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58년 1월 5일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인천으로 이사해 인천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고 미국 노벨대 경영학 명예박사를 받았다.그는 어릴 때부터 합기도와 태권도를 익혔으며 87년에 벌써 태권도 7단이 되었다.
그는 당시 전국무술대회에 자신이 창시한 문무도로 참가했다.
이소룡, 그 이상이 되고 싶었다는 그는 어린시절 홍콩무협스타인 왕우 배우의 <흑호문>, <흑백도>, 그리고 라열 배우의 <철인(죽음의 다섯손가락)>을 보며 영화를 꿈꾸었다고 한다.
한국영배의 황두승 사장은 그의 소질과 운동 실력을 알고 그를 남기남 감독의 <평양맨발>에 출연시켰다. 이주일을 비롯하여 마영달, 남포동, 곽은경 등이 출연한 이 영화가 그의 데뷔작이다. 이후 그는 박우상 감독의 <돌아온 용쟁호투>에 출연하였으며 현진영화사의 김원두 사장과 친분을 맺어 당시 톱스타인 이영하의 출연료가 1500만 원이던 시절 무술감독료를 포함하여 3천만 원을 받았다.
당시 세계 최초로 공중회전 7단차기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후 <내이름은 쌍다리>에 출연하였고 홍콩 골든하베스트사의 초청으로 1984년에서 1986년까지 홍콩에서 활동하였다. 홍콩 데뷔작은 무수천 감독의 <진로여정>이고 한국인들이 홍콩영화에서 악역으로만 출연하는 것에 자존심을 상해서 출연을 거부하고 제작, 연출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홍콩의 TVB 토크쇼에서 무술 시연을 하여 타이완의 영화사 미보당 사장이 섭외를 하여 타이완에서 활동하였다.
대만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여 <겁없는 아이>에 출연 후 <해동제일가> 등 세 편의 각본을 썼고 <대륙혼> 등의 영화를 감독하기로 했다. 그러나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고 이후 직접 제작에 참여한 <천년>도 제작이 중단되는 실패를 겪는다.
그후 <카리스마>에 출연하였고 영화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한국 액션영화의 세계화를 위해 애썼던 그의 젊은 날은 파란만장한 실험의 연속이었다.
그는 신영일이란 본명 외에 데뷔 초창기에 황우 그리고 홍콩 시절의 한국일이란 예명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지금은 신영일이란 본명으로 세계평화성경공회의 이사장 및 세계문화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 이 모두가 영화로 부터 비롯된 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