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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당위성, 조화調和를 향하여
'존재存在'란 단어가 가지는 철학적 심오함에 한번 빠지면 쉽게 헤어나올 수가 없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이르기까지, 실로 이러한 존재에 대한 의심과 합리화는 끊임없다. 이러한 의심과 합리화를 진화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시간적 흐름에 따라 변화했다고 보는데, 이런 변화는 시대성을 반영하므로 일정부분 방향성을 가진다. 존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시대순으로 정리한다면 이런 방향성을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난한 작업은 철학자들에게도 큰 흥미를 가져다 주진 못할 것이다. 어쩌면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하는 일과 다를 바 없는, 돌아올 수 없는 길에 발을 내딛고 싶지 않을 것이다.
몇 가지 사례로 존재에 대해서 살펴보자.
사례 1 : 술잔
내 앞에 술잔A가 있다. 술잔은 존재한다. 술잔에 술을 채웠다. 채워진 술은 언제가 술잔에서 떠날 것이다. 채워진 순간, 일어날 일에 대한 확실성을 가진다. 술은 술잔과 어떤 관계인가? 술잔이 존재함은 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것은 확실성에 의해서 이어져 있다. 한번도 술이 채워지지 않은 채로 존재하던 술잔B가 깨졌다. 그렇지만 술과 술잔의 이어짐은 훼손될 수는 없다. 술잔은 술과 관계성 속에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지만, 술잔A와 술잔B를 개별적으로 볼 때 온전히 그런 관계성만으로 술잔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을까? 존재는 말한다, 관계의 확실성이 드러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술잔A은 술을 마시는 나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 또한 가능성이 아닌 확실성으로 이어져 있다. 수집가가 있다. 그는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도자기 술잔C를 고풍스런 장식장에 고이 보관했다. 그는 살아온 평생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술잔은 술을 마시는 사람과의 관계성 속에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지만, 술잔A와 술잔C를 개별적으로 볼 때 온전히 그런 관계성만으로 술잔의 존재를 설명할 수는 없다. 존재는 말한다, 관계성만으로는 자신을 정의할 수 없다고.
술잔은 술을 마시는 사람의 편의성에 의해 만들어 졌다. 이것이 술잔이 가진 존재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술잔A는 내가 없더라도, 혹은 내가 술을 끊었더라도, 혹은 세상의 모든 술이 사라져버렸다 하더라도, 심지어 깨어지거나 장식장안에 틀어박혀 있게 되더라도 존재한다(혹은 했다.). 존재는 존재성(존재의 속성)을 가진다. 존재는 그 자체로 있지만, 속성은 이어짐의 확실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모든 존재에는 존재의 속성이 내재한다. 존재는 말한다, 존재와 존재성은 불리부잡不離不雜이라고.
이제 좀 재미있는 실험을 해보자. 술잔A에서 시료를 채취한다. 화학적 분석을 통해서 그것이 가진 본질을 파악하려고 한다. 그리고 술잔A의 물성도 조사한다. 물리적 분석을 통해서 그것이 가진 본질을 파악하려고 한다. 이로써 술잔에 대한 보편적 특성을 파악하려고 한다. 가능할까? 개별성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술잔B와 술잔C에 대해서도 조사해본다. 그렇다고 보편적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할까? 혹은 본질에 접근했다고 할 수 있을까? 본질이란 것이 술잔 그 자체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기능에 있는 것일까? 술잔을 납작하게 변형시켜본다. 위상학적으로 동일하다. 하지만 그것이 술잔일까? 혹시 존재라는 것은 관측하는 순간 그 존재가 변하는 건 아닐까? 혹은 그 존재성이 변하는 걸까? 존재는 말한다, 존재성과 별도로 '변화와 소멸'이라는 보편적 속성을 가진다고.
사례 2 : 아틀란티스와 폼페이
아틀란티스는 플라톤의 대화록에 등장한다. 이 전설의 땅은 바다에 가라앉았다고 전해진다. 아직까지 수많은 설만 무성한 채로 여전히 그 실체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폼페이는 로마의 정치가의 편지에 등장한다. 도시는 화산폭발에 의해 사라졌다. 하지만 1592년 그 땅 위로 운하를 건설하는 중에 유적이 발견되면서 그 실체가 확인되었다.
15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아틀란티스와 폼페이는 가능성만으로 존재했다. 이런 '가능성-존재'를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외계인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화두도 '가능성-존재'를 존재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라고 볼 수 있다. 폼페이의 흔적이 드러나면서 어이없지만 아틀란티스도 역시 존재한다는 가설에 힘이 실리기도 한다.
폼페이, 과거의 폼페이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발견한 것은 폼페이의 흔적일 뿐이다. 즉 지금 존재하는 것은 '폼페이의 흔적'이다. 소멸된 도시는 과거 도시에 대한 많은 사실들을 드러내고 있다. 소멸된 도시는 (존재했던) 도시와 확실성으로 이어진다. '변화와 소멸'이라는 속성을 가진 존재이다. 즉 '존재했다'는 '존재한다'와 존재의 확실성으로 이어진다. 1500년이란 시간의 틈이 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존재의 확실성으로 이어지듯이 그 틈은 메워진다. 그리고 '내일의 나'로 이어지듯이 폼페이는 그 존재의 연속성에 있다. 어제의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존재한다. 나는 존재의 연속성 안에서 존재한다. 이러한 연속성을 가능하게 하는 건 '존재의 확실성'이다. 확실성은 결정론과 무관하다. 존재의 '확실성'은 '변화와 소멸'을 긍정한다.
폼페이라는 존재는 나에게 어떤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심지어 이것의 존재유무가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미없음meaninglessness'는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value의 문제이다. 나의 감각은 공시와 통시를 아우른다는 점에서 그 간접적 영향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폼페이는 나에게 '의미없음'이다. '폼페이가 의미없음'은 나란 존재성의 한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아틀란티스는 존재하는가? '가능성-존재'는 그 가능성이 현현顯現될 때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즉 '가능성-존재'는 무의미한 상태(nonexistence)이다. 여기서 무의미는 meaninglessness이 아닌, beinglessness로 표현된다. 즉 이는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다. '가능성-존재'는 과거-현재-미래의 어떤 존재의 확실성이 없는 상태이며, 이는 결국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혹은 무의미beinglessness한 존재라고 역설적으로 말할 수 있다. 간단하게 실존實存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은 유와 무로 이뤄졌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관념으로 이뤄졌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실재하는 세상은 존재存在와 부재不在로 이뤄져 있다. 소크라테스는 죽었다, 그는 부재不在이다. 소크라테스가 실존했던 인물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는 부재不在로 존재한다. 삶이 죽음을 포함한 실재이듯, 존재는 부재를 포함한 실재이다. 나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그녀는 부재이다. 이 세상의 세상됨에는 나의 어머니가 있다. 나의 어머니는 비록 먼지일지언정 이 세상을 이루는 흔적으로 있다.
좀 복잡해진다. 과연 폼페이와 아틀란티스는 뭐란 말인가?
단어 폼페이와 아틀란티스는 존재한다. 폐허가 된 폼페이는 존재한다. 전설 속에서 아틀란티스는 존재한다. 폼페이는 부재不在한다. 폼페이는 이 세상을 이루는 흔적으로 존재한다. 아틀란티스는 실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틀란티스는 이 세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폼페이처럼 아틀란티스는 간접적으로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아틀란티스는 부재不在가 아니라 '가능성-존재'이다. 아틀란티스는 무수한 이미지를 쏟아낸다. 단어 아틀란티스는 여러 이미지에 이어진다. 이들 이미지는 상징을 생산한다. 아틀란티스는 대홍수 이전의 에덴 동산이 된다. 아틀란티스는 이 세계 문명의 발상지가 된다. 아틀란티스는 외계인의 대륙이 된다. 아틀란티스는 신들의 올림푸스가 된다. 하지만 상징을 잇는 실체가 없다. 그래서 더욱 상징은 풍성해진다. 왜곡은 왜곡을 기하급수적으로 양산한다. 폼페이의 흔적이 발견된 순간, 폼페이의 상징은 하나의 실체와 이어져 부풀린 거짓은 사그라진다. 지금도 아마존에서 새로운 생명체가 발견된다. 이들을 외계인이라고 주장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진다면, 외계인에 대한 무수한 이미지와 상징은 빈약해질 것이다. 아틀란티스는 상징과 이미지로 이뤄진 존재이다. 실체가 없는 존재이다. 이는 부재가 아니다. 실로 이는 존재가 아니다. 이는 '없는 것'이다. 없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뭔가 기대할 필요는 더더군다나 없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없는 것'이 양산한 왜곡이 이 세상을 오염시키고 있다. 인간들에게 유효한 영향을 주고 있다. 무의미nonexistence/beingnessless가 큰 의미로 인간들과 이어진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신神'이다.
사례 3 : 도시와 오름실, 그리고 생명들
공간과 장소는 자아의 주체적 해석에 의한 의미(유효성)로 구분된다고 민병호씨는 말한다.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이 공간이라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그 영향에 의해서 자아가 드러나는 곳이 장소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공간과 장소는 같은 곳이다. 그 공간의 관념적 존재가 장소가 되는데, 이는 관념적 실재이다. 즉 공간과 장소는 같은 존재이지만, 그 존재성이 나란 존재와 맞닥트리는 순간 공간의 메타모포시스metamorphosis 즉 장소가 된다.
상기의 말에는 한가지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인간이 주체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음을 부정하진 않는다. 다만 사람은 살아있는 존재이며, 생은 곧 연결(系)이며, 사람의 감각은 끊임없이 무언가와 연결하고 연결된다. 이러한 운동은 인간의 주체적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그 살아있음, 즉 그 존재의 존재(속)성에 의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 현상은 관념일 수가 없다. 이 현상은 지극히 실재적이며, 이 현상은 실체를 지향하는 사람의 자율반응이다. 이는 자율신경계 운동과 같은 것이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인간은 심각한 결핍에 고통 받기도 하고 그야말로 느닷없는 행복(happiness)에 젖어 들기도 한다.
도시는 존재한다. 도시는 땅을 점유한 형태를 가진다. 외형적으로 도시는 온갖 만들어진 것들로 이뤄져 있다. 인간들이 만들었다. 그 온갖 것들은 죽은 것들이다. 죽은 채로 존재한다. 죽은 것들은 무수한 상징을 담은 이미지들이다. 이미지는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비물리적인 것도 포함한다. 죽은 것들은 흙을 파헤치고, 생명들을 몰아낸다. 그리고 인간들을 유혹한다, 인간들로 그 공간을 채운다. 죽어 있는 무수한 상징은 실체에 닿아있지 않다. 인간은 그 상징들과 끊임없이 연결한다. 들이키고 마셔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인간의 결핍은 극도로 깊어지고 커져만 간다. 살아있는 것이 필요하다. 공원도 만들고, 그곳에 살아있는 것들로 채운다.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푯말은 박아둔다. 거리에 나무들을 심는다. 그 나무가 너무 자라면 친절히 전기톱으로 윗부분은 잘라주고 키를 맞춘다. 어떤 나무에는 온갖 링거를 달아 둔다. 그 나무는 죽을 수가 없다, 수령 000이란 이름표도 달려있다. 인간들이 떠나지 않도록 도시는 유/무형 경계선을 따라서 변해간다. 최소한 인간들이 숨을 쉴 수는 있어야 한다. 인간의 환상을 최대한 증폭시켜야 한다. 못 견디고 떠나간 인간들에게 그 환상은 열렬한 그리움이 되어야 한다.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도록 어두운 밤을 전기빛으로 덮는다. 바다에 비치는 달빛을 쫓아 알에서 나온 거북이가 물로 나아가듯, 도시의 불빛은 인간을 유혹한다.
도시는 존재한다. 무수한 이미지들은 돈과 연결되어 있다. 돈은 도시의 상징이자 생명이다. 그 위대한 생명은 실체가 불분명하여 도시의 신이 된다. 생명을 가진 신은 엄청난 영향력으로 인간들을 구속한다. 인간은 그 안에서 속죄하고 찬양하고 경배한다. 그 열심에 스스로 안위한다.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결핍의 문제는 더욱더 집착하게 한다(생의 충만, 그 필요조건은 살아있는 것과의 이어짐이다.). 그 집착을 양식으로 비대해진 자본주의 시스템은 유/무형으로 도시의 공간을 가득 채운다. 도시는 변해간다. 인간도 따라서 진화한다. 사람은 그 경계의 칼날에서 위태롭게 살아간다. 언젠가 공간을 가득 채운 시스템이 남은 공기를 몰아내더라도 진화한 인간들은 새로운 호흡기관을 가질 테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칼날에 찢겨 나갈 것이다. 존재는 남아도 존재성은 죽음으로 덮여진다.
나는 어둠과 빛이 충돌하는 도시의 밤거리를 좋아한다. 걸으며 마주치는 다양한 냄새는 지나는 사람도 건물도 선명하게 한다. 젊은이의 땀냄새, 여인의 향수냄새, 만취한 중년의 찌든냄새, 음식점 환풍기에서 뿜어나는 복잡한 냄새, 고깃집 열린 문틈으로 삐져나오는 타는 냄새, 골목길에 들어서면 솔솔 풍기는 담배냄새, 어디선가에서 풍기는 화장실의 지린내. 어둠은 존재한다. 어둠은 빛의 부재이다. 주황빛이 은은한 선술집을 만나면 들어가고 싶어진다. 그곳에서 옛친구와 마주한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혼술을 하더라도 즐겁다. 도시의 틈에는 뭔가 이야기가 있을 거란 기대로 채워져 있다. 틈은 온갖 보이지 않는 것으로 채워진 공간일 뿐이다. 그곳에서 나는 소외된 인간과 공감한다. 넘치는 도시의 상징과 생명은 나의 것이 될 수 없음을 느낀다. 그곳에서 나는 나의 부재를 확인한다.
오름실은 존재한다. 물론 이것은 내가 확인한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무릉도원이 존재한다. 누군가 확인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혹자는 말한다, 무릉도원이 존재하듯 오름실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존재에 대한 의심이 든다고. 나도 가끔 오름실이 무릉도원이 아닐까, 라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오름실이란 지명은 그곳 그 장소의 실재와 연결된 기호이미지이다. 무릉도원일 수도 있다. 무릉도원은 오름실을 상징하며, 환유한다. 나는 오름실 그 장소의 실재가 무엇과 닿아있는지 알고 있다. 오름실은 실재한다. 오름실을 둘러싼 아담한 산, 오름실을 가로지르는 개울, 노인들의 게으른 움직임, 때마다 자기 색이 있는 듯 벼들의 물결 혹은 그들의 부재, 10년 전보다 다양성을 잃었다곤 하지만 여전히 다양한 새들과 벌레들의 소리, 가끔 들리는 고라니의 날카로운 울음, 수시로 변하는 빛깔들과 나뭇가지들의 흔들림, 바람과 공기가 되어 내 몸을 드나드는 구름과 산과 나무와 꽃,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복실이의 몸짓, 이 모든 것들을 품은 흙. 오름실은 실체인 '생'과 연결되어 있다. 오름실은 '생'의 적나라함으로 존재한다. 오름실을 둘러싼 산은 오름실이 아닌 어디에도 없는 그 산으로 존재한다. 모든 개별 존재들이 생으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각기 다른 소리로 몸짓으로 향기로 나의 몸에 닿는다. 하지만 한결같이 하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조화調和를 지향한다. 스피노자는 말했다, 유일한 실체substance는 '신神'이라고 혹은 '자연Nature'이라고. 혹은 자연?, 나는 알게 되었다. 유일한 실체는 '생生'이다. 조화調和는 생의 속성이다. 조화를 지향하는 존재들에게는 '생'이 드러난다. 그들 존재의 속성은 '조화'이다. 생은 그들 존재를 통해서 현현顯現한다. '생'은 상징과 이미지가 아니다. '생'은 실체이며, 실재하며, 존재한다.
도시에도 살아있음(존재적 측면)과 살아감(존재성 멱집합)이 있다. 집과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 휑한 거리에 유폐된 나무들, 상대적으로 비관적이지 않는 공원의 식물들, 그리고 힘들지만 살아가는 사람들. 물론 도시는 이들을 몰아내고서도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도시 그 자체를 파멸시킬 수도 있음을 안다. 인간이 사라진 도시는 더 이상 도시가 될 수 없다. 인간의 존재성(삶)을 앗아갈 수는 있어도, 인간의 존재는 파괴할 수 없다. 도시의 땅은 흙을 걷어내야만 가치(교환)가 생긴다. 시골의 땅은 흙으로 덮여야만 가치(존재)가 생긴다. 흙은 생명을 품고 있다. 영속성의 측면에서 도시가 오름실보다 유지가능성이 높다. 흙이 없어도 도시는 존재한다. 흙이 없으면 오름실은 존재할 수가 없다.
오름실은 존재한다. 실재하는 것을 두고서 관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가? 나에겐 존재하는 것이 어떤 이에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존재는 존재자체가 아닌, 존재성을 말한다. 존재의 속성은 그 자체로만 발현될 수가 없다. 나는 감각한다. 감각은 그 존재의 존재성에 대한 반응으로 확인된다. 오름실의 존재성은 오름실의 것이 될 수 없다. 나의 존재성도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나와 오름실이 만나는 그 지점에서 오름실의 존재성이 발현되며, 나의 존재성이 드러난다. 나와 오름실의 이어짐, 그것은 점이고, 선이고, 허공이자 농밀한 공간이다. 그래서 어떤 이에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존재성의 문제이다.
고향 친구들이 하룻밤 오름실에서 보냈다. 아쉽지만 그 하룻밤은 같은 공간, 다른 장소였다. 왜 그랬을까? 감각은 끊임없이 연결한다. 살아있는 것과의 이어짐은 마른 땅에 내리는 비와 같다. 좋다라는 탄성이 나온다. 맘과 몸이 편해짐을 느낀다. 살아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오름실은 피상적으로 머물고 만다. 그저 도시를 떠남으로 얻게 되는 감정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도시-존재성의 부재로서 오름실을 바라본다. 가끔 쉬기엔 좋은 곳이지만 여기서 살 수는 없다고 말한다. 분명 그들도 같은 공간에 머물렀다. 다만 오름실과 연결하는 자신의 감각은 희미한 흔적으로 남았다. 언젠가 그들의 꿈 속에서 이미지의 편린으로 나타날 흔적, 혹은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나타날 흔적으로 그들의 몸 어딘가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미지와 상징이 오름실에 이어지고 있음을 그들이 알아챌지는 나는 모른다. 나는 고향 친구들이 좋다. 어린 시절 나와 같은 공간을 함께한 친구들과의 만남은 즐겁다. 만남엔 그 시절의 향기가 배어있다. 해운대 논밭의 풋풋한 풀들의 냄새와 바닷가의 짭짤한 풍경과 개구리 소리가 흔적으로 배어있다. 만남엔 향기로운 부재가 가득하다.
사례 4 : 나, 자아, 주체 그리고 고유성
나는 누구인가?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면 여러 번 자문할 것이다. 자기소개서는 타자가 자신에 대한 호감을 가질 수 있도록 구성된다. 자신의 경력과 경험을 최대한 업무 연관성에 준해서 각색할 것이다. 가끔은 과장과 거짓의 경계를 넘나든다. 자신의 성격도 마찬가지이다. 기업이 진취적인 인재를 원한다고 하면, 지원자는 진취적인 인격을 보여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다 어떤 사람은 과연 나란 존재가 혹시 하나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는 감각한다. 나는 어떤 대상 혹은 현상에 반응한다.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도대체 나의 존재를 어떻게 부정할 수 있는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하자. 이런 선언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이 선언을 하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선언도 할 수가 없다. 고로 나의 존재에 대한 어떠한 의심을 한다면, 그 자체가 존재의 강력한 증거가 된다. 나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의심은 부질없다는 걸 안다. 그래도 해소되지 않는 물음, 나는 누구인가. 누가 묻고 누구에게 답을 구하는 건가?
인간은 하루 종일 여러 가지 행위를 한다, 혹은 침묵한다. 즉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무수한 선택을 한다. 무의식의 선택을 흔히 본능적, 감정적인 처사로 치부하고 이 행위에 대한 어떤 결과에 대한 책임을 의식적으로 회피한다. 선택을 의식할 때, 그 선택의 동기를 합리화하든 어떤 고상한 목적에 따른 의지적 행위라고 믿든 그 선택을 하는 주체가 있다고 여긴다. 그 주체를 자아라고 한다. 자아란 나와 다른 어떤 존재로 부각된다. 자아는 고유성을 지닌 주체가 된다, 마치 꿈을 꾸며 잠자는 나와 깨어나 현실에 고스란히 노출된 나가 다른 존재라고 여기듯이. 과연 그러한가? 나의 고유성이란 것이 있는가, 다시 말해 고유한 나가 나와 분리되어 존재하는가?
영혼, 이데아, 선험적인 초자아가 인간에 내재한다고 주장한다. 현상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할지도 모른다. 나는 분명 복합적으로 이뤄져 있다. 누군가가 죽었다. 그는 없다. 하지만 그는 죽어서도 나에게 영향을 준다. 그는 부재不在로 존재한다. 이것은 영혼이라는 관념으로 왜곡된다. 영혼은 나의 부재로 존재한다, 라고 왜곡된다. 이데아는 정신의 환유가 되며, 초자아는 자연의 생명체들과는 차별화된 인간만의 우월한 고유성이 된다(이는 관념적 환유이다). 이때 왜곡은 환유라는 그럴듯한 이름표를 달고 재생산의 자유를 만끽한다.
지암비스타 비코는 제유는 영웅의 언어, 은유는 인간의 언어, 환유는 신의 언어라고 했다. 그렇다! 제유는 영웅의 왜곡도구, 은유는 인간의 왜곡도구, 환유는 신의 왜곡도구이다. 나는 월트 휘트먼의 시가 좋다. 나는 김소월씨의 시가 좋다. 나는 특히 정지용씨의 시 '향수'를 좋아한다. 언어는 왜곡의 도구가 되었지만, 시인은 그 왜곡을 회복하고 진실을 환기하는 노래를 부른다.
고유성 그 자체는 변할 수 없는 성질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도무지 경험해본 적이 없는 불변의 성질이 고유성이다. 진리의 한 줄기로 뻗은 고유성은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만든다. 본질은 그래서 변할 수 없다. 인간에 내재하는 신神이 본질이 되기도 하고, 이데아가 본질이 되기도 한다. 이를 인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주체적 자아를 드러낸다. 나의 신이 너의 신과 다르고, 나의 이데아가 너와 것과 다르다. 주체적 자아는 개별적이다. 고유성은 보편적이며 개별적이다. 모순에 빠진다. 너의 신과 너의 이데아는 나와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이다. 너의 주체성을 인정할 수 없다. 제인류의 공통적인 본질을 찾는다. 그것을 '진리'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그 진리에 속한 자는 칼을 든다. 그들은 동종인 인간을 포함하여 대자연과 모든 생명들에게 칼을 겨눈다.
'박새는 애벌레를 잡아먹어 유익하다. 고슴도치는 달팽이를 잡아먹어 유익하다. 달팽이는 채소를 갉아먹어 해롭다. 진딧물은 식물의 즙을 빨아 먹어 해롭다. 그리고 놀랍게도 모든 해충에겐 그것의 갈 길을 가로막는 유익한 곤충이 있다. 하지만 자연을 그런 식으로 나누려면 자동적으로 두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첫째 창조자의 설계도가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정교하게 짜 맞추어 균형 있게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는 설계도 말이다. 둘째 이 창조자가 세상을 완벽하게 인간의 욕구에 맞추어 만들었다. 이런 세계관에선 논리적으로 진드기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동물의 사생활과 그 이웃들 BY PETER WOHLLEBEN P81-82)'
인간은 상기 두 가지 조건을 의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고유성'에 대한 어떠한 의심도 거부한다.
나는 인간에게 고유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생生'의 속성으로서 인간에게 차별적으로 주어진 것이 인간의 고유성이다. 물론 생의 속성으로서 복실이에게 차별적으로 주어진 개의 고유성도 있다. 생의 속성은 속성끼리 충돌하지 않는다.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우열을 따질 수가 없다. 생의 속성들은 실체인 생과 이어진 것으로 다른 속성들과도 '생' 즉 '조화調和' 안에 있다. 인간의 몸은 인간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표상이다. 복실이의 몸은 개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표상이다. 즉 몸과 고유성을 분리할 수가 없다.
인간의 고유성에는 날개가 필요하지 않다. 날개가 없는 다른 동물들과 일정부분 공유하는 고유성이 있다. 인간의 고유성에는 지느러미가 필요하지 않다. 지느러미가 없는 다른 동물들과 일정부분 공유하는 고유성이 있다. 인간의 고유성에는 땅 속에 내려진 뿌리가 없다. 뿌리가 없는 생명체들과 공유하는 고유성이 있다. 인간은 잘 발달된 뇌가 있다. 이는 잘 발달된 뇌를 가진 다른 생명체들과 공유하는 고유성이 있다. 인간의 고유성은 생의 속성들의 부분집합이며, 다른 동물의 고유성과 교집합의 관계를 가진다. 인간의 고유성은 복합적이다. 이는 복실이의 고유성이 복합적인 것과 다를 바 없다.
웨델바다표범은 운명이 다 한 것처럼 보였다. 작은 유빙 위에 올라 겁에 질린 바다표범 주위를 범고래 무리가 돌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범고래는 대열을 이뤄 유빙을 향해 다가서다 갑자기 방향을 틀 것이다.
일어난 물살에 쓸려 물에 빠진 바다표범을 범고래들이 사냥할 것이다.
그러나 2009년 남극해에서 범고래의 사냥 행동을 조사하던 로버트 피트먼 미 국립해양어업국 박사 등 연구자들은 색다른 모습을 보았다. 물살에 휩쓸려 유빙에서 떨어진 바다표범은 근처에 있던 한 쌍의 혹등고래를 향해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바다표범이 다가가자 혹등고래가 특이한 행동을 했다. 몸을 뒤집어 거대한 가슴지느러미 사이의 가슴에 바다표범이 올라오도록 했다.
범고래가 다가서자 혹등고래는 몸을 굽혀 바다표범이 물 밖으로 나가도록 했고 물에 떨어지지 않도록 자세를 고치기도 했다.
결국 바다표범은 범고래를 피해 다른 안전한 유빙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는 <자연사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혹등고래들은 바다표범을 보호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라고 적었다. 혹등고래 행동의 미스터리는 범고래의 사냥을 가로막기 위해 ‘출동’하는 구조 대상의 대부분이 다른 종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혹등고래는 11%밖에 되지 않았다. 그 밖에는 바다표범, 다른 고래, 물고기 등이었다.
그렇다면 전체 사례의 90% 가까이 차지하는 다른 종을 도와주는 행동에는 무슨 이득이 있을까. 연구자들은 “혹등고래가 심각한 상처를 입을 위험은 거의 없지만 쓴 시간과 에너지에 견줘 명백하게 얻는 것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범고래 괴롭히기가 혈연선택과 호혜 효과를 통해 전체적으로 득이 된다면 이런 행동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고
논문에서 밝혔다.
말하자면, 다른 종을 돕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부수적인 효과라는 것이다. 혹시 지적인 동물인 혹등고래가 약한 피식자가
잡아먹히는 것에 공감해 돕는 ‘맹목적 이타주의’가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피트먼 박사는 이런 주장에 회의적이다. 그는 <사이언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혹등고래는 훨씬 간단한 규칙으로 행동한다고 봅니다. ‘범고래의 공격 신호가 들리면 가서 깬다’는 식이죠.
이런 개입은 범고래에게 혹등고래 공격을 재고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한겨례 조홍섭기자, '혹등고래는 왜 범고래에게 쫓기는 바다표범을 구해주나' 2016.07.28)
물론 연구자는 혹등고래의 이런 행위에 대해서 이런저런 해석을 내놓지만, 잘 발달된 뇌를 가진 다른 고래에게서 볼 수 있는 이런 구조행위는 인간의 고유성에 대한 한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지금껏 개발이란 명분하에 자연을 파괴하고, 이런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 인간의 고유성과는 무관하다. 차라리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다른 생명체와 생태계의 지속성을 위해서 옳을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마!'라는 말은 넋두리일 뿐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다른 종에 대한 구조행위'를 인간은 할 수 없는가? 가능하다. 이것도 인간의 고유성이다. 하지만 동물원에 가두어 보호하는 것과 홀로 있는 고라니 새끼를 데려오는 것과 반려동물을 쇼핑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 이것은 인간 고유성의 왜곡된 측면이다. 왜곡은 진실의 흔적에 근거한 거짓이다. 고유성은 실체인 '생'과 이어진다. 조화調和는 생의 속성이다. 고유성은 모든 생명체의 공통속성인 '조화調和'를 지향한다.
여전히 존재는 상기의 사례를 넘어선 관념 속에서 유영한다. 존재에서 어떤 특별함을 찾기-특히 인간의 우월함 찾기-는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다. 인간의 파괴행위에 대한 위대한 명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우열이 존재해야 한다. 이 사회가 끊임없이 조장하는 불안감은 힘을 얻을 것이다.
존재는 관념이 아니다. 나는 존재하는가? 라는 자문으로 자신을 괴롭힐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속)성에 대한 것이다. 위상학topology적으로 사람들은 다양하다, 그리고 같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감각한다. 의식적 무의식적 경험들이 자신의 몸과 연결되는데, 이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공유하는 경험에서도 개인차이가 있다. 현상 그 자체를 우리는 감각하는 것이 아니다. 현상과 내가 만나는 그 지점-현상에 반응하는 자아-에서 감정이 유발된다. 현상을 감각한다는 것은 곧 현상에 자신이 연결됨으로 가능하다. 어떤 현상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온다면, 이는 자신의 존재성이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한가지 현상에 대한 개인차이는 현상이 달라서가 아니라 그 현상과 연결된 사람의 다양성 때문이다. 혹은 어떤 동일한 현상이 한 개인에게 반복될 때 동일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대부분 그렇다. 이는 한 개인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변화와 소멸'은 진리이다. 개인은 진리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한 개인의 몸에는 공시/통시의 흔적들이 있다. 이런 흔적들은 뇌의 신경전달물질에 영향을 준다. 이런 흔적들은 자신의 감각을 이루는 요소이다. 그리고 이러한 흔적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 몸에 침투한다. 우리는 모든 감각을 통제할 수가 없다. 깊은 잠에서도 심장이 뛰듯이, 나는 끊임없이 감각한다. 그리고 그 감각들은 또 다른 감각을 감각하는데 영향을 끼친다. 모든 감각들은 나의 몸에 흔적으로 새겨진다. 이건 단지 뇌-기억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존재한다. 나에게는 존재의 속성이 있다. 존재와 존재성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나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개인적인 물음에서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라는 거창한 물음에 직면한다.
'왜'라는 의문은 '마땅한 이유'를 요구한다. '마땅한 이유'에는 목적이 있다. 목적은 의도된 어떤 것이다. 그 목적에 대한 행위는 곧 의지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행위는 스스로든 혹은 타인에 의해서든 평가된다. 행위의 결과가 목적과 부합되는가, 행위의 원인이 목적에서 나온 것인가, 그리고 목적은 (선과 악) 어디에 부합되는가?
'인간의 자유의지는 본질적으로 극히 동요되기 쉬운 것이다. 분명한 것으로 확정되는 것은, 인류로서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감각에 의해서이다... (공통감각은) 어느 한 집단 전체가 주민모두 민족모두 인류모두의 공통으로 느끼는 판단이며, 반성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G.비코, 새로운 학문, 이원두옮김 141~142)'
비코는 같은 책에서 보편 공통적인 인간의 세가지 습속이 있는데, 그것들은 종교, 혼인, 매장이며 신성하고 엄숙하다고 한다. 무법상태->공포->종교->국가->질서로 이어지는 선형적 세계관속에서 종교가 없었다면 국가가 생겨나지 않았으며, 국가가 없었다면 철학자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P179). 결국은 질서를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공통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존재의 목적은 곧 질서를 지향하는 것에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종교와 국가를 정당화하고, 이들이 지향하는 질서에 부합되지 않는 인간행위를 악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자행하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폭력과 파괴를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이런 왜곡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인가? '정신을 쓰는 사람이 명령을, 육체를 사용하는 사람이 복종하도록 정한 것은 신의 섭리(P18)'라고 주장하는 비코는 인간성humanitas가 매장하는 것humando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가 어딘가에 매장되었듯이, 그가 주장하는 인간성도 매장되어야 마땅하다.
당위當爲의 사전적 의미는 '마땅히 그렇게 하거나 되어야 하는 것.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것.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닌, 존재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을 지시指示한다. 이는 윤리적 문제로 귀결된다. 인간중심적 사고에서는 당연히 이는 인간이 만든 시스템의 질서와 관계된다. 하지만 '존재의 당위성'은 그 존재의 이유와 부합해야 한다. 당위와 연결되는 존재는 '살아있음'을 전제한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는 존재이다. 이 지구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살아있는 존재이다. 살아있는 존재는 실체인 '생生'과 이어져 있다. 생은 들숨처럼 들어와서 날숨으로 드러난다. 이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존재'의 존재됨에 기인한다. 자연스러움이다. 이는 모든 생명체의 공통적인 속성이다. 이런 공통적인 속성의 표상은 감각이다. 감각은 멈출 수 없다. 감각은 홀로 작동할 수 없다. 감각이 멈추면 존재는 소멸한다. 살아있음은 감각의 상징이다. 나는 무언가로부터 이어진 존재로서 살아간다. '살아간다'함은 당위적 요구에 직면한다. 이건 인간 존재만의 문제일 수 있다. homo distortus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살아간다'함은 끊임없는 감각이자 행위이다. 어떤 생명체들이 자신의 살아감에 당위성을 고민하는가? 그들의 살아감은 그 자체가 생과 생의 속성에 따른다. 그들의 삶은 조화調和로움 그 자체이다. '왜곡하는 인간'은 인간의 현상학적 측면에서 사실이다. 한때 나는 이런 사실에 좌절했다. 그렇다고 이런 사실을 합리화하는 것이야말로 절망적이다. '살아간다'함의 당위적 요구, 즉 인간존재의 당위성은 당위성을 초월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오직 '조화調和'를 지향함으로 가능하다. 이것은 관념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이 끊임없이 알려주는 진실이다.
조화調和는 생의 속성이다. 생은 실체이다. 그래서 실체의 속성은 그 실체 자체이다. 생은 조화로 드러난다. 조화는 생生이다. 조화 안에서 살아있는 존재는 살아있음을 감각한다. 생을 드러낸다. 생에 대한 끊임없는 반응은 충만감이 된다. 삶의 충만은 가능하다. 나는 그 조화 안에서 자유롭다. 나는 그 조화 안에서 즐겁다. 조화를 지향하는 것은 조화를 깨뜨리지 않는 소극적 움직임에서 조화를 풍요롭게 하는 적극적 움직임을 아우른다. 정훈의 말대로 나도 다른 생명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는 조화를 지향하는 움직임이다, 존재의 당위성이다.
첫댓글 멋진 글이다~ 오름실은 생의 적나라함으로 존재한다. 조화안에서 즐겁다. 긴 글이지만 한 달음에 읽었다.
존재함은 언어로 표현되거나 증명될 수 없으리라. 그럼에도 굳이 글로 적어야 한다면, '나는 느낀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나는 살아있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정도면 용서해 줄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며칠만에 오름실에서 조용히 앉아있는 중이다. 아주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