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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중추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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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린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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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린 佳か山やま麟りん | 카야마 린 | |
초명 | 최문탁(崔文鐸) |
출생 | 1878년 1월 25일 |
함경도 함흥부 주남면 하서리[1] (현 함경남도 함흥시 통남동) | |
사망 | 1958년 12월 말 (향년 80세) |
평안북도 선천군 | |
자 | 공지(公之) |
호 | 고우(古友)·여엄(如奄) |
본관 | 해주 최씨[2]# |
종교 | 천도교 |
주요 경력 | 민족대표 33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매일신보 사장 조선임전보국단 단장 |
일제강점기 시절의 종교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하였고 광복 후 자신의 친일 행각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뒤늦게나마 진솔하게 참회한 특이한 인물이다. 본관은 해주(海州)[3]#, 자는 공지(公之), 호는 고우(古友)·여엄(如奄), 초명은 최문탁(崔文鐸)이다.
1878년 함경도 함흥부 주남면 하서리[4]에서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낸 아버지 최덕언(崔德彦)[5]과 어머니 청주 김씨 김재항(金在恒)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구한말 대한제국의 하급 관리로 활동했으나 1904년 황실 특파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하게 된다. 이후 동경제일중학교를 거쳐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한다.
젊은 시절의 최린. |
귀국 후 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고 33세의 나이에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도산 안창호의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도 하였고 3.1 운동의 3원칙을 제시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영향도 컸지만 3.1 운동 때 체포되어 구속되면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1920년대 초에 출소하였다.
학병 권유를 하는 최린. |
이후 민족 개량주의 노선으로 걸어갔는데 1933년 말 대동방주의를 내세우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1934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었고 1938년 조선총독부 어용 기관지인 <매일신보> 사장이 되었으며 1939년 '조선임전보국단'의 단장이 되었다. 이외에도 강연회를 통해 일본이 벌이는 전쟁에 조선인이 참여하는 것을 독려하고 중일전쟁을 미화하는 내용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으며 '조선언론보국회'라는 친일단체까지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에 그가 쓰던 창씨명은 '가야마 린(佳山麟)'[6]이였다. 변절 이후 만해 선사의 어린 딸에게 돈을 쥐어줬는데 사실을 안 만해 선사가 "더러운 돈이다"라는 말과 함께 대노하면서 돈을 빼앗아 최린의 얼굴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최린은 이런 말까지 남기며 자신이 했던 독립운동까지 부정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미군정으로부터 발표된 포고령에 따라 조선총독부 중추원 직을 박탈당했다. 이어 천도교 측은 최린의 친일 행각 죄를 물어 은퇴를 권고하였으나 거부하다가 결국은 영구 제명당하고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였다고 한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3차례의 공판이 열렸고 이 과정에서 뒤늦게 자신의 친일 행위를 시인하고 솔직한 참회를 했다. 당시 남긴 말로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 잠시 민족 독립에 몸담았던 내가 이 곳에 와서 반민족 행위를 재판을 받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소에 사지를 묶고 형을 집행해 달라. 그래서 민족에 본보기로 보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때 공판정에 같이 있던 이광수가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한 것이다"라고 하자 옆에 서 있던 최린이 이광수를 향해 "입 닥쳐"라며 벽력같은 일갈을 내뱉은 일화도 있었다.
이에 대해 1990년대 나온 임종국의 <한국의 친일파 99인>에서는 그래도 이렇게 회개한 점은 좋게 봐야 한다고 쓴 바 있다. 당시 공판에 나온 친일파들은 대다수가 '내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나는 살고자 친일을 했을뿐 되려 나만큼 나라를 생각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라며 정당화(본문에 있는 이광수와 최남선)하거나 '일본이 전쟁에서 질 줄 몰랐다.'(서정주), '지금 인재도 희귀한데 다른 놈들 갈구지 말고 차라리 나 한놈만 죽여라.'(박중양), 아예 '날 재판에 세워두는 건 죄다 빨갱이 새끼다'처럼 큰 소리치고 욕하고 악쓰는 이들까지 있었다.(대표적으로 이종형과 노덕술 같은 부류들을 들 수 있겠다.)
1949년 4월 병보석을 허가받아 석방되었다.
말년의 최린. |
6.25 전쟁 때 북한에 납북되었고 이후 행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게 없다. 다만 1958년 12월 말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8]
[1] #. 상리라고도 한다.#.[2] 대령군파 29세.[3] 대령군파 29세.[4] 현 함경남도 함흥시 통남동.[5] 초명 최숭림(崔崇林).[6] 崔를 파자하여 지음.[7] 출처: 쟁점으로 본 한국사: 김육훈 지음/ 푸른나무/ 1996년 출간/ 257쪽[8] 1991년 10월 1일 공개된 전 북한 정무원 부부장(차관급)을 지내다가 1980년대 중반 망명한 박병엽(朴炳燁, 필명 신경완(申敬完))의 구술 기록 참조.#[9] 나혜석은 한국 여성 최초의 세계 일주를 한 사람으로 당시 변호사이자 일본 외무성 관료로 일했던 남편 김우영을 따라 2년 여에 걸쳐 만주, 러시아, 유럽, 미국, 하와이 등을 여행했다. 나혜석의 파리 체류 중 당시 천교도로 활동 중이던 최린을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당시 한국인 유학생 사회가 좁은 바람에 파리 한인 사회에서 나혜석은 최린의 작은댁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당시 잠시 베를린에 가서 공부하던 김우영은 소문을 듣고 몰래 파리에 돌아와 둘의 불륜을 목격한다. 이후 귀국하여 둘은 이혼한다. 이혼 후 솔로가 된 나혜석을 최린은 그녀를 버리는데 나혜석은 최린 때문에 이혼당했는데 나 몰라라 하니 최린을 '정조 유린죄'로 당시 돈 12,000원의 손해배상(위자료)과 함께 고소한다. 최린은 이것에 대한 신문 기사를 막으려고 동아일보 기자를 매수하고 나혜석에게 2,000원의 합의금을 주면서 소 취하를 종용한다. 결국 나혜석은 패소한다.[10] 섭외한 이유가 최린과 닮은 얼굴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11] 동생인 한춘일은 1부에서 개성 지역의 순사 역을, 2부에서는 조봉암 역을 연기했다.[12] 당시에는 '잡혀오다'를 '잽혀오다'로 한 것 같다.[13] 다른 반민족친일행위자가 반민특위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고함 소리도 듣고 조사관이 막 대하는 태도를 했다고 하나 최린은 조사관과의 인연과 고령인 점을 감안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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