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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탐진어가」 십장 정약용
[ 耽津漁歌 十章 丁若鏞 ]
其一(기일)
桂浪春水足鰻鱺(계랑춘수족만려) 계량 봄바다에 뱀장어가 많고
橕取弓船漾碧漪(탱취궁선양벽의) 푸른 물결 헤치며 활선이 떠나간다
高鳥風高齊出港(고조풍고제출항) 높새바람 드높을 때 일제히 출항해서
馬兒風緊足歸時(마아풍긴족귀시) 마파람 급히 불 때 가득 싣고 돌아올 때라네
〈감상〉
이 시는 1802년 강진에서 유배생활 하면서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며 부르는 뱃노래를 듣고 지은 시이다.
다산은 이 시에서 ‘활선’, ‘높새바람’, ‘마파람’ 등 방언을 이용해 조선식(朝鮮式) 한자어(漢字語)를 활용함으로써 현장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시어(詩語)는 정통적인 입장에서는 시의 격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산은 농민들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주석〉
〖耽津(탐진)〗 강진(康津)의 고호(古號). 〖鰻〗 뱀장어 만, 〖鱺〗 뱀장어 려, 〖橕〗 배 젓다 탱,
〖弓船(궁선)〗 활선으로, 배 위에 그물을 편 배를 방언으로 활선이라 함(원주(原注): 선상장고자(船上張罟者) 방언위지궁선(方言謂之弓船)). 〖漾〗 띄우다 양, 〖漪〗 잔물결 의,
〖高鳥風(고조풍)〗 높새바람으로, 새는 을(乙)이고, 을은 동쪽을 말하므로 동북풍을 일러 높새바람이라고 함(원주(原注): 조자을야(鳥者乙也) 을자동방(乙者東方) 동북풍왈고조풍(東北風曰高鳥風)).
〖馬兒風(마아풍)〗 마파람으로, 말은 오(午)이므로 남풍을 일러 마파람이라고 함(원주(原注): 마자오야(馬者午也) 남풍왈마아풍(南風曰馬兒風)). 〖緊〗 급하다 긴
각주
1 정약용(丁若鏞, 1762, 영조 38~1836, 헌종 2):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 근기(近畿) 남인(南人) 가문 출신으로,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 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역사 현상의 전반에 걸쳐 전개된 그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혁명론’이었다기보다는 파탄에 이른 당시의 사회를 개량하여 조선왕조의 질서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왕조적 질서를 확립하고 유교적 사회에서 중시해 오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구현함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이상적 상황을 도출해 내고자 하였다.
「사마창방일 구호칠보시」 조수삼
[ 司馬唱榜日 口呼七步詩 趙秀三 ]
腹裏詩書幾百擔(복리시서기백담) 배 안에 시와 글이 거의 백 짐은 되는데
今年方得一襴衫(금년방득일란삼) 금년에야 한 난삼을 얻었네
傍人莫問年多少(방인막문년다소) 곁에 있는 사람들아! 나이 많고 적음을 묻지 마라
六十年前二十三(육십년전이십삼) 육십 년 전에는 나도 23살이었네
〈감상〉
이 시는 작자가 83세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고 지은 시로, 풍자와 해학이 동시에 들어 있는 시이다.
〈주석〉
〖司馬(사마)〗 사마시(司馬試)로, 고려와 조선조 때의 과거 제도의 하나.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는 소과(小科)로,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로 나뉨. 〖唱榜(창방)〗 과거시험 합격자를 발표하는 것.
〖七步詩(칠보시)〗 남조송(南朝宋) 유의경(劉義慶) 『세설신어(世說新語)』 「문학(文學)」에, “文帝嘗令東阿王七步中作詩(문제상령동아왕칠보중작시) 不成者行大法(불성자행대법) 應聲便爲詩曰(응성변위시왈) ‘煮豆持作羹(자두지작갱) 漉菽以爲汁(녹숙이위즙) 萁在釜下燃(기재부하연)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本自同根生(본자동근생)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帝深有慚色(제심유참색)”이라 되어 있어, 뒤에 인재(人才)가 민첩(敏捷)함을 뜻함.
〖擔〗 짊어지다 담, 〖襴衫(란삼)〗 과거 급제 옷.
각주
1 조수삼(趙秀三, 1762, 영조 38~1849, 헌종 15): 송석원시사(宋石園詩社)의 핵심적인 인물로, 본관은 한양(漢陽). 초명은 경유(景濰). 자는 지원(芝園)·자익(子翼), 호는 추재(秋齋)·경원(景畹). 어려서부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으나, 역과중인(譯科中人)이라는 신분 때문에 1844년(헌종 10) 83세 때에야 진사시에 합격했다. 강진·조희룡(趙熙龍) 등의 위항시인(委巷詩人)과 사귀었으며, 김정희·한치원 등 당대의 사대부·세도가들과도 친밀히 지냈다. 청나라를 6차례나 다녀왔으며, 전국 각지를 여행하며 자연과 풍물을 읊은 시를 많이 남겼다. 역사·사회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장편을 이루는 시도 남겼는데 홍경래의 난을 다룬 장편 오언고시 「서구도올(西寇檮杌)」, 61세에 함경도지방을 여행하면서 민중들의 고난을 담은 「북행백절(北行百絶)」 등이 유명하다. 도시생활인의 생활을 산문으로 쓴 뒤 칠언절구의 시를 덧붙인 『추재기이(秋齋紀異)』, 중국 주변의 여러 나라에 대한 짧은 산문과 시로 구성된 「외이죽지사(外夷竹枝詞)」 등은 당대를 살아간 민중의 생활상과 지식인의 의식수준을 잘 반영하고 있다.
「기부강남독서」 허난설헌
[ 寄夫江南讀書 許蘭雪軒 ]
燕掠斜簷兩兩飛(연략사첨양양비) 제비는 비스듬한 처마를 지나 쌍쌍이 날고
落花撩亂拍羅衣(낙화료란박라의) 떨어지는 꽃잎은 어지럽게 비단 옷을 때려요
洞房極目傷春意(동방극목상춘의) 규방엔 눈이 미치는 곳마다 정을 잃고
草綠江南人未歸(초록강남인미귀) 풀 푸른 강남의 임은 돌아오지 않네요
〈감상〉
이 시는 강남으로 공부를 하러 떠난 남편 김성립(金誠立)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이다(그런데 『지봉유설』에 의하면, 평생 남편과 금슬(琴瑟)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규정(閨情)」이라 제목한 곳도 있으며, 『난설헌집(蘭雪軒集)』에는 실리지 못하고 『명시종(明詩綜)』에 실려 있다. 『지봉유설』에 의하면 이 시가 ‘유탕(流蕩)’하기 때문에 등재(謄載)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덕무(李德懋)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선조조(宣祖朝) 이하에 나온 문장은 볼만한 것이 많다. 시와 문을 겸한 이는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고, 시로는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을 제일로 친다는 것이 확고한 논평이나,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에 이르러 대가(大家)를 이루었으니, 이는 어느 체제이든 다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섬세하고 화려하여 명가(名家)를 이룬 이는 유하(柳下) 최혜길(崔惠吉)이고 당(唐)을 모방하는 데 고질화된 이는 손곡(蓀谷) 이달(李達)이며, 허난설헌(許蘭雪軒)은 옛사람의 말만 전용한 것이 많으니 유감스럽다.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은 염락(濂洛)의 풍미를 띤데다 색향(色香)에 신화(神化)를 이룬 분이고,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시는 정밀한데다 식견이 있고 전아(典雅)하여 흔히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宣廟朝以下文章(선묘조이하문장) 多可觀也(다가관야) 詩文幷均者(시문병균자) 其農岩乎(기농암호) 詩推挹翠軒爲第一(시추읍취헌위제일) 是不易之論(시불역지론) 然至淵翁而後(연지연옹이후) 成大家藪(성대가수) 葢無軆不有也(개무체불유야) 纖麗而成名家者(섬려이성명가자) 其柳下乎(기류하호) 痼疾於模唐者(고질어모당자) 其蓀谷乎(기손곡호) 蘭雪(란설) 全用古人語者多(전용고인어자다) 是可恨也(시가한야) 龜峯(구봉) 帶濂洛而神化於色香者(대렴락이신화어색향자) 澤堂之詩(택당지시) 精緻有識且典雅(정치유식차전아) 不可多得也(불가다득야)).”라 하여, 허난설헌의 시가 전용(全用)한 것이 많음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주석〉
〖掠〗 스쳐 지나가다 략, 〖撩〗 어지럽다 료, 〖拍〗 치다 박, 〖洞房(동방)〗 깊은 안방, 규방(閨房), 특히 신혼부부가 거처하는 방. 〖春意(춘의)〗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는 정.
각주
1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 명종 18~1589, 선조 22):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엽(曄)의 딸이고, 봉(篈)의 여동생이며, 균(筠)의 누나이다. 문한가(文翰家)로 유명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용모가 아름답고 천품이 뛰어났다 한다. 오빠와 동생 사이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집안과 교분이 있던 이달(李達)에게서 시를 배웠다.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 신동이라고까지 했다. 15세에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했으나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못했다. 남편은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기방을 드나들며 풍류를 즐겼고, 시어머니는 시기와 질투로 그녀를 학대했다. 게다가 어린 남매를 잃고 배 속의 아이마저 유산했다. 친정집에는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허균(許筠)도 귀양 가 버리자 삶의 의욕을 잃고 시를 지으며 나날을 보내다가 27세로 요절했다. 시 213수가 전하며, 그중 신선시(神仙詩)가 128수이다. 그녀의 시는 봉건적 현실을 초월한 도가사상의 신선시(神仙詩)와 삶의 고민을 그대로 드러낸 작품으로 대별된다. 후에 허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시를 보여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蘭雪軒集)』이 발간되는 계기가 되었다.
「만흥」 이수 홍세태
[ 漫興 二首 洪世泰 ]
其二(기이)
高閣深深夏氣淸(고각심심하기청) 높은 누각 깊고 깊어 여름 기운 맑은데
雲流雨去日微明(운류우거일미명) 구름 흘러 비는 개고 해는 희미하게 밝네
閉門寂寞靑山近(폐문적막청산근) 문 닫으니 적막하여 푸른 산이 가깝고
隱几蕭條芳草生(은궤소조방초생) 서궤(書几)에 기대니 쓸쓸하여 방초가 피어 있네
夢裏不知爲化蝶(몽리부지위화접) 꿈속에서 나비로 변화한 걸 몰랐는데
酒醒何處有啼鶯(주성하처유제앵) 술이 깨자 어디선가 꾀꼬리 울어대네
林風夕起吹雙袂(임풍석기취쌍몌) 숲 바람이 저녁에 일어 양쪽 소매에 불어오니
矯首晴天緩步行(교수청천완보행) 머리 들어 갠 하늘에 천천히 걸어가네
〈감상〉
이 시는 34세에 지은 작품으로, 『소대풍요(昭代風謠)』와 『대동시선(大東詩選)』에 실려 있다. 평이(平易)하면서도 충담(沖淡)한 풍격을 느끼게 하여 홍세태(洪世泰) 시작품의 대체적 성향을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지적되곤 하는 시이다. 동시에 천기(天機)가 발현되고 당풍(唐風)의 문학성이 한껏 두드러진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이 시를 전후한 시기에 지은 시가 수작(秀作)으로 꼽히는데, 홍세태는 20대 후반에 낙사(洛社, 낙사의 모임은 1650년대에 시작되었고, 임준원(任俊元)이 후원했던 1680년대에 가장 번성했다가, 그가 죽고 김창흡(金昌翕)이 영평으로 은거한 1689년경에 흩어진 것으로 알려짐)에 참여하고, 낙사의 활발한 모임은 1680년대 10년 정도 기간에 이루어졌던 점을 감안하면, 홍세태의 이런 수작(秀作)들이 낙사의 활동과 상당한 관련성을 지닌다고 생각된다. 지우(知友)들과 문학을 토론하고 서로의 작품을 연찬(硏鑽)하는 가운데 문학성과 질적 수준이 한층 더 높아질 수 있었던 것이다(박수천, 「유하(柳下) 홍세태(洪世泰)의 시문학」).
〈주석〉
〖隱〗 기대다 은, 〖几〗 안석 궤, 〖蕭條(소조)〗 쓸쓸한 모양. 〖化蝶(화접)〗 장자(莊子)가 꿈속에 나비가 된 고사로,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昔者莊周夢爲胡蝶(석자장주몽위호접) 栩栩然胡蝶也(허허연호접야) 自喩適志與(자유적지여) 不知周也(부지주야) 俄然覺(아연각) 則蘧蘧然周也(칙거거연주야) 不知周之夢爲胡蝶與(부지주지몽위호접여) 胡蝶之夢爲周與(호접지몽위주여)”라는 말이 나옴. 뒤에 꿈을 가리킴.
〖醒〗 술이 깨다 성, 〖鶯〗 꾀꼬리 앵, 〖袂〗 소매 몌, 〖矯〗 들다 교
각주
1 홍세태(洪世泰, 1653, 효종 4~1725, 영조 1):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도장(道長), 호는 창랑(滄浪)·유하(柳下). 무관이었던 홍익하(洪翊夏)의 아들로, 조선 후기 위항문학의 선성(先聲)을 올린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5세에 책을 읽고 7, 8세에는 글을 지을 만큼 일찍부터 문장에 재능을 보였으나 중인(中人) 신분이었으므로 제약이 많았다. 경사(經史)와 시(詩)에 능통하여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이규명(李奎明) 등의 사대부들과 수창(酬唱)하며 친하게 지냈다. 또한 임준원(林俊元)·최대립(崔大立) 등의 중인들과 낙사(洛社)라는 시사(詩社)를 만들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1675년(숙종 1) 식년시에 잡과인 역과(譯科)에 응시하여 한학관(漢學官)으로 뽑히고 이문학관(吏文學官)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문학관에 부임하게 된 것은 이로부터 16년 뒤인 1698년이었다. 1682년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묵(詩墨)을 얻어 간직했다. 1698년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좌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추천하여 시를 지어 보인 것이 임금에게 인정받아 제술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문학적 재능은 뛰어났으나 평생을 궁핍하고 불행하게 살았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광좌(李光佐)의 도움으로 말년에는 울산감목관(蔚山監牧官)·제술관·남양감목관 등을 지내기도 했다. 1712년(숙종 38) 위항시인 48명의 시작품을 모아 『해동유주(海東遺珠)』라는 시선집(詩選集)을 편찬하는 등 위항문학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731년 사위와 문인들에 의해 시문집인 『유하집(柳下集)』 14권이 간행되었다.
「도중」 이수광
[ 途中 李晬光 ]
岸柳迎人舞(안류영인무) 언덕 버들은 사람 맞아 춤을 추고
林鶯和客吟(임앵화객음) 숲 속 꾀꼬리는 나그네 읊조림에 화답하네
雨晴山活態(우청산활태) 비 개이니 산은 활기찬 모습이고
風暖草生心(풍난초생심) 바람 따스하니 풀은 돋는 마음이네
景入詩中畫(경입시중화) 경개는 시 속에 든 그림이고
泉鳴譜外琴(천명보외금) 샘물 소리는 악보 밖의 거문고네
路長行不盡(노장행부진) 길이 멀어 가도 끝이 없는데
西日破遙岑(서일파요잠) 서산의 해는 아득한 봉우리를 깨뜨리네
〈감상〉
이 시는 따뜻한 봄날 중국으로 사행(使行) 가는 길에 쓴 시로, 이수광의 대표작 가운데 한 편이다.
언덕에 있는 버들은 사람을 맞아 춤을 추듯 하늘대고, 숲 속의 꾀꼬리는 나그네 읊조림에 화답하여 울고 있다(자연과 시인의 일치). 비가 내리다 개니 산은 활기찬 모습을 하고 있고, 바람이 따스하게 부니 풀은 돋아난다(비와 바람에 의한 봄의 활기찬 모습을 형용). 경개는 시 속에 든 그림이고(또한 그림 속에 든 시임), 샘물 소리는 악보에도 없는 거문고소리이다. 중국으로 가는 길이 멀어 가도 가도 끝이 없는데, 어느덧 서산으로 지는 해는 아득한 봉우리를 물들인다.
이수광은 초기의 실학자(實學者)로, 서학(西學)을 최초로 소개한 인물로, 당시풍(唐詩風)을 추구하여 조선 중기 당시풍(唐詩風) 형성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되어 왔다. 지봉은 「속조천록(續朝天錄)」 자서(自序)에서, “내가 시에 대해서 감히 지으려는 뜻이 있지 않으나, 한가롭게 거하여 일이 없을 때 경물을 보고 가슴속에 부딪치는 것이 있으면, 간혹 읊조리는 것을 발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말이 반드시 공교롭지도 않고 작품 또한 많지 않다.
······눈에 닿아서 마음에 느끼는 것이 때때로 물리칠 수 없어, 간혹 즉석에서 읊조리거나 간혹 서로 수창하였다(余於詩(어여시) 非敢有作爲之意(비감유작위지의) 居閑無事時(거한무사시) 見境有觸於中(견경유촉어중) 而或不能不發於吟詠(이혹불능불발어음영) 故辭不必工(고사불필공) 而數亦無多矣(이수역무다의) ······接乎目而感於心者(접호목이감어심자) 往往不能排遣(왕왕불능배견) 或爲之口號(혹위지구호) 或相與唱酬(혹상여창수)).”라 하여, 자연스러움을 중시한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위의 시 역시 이러한 생각에서 지어진 것이다.
이덕무는 『청비록(淸脾錄)』에서, “지봉 이수광의 자는 윤경(潤卿)이고, 벼슬이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그는 인품이 원만하여 흠이 없었고, 시는 중당(中唐)·만당(晩唐)의 체(體)를 배웠는데, 박식하기가 조선(朝鮮)의 승암(升菴, 명(明)나라 학자 양신(楊愼)의 호)이라 할 만하다(李芝峯晬光字潤卿(이지봉수광자윤경) 官判書(이엄박) 人物無疵(인물무자) 詩學唐中晩(시학당중만) 而淹博(이엄박) 東之升菴(동망지승암)).”라는 평을 남기고 있다.
〈주석〉
〖鶯〗 꾀꼬리 앵, 〖岑〗 봉우리 잠
각주
1 이수광(李晬光, 1563, 명종 18~1628, 인조 6):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1585년(선조 18) 별시문과에 급제, 지제교(知製敎)를 지냈고, 1590년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2년에 북도선유어사(北道宣諭御史)가 되어 함경도 지방에서 이반한 민심을 돌이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597년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며 진위사(陳慰使)로 2번째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안남(安南, 지금의 베트남)의 사신과 교유했다. 1601년에 홍문관부제학으로 「고경주역(古經周易)」을 교정했고, 1603년에 『사기』를 교정했다. 1605년에 안변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돌아와 1607년 홍주목사로 부임했다. 1611년 왕세자의 관복(冠服)을 청하는 사절의 일원으로 3번째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유구(琉球)와 섬라(暹羅, 지금의 타이)의 사신을 만나 그들의 풍속을 기록했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사직했다가, 1616년 순천부사가 되었고 임기를 마친 후에는 관직을 사양하고 수원에서 살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도승지로 관직에 복귀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했다. 1625년 대사헌으로서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12조목에 걸친 「조진무실차자(條陳懋實箚子)」를 올려 당시 가장 뛰어난 소장(疏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강화로 갔으며, 이듬해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죽었다.
「차윤서중운」 이달
[ 次尹恕中韻 李達 ]
京洛旅遊客(경락려유객) 서울에 와서 나그네로 떠도는 객이여
雲山何處家(운산하처가) 구름 낀 산 어느 곳이 그대 집인가?
疏煙生竹逕(소연생죽경) 성근 연기 대숲 길에 피어오르고
細雨落藤花(세우락등화) 가랑비에 등나무 꽃이 지는 곳일세
〈감상〉
이 시는 윤서중의 시에 차운한 것으로, 자문자답(自問自答)의 형식을 통해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슬퍼하며 지은 것이다.
서울에 와서 나그네가 되어 떠도는 나, 구름이 껴 있는 산중에 어느 곳이 내 집인가? 성근 연기가 대나무 숲속으로 난 길에서 피어오르고, 가랑비가 내려 등나무 꽃이 지는 곳이 내 집이다.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의 「답이생서(答李生書)」에서는 우리나라의 시사(詩史)를 언급하면서 이달(李達)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외져서 바다 모퉁이에 있으니 당(唐)나라 이상의 문헌은 까마득하며,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진덕여왕(眞德女王)의 시(詩)가 역사책에 모아져 있으나, 과연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었던 것인지는 감히 믿을 수 없소. 신라(新羅) 말엽에 이르러 최치원(崔致遠) 학사(學士)가 처음으로 큰 이름이 났는데, 오늘로 본다면 문(文)은 너무 고와서 시들었으며 시(詩)는 거칠어서 약하니 허혼(許渾)·정곡(鄭谷) 등 만당(晩唐)의 사이에 넣더라도 역시 누추함을 나타낼 텐데, 성당(盛唐)의 작품들과 그 기법(技法)을 겨루고 싶어 해서야 되겠습니까? 고려(高麗) 시대의 정지상(鄭知常)은 아롱점 하나는 보았다 하겠지만, 역시 만당(晩唐) 시(詩) 가운데 농려(穠麗)한 시 정도였소.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는 더러 맑고 기이(奇異)하며 진화(陳澕)·홍간(洪侃)은 역시 기름지고 고우나 모두 소동파(蘇東坡)의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지요. 급기야 이제현(李齊賢)에 이르러 창시(倡始)하여, 이곡(李穀)·이색(李穡)이 계승하였으며,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김구용(金九容)이 고려 말엽의 명가(名家)가 되었지요. 조선 초엽에 이르러서는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이 그 명성을 독점하였으니 문장(文章)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달(達)했다 칭할 만하여 아로새기고 빛나곤 해서 크게 변했다 이를 만한데 중흥(中興)의 공로는 이색(李穡)이 제일 크지요. 중간에 김종직(金宗直)이 포은(圃隱)·양촌(陽村)의 문맥(文脈)을 얻어서 사람들이 대가(大家)라고 일렀으나 다만 한(恨)스러운 것은 문규(文竅)의 트임이 높지 못했던 것이오.
그 뒤에는 이행(李荇) 정승이 시에 입신(入神)하였으며, 신광한(申光漢)·정사룡(鄭士龍)은 역시 그 뒤에 뚜렷하였소. 노수신(盧守愼) 정승이 또 애써서 문명을 떨쳤으니, 이 몇 분들이 중국(中國)에 태어났다면 어찌 모두 강해·이몽양(康海·李夢陽, 명(明)의 전칠자(前七子)로 시문(詩文)에 능함) 두 사람보다 못하다 하리오? 당세의 글하는 이는 문(文)은 최립(崔岦)을 추대하고 시(詩)는 이달(李達)을 추대하는데, 두 분 모두 천 년 이래의 절조(絶調)지요.
그리고 같은 연배 중에서는 권필(權韠)이 매우 완량(婉亮)하고, 이안눌(李安訥)이 매우 연항(淵伉)하며 이 밖에는 알 수가 없소(吾東僻在海隅(오동벽재해우) 唐以上文獻邈如(당이상문헌막여) 雖乙支(수을지), 眞德之詩(진덕지시) 彙在史家(휘재사가) 不敢信其果出於其手也(불감신기과출어기수야) 及羅季(급라계) 孤雲學士始大厥譽(고운학사시대궐예) 以今觀之(이금관지) 文菲以萎(문비이위) 詩粗以弱(시조이약) 使在許鄭間(사재허정간) 亦形其醜(역형기추) 乃欲使盛唐爭其工耶(내욕사성당쟁기공야) 麗代知常(여대지상) 足窺一斑(족규일반) 亦晩李中穠麗者(역만이중농려자) 仁老奎報(인로규보) 或淸或奇(혹청혹기) 陳澕洪侃(진화홍간) 亦腴艶(역유염) 而俱不出長公度內耳(이구불출장공도내이) 及至益齋倡始(급지익재창시) 稼牧繼躅(가목계촉) 圃陶惕(포도척) 爲季葉名家(위계엽명가) 逮國初(체국초) 三峯陽村(삼봉양촌)
獨擅其名(독천기명) 文章至是(문장지시) 始可稱達(시가칭달) 追琢炳烺(추탁병랑) 足曰丕變(족왈비변) 而中興之功(이중흥지공) 文靖爲鉅焉(문정위거언) 中間金文簡得圃(중간김문간득포), 陽之緖(양지서) 人謂大家(인위대가) 只恨文竅之透不高(지한문규지투불고) 其後容齋相詩入神(기후용재상시입신) 申鄭亦瞠乎其後(신정역당호기후) 蘇相又力振之(소상우력진지) 玆數公(자수공) 使生中國(사생중국) 則詎盡下於康李二公乎(칙거진하어강이이공호) 當今之業(당금지업) 文推崔東皐(문추최동고) 詩推李益之(시추이익지) 俱是千年以來絶調(구시천년이래절조) 而儕類中汝章甚婉亮(絶調구시천년이래절조 而儕類中汝章甚婉亮) 子敏甚淵伉(자민심연항) 此外則不能知也(차외칙불능지야)).”
〈주석〉
〖逕〗 좁은 길 경, 〖藤〗 등나무 등
각주
1 이달(李達, 1539 ~ 1612): 본관 홍주(洪州). 자는 익지(益之)이고, 호는 손곡(蓀谷)이다. 원주 손곡(蓀谷)에 묻혀 살았기에 호를 손곡이라고 하였다. 이수함(李秀咸)의 서자이다.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과 함께 당시(唐詩)에 뛰어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다. 문장과 시에 능하였고, 서자 출신이어서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고 제자 교육에 일생을 바쳤다. 일찍부터 문장에 능하고 글씨에 조예(造詣)가 깊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천인(賤人) 신분(身分)이었기에 서얼(庶孼)로서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 능력 또한 쉽사리 세상에서 빛을 볼 수가 없었다. 김만중(金萬重)이 “손곡(蓀谷)의 작품 「별리예장(別李禮長)」은 조선을 통틀어서 오언절구(五言絶句)의 최고작”이라고 논평할 만큼 시재(詩才)와 문장력이 뛰어났기에 선조 때 사역원(司譯院)의 한리학관(漢吏學官)이 되기도 했으나,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곧 사직하고는 향리에 은거했다. 손곡(蓀谷)은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과 함께 뜻을 모아 시사(詩社)를 조직한 후, 고죽(孤竹)과 옥봉(玉峯)의 스승인 사암(思庵) 박순(朴淳)을 만나 당대(唐代)의 여러 시집(詩集)들을 접하게 되면서 시(詩)의 정법(正法)이 당시(唐詩)에 있음을 깨닫고 당시인(唐詩人)의 시체(詩體)를 탐구하는 한편, 율시(律詩)와 절구(絶句)를 지어 내기 시작해 5년 동안 오로지 시법의 연구에만 몰두한 결과, 신라와 고려를 통틀어 당시(唐詩)에서 아무도 손곡(蓀谷)을 따를 수 없다는 평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膾炙)되면서 고죽(孤竹)과 옥봉(玉峯)을 제치고 삼당시인(三唐詩人)의 일인자로 꼽히게 되었다. 한편, 손곡(蓀谷)의 명성과 고결한 인품에 대한 소문을 듣고 당시의 명문 귀족이었던 초당(草堂) 허엽(許曄)이 자식들인 허초희(許楚姬)와 허균(許筠)을 보내 제자로 삼아 줄 것을 부탁하자, 손곡(蓀谷)은 그들 남매에게 평민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이상을 전수시켰는데, 훗날 허균이 서자(庶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쓴 것이라든지, 적서(嫡庶) 타파(打破)를 주장한 것이라든지, 양반 사회에 대한 반항적인 자세와 함께 풍자적이면서도 서민 생활을 옹호했던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시 정신은 손곡(蓀谷)의 정신적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손곡(蓀谷)은 허균(許筠)이 반역죄로 참형당했던 그해에 역시 57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도청파 이배경원 우이삼수 정월구일 개북청 연릉제군휴호 송우산단도좌」 이항복
[到靑坡 移配慶源 又移三水 正月九日 改北靑 延陵諸君携壺 送于山壇道左 李恒福]
雲日蕭蕭晝晦微(운일소소주회미) 구름과 해는 쓸쓸하여 한낮도 어두컴컴한데
北風吹裂遠征衣(북풍취렬원정의) 북풍은 먼 길 가는 사람의 옷을 찢을 듯 부네
遼東城郭應依舊(요동성곽응의구) 요동의 성곽은 응당 예전과 같겠지만
只恐令威去不歸(지공영위거불귀) 다만 영위가 가서 돌아오지 않을까 염려되도다
〈감상〉
이 시는 청파에 이르니, 경원으로 이배시켰다가 또 삼수로 옮기었고, 정월 구일에는 북청으로 고쳐 이배시켰는데, 연릉 등 제군이 술을 가지고 와서 산단(山壇)의 길 아래에서 전송하면서 지은 시이다.
이 시는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시참(詩讖)이 되었다. 『속잡록(續雜錄)』에는 이 시에 관련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기자헌과 함께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 떠나기에 임하여 전송하는 동료에게 말하기를, ‘명년 8월에 마땅히 다시 돌아올 것이니, 그때 서로 만나 보아도 늦지 않소.’ 하고, 시를 읊기를, ······하였다. 도중에 서로 익살을 부리면서 시름과 피로를 씻었다. 역참에 나오는 마부를 보고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네가 기다린다면 일찍 돌아올 것이다.’ 하였다. 기자헌은 둥주리를 타고, 오성은 부담을 탔는데, 기자헌에게 말하기를, ‘영공(令公)은 둥주리 같은 액을 만났네.’ 하니, 기자헌은, ‘영공은 도처에 부담(浮談, 허튼 이야기)이로다.’ 하였다. 오성이 북청에 있을 때 노래를 지으니, ‘철령 제일봉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가져다가 임 계신 구중궁궐에 뿌려 본들 어떠리.’ 하였다.
이 노래가 서울 장안의 궁인들에게 전파되니 광해가 이 노래를 듣고 누가 지은 것이냐고 물었다. 궁인이 사실로써 대답하니, 광해는 수심에 싸여 기뻐하지 않았다. 그래도 소환하라는 명은 없었다. 아! 사람의 마음이 한번 그르치게 되면 깨닫기 어려움이 이에 이르는구나.
오성은 실로 세상에 드문 대현(大賢)이요, 동방의 명상(名相)인데 말세에 태어나서 받아들여지지 못했으니, 한스러운 일이다(與自獻俱謫咸鏡道北靑(여자헌구적함경도북청) 臨行謂餞僚曰(임행위전료왈) 明年八月(명년팔월) 當復還來(당부환래) 其時相見(기시상견) 不相遲也(불상지야) 因吟詩曰(인음시왈) 雲日蕭蕭晝晦迷(운일소소주회미) 北風吹破遠征衣(북풍취파원정의) 遼東城郭應依舊(요동성곽응의구) 秪恐令威去不歸(지공령위거불귀) 途中相與詼諧(도중상여회해)
以消憂勞(이소우로) 見出站處(견출참처) 大噱曰(대갹왈) 若知待候(약지대후) 可以早來(가이조래) 奇乘(기승)둥주리 鰲城騎浮擔(오성기부담) 謂奇曰(위기왈) 令公(영공)은둥주리厄을맛낫 奇曰(기왈) 令公(영공)은 到處(도처)의浮談(부담)이로다 在北靑有詞曰(재북청유사왈) 鐵嶺第一峰(철령제일봉)의 자고가 져구룸아 孤臣冤淚(고신원루)를 비사마 가져다가 님 겨신 九重宮闕(구중궁궐)의 려본 엇더리 其詞傳播都下宮人(기사전파도하궁인) 光海聞是詞(광해문시사) 問誰所作也(문수소작야) 宮人以實對(궁인이실대) 光海愁然不樂(광해수연불락) 猶不有召還之命(유불유소환지명) 嗚呼(오호) 人心一誤(인심일오) 難悟至此(난오지차) 鰲城實是曠世大賢(오성실시광세대현) 東方名相(동방명상) 生於季世(생어계세) 不能容(불능용) 可恨(가한)).”
〈주석〉
〖晦〗 어둡다 회, 〖令威(영위)〗 한(漢)나라 때 요동(遼東) 사람 정령위(丁令威)를 가리키는데, 그가 일찍이 영허산(靈虛山)에 들어가 선술(仙術)을 배워, 뒤에 학(鶴)으로 화(化)하여 요동에 돌아와서 성문(城門)의 화표주(華表柱)에 앉았다가 다시 날아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임.
각주
1 이항복(李恒福, 1556, 명종 11~1618, 광해군 10): 본관은 경주(慶州). 일명 오성대감(鰲城大監).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백사(白沙)·동강(東岡).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상을 당한 후라 병약했기 때문에 낙태하려고 독극물을 먹었으나 무사히 태어났고, 8세에 당시(唐詩) 절구(絶句)를 이해하여 부친에게 시를 지어 드렸다고 한다. 9세에 아버지를, 16세에는 어머니를 여의었다. 1574년(선조 7)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580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1583년 대제학 이이(李珥)의 천거로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선조(宣祖)의 신임을 받아 직제학·우승지를 거쳐 1590년 호조참의가 되었고,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좌승지로 재직 중 정철(鄭澈)의 죄를 처리하는 데 태만했다 하여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승지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위해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으며, 두 왕자를 평양까지 호위해 형조판서에 특진했고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했다. 1600년 영의정에 오르고 다음 해 호종공신(扈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602년 정인홍(鄭仁弘)·문경호(文景虎) 등이 성혼(成渾)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하고 살해하려 했다고 하며 성혼(成渾)을 공격하자 성혼의 무죄를 변호하다가 정철(鄭澈)의 당이라는 혐의를 받아 자진하여 영의정에서 사퇴했다. 1608년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광해군 즉위 후 정권을 잡은 북인(北人)이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을 살해하려 하자, 이에 반대함으로써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퇴의사를 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에도 북인(北人)이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 일가를 역모혐의로 멸살시키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는 등 정권 강화작업을 벌이자 적극 반대했다. 1613년(광해군 5) 다시 북인의 공격으로 물러났으나 광해군의 선처로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 옮겼다.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가 1618년 관직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