존재에 대한 내면 탐구를 통해서 사물의 본질과 인생의 깊이를 천착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자아화, 자아의 내면화, 내면의 심화라고 하는 서정시의 본질을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하게 통찰함으로써 존재론적 서정시의 한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복효근의 시는 개인과 사회·역사가 서로 껴안고 감싸면서 서정성과 예술성 그리고 철학성을 함께 섭수해 들임으로써 90년대 신진 서정시의 한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열어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랫동안 일그러져 왔던 이땅 삶의 불구성을 극복하여 삶의 총체성·온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또한 시의 본도로서 서정성과 사회성을 확보하고 사상예술을 고양하기 위한 노력을 진지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돌발적인 시적 장치나 특이한 내용 또는 기법의 구사가 두드러지지 않는다거나 무슨 대단한 주의주장을 현란하게 펼쳐보이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시는 진지성이나 치열성 그리고 시적 성숙성에 있어서 90년대 신진시의 가능성을 엿보기에 충분한 것으로 여겨진다. 90년대 이땅의 시는 그 삶이 그러해야 하듯이 진정한 인간 사랑, 생명사랑, 자유사랑의 정신이 예술적으로 탁월하게 결합돼 가야만 할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시인의 각고분발과 대성을 기원한다.
체험과 성찰의 시
- 복효근 시집 『새에 대한 반성문』
유성호 | 문학평론가
우리 서정시는 ‘현실/서정’, ‘참여/순수’, ‘전통/실험’, ‘리얼리즘/모더니즘’ 등 대립적이면서도 상보적인 미학적 범주들의 갈등과 혼효 속에서 자신의 육체를 형성, 전개시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대극의 긴장과 상생은 우리 시단을 풍요롭고 날카롭게 진전시켜 온 동력이었고, 이념적으로나 방법적으로나 매우 섬세한 자기성찰을 수행시켜 온 동인이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양극의 구도 속에서 어느 한 켠의 미학적 전위를 자임했던 시편들은 비평적 논의의 대상이 되기 쉬웠고, 그렇지 못한 시편들 이를테면 두 범주 사이의 통합이나 지양을 추구했던, 곧 ‘제3의 영역’을 줄기차게 노래해 왔던 무던한 시편들은 상대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때 일컬어지는 ‘제3의 영역’이란, 우리 시의 경우, 높은 정신적 경지를 추구하는 이른바 형이상학적 경향이라든가 신성 지향의 종교적 상상력의 시편들 그리고 일상적 세목을 반성적 시선으로 통찰하는 생활시편들이 그 주된 영역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우리 서정시는 그 동안의 이념적, 방법적 대립구도 속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이러한 신성 탐구나 일상 탐구의 시편들을 주목하기 시작하였고, 그것들이 새로운 대안적 시 경향 중의 하나로 대두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거대한 이념이나 질서에 낱낱이 귀속되지 않는 다양하고도 구체적인 일상의 체험들을 그린 시편들은 그 사소하고 섬세한 성격 때문에 오히려 서정시의 귀중한 영역임이 자각되기 시작하였다. 최근 발간된 복효근(卜孝根)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새에 대한 반성문』(시와시학사)은 이러한 사례에 매우 적합한 내용과 형식을 두루 갖추고 있다.
복효근은 그 동안 화려한 비평적 조명을 받았다든가, 시단에서 자기 고유의 음역으로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는 시인은 아니다. 다채로운 수사적 의장(意匠)이나, 전략적 화두 또한 특별히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낱낱의 사물들이 품고 있는 내적 비의(秘儀)를 투시하는 차분한 관조와 그것을 자신의 삶과 견주는 고요한 명상의 태도 그리고 사실성과 우화성을 적절하게 곁들이면서 펼치는 형상성이 그의 시가 이루어 가는 커다란 물줄기이자 상상력의 수원(水源)일 뿐이다.
이번 시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특성은 여전히 그가 자신의 가장 직접적인 일상적 체험을 시의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체험’을 시적 소재로 하지 않는 시인은 없다. 그러나 각별히 이 점이 복효근에게 있어 강조되는 것은 자신의 지적, 실천적 체험영역의 바깥을 결코 노래하지 않는 그의 독특한 시적 엄격성 때문이다. 그만큼 복효근의 시는 역동적인 상상력에 의해 활달하게 원심적 파장을 그리는 시편이나 전위적 실험의지를 가진 시편이 아니다. 그의 시는 생리적으로 소박하고, 애써 지은 표정이 없는 삶의 깨달음을 곡진하게 담고 있다. 그래서 불편하지 않고 그만큼 비평적 촉수를 깊이 드리울 필요성이 적어진다. 이러한 작품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표제시이기도 한 「새에 대한 반성문」이다. 이 시는 일상적 관찰을 통한 인생론적 깨달음이 얼마나 애잔하고 아름다운지를 형상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물 속에 살며 물에 젖지 않는
얼음과 더불어 살며 얼지 않는 저 어린 날개들이
건너왔을 바다와 눈보라를 생각하며
비상을 위해 뼈 속까지 비워둔 고행과
한 점 기름기마저 깃털로 바꾼 새들의 가난을 생각하는데
물가의 진창에도 푹푹 빠지는
아, 나는 얼마나 무거운 것이냐
“비상을 위해 뼈 속까지 비워둔 고행”이라는 표현은 그러한 삶의 지극한 아이러니를 실물감각으로 체험하지 못한 이로서는 가능한 표현이 아니다. 그래서 더욱 “한껏 가난해져야겠다”는 시인의 각오가 허탄해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지와 자기다짐은 “마지막 끝자리마저 나팔꽃에게 내어주고/제 몸이 비어갈수록 채워지는 햇살의 따스함”(「폐차와 나팔꽃」)과 꼭 같은 이치로 나타나기도 하고, “왕버드나무는 제 옷 다 벗어/제 그늘 아래 홑것들 죄 덮어주고”(「상응」) 같은 관찰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그러한 자각은 “텅 빈 누구의 삶인들 향기롭지 않으랴”(「고목」)는 탄성과 함께 시인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지속적인 삶의 지혜로 자리잡고 있다.
그 다음 그의 시집에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덕목은, “무시무종無始無終/우주가 잠시 비밀을 들켜주는 순간”(「씨알 속 우주 한 그루」)에 대한 날카로운 포착이다. 일상적 삶과 우주적 질서를 분리하지 않는 이러한 통합적 시선이야말로, 주객분리에 익숙한 현대인의 물신적 사고를 극복하고 새로운 인식 지평을 열 수 있는 소중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찰의 예각성과 국량(局量)은 “이쯤이면 되었다 싶은 순간에도 또 견뎌야 할 날들은 남아”(「가마솥에 대한 성찰」)있다는 인생론적 자각이나, “나의 천장은 또 누구의 바닥이었구나”(「소리 세례」) 같은 알레고리적 인식 그리고 “부서짐은 때로 저리 눈부셔서/나도/잘 익은 상처 하나로 서고 싶다”(「상처의 집」)는 실존적 황홀감 등으로 변용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성찰의 힘은 그의 시를 가볍게 하지 않고 그것을 삶의 근원과 본질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형상적 제언으로 들리게 한다.
결국 “깎이거나/무너지거나/소멸해 갈/내 직립의 자세는 결연하다”(「절벽」)고 믿는 그리고 삶을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저주”(「자서」)라고 복합적으로 읽는, 이 소박하지만 당당한 서정적 주체에게 우리가 바라는 것 또한 자조적이고 숙명론적인 체념이 아니라, 삶에 대한 궁극적인 긍정의 시선일 것이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과장된 죄의식으로 자학하거나 아니면 과거와 조급하게 차별짓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면면하게 화해하는 지속성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당당하다 나의 이 가난한 시 쓰기는/그래서 당당하다”(「기저귀를 빨면서」, 『버마재비 사랑』, 시와시학사, 1996)는 시인의 다짐은 절실하고 그만큼 미더운 것이 된다.
텅 빈 삶의 향기
- 복효근 [텅 빈 삶의 향기] 제4집 해설
전정구(문학평론가, 전북대 교수)
1.
복효근은 세 권의 시집을 펴낸 바 있다.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1993)와 {버마재비 사랑}(1996) 그리고 {새에 대한 반성문}(2000)이 그것들이다. 1991년 {시와시학} 겨울호로 등단한 그는 이 시집들에서 서정시인으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다져왔음을 보여준다. 단순한 서정의 심화나 문체의 매력에 의해 감흥을 자아내는 종류의 시편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우리 시단에서 주목받을 만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한국 서정시의 형식미를 계승해 온 점도 그렇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작품이 전통 서정시의 내용미를 풍부하게 개척할 여지를 지녔다는 점이다. 세 번째 시집에 실린 [소리 물고기]에서 그 징후를 읽어본다.
"내소사 목어 한 마리 내 혼자 뜯어도 석 달 열흘 우리 식구 다 뜯어도 한 달은 뜯겠다 그런데 벌써 누가 내장을 죄다 빼먹었는지 텅 빈 그 놈의 뱃속을 스님 한 분 들어가 두들기는데……// 소리가 하, 그 소리가 허공중에 헤엄쳐 나가서 한 마리 한 마리 수천 마리 물고기가 되더니 하늘의 새들도 그 물고기 한 마리씩 물고 가고 칠산바다 조기떼도 한 마리씩 온 산의 나무들도 한 마리씩 구천의 별들도 그 물고기 한 마리씩 물고 가는데……// 온 우주를 다 먹이고 목어는 하, 그 목어는 여의주 입에 문 채 아무 일 없다는 듯 능가산 숲을 바람그네 타고 노는데……// 숲 저쪽 만삭의 달 하나 뜬다"([소리물고기])
이 작품은 그의 시세계를 가늠하는 중요한 바로미터이다. 목어(木魚) 소리에서 촉발된 행위들은 시인이 한순간 우연히 떠올려 본 상상력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적 삶에 대한 깊은 사색의 결과로 판단되는데, [소리물고기]는 일반 서정시가 감당하기 어려운 의미의 파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표현내용이 현실세계에서 가능한 것도 아니고 텍스트 내적 맥락에서 그 내용의 고유한 의미를 확정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러한 추론이 가능하다. '소리물고기'라는 단어는 텍스트 내적인 의미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소리물고기를 매개로 전개되는 거침없고 활달한 액션들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온갖 물질적 탐욕을 사라지도록 만들었다는 점이고, 물질세계 너머로 상승하는 정신세계의 무한한 가능성을 노래했다는 점이다.
환상적인 '목어 이야기'가 현실의 맥락에서 중요한 생의 의미를 담아내고 있는 것은, 텅 빈 그곳의 소리가 빚어낸 나눔의 기적, 그리고 그 기적이 발산하는 삶의 향기이다. 그 향기는 목어 한 마리가 불러낸 것이다. '텅 빈 삶의 향기'가 그윽하게 풍기는 [소리물고기]가 보여주듯이, 시인은 문학적 사유활동 자체를 생활의 값진 경험으로 받아들인다. 그의 시쓰기가 일상의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행위의 연속선 위에 놓여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그것은 이번에 발간하는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이라는 네 번째 시집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사회에서 쟁점이 된 이슈나 난해한 현대이론을 가지고 잔꾀를 부리지 않는 대신에 복효근은 시문학의 사명에 대한 자각만큼은 철저하다. 철학의 사명에 합당한 '삶의 존재방식에 관한 전체적인 조망'을 찾는 일에 그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데, 네 번째 시집의 주된 내용도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무엇을 쓰든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다루든, 혹은 그것이 현실의 맥락을 벗어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그의 시쓰기는 삶의 존재방식에 관한 탐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시문학이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어떤 것이라는 믿음, 다시 말하면 자신이 살아가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뒷받침된 것이다. 이번 시집도 이러한 생각과 믿음을 실천하는 시쓰기가 중심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 권의 시집으로 묶였을 때 전체를 관통하는 내용의 응집력이 부족한 것도 삶에 관한 전체적인 조망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에 고심했기 때문이다. 최근 작품은 물론이고 그 이전의 초기시부터 복효근은 자신이 의도한 예술적 메시지를 간단 명료하게 전달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시인이다.
2.
'삶의 존재방식에 관한 조망'을 겨냥하는 그의 창작활동은 상당부분 일상의 체험을 평이한 언어로 옮겨놓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구두 뒤축에 대한 단상] 역시 일상생활과 밀착된 소재를 다루고 있는데, 닳아버린 구두뒤축에 관한 관찰을 통해 삶 전체 국면을 조감하고 있다.
겉보기에 멀쩡한데
발이 빠져나간
구두 뒤축이 한쪽으로 심하게 닳았다
보이지 않은 경사가 있다
보이는 몸이 그럴진대는
헤아릴 수도 없을 마음의 경사여
구두 뒤축도 없는 마음의 기울기는
무엇이 보정補正 해주나 또
뒷모습만 들켜주는 그 경사를 누가 보아주나
마지막 구두를 벗었을 때
생애의 기울기를 볼 수는 있는 것인가
수평을 이룰 때 비로소 완성되어버릴 생이여, 비애여
닳은 구두 뒤축 덕분에 나는 지금 멀쩡하게 보일 뿐이다
--[구두 뒤축에 대한 단상]
멀쩡한 구두의 감추어진 부분, 즉 구두 뒤축에 관한 이야기가 이 시의 표면적 내용이다. 그러나 그 이면의 핵심 의미는 인생의 "보이지 않은 경사"의 문제이다. 한쪽으로 심하게 닳아버린 구두 뒤축은, 생애의 기울기를 비유하는 적절한 소재가 된다. 구두 뒤축의 기울기와 생애의 기울기를 대비시킴으로써 시인은 수평을 이루지 못한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계기를 마련한다. 평범한 일상의 소재에 그 자신의 삶을 접합시켜 형상화하는 방식이 복효근 시의 감동의 폭과 깊이를 결정하는 요인인데, 중요한 것은 시인의 삶에 대한 반성적 자기성찰이 한 개인의 생활범위를 너머 보편적인 삶의 국면으로 확산된다는 점이다.
복효근 시에서 의미의 울림이나 감동의 효과는 일상의 소재보다는 자연에서 택한 소재를 다룬 시편들에서 훨씬 크다. 그것은 자연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그렇지 않은 것들에 비해 풍부한 서정성과 더불어 의미심장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다룬 시편들은 자연현상의 관찰을 통하여 삶의 근본원리를 발견하고 이것을 통해 일상생활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탄생된 작품들인데, 자아의 내면을 비추어 내거나 자신의 삶을 숙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닥을 드러냈을 때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는 강의 모습을 그려낸 [강은 가뭄으로 깊어진다]가 여기에 해당한다.
가뭄이 계속되고
뛰놀던 물고기와 물새가 떠나버리자
강은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
처음으로 자신의 바닥을 보았다
한때
넘실대던 홍수의 물높이가 저의 깊이인줄 알았으나
그 물고기와 물새를 제가 기르는 줄 알았으나
그들의 춤과 노래가 저의 깊이를 지켜왔었구나
강은 자갈밭을 울며 간다
기슭 어딘가에 물새알 하나 남아 있을지
바위틈 마르지 않은 수초 사이에 치어 몇 마리는 남아있을지……
야윈 몸을 뒤틀어 가슴 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강은
제 깊이가 파고 들어간 바닥의 아래쪽에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가문 강에
물길 하나 바다로 이어지고 있었다
--[강은 가뭄으로 깊어진다]
자연의 모습과 인간의 삶이 다르지 않다는 인식이 그의 시의 바탕이 되고 있는데, 그것은 고난을 겪어본 후에야 인생의 깊이를 알게 되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이 근본적으로 유사하다는 시인의 생각은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자연을 관찰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관점은 물고기와 물새의 "춤과 노래가 저의 깊이를 지켜왔었구나"라는 진술에 나타나 있다. 강의 깊이를 지켜 온 것은 '물새와 물고기의 노래와 춤'이라는 해석은 일반과학의 그것과 다른 문학적 상상력의 소산이고, 그것은 시인이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과 결부되어 있다. 주의해야 할 중요한 점이 여기에 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자연은 우리의 감각에 지각되는 그대로의 물질세계와 다르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자연은 원래 모습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의 내면공간에 자리잡은 풍경을 대신한다. 그 풍경이 시의 공간적 배경을 이룰 때 인간과 자연은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저 길도 없는 숲으로/ 남녀 여남은 들어간 뒤/ 산은 뜨거워 못 견디겠는 것이다"([단풍]) 등 그가 다룬 자연은 인간과 공존한다. 인간과 자연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결합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 단절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인연의 연속, 그것이 인간과 자연의 본연의 관계이다. 과학자가 매장해 버린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복원시킨 [복사뼈에 대한 단상]은 그 둘 사이의 뗄 수 없는 인연을 확인시켜 준다.
복숭아를 먹다보면
필연코 단단한 씨를 만난다
그것은 말하자면
복사꽃의 끝
단맛으로 깊어가던 복숭아의 끝
끝나버린 복숭아씨, 그것은
또 꽃피울 복숭아의 머언 먼 시작이려니
귀 기울이면
그 속에 비가 내리고 새가 울리라
나에게도
복숭아뼈라 부르는 씨 하나가 있어
살아버린 나는 무엇인가의 맛 나는 과육이 되어야겠다
언젠가
내 과육을 다 먹은 시간이 그 끝에 만나고야 말 그 씨는
나의 시작인지도 모르는 일이어서
들으면 들리리라 비 내리는 소리
내 안에서 우는 새소리
꽃 피는 소리
끝이 시작으로 이어지는 지점
내게도 복숭아씨가 있다
--[복사뼈에 대한 단상]
"끝나버린 복숭아씨, 그것은/ 또 꽃피울 복숭아의 머언 먼 시작"이라는 구절에 복효근의 작품 안에 자리잡고 있는 불교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자연에 속한 모든 존재는 그 어느 것도 우연히 생겨난 것은 아니다. 자연계의 이것과 저것은 윤회의 끈으로 이어진 필연을 통해 그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자연의 섭리에 의해 존재를 부여받은 인간의 복사뼈나 복숭아씨도 마찬가지이다. 서구과학과 자본주의 문명이 자연과 인간을 구분하면서 그 둘 사이를 분리시켜 온 것을 시인은 거부한다. 분리와 구분을 없애는 것이 그의 과업이다. 그 과업은 인간을 다시 자연으로 인도해야 할 시문학의 사명과 통하는 것이다. 작은 씨앗과 인간 신체의 일부가 서로 의미 있는 관계로 설정된 이 시가 그것을 알려준다.
"들으면 들리리라 비 내리는 소리/ 내 안에서 우는 새소리/ 꽃 피는 소리" 등 그의 시는 물질의 탐욕과 속도의 시대에 매몰된 현대인이 잃어버린 소중한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회복하는 길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속도의 시대가 만들어낸 함정에서 빠져 허둥대는 인간의 구원이라는 보다 심원한 프로젝트가 그의 시속에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자본주의적 근대과학이 기획한 프로젝트와 방향을 달리한다. 그 다른 점은 한 시인의 소박한 상상력에 입각해 있지만, 그것은 현대과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문명세계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를 풀어내는 단순함이 돋보인다.
3.
자연관찰을 통해 자신의 삶의 정체성을 구성해 나간 복효근은 순간 순간의 삶의 장면들을 다양한 자연풍경으로 치환시킨다. 그 풍경은 기억 너머의 과거생활을 반추하는 추억의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과 속도가 지배하는 인공적 도시의 반대쪽에 놓여진 생명 나눔의 장소이고, 화해의 삶이 이루어지는 세계의 조화를 함축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생태와 인간생활의 대조적 국면을 부각시킨 복효근의 시쓰기는 인간사회의 여러 현상을 파악하는 것이며, 현재 당면한 우리의 삶의 문제를 성찰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시가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것은 자연미의 본질과 특성을 표현하는 서정시 본연의 임무가 자연경관 자체의 속성을 파악하는 것으로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자연질서의 모순을 포용하고 자연생태계의 평화 뒤에 숨어 있는 투쟁까지도 우주만물의 질서로 파악할 때 우리는 자연의 근본 법칙의 진실에 근접할 수 있다.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에서 자연이라는 미적 대상이 집단과 집단, 혹은 집단과 개인의 특수관계를 상징하는 표현의미를 지니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
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 중 몇 마리는 저 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낭만적 이상향으로 자연을 대해온 시각에서 도달할 수 없는 삶의 질서나 법칙에 대한 예리한 인식이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에 반영되어 있다. 그것이 직접 경험이든 간접 경험이든 그것은 상관없다. 문제는 냉혹한 자연의 법칙을 응시하는 시인의 시선에 자신의 삶의 실체에 대한 명상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생존방식과 그러한 목적을 위해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누우의 모습을 표현한 점이 그것이다. 조화와 균형이 지배하는 평화로운 자연풍경 내부에서 벌어지는 비정한 생존의 모습, 그것은 고귀한 또 다른 생명의 희생이 뒷받침된 것이다.
그 생존은 또 다른 존재의 죽음에 빚진 것이다. 자연의 질서는 동정과 연민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복효근의 관점에서 현실사회의 난맥상--이기주의와 개인주의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누우를 포식하는 악어의 행동은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 아니라 우주만물의 자연스런 운행일 뿐이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가 말해주듯이, 한 존재의 생존은 또 다른 존재의 희생에 의한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누군가의 목숨,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의 죽음에 의해 보장받은 것이다.
이 땅에서 쓰여진 상당수의 생태시들이 자연의 진정한 모습을 조작함으로써 유토피아적 자연관을 형성하는 기획에 협력해 온 것이 사실이다. 자연의 모습을 왜곡하여 경험적 자연이 아닌 환상적 자연을 그려냄으로써 그것들은 자연의 진실을 은폐하는 기획에 동참해 왔다. 그대로의 자연현상을 이해하려는 진지한 자세가 부족하거나 없었던 우리 시단의 생태시들과 비교되는 복효근 시의 진면목이 여기에 있다. 그의 시가 진한 서정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감상과 낭만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는, 그리하여 생경한 관념의 토로에 그치지 않는 비결도 이 대목에 있음은 자명하다. "숲엔 언제나 숲의 향기가 있다"([숲, 혹은 사랑에 관한 변주 1--독초에게도 향이 있다])나, "때로 슬픔도 모여서 힘이 된다"([숲, 혹은 사랑에 관한 변주 2--슬픔도 모여서 힘이 된다])는 자연현상에 관한 경험의 진술이 우리의 삶의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도 이러한 비결과 무관하지 않다.
4.
뜨거운 사랑의 문제를 다룬 [석류]나 [석쇠의 비유] 등 그의 수사기법은 간단 명료하다. 난삽하거나 현란한 비유가 없고 지리산 물같이 투명하다. "낙엽소리에/먼 하늘 별이 돋는다"([낙엽을 밟았다는 사건])나 "나도 꽃인 척 무얼 피워내야겠는데/ 내 전 생애를 쥐어짠대도/ 꽃 하나가 될 수 없어"([산수유 노란 때깔마냥]) 등 그의 시어도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 [단풍], [낙엽], [산길] 등 자연을 소재로 삼은 시가 많은 것도, 그가 일상생활에서 친밀하게 접하고 있는 고향산천에 삶의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꾸밈없는 삶이 반영된 그의 시는 순박한 비유와 단순한 이미지, 그리고 명료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복잡한 수사기교나 통사구문이 배제된 그의 시편들에서 기법적으로 주목할 만한 특성을 지적해내기 어렵다. 잘 달여낸 녹차의 향기 같은 탈속(脫俗)의 은은함이 묻어난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의 작품들이 쉽게 쓰여진 것이라고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것들은 불면의 밤을 견뎌낸 고통의 시간을 필요로 한 것이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인의 자화상을 그려낸 [탱자]가 그것을 말해준다.
"가시로 몸을 두른 채/ 귤이나 오렌지를 꿈꾼 적 없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밖을 향해 겨눈 칼만큼이나/ 늘 칼끝은 또 스스로를 향해있어서/ 제 가시에 찔리고 할퀸 상처투성이다// 탱자를 익혀온 것은/ 자해 아니면 고행의 시간이어서/ 썩어문드러질 살보다는/ 사리 같은 씨알뿐// 향기는/ 제 상처로 말 걸어온다".([탱자])
"사리같은" 언어를 만들려고 복효근은 무수한 고뇌의 시간들을 견뎌냈을 것이다. "번개의 언어 은장도 하나 찔러" 넣기 위해서, "연꽃다운 화두 하나" 걸쳐주기 위해서 그는 불면의 밤을 하얗게 밝혔을 것이다. "밖을 향해 겨눈 칼만큼" 늘 칼끝을 갈아서 시심(詩心)의 중앙을 겨누거나, "가시로 몸을 두른 채" "제 가시에 찔리고 할퀸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탱자를 익혀" 왔던 그의 고행은 "귤이나 오렌지를 꿈꾼"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시詩는 개뿔이라 해야 옳다" "아, 아직은 개뿔일 뿐인 나의 시여"([자서])라고 시혼(詩魂)을 자해(自害)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간결하게 표현대상을 그려내려는 절제의 미덕을 발휘하기 위해 그는 '번뜩 한 눈에 들어오는 빛나는 시 구절'을 버렸을 것이다. 허튼 언어놀림을 자제하는 자기검열의 엄격성이 언어의 보석에 무늬 그려 넣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점이 복효근 시의 장점이자 한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