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경 김천의 가야기록
조선 후기 우득공, 정약용, 안정복 등 실학자들이 인용하는 역사서이다.
김천 감문국도 <수산집>의 가야세가 중의 한 부분을 인용하여 전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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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세가(伽倻世家)
이종휘(李種徽, 1731~1797)
大伽倻伊珍阿鼓王者。駕洛首露王之弟也。爲五伽倻之首。以漢光武建武十八年壬寅(42년)。立國於高靈郡。四伽倻分據洛東江西。而古寧今咸昌也。星山今星州也。阿羅今咸安也。小伽倻卽甘文小國也。而大伽倻最大。壤接新羅。世相侵伐。互有勝負。婆娑王時襲擊新羅南界。殺其將長世。又圍羅王於黃山江上。幾獲之。其後新羅益侵滅諸小國。而伽倻武力不競。遂服屬於新羅。法興王妻以宗女。後世有嘉悉王者。妙解音律。製十二絃琴。以象十二月。其法。祖中國樂部箏。而以華東方言之各異。而聲音之難一也。命樂師于勒。更造十二曲。一曰下加羅都。二曰上加羅都。三曰寶伎。四曰達己。五曰思勿。六曰勿慧。七曰下奇物。八曰師子伎。九曰居烈。十曰沙八兮。十一曰爾赦。十二曰上奇物。勒弟子泥文所製又三曲。一烏。二鼠。三鶉。後更爲河臨嫰竹二調。調共一百八十五曲。今世所傳伽倻琴是也。後勒等。知國將亂。抱樂器投新羅。陳文帝天嘉三年。道設智王痛國之衰弱。而見凌於新羅。謀侵其國。以復其耻。反爲所攻。新羅將斯多含。以五千騎。馳入奪旃檀門。而立白旗。城中大將異斯夫。率軍繼之。王城驚潰。遂爲所滅。伽倻凡十六世。五百二十年。於五伽倻最後亡。而所傳琴聲。平淡近古。可以推知其治云
대가야 이진아시왕은 가야수로왕의 동생이다. 다섯가야의 우두머리가 되어 한나라 광무건무 18년(서기 42년, 임인년)에 고령군에 나라를 세웠다.
4가야는 낙동강 서쪽에 나누어 있었는데, 古寧은 지금의 咸昌, 성산은 지금의 星州, 아라는 지금의 咸安, 소가야는 甘文小國(~231년)이다. 대가야가 가장 크다.
경계가 신라와 접하여 대대로 서로 침범하여 서로 이기고 졌다.
파사왕(80~112) 때 신라의 남쪽 경계를 습격하여 그 장수 장세를 죽였고(96년), 또 황산강 상류에서 (신)라왕을 포위하여 거의 사로 잡을 뻔 하였다.
그 후 신라가 더욱 침입하여 여러 소국을 멸하였다.
가야는 무력으로 경쟁할 수 없어 마침내 신라에 복속하였다.(532년, 법흥왕19)
법흥왕(514~540) 처가 종녀이다.
후세에 가실왕이 있었는데 음률을 정묘하게 해석하여 열두현의 금을 만들었는데 12달의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그 원리는 중국 악부 쟁을 바탕으로 하였다. 동방에서는 각기 다르게 피어나 성음을 하나로 하기가 어려웠기에 악사 우륵에게 명하여 12곡으로 고쳐 만들었는데, 첫째는 하가라도(下加羅都), 둘째는 상가라도(上加羅都), 셋째는 보기(寶伎), 넷째는 달기(達己), 다섯째는 사물(思勿), 여섯째는 물혜(勿慧), 일곱째는 하기물(下奇物), 여덟째는 사자기(帝子伎), 아홉째는 거열(居烈), 열 번째는 사팔혜(沙八兮), 열한번째는 이사(爾赦), 열두번째는 상기물(上奇物)이라 부른다. 우륵의 제작 니문이 또 세곡을 만들었는데 첫째는 오(烏), 둘째는 서(鼠), 셋째는 순(鶉)이다. 뒤에 하림(河臨)과 눈죽(嫰竹) 두 곡조로 고쳤는데, 185곡을 할 수 있다. 지금 전해지는 가야금이 이것이다.
뒤에 우륵 등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악기를 가지고 신라에 의탁했다.(진흥왕 12년, 551년)
진(陳) 문제(文帝) 천가3년(天嘉三年 562년) 도설지왕은 나라가 쇠약해지는 것을 애통해 하였는데, 신라에 능멸을 당하여 그 나라를 침략할 것을 도모하여 그 치욕을 복수하고자 하였으나 반대로 공격을 받았다. 신라의 장수 사다함이 5천 기병으로 전단문(旃檀門)을 빼앗고 백기를 세우자, 성에 있던 대장 이사부가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여 왕성이 갑자기 궤멸되어 멸망하였다. 가야는 대략 16세 520년 인데 다석 가야가 마지막에 망하였다.
그 전하는 가야금 소리가 근고에 평담하여 그 다스림을 미루어 알 수 있다.
1) 6가야 건국시기와 위치 : 漢光武建武十八年壬寅(42년) 수로왕의 다섯 동생이 5가야를 세움
2) 소가야의 건국위치를 감문소국(현 김천시 개령면)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학계에서 소가야의 위치를 경남 고성으로 비정하고 있는 이유는 감문소국이 망하고 그 유민이 다시 소가야를 세감문소국(현 김천시 개령면)웠다고 추정할 수 있음.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소가야의 위치를 경남 고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임인년(42년) 춘3월 가락(駕洛) 사람이 김수로(金首露) 형제 6인을 세워 군(君)으로 삼고, 가야(加耶)를 나누어 다스렸다. 가락은 옛날 변한(卞韓) 땅이다. 처음에는 군신(君臣)의 위호(位號)가 없고 9간(干)이 있었으니, 아도(我刀)ㆍ여도(汝刀)ㆍ피도(彼刀)ㆍ오도(五刀)ㆍ유수(留水)ㆍ유천(留天)ㆍ신천(神天)ㆍ신귀(神鬼)ㆍ오천(五天)이 그것으로서 각각 추장(酋長)이 되었다. 민중은 총 7만 5천이었는데 산과 들에 모여 살았다.
이에 이르러 9간이 계사(禊事 계제사. 곧 3월 3일 상사(上巳)에 물가에서 재앙을 제거하고 복을 구하는 행사)를 하고 있었더니, 이때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나 김수로라는 이가 있어 구지봉(龜旨峯)지금 김해부(金海府)에 있음 에 올라 가락의 9마을을 바라보고 그곳에 이르렀다. 9간이 수로 형제 여섯 사람의 용모가 모두 기위(奇偉)하고 장대한 것을 보고는 여럿이 모두 경이(驚異)하여 이들을 세워 군(君)으로 삼았는데, 수로가 연장자였으므로 국호를 대가락(大駕洛) 지금 김해부 이라 하고, 또 가야라고도 하였다.나머지 5사람은 각각 5가야의 군이 되니, 아라가야(阿羅伽耶) 지금 함안군(咸安郡) ㆍ고령 가야(古寧伽耶) 지금 함창현(咸昌縣) ㆍ대가야(大伽耶) 지금 고령현(高靈縣) ㆍ성산가야(星山伽耶) 지금 성주부(星州府), 일설에는 벽진가야(碧珍伽耶) ㆍ소가야(小伽耶) 지금 고성현(固城縣) 가 그것이다.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으로 경계를 삼았는데, 가락은 뒤에 금관국(金官國)이라고 국호를 고쳤다.
3) 532년(법흥왕 19)에 마지막 왕인 구해(仇亥)는 신라에 나라를 바친 뒤 높은 벼슬을 받고,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고 한다. 법흥왕의 배우자 중에, 백제 동성왕의 딸 보과공주와 옥진이 있음
4) 병신년(96년) 신라 파사왕 17년, 고구려 태조왕 44년, 백제 기루왕 20년(한 화제 영원 8, A.D. 96)
가야가 남쪽 변방을 침범하매 성주 장세(長世)가 막다가 피살되었다
5)진(陳) 문제(文帝) 천가3년(天嘉三年) 은 신라 진흥왕(眞興王) 22년(562년) 임오년 이다.
*이종휘(李種徽,1731~1797) 본관 전주(全州). 字덕숙(德叔), 號수산(修山), 남천자(南川子),
소론(少論) 양명학자(陽明學者) <동사> <수산집>을 저술함.
■가계
>2 이상백(相李伯) 監役
>1 ①이정걸(李廷傑) 配 김세기(金世器)의女)
>1 ②이정필(李廷弼) 配 강택규(姜宅揆)의女
>1 ③이정일( 李廷一) 配평산인 신재(申載)의女
>0 入後 이종휘(李種徽,1731~1797)[진1771] 字덕숙(德叔), 號수산(修山), 남천자(南川子),
配해주인 崔普興[진1735]의 딸 *최보흥(崔普興) : 동몽교관, 종부직장, 감찰, 김제군수 등 역임
>-1 ①이동직(李東稷)
>-1 ②이동면(李東冕)
>-1 壻송영재(宋永載)
>1 ④이정철(李廷喆) 配달성인 徐命遇의딸(~1738)
>0 ①이만휘(李晚徽)
>0 ②이종휘(李種徽,1731~1797) 出後 이정일(李廷一)
>0 ③이시휘(李時徽)
>0 ④이훈희(李薰徽 개명李景徽)
>0 ⑤이승희(李昇徽)
■이력
1775중부봉사, 정릉직장, 1776활인별제, 금부도사, 1777문서색도사, 종부령, 포천현감, 1782돈녕주부
1783옥과현감, 1787양천현령, 1792돈영판관, 장악첨정, 1793공주판관, 1796종부령, 돈녕부판관
1738년 생모 서씨의 상을 당하다
1751년 장인 崔普興이 縣監으로 있는 稷山에 가다. 그 곳에서 〈溫王祠記〉 〈銅檣記〉〈皐蘭寺重修記〉를 짓다.
1752년 昌寧으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가다.
4월, 東萊의 海運臺, 沒雲臺를 유람하다.
8월, 昌寧 북쪽의 龍興寺를 유람하다.
부친을 모시고 靈山 聞巖亭의 辛礎 遺墟를 돌아보고 〈辛礎傳〉을 짓다.
1753년 봄, 〈昌山縣學重修記〉를 짓다.
3월, 昌寧 북쪽 火王山 古城을 유람하고 記文을 짓다.
4월, 伯氏 李晚徽를 따라 洛東江을 유람하다.
12월, 모친 申氏의 상을 당하다.
1755년 부친상을 당하다
1771년 진사시에 합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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獐夫人冢
유득공(柳得恭,1748~1807)
山訟者,兩族詬罵痼俗也。嶺南之開寧縣,古甘文小國,
《東史》所云“大發兵三十”者是已。縣有甘文金孝王陵及獐夫人冢。
余《懷古詩》:獐姬一去野花香,埋沒殘碑古孝王。三十雄兵曾大發,蝸牛角上鬪千場。
蓋亦荒昧,不可考。今年春,有邑生營葬於獐夫人冢傍,邑宰以破壞古蹟禁之。邑生走京師,鳴錚衛外,原情云“未聞有以獐爲姓之人”,遂加侮蔑於夫人。直中見之者,不覺絶倒;獐之族無對詈者。哀哉,甘文國也!
산송(山訟)은 두 집안이 서로 나무라고 욕하는 고질적인 풍습이다. 영남 개령현(開寧縣)은 옛날 감문국이라는 작은 나라였다.
『동사(東史)』에 “크게 서른 명의 병사를 내었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나라다. 고을에는 감문국의 금효왕릉(金孝王陵)과 장부인총(獐夫人冢)이 있다. 나는 〈회고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獐姬一去野花香(장희일거야화향) 장희 떠난 자리에는 들꽃만 향기롭고
埋沒殘碑古孝王(매몰잔비고효왕) 땅에 묻힌 깨진 비석 옛 금효왕 것이라.
三十雄兵曾大發(삼십웅병증대발) 서른 명 용맹한 병사를 크게 동원하여
蝸牛角上鬪千場(와우각상투천장) 달팽이 뿔 위에서 치열하게 싸웠다나.
하지만 또한 아득해서 상고할 수가 없다.
올봄에 그 고을 어떤 유생이 장 부인의 무덤 옆에다 무덤을 쓰려고 했는데, 고을 수령이 고적(古蹟)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금하였다. 그 유생이 서울로 달려와 궐 밖에서 격쟁하여 하소연하기를 “장(獐 노루)이란 성씨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며 마침내 장 부인을 업신여기고 멸시하는 말을 해 대니, 근무하던 관원들이 보고는 모두 포복절도했다. 장씨붙이에 대거리해서 욕하는 자가 없었으니, 슬프다 감문국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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甘文國
이유원(李裕元,1814~1888)
開寧縣北二十里。有大塚。世傳甘文金孝王陵。西曰獐夫人塚。東院傍有國基。東史所云。大發兵三十人者。此也
개령현(開寧縣) 북쪽 20리에 큰 무덤이 있는데, 세상에는 감문(甘文) 김효왕릉(金孝王陵)이라 전해진다. 서쪽은 장부인총(獐夫人塚)이라 하고, 동원(東院)의 곁에 국기(國基 나라의 터)가 있으니,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말한, 30인이 크게 발병(發兵)했다는 곳이 여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