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한국은 '고통의 역사'를 잊었나"
대화]〈12〉서경식 & 김상봉 : 디아스포라, 민족, 그리고 역사
2006-08-17
서경식 이야기 서경식(55)에게 2006년은 특별하다. 3대째 일본에서 살아온 서경식이 한국을 처음 찾은 것은 1966년 그의 나이 열다섯 살 때. 그는 40년 만에 온전하게 모국을 '원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한 번도 모국에서 오래 머문 적이 없던 그는 3월부터 성공회대 연구교수로 지내고 있다. 그는 40년 전 경주를 찾았던 일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경주를 찾은 느낌을 고스란히 살린 그의 40년 전 습작 시는 '모국을 잃은 자의 슬픔'을 말하고 있다. 바로 '디아스포라(diaspora)'의 삶이다. 비록 평생을 일본에서 살아 왔지만 서경식에게 한반도는 단순히 모국 땅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의 둘째 형과 셋째 형은 박정희 시대 국가보안법의 희생자였던 서승, 서준식이다. 1965년 한일 간 국교가 정상된 후 모국을 알기 위해 군사 독재 정권에 맞서는 모국의 동포들과 함께 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던 이제 스물을 갓 넘긴 재일 조선인 형제는 1971년 봄 간첩으로 몰려 각각 19년, 17년의 수감 생활을 했다. 그는 형들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모국과 인연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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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식 도쿄 게이자이대 교수 ⓒ프레시안 |
어디에도 정을 둘 수 없었던 서경식은 수많은 사연이 깃든 미술 작품에 깊이 매료됐다. 그리고 그의 미술 작품에 대한 독특한 해석에 1980년대의 열정과 1990년대의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한국의 젊은이들은 푹 빠져들었다. 그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박이엽 옮김, 창비 펴냄)는 1992년 처음 번역돼 나온 후 15년 가까이 단지 입소문만으로 수많은 독자들에게 읽혔다. 그러나 그가 진짜 관심을 뒀던 것은 단순히 미술 작품이 아니라 그 작품에 녹아 있는 '삶' 그 자체였다. 서경식은 자기와 같은 처지의 수많은 디아스포라들에게 시야를 넓힌다. 그 중에는 아우슈비츠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탈리아의 유대인 작가 프리모 레비도 있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역사의 상처'를 증언했던 레비처럼 서경식도 기꺼이 '폭력의 증언자'가 되고자 한다. 지난 6월 20일 인사동 평화박물관에서 상영된, 그의 도움을 받아 일본 NHK가 만든 다큐멘터리 <아우슈비츠 증인은 왜 자살했는가>는 그 노력의 산물이다. 서경식은 40년 만에 머물고 있는 모국이 낯설다. 그는 일본에서 오른쪽으로 달려가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정면으로 거스르며 양심적인 목소리를 높여 왔다. 그러나 모국에 머물고 있는 지금 여전히 외롭다. 또 불편하다. 한 발자국씩 민주주의를 확장해 오던 것처럼 보이던 모국의 실체는 '자본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두 줄에 매달려 절벽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위기 상황이다. '역사의 상처'를 '증언'하기보다는 '망각'하는 길을 택한 지식인의 모습도 우려스럽기만 하다. 한 번도 '소수자(minority)'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 또 '소수자'이면서도 '다수자(majority)'라고 믿는 사람들 속에서 서경식은 계속 외로울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속 이웃들에게 손을 내민다. "너희들은 자신의 출생을 생각하라. 짐승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덕과 지를 구하기 위해 생을 얻은 것이다." 레비가 인용했던 단테의 말이다. 김상봉 이야기 김상봉(48)에게는 한때 '거리의 철학자'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1999년 대학을 떠난 뒤 그는 대학이 '연구를 잘 하는 것'과는 큰 상관이 없는 공간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했다. 지난 수 년간 묵직한 주제를 깊이 천착한 수 권의 저서는 그 물리적인 증거들이다. 특히 2006년 초 나온 <나르시스의 꿈>(한길사 펴냄)은 그의 전공인 서양 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그것의 극복 방향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담고 있어 출간 전부터 큰 논란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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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봉 전남대 교수 ⓒ프레시안 |
이런 성과를 주류 학계에서도 마냥 무시할 수많은 없었을 것이다. 2005년 7월 김상봉은 전격적으로 전남대에 임용돼 큰 화제가 됐다. 그를 임용한 전남대 철학과는 이미 정원이 가득 찬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부산 출신인 그는 전남대는 물론이고 광주와도 인연이 전혀 없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는 '지연'과 '학연'을 무시한 이 조치에 당사자 역시 적잖이 놀랐다. 특히 그가 대학 사회에서 기피하는 '운동권' 학자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더욱더 그렇다. 김상봉의 삶의 한 축이 '철학'이라면 다른 한 축은 '공동체'이다. 그는 이 땅에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바로서야 한다고 믿는다. 그 '교육'을 왜곡시키고 더 나아가 공동체를 좀먹는 '학벌'이야말로 꼭 해체되어야 할 '마지막 권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주장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그가 몸담고 있는 단체 '학벌 없는 사회'는 이 문제를 공격적으로 제기했고, 그는 항상 맨 앞에 섰다. 그가 펴낸 <학벌사회>(한길사 펴냄)는 이 운동의 기본 논리를 제공하는 책이다. 김상봉은 최근 한국 현대 사상사를 정리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쏟고 있다.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재인식했을 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공감'의 폭을 넓혔던 20세기 한국 사상가의 독특한 사유와 경험이 계승·발전되기는커녕 잊히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20세기 현대 사상사를 정리하는 것은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이 땅의 보통 사람들에게 쥐어줄 수 있는 '한 자루의 칼'을 만드는 과정과도 연관돼 있다. 20세기 현대 사상이야말로 그들이 온 몸으로 체험한 역사가 새겨져 있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 번도 공부가 세상의 삶과 무관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강단을 떠났던 수 년간 오히려 더 많은 이웃과 눈높이를 맞추고 같이 공부하는 기회를 만들고자 노력했던 것도 이 연장선상에 놓인 일이었다. 그가 일선 학교 도덕 교사들과의 토론을 토대로 철학하는 방법을 처음 가르치는 도덕 교육의 문제점을 고발한 것 역시 이런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2005년 <도덕 교육의 파시즘>(길 펴냄)을 내놓아 논란의 중심에 섰었다.
김상봉은 스스로를 '긍정'하는 진정한 개인, 타자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는 개인, 그런 개인들이 '연대'하는 공동체를 꿈꾼다. 그는 이런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철학'이라는 칼을 벼르고 있다. 서경식-김상봉 이야기 두 사람이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하자는 얘기는 2005년부터 있었다. 그러나 가끔씩 한국을 찾는 서경식과 광주에 터를 잡은 김상봉의 시간을 맞추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다행히 서경식이 3월부터 서울에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상황은 좀 더 나아져 어렵사리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서경식이 연초에 펴낸 <디아스포라 기행>(김혜신 옮김, 돌베개 펴냄), <난민과 국민 사이>(이규수·임성모 옮김, 돌베개 펴냄)를 중심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사적인 경험부터 동·서양의 사상을 넘나드는 그들의 대화는 오후 4시에 시작해 밤 12시가 넘도록 계속 됐다. 서경식이 고등학생이던 1960년대 한국을 처음 방문해 경주의 한 사찰에 있는 석불을 보고 쓴 시로 시작된 두 사람의 대화는 서경식의 "한국은 이제 상처, 고통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형성된 자기 인식인 저항적 민족의식을 잊었나"라는 문제제기로 이어졌다. 제국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저항적 민족주의가 사라진 자리를 민주화와 경제 발전에 기반한 막연한 자부심과 자긍심의 발로인 '월드컵 민족주의'가 대신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두 사람은 우려를 표명했다. 이처럼 인간의 상처에 대한 기억이 없는 역사의식은 '자랑스러운 역사 찾기'로 이어지고 최근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도 이런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런 '월드컵 민족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폐쇄성은 시대적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다. 식민 지배와 2차례의 세계대전, 지역분쟁, 지구화된 자본주의 등에 의해 '디아스포라'가 늘고 있는 현실은 '민족이라는 공동체를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프레시안>은 두 사람의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해 2회에 걸쳐 소개한다. 두 사람의 대담엔 서은혜 전주대 교수가 배석해 통역과 진행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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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 |
"모든 고통은 일회적인 반면 모든 영광은 수치화 된다" 서경식 : 한국은 민주화 투쟁을 거쳐 소위 진보세력이 집권하게 됐는데 오히려 폐쇄적인 민족주의 국가로 바뀐 것 같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또 1965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으로 이어진 과거 개방적인 성격의, 또 제국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민족주의가 지금도 한국에 남아 있는지 묻고 싶다. 김상봉 : 민족주의가 자기에 대한 기억을 통해 형성된다고 할 때, 저항적 민족주의는 상처, 고통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형성된 자기의식이다.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소위 '월드컵 민족주의'는 더 이상 상처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은 민족주의다. 지금 우리시대 많은 한국인이 더 이상 역사의 상처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서경식 : 갖고 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김상봉 : 그렇게 표현해도 될 것 같다. 내가 위험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 이 지점이다. 인간의 상처에 대한 기억이 없는 역사의식은 영광스러운, 자랑스러운 역사로 흘러버린다. 정신적인 허영과 소수자 및 타자에 대한 배제는 늘 짝을 이룬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엷어지는 게 문제다. 일본에서는 과거 전쟁의 고통에 대한 기억이 엷어지면서 침략의 영광에 대한 향수만 남았다. 요즘 한국 사회의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도 마찬가지다. 그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끔찍한 고통을 겪었는가를 잊을 수 있다면 모든 역사는 다 아름다워질 수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식민지 개발론'이 나오는 것도 일제시대에 살아 있는 인격체로서 개인들이 얼마나 고통스런 삶을 살았는지 잊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박정희 시대를 기억한다고 할 때, 그 시대가 얼마나 끔찍한 시대였는지를 알려준 사건이 서승 선생의 '난로 사건'(편집자 주: 1971년 대선을 앞두고 서승.서준식 형제가 간접 혐의로 보안사에 검거된 뒤, 서승 씨는 심문과정 중 심한 고문으로 자신의 의지와 달리 거짓 자백을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경유 난로 기름을 끼얹고 분신을 기도한 바 있다)이었다.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으면 그런 방식으로 사람이 죽음을 과감히 선택할 수 있을까 생각했고, 지금까지도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잊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고통을 잊는 한 역사의식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모든 고통은 일회적인 반면 모든 영광은 수치화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통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박제화된 것만 남는다. 수치화된 박정희 정권, 그의 치적만 남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억도 똑같다. 최근 경남 통영을 방문했는데, 고속도로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온통 작곡가 윤이상 선생으로 도배를 했다. 윤 선생은 한국 정부로부터 끝끝내 거부됐지만 그가 죽고 나서 한국 정부에게 더 이상 무해하게 됐을 때, 그의 수난을 그런 식으로 박제화, 상업화하는 것은 고인에 대한 최고의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한국 지식인들이 동아시아인의 공통성을 쉽게 얘기하나" 서경식 : 동감한다. '이 나라 사람들이 고통의 기억을 잊어버렸는가'에 대한 의문은 일반 젊은이들만이 아니라 지식인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최근 창비에서 주최한 한 포럼의 주제가 '동아시아인으로서의 공통성'이었다. 동아시아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서의 공통성을 갖고 미국의 일방주의에 저항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동아시아인으로서의 공통성'은 과거 일본이 아시아를 침략할 때 내세웠던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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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 |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한국과 중국은 일본에 계속 배신당했다. 어떻게 한국에서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공통성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루자는 얘기를 그렇게 가볍게 할 수 있는가. 언제, 어느 시점에서부터 일본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는가. 최근 <한겨레>에 서강대의 한 중국전문가가 '동아시아인의 건배'라는 글을 썼다. 벌써 건배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한국인들이 역사의 고통을 다 잊어버렸는지 의심이 든다. 일본 시민들의 역사망각증, 즉 역사의 기억을 지우고 자기를 긍정하고 싶은 욕망을 보면서 불안하고 위험하게 느껴졌는데, 한국에 와서 점점 더 불안해지고 있다. 어떻게 이 나라 사람들은 식민지 경험이 있으면서도 일제 식민지 시절의 고통의 기억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김상봉 : 완전히 망각했다 보지는 않는다. 또 외적 조건이 완전히 망각할 수도 없다. 지금 우리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기보다는 즉자적이다. 광주에서 살면서 느끼는 것도 그런 부분인데, 역사에서 언제라도 다시 침탈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저변에 깔려 있는 한 방어적 무의식이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다만 역사의 고통에 대한 기억이 매번 즉자적으로 부딪힐 때만 환기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의식의 수면 아래로 내려간다면, 그 슬픔은 힘이 되지 못한다. 수동적인 의미의 고통의 감수성은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든다. 방어적이 되고 자기 보전 본능만 강해진다. 이럴 경우 고통의 기억은 인간을 용렬하게 만들 뿐이다. 이런 고통의 기억은 차라리 없는 게 좋을 수도 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고통의 기억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과 타자와 연대를 위해 자기 고통에 대한 성실한 성찰을 요구한다. 서경식 : 일본은 전쟁의 가해자인데도 히로시마, 오키나와 등 피해자로서의 기억만 보존해 왔다. 학생들을 데리고 히로시마 평화박물관에 가보면, 전부 피해의 기억이며 다 기호화돼 있다. 반면 한국은 피해자로서의 기억을 다 잊은 듯하다. 한국의 시를 보면 김수영 시인도 그렇고 신경림의 '농무'도 패자의 역사, 패자의 아픔을 담고 있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도 같은 범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패자의 아픔을 통해 자기 인식으로 형성된 감수성이 있었는데, 오히려 내가 그걸 잘 기억하고 있고, 한국 사람들이 신기하게 다 잃어버린 것 같다. 김상봉 : 더 늦게 전에 우리 시대의 지성사를 성찰해봐야 한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 수난의 역사를 살아 왔다. 그러나 타자의 고통에 대한 참여, 또는 연대로 확장되지 못했다. 오히려 단순한 자부심과 긍지, 이를 통해 왜곡된 민족주의로만 나타나는 게 대단히 위험스럽고 걱정된다. 이전 세대는 고통이 가까이 있고 거기에 사로잡혀 있다. 거꾸로 지금 세대는 그런 고통의 기억은 없다. 우리 세대가 6.25를 기억 못 하듯 지금 세대는 5.18을 기억 못한다. 이들이 아는 것은 그 이후에 누린 상대적인 경제적 풍요고, 이런 경제 풍요가 고통에 대한 기억을 다 희석시킬 뿐 아니라 막연한 자부심, 자신감을 주기까지 한다. 이런 자신감과 자부심이 그 이전까지 민족적 열등감과 묘하게 맞물려 별로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과도하게 표출된 게 '월드컵 민족주의' 등 '과도한 운동장 민족의식'이 아닐까. 서경식 : 지금 세대적 단절에 대한 말씀이 나왔는데, 젊은 세대의 경우 상상을 못 하니까 당시의 고통의 의미가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된 것은 젊은 세대보다 기존 세대의 책임이 무겁다. 프리모 레비 (편집자 주: 현대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했던 유태계 이탈리아인으로 2차대전 말 아우슈비츠로 이송됐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한 뒤, 40여 년 동안 문학 작품 등을 통해 자신의 경험에 대해 '증언'하는 작업을 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홀에서 투신자살해 당시 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같은 전쟁 생존자가 자신들이 겪었던 경험을 젊은 세대에 전달하려고 할 때 느껴지는 어려움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 윤동주의 시도 하나의 예로 들 수 있다. 윤동주의 '서시' 중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을 이부끼 사토(伊吹鄕)라는 일본 사람이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일어로 번역했다. 이부끼는 윤동주는 기독교인으로 그의 시는 기독교적인 사랑의 표출이다, 미움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윤동주 시인의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가 윤동주의 시에 대해 "그는 일본 사람에 대한 미움이 없었을 것"이라고 얘기한 것을 자신의 번역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제시했다. 윤동주가 표현한 '죽어가는 것들'은 일제 치하에서 조선적인 것, 사라져가는 것들을 의미한다. 반면 이부끼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라고 번역한 것은 일본의 애니미즘(animism : 모든 것에 신이 깃들여 있다는 믿음)에 기반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깊은 미움과 동의적 의미다. 미움이 있으니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설사 윤동주가 일본사람들에게 기독교적 사랑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일본인들이 그렇게 주장해서는 안 된다. "목격자는 방관자가 아닌 증언자" 김상봉 : 일본 사람들이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누군가를 학대했는데 그 학대받은 사람이 자기를 사랑해주기까지 바라는 것은 어린애 같은 기대 아닌가. 일본인들의 정신적인 허약함을 보는 것 같다. 서경식 : 이런 게 일본의 허약한 제국주의적 인식의 전형이다. 그래서 나는 일본인들에게 '상상 못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생각해보자', '바깥에서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를 안 보려는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생각해보자'고 얘기한다. 민족이 타자, 침략하는 사람에 대한 반동을 통해 형성된다면 그 관계성과 운동성을 제고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윤동주가 민족 시인이라고 할 때 어떤 의미인가. 모순적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난 디아스포라이므로 민족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윤동주가 왜 조선말로 시를 썼는가. 조선말밖에 못 썼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간도에서 자랐기에 초중등 교육을 조선말로 받았다. 그래서 자기 진심을 조선말로밖에 표현하지 못했다. 그 당시 이미 조선의 문학가들은 일본어로 글을 쓸 수 있었다. 일본말을 쓴다는 것을 일본 문화를 배우는 의미도 있다. 김상봉 : 윤동주는 연희전문 출신이다. 연전이 당시 우리말에 대한 자의식이 상당히 강했다. 조선어학회 사건(편집자 주 : 1942년 일제가 국학연구의 탄압책으로 조선어학회의 관계자를 대거 투옥한 사건. 최현배 등 조선어학회 관계자들은 1년 동안 일본 경찰의 갖은 야만적인 고문에 시달린 끝에 '학술단체를 가장하여 국체(國體)변혁을 도모한 독립운동단체'라는 죄명으로 기소돼, 6년에서 2년까지 징역을 받았다) 으로 정인보, 김윤경 등이 잡혀가기도 했다. 난 윤동주 같은 이가 역사에 있어 '목격자'라고 생각한다. 정신의 강건함이 없는 상황에서는 순수함이 없다. 인간을 감동시키는 순수함은 여린 감수성으로 나타난다. 우리 역사를 보면 저항운동에 두 가지 전통이 있다. 하나는 테러리스트의 전통이다. 동학, 항일 의병, 서승과 서준식 선생이 바로 이들이다. 1970~80년대 군부 독재정권에 항거하면서 감옥을 들락날락 했던 이들도 이 전통을 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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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 |
반면 함석헌, 윤동주, 한용운은 '목격자'들이다. 하지만 '목격자'는 방관자가 아닌 '증언자'다. 시인, 철학자들은 증언자가 돼야 하고, 이 증언은 언어에 대한 치열함, 몰입이 필요하다. 이들은 저항의 역사 속에 같이 존재했지만, 우리 사회에서 증언자의 전통은 별로 진지하게 반추된 적이 없다. 이제 이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미 부여해야 한다. 끝끝내 할 수 없는 일을 안 했을 때 순교자가 된다. 수난의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을 적극적으로 해서 순교자가 된 게 아니다. 악한 사람들이 나의 악에 동참하라고 할 때 거기에 동참하지 못해서 순교자가 된다. 그래서 윤동주는 죽었고 함석헌은 죽지 않았지만 똑같다고 생각한다. 삶의 알량한 안락함, 명예, 지위 등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으려면 타협해야 한다. 같은 시인으로서 서정주와 윤동주의 차이는 사소한 것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차이가 절대적인 것이다. 자기가 선 자리에서 아닌 것은 죽어도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단순히 소극적이라고만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서경식 : 윤동주의 시 '십자가'를 보면 자기 운명을 아주 냉담하게 예측한다. 하지만 윤동주는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 사람들이 이런 것을 다 잃어버리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김상봉 : 그런 전통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지고 승화될 수 있다고 본다. 내 경우를 보면, 무엇이 살아있게 했는가? 내 인생에 각인된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서승선생의 '난로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일방직사건(편집자 주 : 1978년 인천의 동일방직이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노조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노조 사무실을 부수고 인분을 투척한 사건)이다. 내게는 이 두 사건이 하나이자 전부로 삶을 이끌어 왔다. 내가 당한 상처였다면 세월이 지나면서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의 고통이 한 사람의 삶에 지울 수 없이 각인돼 삶의 에너지로 살아 있는 경우가 있다. 이들의 고통은 혼자만의 무익한 고통이나 수난으로 끝나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수 많은 다른 타인들의 응답 속에서 역사가 발전한다. 내가 마음속으로 빚지고 있다고 느끼는 분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얘기는 그 고통을 누가 대신해줄 수 없었지만, 그분들이 품었던 이상주의적 열정이 절대로 역사 속에서 속절없이 배신당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계속)
"세상의 허무주의자들에게 고한다"
[대화]〈12〉서경식 & 김상봉 : 디아스포라, 민족, 그리고 역사
2006-09-06
재일조선인 3세 서경식은 1966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한국에 올 수 있었다. 당시 '재일거류민단 하계학교' 프로그램에 참석해 경주를 방문한 그는 먹고 살기에 급급해 문화 유적 따위는 돌볼 겨를이 없는 모국의 가난을 보았다. 그리고 경주의 한 박물관에서 제 몸뚱이조차 잃어버려 머리만 남은 석불을 보고 시를 썼다. 돌부처 머리가 아플 만큼 하늘 깊은 날 시골 마을 작은 박물관, 기와 조각 무너져 내릴 듯한 붉은 문을 들어서다 머리 하나 서늘하게 미소 짓고 있네 불타버린 돌단 앞 굳은 얼굴로 마주선 내 앞에 머리만 남은 그대는 담담히 미소 짓고 있네 비를 피할 수 있는 처마도 없고 위험을 지킬 철책도 없이 말라 숨죽은 잡초 위에 머리만 남은 그대 나는 그대를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매미도 울지 않는 여름 눈부신 빛 속을 나는 그대 향해 다가선다 비틀어져 볼품없는 소나무 그 조그만 그늘 속, 돌로 된 그대는 미소 짓고 있네 얼마나 긴 세월을 그대는 그렇게 웃어왔는가 제대로 된 논밭도 없는 산악 경상북도 가난하고 시커먼 백성들에게 그대는 그렇게 미소를 건네 왔다 하지만 세월의 태풍은 그대의 강건하고도 부드러웠던 몸을 앗아가고 코조차 떨어져 나가 여기저기 이끼가 돋기도 하였건만 그대의 이 안정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세월이 흐르게 만들었던 백성들의 눈물조차 마침내 말려버리고 마는 경상북도의 이 여름에 평화로이 웃고 있는 그대 그대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또한 무엇인가 나는 남의 나라 일본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그대의 이름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도시인의 손을 가졌으니 그대를 흔들어 움직일 수 없다 나는 야간열차와 배를 갈아타며 일본에서 왔다 그러니 이 마을에서 가끔 교토를 떠올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대는 분명 일본을 알고 있으리라 그대가 몸통을 잃어버린 것도 코가 떨어져 나간 것도 그 나라와 무관하지 않으니 그대 눈으로 그 나라 인간들이 이 나라에서 무엇을 했는지 보았을 것이다 나는 일본에서 온 나그네 그대는 왜 나를 비난하지 않나 그럴듯한 얼굴로 카메라를 들고 그대를 가엾어하려드는 이런 나를 그대는 미소 짓고 있네 정원석과 같은 산들에 벌레처럼 매달려 살아가는 백성들에 둘러싸여 그대는 미소 짓고 있네 시골마을 박물관 마당 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짓는 그대 시커먼 세월의 흔적, 돌로 된 그대 그대를 금이나 동 같은 것이 아닌 돌로 만든 조상의 그 지혜가 얼마나 애틋한지 나는 그대 앞에서 무심결에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간밤에 해협을 건너 처음 이 나의 나라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그러니 나는 정말 납득할 수 없다 그대의 풍요로운 입가 어째서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뒤틀리지 않을까 그대의 부드러운 눈의 윤곽 어째서 피눈물이 흘러넘치지 않을까 나는 무엇을 구경하고 있을까 나에게 보이는 것은 그대의 부드러운 미소 하지만 내 귀에는 나의 관광으로 먹고 살겠다는 껌팔이 소년들의 조숙하고 쉬어버린 목소리만 날아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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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도쿄 게이자이대 교수(왼쪽) ⓒ프레시안 |
거리의 성매매 여성들이 15세 소년인 자신마저 붙들어 세우는 어둡고 우울한 모국의 모습, 또 그 모국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 첫 한국 여행을 통해 얻은 문제의식은 평생 그의 화두가 됐다. 조국 방문 후 2년이 지나, 그는 이 시들을 묶어 박일호라는 필명으로 자비 출판했다. 그리고 그 시집의 머릿글에서 첫 고국 여행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년 전 나의 첫 한국 여행은 고향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스스로의 존재기반으로서의 고향 또는 민족을 실제적으로 이미지화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나는 고향의 실체를 잡고 싶었다. 한국의 8월은 둔기로 얻어맞는 것처럼 더웠다. 나는 그 더위 속에서 마비되려는 의식에 피를 흘리는 듯한 방식으로 고향의 모습을 기록하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목격자이고자 했다. 목격자는 방관자가 아니다. 목격자는 언젠가 증언을 한다. 그리고 나는 목격으로부터 증언까지 나에게는 2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의 무능력은 나에게 진실을 증언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말은 공중을 떠돌고 의미를 잃어버린 채 허망하게 부서져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말은 그대들의 머리를 자극하는 데는 너무 가벼운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대들 일본인들에게 있어 나의 시는 과연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모른다. 아마도 이 책은 내 마지막 시집이 될 것이다. 나는 일본어로 고향을 쓴다는 것의 한계에 직면하고 있고, 모국어로 고향을 쓰기에는 나는 너무나 일본인인 것이다. 자, 나는 증언했다. 내일, 이미 나는 목격자에 머물러 있지는 않으리라." 서경식은 마치 평생을 '경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스스로의 미래를 예고라도 하듯이 재일조선인으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와 글 곳곳에 토로하고 있다. 서경식이 40년 전에 쓴 시와 글을 읽고 김상봉은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이 시와 글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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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봉 전남대 교수 ⓒ프레시안 | 전편의 대담("2006년 한국은 '고통의 역사'를 잊었나")에서 서경식이 '동아시아인으로서 공통성'을 쉽게 언급하는 한국 지식인들에게 문제의식을 느낀 것도 그의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에 기반한 것이다. 역사의 고통을 잊은 사회는 막연한 자부심과 긍지에 기반한 왜곡된 민족의식에 사로잡힐 수 있다. 이처럼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의식은 국가의 경계를 넘는 디아스포라가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현재', 그리고 '미래'와 연관된 것이기도 하다. 서경식은 20세기 소수자의 삶이 배어 있는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이 새로운 보편성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서경식이 김상봉과 만나는 부분도 이 대목이다. 김상봉 역시 (패권적,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해 왔기 때문이다. 서경식과 김상봉은 타자와의 만남이 가능한 주체를 꿈꾼다. 김상봉이 '서로 주체성'이라고 이름 붙인 그것은 서경식이 '디아스포라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대안적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자발적 연대를 통한 '공동체', 바로 이것이야말로 21세기의 '민족'이 되어야 한다. 대담 후반부를 발췌해서 소개한다. 두 사람의 대담엔 서은혜 전주대 교수가 배석해 통역과 진행을 도왔다. "민족을 새롭게 정의해야 할 때" 서경식 : 윤동주의 시 '별을 헤는 밤'을 보면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프란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나온다. 윤동주는 이를 통해 열린 형태의 민족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본다. 민족의식이 형성되는데 타자와의 만남은 아주 중요하다. 타자와 만나지 않을 때 국수주의적 민족의식이 우선한다. 윤동주의 모어(母語)는 조선어였다. 나는 일본어가 모어다. 한국에서 일본의 지배는 35년 만에 끝났지만 아프리카처럼 100년 가까이 식민 지배를 받았다면 모어가 없어지고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개인들에게 모어가 절대적이라면 별 문제가 없다. 자기가 쓰고 있는 모어에 대한 의심이 없었다면 나도 운동주의 '서시'를 보고 이부키 같이 번역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 내 사고엔 일본적인 사고가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아름답다, 좋다는 느낌 자체가 일본어로 구성된다. 일본어라는 모어는 자기가 선택한 게 아니고 아기일 때 투입된 것이다. 어머니가 아기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것, 그것이 원초적인 폭력이다. 이 과정이 폭력으로 인식되면 근원적인 것도 의심하게 된다. 애국심이나 가장 깊은 수준까지 생각하면 자기가 쓰고 있는 말에 대한 의심까지 든다. 김상봉 :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고 하는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민족이 '실체'냐 '무(無)'냐 하는 잘못된 인식으로 빠질 수 있다. 민족은 '실체'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다. 집단적 주체다. 그것은 '우리'라는 공유된 자기-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있으면 존재하고, 그것이 없으면 사라진다. 진정한 주체성은 타자와 만남을 통해 형성된다. 언제나 타자와 만남을 통해 참된 의미의 주체성이 형성되고 그게 '서로 주체성'이다. 나는 이전에 민족을 가리켜 역사와 언어라고 하는 어떤 전제, 조건 위에서 수립되는 '공동 주체성'이라고 풀이했는데, 서경식 선생을 만나면서 내 안에 굉장히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타인과 만남에 전제가 필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은 역사나 언어라는 전제를 버려야할 때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땅에 들어온 피부 색깔이 다른 이주민들과의 '공동 주체성'의 형성이란 과제를 생각해 봐야 한다. 민족은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맞닥뜨린 '만남의 공동체' 정도로 느슨하게 개념 지어져야 한다. 윤동주 시인이 패, 경, 옥 등 이국 소녀 이름들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민족주의 개방성에 대해 개념적인 말로 형상화시켜야 하는 게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디아스포라적인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지금까지의 민족 개념이 아닌 다른 것이 어떤 것이 있을까. 혼자서 곱씹으면서 도달한 결론이 우리 시대에 추구해야 할 개념은 만남의 지평 그 자체를 민족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서경식 : 5·18에서 '서로 공동체'라고 할 때, 모든 사람이 다 나서서 싸운 것은 군사독재에 대한 분노, 일상적인 지역적 억압에 대한 분노 등이 근간이 됐다. 한국 사람이니까, 광주니까, 이렇게 보는 게 아니다. 다소 진부하지만 정치적 목표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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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 | 김상봉 : 5·18을 생각하면 정치적 이념에 앞서야 하는 게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의 문제다. 그것 없이 정치적 이념이 먼저 갈 때 인간은 수단화된다. 서경식 : 1960년대에 일본에 재일조선인들의 정체성이 문제가 됐을 때 일본 내에서 조선 문화를 얘기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주장은 일본이 고대와 중세 때 백제, 고려 등으로부터 문화를 전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것이다. 문화가 있다, 없다는 문제와 지배, 피지배는 다른 얘기다. '문화가 있다'고 강조하는 것은 자기가 천대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은 욕심이다. 그렇다면 '문화가 없는' 사람들은 지배당해도 되는가? 이런 사고방식은 서양인들이 인디언들을 문명화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남경태 옮김, 그린비 펴냄)에 보면 식민지 지식인의 인식의 세 단계가 나온다. 처음에는 백인에 동일화하려고 노력하고, 두 번째 자기들이 고대에 있어 얼마나 훌륭한 문화가 있었는지 증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고대 아프리카에 훌륭한 문화가 있었다고 해도 백인들은 그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문화를 시발점으로 자기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눈앞에 있는 싸움을 통해서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 세 번째 단계가 바로 디아스포라인 내가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파농도 디아스포라다. 알제리와 별 상관없는 사람이었지만 알제리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새로운 보편성을 위해 싸웠다. 김상봉 :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금 나누는 얘기들이 한국 사람들만의 얘기가 아니라 전 지구적인 보편성을 갖고 있다. 서경식 : 디아스포라적인 객관성이 있다. 디아스포라야 말로 자신의 존재조건, 즉 언어조차 의심하면서 그래도 남는 자신을 근거로 타자와 서로 공동체를 만들 수밖에 없다. 피부 색깔이 다른 이주 노동자를 한국 사람으로 만드는 게 아니고 그들과 만남을 바탕으로 새로운 보편성을 이 사회에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허무주의에서 나오는 삶의 의지?"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 언제나 그게 마음에 걸린다. 외국이 숙소에서 눈을 떠, 잠들지 못한 채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삶의 실감이 급격히 흐려질 때가 있다. 죽고 싶은 것은 아니다. 슬프다거나, 우울해진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과는 좀 다르다. (…) '누군가가 뒷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는 말이 있지만, 내 뒷머리를 이승으로 잡아끄는 힘은 너무 약하다.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계속 살아야만 하는가. (…) 이렇게 나를 이 세상에 잡아매 두는 끈들을 그 어떤 것도 인공적이고 불투명한 것이다. 내가'죽음'을 향해 몸을 내밀었을 때 그 끈들이 나를 꽉 잡아줄 것인가. 그럴 것 같지 않다. 내 쪽에서 손에 쥐고 있는 끈을 살짝 놓으면 그걸로 그만일 것이다.(<디아스포라 기행> 46~49쪽) 김상봉 : 서경식 선생의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제일 가슴 아프게 읽었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낯선 도시 호텔방에서 내가 뛰어내린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나를 붙잡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한 인간이 놓여 있는 측량할 수 없는 뿌리 없음, 허무함 등에 대해, 이 절규에 대해 내가 뭐라고 응답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허무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교양인이 아니라는 식의, 우리 시대의 가벼운 허무주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허무주의라는 말을 쓰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아스포라로서 아주 절대적이고 실제적인 허무의 체험과 또 정반대로 보통 허무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삶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이 어떻게 같이 갈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정말로 서경식 선생이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조금만 더 정면으로 선생이 그 지점을 대면해줄 수 있겠나. 서경식 : 아주 근본적인 문제다. 민족과 관련된, 디아스포라와 관련된 허무주의라고 할 때는 두 가지가 생각난다. 가네코 후미코(편집자 주: 조선인 남편 박열과 함께 1923년 히로히토 당시 일본 왕세자와 고관들을 폭살하려다가 붙잡힌 일본인. 1926년 3월 이들 부부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가네코는 석달 후 감옥에서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무정부주의자는 죽음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주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사생아라서 호적이 없었고, 그래서 소학교도 들어가기 힘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후미코는 가부장제와 국가 제도에 대해 아주 철저한 증오를 갖고 이를 끝까지 관철했던 사람이다. 그는 죽음으로 자기를 관철했다. 이봉창(편집자 주: 193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구의 지시로 일왕 히로히토의 암살을 시도했던 인물로 그해 10월 사형을 당했다)도 마찬가지다. 과자점 직공, 철공소 직공 등을 전전하던 그는 유가다를 입고 게다를 신고 김구 선생을 찾아가 '죽고 싶다. 죽을 명분을 마련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봉창이 마지막에 히로히토를 암살하기 위한 폭탄을 가지고 일본에 갈 때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그는 평생 집착이 없었다. 이봉창도 다이스포라였고 그래서 그런 허무주의자의 분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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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 | 김상봉 : 삶에 집착하는 한 누구도 자유를 쟁취할 수 없다. 죽음을 무릅쓰고 자기를 걸 수 있다는 것은 별로 놀랍지 않다. 오히려 궁금한 것은 삶에 대한 의지다. 삶의 이유, 존재의 이유, 근원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허무주의 때문에 병든다. 삶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고 냉소에 빠지면 모든 게 다 면죄부를 부여받게 된다. 정반대로 그 허무주의를 참을 수 없을 때 맹목적인 우상숭배에 빠져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소련이 망하기 전까지 역사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떤 유토피아도, 절대자도 오지 않는 시대다. 서경식 선생은 디아스포라로 그걸 누구보다도 철저하고 처절하게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살았다. 서경식 : 진부한 말이 될 것 같아 쓰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정의'다. 정의롭게 살고 싶다는 욕심이다. 중국의 루쉰은,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어떤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길이 있다고 해서 걸어가는 게 아니다. 소련이 무너졌다고 해서 그만두는 건 싸움이 아니다. 근거가 없더라도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다. 전부 다 없어도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는 뭐냐고 물으셨는데, 그럼 전부 다 없으면 죽는 것이냐. 개개인의 허무주의와의 싸움이다. 19세기 러시아 허무주의자들은 다 귀족이었다. 사치스럽게 살 수 있었는데 노예를 해방시키고 재산을 나눠줬다. 이런 허무주의적 테러리스트들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변화가 있었다. 김상봉 : 수백년 전 사람이 경험했을 무조건적이고 직접적인 삶의 동력 같은 것은 이제 누구에게도 없다. 서경식 : 나는 유한이다. 국가나 국민은 무한이다. 내가 국가를 위해서 죽으면 불사가 된다. 새로운 우리라는 걸 구성할 때는 이런 사고방식을 거부해야 한다. 죽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직시하지 않는 한 국가나 국민이 재생되고, 국가주의나 국민주의로 후퇴할 수 있다. 진짜 자유인이 되려면 이것부터 거부해야 한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게 자기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 되는 길이다. 마음 아프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를 태어나게 만든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이 삶의 끈을 잡는 행위 자체가 될 수 있다. 이를 놓는 게 패배라고 생각해서 끈을 놓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내일 여기에서 몸을 던지고 죽었다고 해도 놀랄 필요나 가슴 아프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냥 자살한 것처럼 뚝 끊어지는 것도…" 허무주의와 삶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의 관계를 두고 두 사람 사이에 아주 가깝지만 결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보였다. 답이 없는 문제를 두고 대화는 끝이 없이 계속되었고 그럴수록 점점 더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불편한 긴장감이 자리에 있던 모두를 옥죄었다. 대화의 에너지는 거의 최고조에 달했다. 윤리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초월적 계기를 찾아내야 하는지, 혹은 그런 믿음에 기대지 않는다는 그 자체가 동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은지…. 이런 문제들에 대한 대답은 좀 더 철학적인 탐구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기에 이 정도로 대담을 마치기로 했다. 대담이 결말 없이 중간에서 끊긴 느낌이라 마무리 멘트를 부탁하자 서경식은 "그냥 자살한 것처럼 뚝 끊어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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