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봉화4길 : 곤지 바위길(곤지암역 - > 신둔 도예촌역)
봉화 4길은 곤지 바윗길이다. 지명만 들어도 다정다감함을 느끼는 곤지 바위에는 어떤 사연이 깃들어 있을까? “‘곤지암’의 어원은, 옛날 이 마을 뒷산 끝자락에 연못이 있는 곳에 바위가 있다고 하여, ‘뫼 곤(崑)’ ‘못 지(池)’ ‘바위 암(巖)’자를 써서 곤지암이라고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이 일대는 조선 시대부터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이곳을 거쳐 가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이 때문에 곤지암 주막촌과 오일장이 유명했습니다. 광주에서 곤지암까지 가기 위해서는 대쌍령과 소쌍령이라 불리는 두 개의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신립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신립 장군의 혼이 두 개로 쪼갰다는 넋고개 전설과 벼락이 쳐서 바위가 갈라졌고, 지금도 그 바위 위에서 향나무가 약 400년 넘게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라고 경기 옛길 홈페이지는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곤지암 초등학교, 곤지암 중학교. 곤지암 고등학교, 곤지암 사거리, 곤지암 인터체인지, 곤지암읍. 곤지암리 등 곤지암이란 명칭이 곳곳에 베여있는데 이 고장의 음식인 소머리 국밥으로 인해 곤지암이란 지명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기에 봉화 4길도 곤지 바윗길로 명명하였나 보다. 경기 광주시 곤지암읍 곤지암리에 소재한 경강선 곤지암역에서 봉화 4길을 걸어간다. 곤지암역 1번 출구로 나와서 좌측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경강선 철로인 육교 아래에 이르면 양평가는 98번 지방 도로변으로 진입하여야 한다.
선행자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 봉화4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찾을 수 없었다. 갈 잘못 들은 것으로 여기고 지도를 확인한바 가는 방양과 일치하였다.
가는 길을 올바르게 진입하였는데 안내도를 확인하지 못한 것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 웃음 한번 짖고 도로변을 걸어갈 때 식당이 있어 조금 늦었지만, 아침 식사를 하고자 배낭을 내렸다.
오늘부터 기온이 하강한다고 하였는데 다소 쌀쌀한 바람 앞에 움츠려진 가슴이 아침을 먹고 나니 허리가 꼿꼿해지며 기운이 솟아 겉옷은 벗고 쬬끼를 걸치고 걸어간다.
도로에는 자동차의 통행이 잦아 다소 시끄러웠다. 길옆에 있는 곤지암 행정복지센터의 건물은 언뜻 보아도 도시 규모보다 건물이 크고 일반 건물에 비교해 화려하게 느껴진다.
지방자치가 시행되고 나서 행정 관서의 규모가 전과 비교하면 너무 화려한 대형 건물로 바뀌고 있는 것 같다. 구한말 때 임금이 거처할 궁궐이 없어 당시 집권자인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여야만 했을까?
성인께서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에 참견하지 않는다(不在其位,不謀其 政)고 하신 것처럼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비판하는 행위는 어리석은 짓이요 도보 여행의 즐거움을 반감하는 행위임을 자각하고 가는 길에 집중한다.
자동차와 나란히 걸어가는 길은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계속되었다. 어서 빨리 벗어나기를 고대하던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는 은대미 버스 정류장에 이르고 난 뒤 곤지암천의 물소리로 바뀌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개천의 물소리를 들으며 걸어가노라니 비로소 걷는 맛이 난다.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도 사라지고 마을길은 은은하게 자연의 향기를 풍기는데 기쁨의 교회를 지나면서 깊은 산골의 세계로 몰입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였다.
고즈넉한 마을, 우리의 어린 시절 시골길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때는 도로가 포장되지 않아 비만 오면 발이 물에 젖는다고 짜증을 내고, 읍내에 나가려면 30리 길은 걸어야 한다고 불평을 했던 그 순박한 인정이 넘쳐는 마을을 찾아서 걸어가는 길이 봉화길이 아닐까 ?
봉현리였다.느티나무는 수백년의 세월을 이겨내어 마을의 상징이 되었고 주민들은 이곳에 정자를 세워 모두의 쉼터가 되었다. 봉화길 스탬츠함도 이곳에 있었고, 곤지 바위 이야기를 적어 놓았다.
아늑하고 고요한 마을 봉현리는 “마을 대부분의 지대가 비교적 완만한 구릉성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곽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마을 남쪽에 정개산이 자리한다.
자연 마을로는 봉현, 설월이, 바깥, 안말 마을 등이 있다. 봉현 마을은 새재 밑에 위치한다 하여 새재 또는 조현이라 불리다 변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설월이 마을은 눈이 많이 쌓이는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바깥 마을은 설월이 바깥쪽에 위치한다는 의미에서 불리워진 이름이며, 안말 마을은 설월이 안쪽에 자리한다는 뜻에서 명명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골 마을이 무엇인지를 말없이 보여주는 봉현리와 아쉽게 헤어지며 종착지를 향하여 걸어가는데 넘어가야할 고갯마루가 하늘 높이 솟아있다. 날아다니는 새도 고개가 높아 쉬어 넘어간다는 조현鳥峴 즉 새재였다.
헤어지기 싫은 봉현리와 아쉬운 작별을하여 높은 고개 넘지 못하고 발길 되돌려 돌아오란 듯이 높고 높이 솟았는데 어제의 산행 피로가 풀리지 않고 걷기에 나섰기에 동행한 김 총무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르니 은근히 겁이 났다.
3번 국도를 가로지르는 봉현 육교를 건너면서 고갯마루는 서서히 고도를 높이여 돌아가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눈이 오면 자동차의 통행을 금지한다는 경고문이 붙어있는 철문을 지나면서 고갯길은 돌고 돌아간다.
보폭은 평상시 걸음으로 같은 보폭을 유지하고 숨이 차면 보폭을 작게 띠며 쉬지 않고 한발한발 진행하니 날아가는 새도 쉬고 넘어간다는 고갯마루를 한 번도 쉬지 않고 넘어갈 수가 있었다.
새재를 넘어 내려가는데 이상하게도 봉현리 쪽에서는 긴 오르막으로 계속되는 매우 지루한 길이었는데 신촌리에서 오르는 길에는 고갯마루 9부 능선까지 건물이 들어선 완만한 길이었고 거리 또한 매우 짧았다.
새재를 내려서니 곤지암읍 신촌리였다. 우리나라의 산에서 가장 많은 이름이 국사봉이라면 마을의 이름은 아마도 신촌리일 것이다.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을 지킨 신촌리는 그 지명처럼 새롭게 발전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도로를 따라 동원대 정문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봉화길은 길 찾기에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동원대 정문으로 진입하여 효암관을 지나면 동원대학교 안내도가 세워져 있고 이곳에서 봉화길은 우측의 산길로 진입하여야 한다. (안내도 기둥에 표지기 부착되어 있음)
숨겨놓은 보물을 찾는 것 같은 길 찾기의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임도가 조성되어 있었고 이곳에서 봉화길은 좌측의 넋고개로 내려가는 임도를 따라 진행하여 이천 의병 전적비가 세워진 곳에 이른다.
“이천 의병 전적비는 수광리 넓고개(넋고개)에 세워져 있는데 이곳은 1896년(고종 33)1월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 의병들이 일본군 수비대 1백 명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적군을 거의 전멸시키며 승리를 거두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1988년 7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李元會)가 중심이 되어 넓고개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 이천수창의소 의병들의 구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어제(11월5일)는 충남 공주시에 소재한 우금치를 찾아 동학 농민 혁명군의 輔國安民, 廣濟蒼生의 人乃天 사상을 되새기었고 오늘은 봉화길을 걸으면서 이천 의병 전적비에 이르러 국가 안위에 흔연히 몸을 던지는 殺身成仁의 정신을 접하니 이 땅에서 雨露를 먹고 사는 사람으로서의 자긍심이 넘쳐난다.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리고 도로를 걸어간다. 경기미로 이름난 고장 이천시이다. 광주시에서 이천시로 넘어온 것이다. 이천시에서 무엇이 우리의 발걸음을 신명 나게 인도하여 줄까? 설레는 마음을 안고 신둔 도예촌역에 이르렀다.
● 일 시 : 2024년11월06일. 수요일. 맑음
● 동 행 : 김헌영 총무님
● 동 선
- 08시40분 : 곤지암역
- 09시25분 : 은대미 버스 정류장
- 10시30분 : 봉현정. 봉화길 스탬프함
- 11시10분 : 이천 의병 전적비
- 11시30분 : 신둔 도예촌역
● 총거리 및 소요시간
◆ 총거리 : 11km
◆ 소요시간 : 2시간50분
첫댓글 마치 걸은 길처럼 느낌을 주는 귀한 탐방기를 정독했네요. 정다운 곤지암길 걷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