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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륙사
조선왕조실록의 이상한 기록들
“북계(北界)는 여진(女眞)과 달단(韃靼)과 요동(遼東)·심양(瀋陽)의 경계와 서로 연해 있으므로 실로 국가의 요해지(要害地)가 되니, 비록 아무 일이 없을 시기일지라도 반드시 마땅히 군량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될 것입니다.(후략)” - 태조 1권
달단(韃靼) 화척(禾尺)에게 소와 말을 잡는 것을 금하도록 거듭 밝혔다. - 태종 11권
조선의 북쪽 국경이 달단과 접해 있으며 또 그 달단의 일부가 조선과 조선인에 포함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달단은 무엇인가? 달단은 타타르다. 오늘날 이 타타르인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의 국경지대인 카스피해 북부 볼가강 일대에 타타르스탄이라는 러시아연방의 자치공화국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그 시원을 13세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태조실록과 태종실록이 쓰여진 14세기~15세기 조선의 북계에는 달단이 있다고 했는데, 오늘날 한반도 북부에는 달단이 없다. 조선의 강역이 한반도로 한정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아래는 태조 이성계가 거느렸던 북방종족들이다.
동북면 1도(道)는 원래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킨 땅으로서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한 지 오래 되어, 야인(野人)의 추장(酋長)이 먼 데서 오고, 이란 두만(移闌豆漫)도 모두 와서 태조를 섬기었으되, 언제나 활과 칼을 차고 잠저(潛邸)에 들어와서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었고, 동정(東征)·서벌(西伐)할 때에도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진(女眞)은 알타리 두만(斡朶里豆漫) 협온 맹가첩목아(夾溫猛哥帖木兒)·화아아 두만(火兒阿豆漫) 고론 아합출(古論阿哈出古論阿哈出)·탁온 두만(托溫豆漫) 고복아알(高卜兒閼)·합란 도다루가치(哈闌都達魯花赤) 해탄가랑합(奚灘訶郞哈)·삼산 맹안(參散猛安) 고론두란첩목아(古論豆闌帖木兒)·이란 두만 맹안(移闌豆漫猛安) 보역막올아주(甫亦莫兀兒住)·해양 맹안(海洋猛安) 괄아아화실첩목아(括兒牙火失帖木兒)·아도가 맹안(阿都哥猛安) 오둔완자(奧屯完者)·실안춘 맹안(實眼春猛安) 해탄탑사(奚灘塔斯)·갑주 맹안(甲州猛安) 운강괄(雲剛括)·홍긍 맹안(洪肯猛安) 괄아아올난(括兒牙兀難)·해통 맹안(海通猛安) 주호귀동(朱胡貴洞)·독로올 맹안(禿魯兀猛安) 협온불화(夾溫不花)·간합 맹안(幹合猛安) 해탄설렬(奚灘薛列)·올아홀리 맹안(兀兒忽里猛安) 협온적올리(夾溫赤兀里)·아사 맹안(阿沙猛安) 주호인답홀(朱胡引答忽)·인출활실 맹안(紉出闊失猛安) 주호완자(朱胡完者), 오롱소 맹안(吾籠所猛安) 난독고로(暖禿古魯)·해탄발아(奚灘孛牙), 토문 맹안(土門猛安) 고론발리(古論孛里)·아목라 당괄해탄고옥노(唐括奚灘古玉奴)이며, 올랑합(兀郞哈)은 토문(土門)의 괄아아팔아속(括兒牙八兒速)이며, 혐진 올적합(嫌眞兀狄哈)은 고주(古州)의 괄아아걸목나(括兒牙乞木那)·답비나(答比那)·가아답가(可兒答哥)이며, 남돌 올적합(南突兀狄哈)은 속평강(速平江)·남돌아라합백안(南突阿刺哈伯顔)이며, 활아간 올적합(闊兒看兀狄哈)은 안춘(眼春)·괄아아독성개(括兒牙禿成改) 등이 이것이다. 임금이 즉위한 뒤에 적당히 만호(萬戶)와 천호(千戶)의 벼슬을 주고, - 태조 8권
이렇게 나열하기도 쉽지않은 많은 북방종족이 태조 이성계를 따랐다고 하는데, 현재의 보편적 역사는 이 많은 종족들을 한반도 내에서 자생했던 종족이거나 한반도 북부의 국경지대에서 존재했던 세력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 역시 상식적으로 봤을 때 진실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한반도는 저 정도 규모의 유목민이 생활할 수 있는 초원지대가 없으며, 이 역시 우리의 역사 강역을 반도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대륙 전체로 놓고 보면 쉽게 납득할 수가 있다.
또 태조 이성계는 이러한 북방종족들을 이끌고 조선의 동쪽과 서쪽을 정벌했다고 기록했는데, 조선이 한반도로만 한정되었다면 동쪽의 어디를 어떻게 정벌했을지 모르겠다.
래의 사료에서는 아주 적나라하게 조선이 천자(황제)국 임이 드러나는데,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신종호(申從濩) 등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에 이르기를, “선왕(先王)이 사이(四夷)를 통치하시면서 공물[貢]을 바치지 않으면 명분을 닦고 왕(王)으로 여기지 아니하면 문덕(文德)을 닦는다 하였으니, 그 신중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만둘 만한 것을 그만두지 않고 위험을 꾀하고 요행을 바라면서 금수(禽獸)같은 무리와 이기고 지는 것을 비교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 성종 252권
세조가 사이를 모두 통치했음을 증거하고 있다. 사이라 하면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을 의미한다. 사이가 모두 조선에 조공하여 왕으로서의 명분을 인정받았다고 하니, 조선이 북적에 해당하는 북방종족을 통치한 것 정도는 아주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승도(僧徒) 및 회회인(回回人)들이 뜰에 들어와 송축(頌祝)하고 끝나면, 판통례가 꿇어 엎디어 ‘예(禮)를 마쳤다. ’고 아뢰고, 통찬이 예를 마침을 창하면, 전하가 좌에서 내려오고 풍악이 울린다. - 세종 1권
“회회교도(回回敎徒)는 의관(衣冠)이 보통과 달라서, 사람들이 모두 보고 우리 백성이 아니라 하여 더불어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이미 우리나라 사람인 바에는 마땅히 우리나라 의관을 좇아 별다르게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 또 대조회(大朝會) 때 회회도(回回徒)의 기도(祈禱)하는 의식(儀式)도 폐지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세종 36권
회회교 혹은 회교는 이슬람교를 말한다. 위와 같이 조선에는 이슬람교도의 숫자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조정의 대조회시 이슬람교도에 의한 이슬람식의 ‘회회송축’이라는 기도 의식을 행했음을 말하고 있고, 이러한 이슬람식 의식을 즐겨온 세종이 백성과 신들의 우려와 반발의 뜻을 받아들여 이슬람식 행사를 폐지함을 말하고 있다.
또 위 사료에서 ‘숭유억불’ 사회인 조선의 조정은 기존의 일반적 조선인과 복식 문화가 완전히 이질적인 이슬람교도의 혼인정책을 장려했음을 추론해 볼 수 있고 이를 기존의 일반 다수의 조선인들이 거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오늘날 한반도에는 회교도와 회교인 혹은 회교 문화 등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러한 기록 역시 우리의 역사 강역을 반도가 아닌 대륙으로 가정하면 쉽게 납득할 수가 있다.
이러한 의문들을 해소하기 위해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조선 지리를 살펴보면,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 강헌대왕이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한양에 도읍을 정하셨고 열성(列聖)이 서로 이으니, 강토가 날로 개척되어 8도(道)로 정하였으니 사방의 복판에 처한 것을 경기(京畿)라 하고, 서남을 충청, 동남을 경상, 남쪽에 치우친 것을 전라, 정동을 강원, 정서는 황해, 동북은 영안(永安 함경(咸鏡)), 서북은 평안이라 하였습니다.
경(京)이 둘이고, 부(府)가 넷, 대도호부(大都護府)가 넷, 목(牧)이 스물, 도호부가 마흔 넷, 군(郡)이 여든 셋, 현(縣)이 백 일흔 셋이니 안팎 산하(山河)의 세로와 가로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 동국여지승람 위 사료에 드러난 조선의 경기 지역은 동서남북 사방의 정 중앙임을 알 수 있는데, 한반도의 경기 지역은 반도 남북의 중앙이긴 해도 동서의 중앙이 아닌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또 강원 지역이 조선의 정동이고 황해 지역이 조선의 정서라고 하니 경기의 좌측에 황해 우측에 강원이 있어야 하지만, 오늘날 한반도의 황해는 경기의 좌측이 아닌 북쪽에 위치해 있다.
또 조선의 서남에 충청 지역이 조선의 동남에 경상 지역이 있기에 전라는 남쪽에 치우쳐 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충청과 경상이 동서 방향으로 마주하고 그 이남에 전라 지역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날 한반도의 지리는 전혀 그러하지 않다. 반면 대륙에 조선의 8도를 놓고 보면 저러한 지리적 요건은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사방의 정 중앙인 서울과 경기 지역을 장안(서안)과 섬서성 일대로 놓고 그 정서 지역인 황해를 티베트와 청해성 일부 등으로, 그 정동 지역인 강원을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등으로, 서북 지역인 평안을 중앙아시아 부근과 신강성 일대로, 동북지역인 영안(함경)을 하북성과 동북3성 일대로, 서남 지역인 충청을 사천성 일부와 운남성, 귀주성, 광서성 등으로, 동남 지역인 경상을 절강성, 강서성, 복건성, 광동성 등으로, 남쪽으로 치우친 전라를 해남성과 인도차이나 반도 등으로 놓고 보면 조선의 8도 방위와 지리가 일치한다.
이렇게 보면 먼저 열거한 저기 위의 기록에서 태조 이성계가 거느렸던 무수히 많은 북방종족이 현재의 중앙아시아, 몽골, 시베리아 지역 등에 해당하는 유목민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고, 실록에서 말한 조선의 회교와 회교인이 신강성의 위구르를 일렀음을 추청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대륙 그 자체가 우리의 역사 무대임을 아래에 계속해서 기술해 보자면,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곽연성(郭連城)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야인(野人)과 왜인(倭人)들은 모두 우리의 번리(藩籬)이고, 모두 우리의 신민(臣民)이니, 왕(王)된 자는 똑같이 대우하고 차별을 없이 하여 혹은 무력(武力)을 사용기도 하고, 혹은 성식(聲息)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작은 폐단 때문에 그들의 내부(來附)하는 마음을 거절하여 물리칠 수가 없다.
내가 즉위(卽位)한 이후에 남만(南蠻)·북적(北狄)으로서 내부(來附)하는 자가 심히 많은데, 모두 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니, 이것은 하늘의 끌어들이는 바이지, 나의 슬기와 힘이 아니다.(중략) 흑룡강(黑龍江)·속평강(速平江)의 올적합(兀狄哈)과 화라온(火剌溫)·건주위(建州衛) 올량합(兀良哈) 이만주(李滿住)·동창(童倉) 등 심처야인(深處野人)과 삼위달자(三衛撻子)가 관문(關門)을 두드리고 입조(入朝)하기를 청(請)하거든, 그 종인(從人)을 줄여서 후대(厚待)하여 올려 보내라. - 세조 8권
야인과 왜인이 모두 조선의 신민이고 속지이며, 남만과 북적 모두 내부해오며 조선의 속지가 되길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이 천자국임을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대목이다. 앞에서 북적 즉 야인 지역은 현재의 중앙아시아·몽골 북부의 남러시아나 시베리아 지역이라고 추정한 바 있는데, 그렇다면 조선의 속지인 남만은 어디를 이르는 것일까? 이를 아래에서 계속 살펴보면,
남만(南蠻)은 나라의 정남쪽에 있는데, 순풍(順風)이면 3개월 만에 도착할 수 있고, 일본국(日本國)은 나라의 동남쪽에 있는데 5일 만에 도착할 수 있고, 중국은 나라의 서쪽에 있는데 순풍(順風)이면 20일 만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다. - 세조 27권
남만은 나라의 정남쪽에 있으며 일본은 나라의 동남쪽에 있다고 기록했는데, 한반도가 조선의 전부라면 이 두 기록은 모두 틀린 것이 된다. 한반도의 정남쪽에는 남만은 커녕 그 어떤 나라도 없으며, 일본열도도 한반도의 동남쪽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동북쪽까지 뻗어 있으니 정동쪽으로 기록해야 했을 것이다. 이 모든 기록은 반도의 정황이 아닌 대륙의 정황이며 나라 밖의 정황이 아닌 나라 안의 정황이다. 앞의 사료에서 왜와 남만이 모두 조선의 신민이며 번리라고 말해주지 않았던가. 계속해서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동래 부사 이원진(李元鎭)이 치계하였다. “차왜(差倭) 등지승(藤智繩)이 역관을 불러 말을 전하기를 ‘지난해에 귀국이 잡아 보낸 당선(唐船) 안에 과연 예수교도의 당 5인이 있었으므로, 도주(島主)에게만 광영이 있었을 뿐 아니라 관백(關白)도 매우 기뻐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남만(南蠻)의 섬라(暹羅) 사이에 섬 하나가 있는데, 그 섬에 있는 사람들의 형상이 마치 달자(㺚子)와 같이 생겼습니다.(후략)’ - 인조 46권
실록은 섬라가 남만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섬라는 현재의 태국을 말한다. 오늘날 태국은 인도차이나반도에 있으니 섬라가 속한 남만이 곧 인도차이나반도인 것이다. 인도차이나반도 이 곳이 대륙에 있던 조선의 정남쪽이며, 곧 동국여지승람에서 남쪽에 치우쳐 있다고 말한 조선의 전라 지역이다. 남만에 속한 섬라, 곧 인도차이나반도가 조선의 속지라는 기록을 몇몇 더 살펴보면,
섬라곡국(暹羅斛國)에서 그 신하 내(乃) 장사도(張思道) 등 20인을 보내어 소목(蘇木) 1천 근, 속향(束香) 1천 근과 토인(土人) 2명을 바치니, 임금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대궐 문을 지키게 하였다. - 태조 3권
섬라곡(暹羅斛)의 사절 장사도(張思道) 등이 돌아와서 말하였다. “작년 12월에 회례사(回禮使) 배후(裵厚)와 함께 일본에 이르렀다가, 도적에게 겁탈되어 예물과 행장을 다 태워버렸습니다. 다시 배 한 척을 꾸며 주시면 금년 겨울을 기다려서 본국에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칼과 갑옷과 구리그릇과 흑인 두 사람을 바쳤다. 왕이 정사를 보고 있었는데, 예조에 명령하여 섬라곡 사람을 인도해서 반열(班列)에 나오게 하였다. - 태조 6권
섬라 즉 태국에서 조선에 조공하던 기록들 중 조공 물품에 흑인 두 사람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놀라운데, 더 흥미로운건 두 번째 기록에서 섬라 사절이 조선에 조공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일본에 이르렀다가 봉변을 당하고 다시 조선의 조정으로 돌아 왔다는 일화인데, 한반도만이 조선의 전부이고 일본이 열도에 위치했다면 섬라의 사절이 귀국길에 일본에 이를 일이 없다.
하지만 조선이 대륙 그 자체이고 섬라와 조선 조정 사이의 대륙 어느 지점에 일본이 위치했다면, 섬라의 사절은 귀국길에 반드시 일본을 거쳤어야 했을 것이다. 앞의 세조실록 사료에서 남만은 조선의 정남쪽에 있고 일본은 조선의 동남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으로 적용하면 일본은 조선의 경상 지역이 된다.
그러므로 일본의 위치는 절강성과 복건성, 광동성과 강서·광서성의 일부 지역이라는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조선의 전라 지역은 조선의 충청 지역과 경상 지역 이남에 있다고 했으니, 조선의 중앙조정이 있는 경기 지역에서 전라 지역으로 육로와 양자강 등을 통해 이동하려면 반드시 충청 지역이나 경상 지역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 일화는 인도차이나반도가 한반도에 조공하다가 돌아가던 길에 열도에 붙들려 봉변을 당한 것이 아닌, 전부가 대륙 내부에서 벌어진 일이다. 조선과 남만의 관계가 그러하다면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어떠할까? 실록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일본 일기도(一岐島)의 중(僧) 건철(建哲)이 사람을 시켜 우리나라에서 사로잡혀 갔던 남녀 2백여 인을 돌려보내고, 이내 방물(方物)을 바치면서 말하였다. “먼 곳에서 정성을 표합니다.” - 태조 3권
일본국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 원요준(源了俊)의 사자가 우리나라에서 보낸 중 범명(梵明)과 함께 와서 왜구에게 잡혀갔던 남녀 659명을 돌려보냈다. 또 범명이 원숭이를 바치니, 사복시에 두게 하였다. - 태조 6권
일본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 원요준(源了俊)이 중 원정천(原正泉) 등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 태조 8권
일본국 일향주(日向州) 사람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태조 8권
일본국 살마주 사람이 토산물을 와서 바쳤다. - 태조 8권
일본 대내전(大內殿)의 다다량(多多良)이 사람을 보내서 토산물을 바쳤다. - 태조 8권
일본(日本)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과 감자(柑子)·매화(梅花)를 각각 한 분(盆)씩 바쳤다 - 정종 5권
일본국(日本國) 사자(使者) 12인이 와서 토물(土物)을 바쳤다. - 태종 5권
일본이 조선에 조공한 기록은 일일이 나열하기 귀찮을 정도로 방대하게 남아있다. 그 중 한가지 흥미로운 기록은,
일본 좌경 대부(左京大夫) 육주목(六州牧) 의홍(義弘)이 구주(九州)를 쳐서 이기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또 그 공적을 말하였다. 임금이 의홍(義弘)에게 토전(土田)을 하사하고자 하다가,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권근(權近)과 간관(諫官)의 의논으로 그만두었다. 의홍이 청하기를, “나는 백제의 후손입니다. 일본 나라 사람들이 나의 세계(世系)와 나의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니, 갖추 써서 주시기를 청합니다.” - 정종 2권
일본 관리가 조선에 내놓고 스스로를 백제의 후손이라며 잘 봐달라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물론 일본의 이러한 표현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대륙 동남부의 일본 지역은 본래 백제에 복속된 지역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당시의 일본 지역은 위의 기록처럼 소수의 백제계와 다수의 대륙왜인들이 어우러진 사회였을지 모른다. 오늘날에도 광동성과 광서성 등의 지역에 ‘백제향’ 이라는 지역명 등이 남겨져 있는 것과 일본사관학교 출신의 장개석이 자신의 고향인 절강성이 옛 백제의 땅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처럼 일본이 조선의 번리에 해당하는 속국이었다면 왜는 무엇일까? 일본과 왜의 관계는 어떠할까? 일본과 왜는 정말 원래부터 같은 집단이었는지를 실록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통신관(通信官) 박돈지(朴惇之)가 일본(日本)에서 돌아왔는데, 일본국 대장군(大將軍)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피로(被虜)되었던 남녀 1백여 인을 돌려보내었다.(중략) 처음에 삼도(三島) 왜구(倭寇)가 우리나라의 변환(邊患)이 된 지 거의 50년이 되었다. 무인년에 태상왕이 명하여 박돈지(朴惇之)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었는데, 박돈지가 명령을 받고 일본에 이르러 대장군과 더불어 말하였었다.
“우리 임금께서 신에게 명하기를, 우리 중외(中外)의 군관(軍官) 사졸들이 매양 청하기를, ‘육지에는 진수(鎭戍)를 두고 바다에는 전함을 준비하여, 지금 우리들이 목숨을 시석지간(尸石之間)에 붙여 초췌(憔悴)하고 노고하기가 이처럼 지극한 데에 이른 것은, 삼도왜구(三島倭寇)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 신 등은 원하건대 크게 군사를 내어 삼도를 쳐서 도적의 남은 무리가 없게 하고, 우리 국가에 다시는 근심이 없게 하소서.’ 한다.
대장군이 오래동안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평소에 위엄과 덕망이 있어 삼도지경(三島之境)에 미치니, 감히 군사를 가만히 행하여 지경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신하를 보내어 좌우(左右)에 고하는 것이다. 또 대장군이 정(精)한 병갑(兵甲)과 엄한 호령으로 어찌 삼도의 도적을 제압하여 이웃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겠는가? 대장군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시었습니다.” 대장군이 흔연히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제가 능히 제어하겠습니다.” 하고, 곧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으나 여섯 달이 되어도 이기지 못하였다. 대장군이 대내전(大內殿)으로 하여금 군사를 더하여 나가서 공격하게 하니, 적이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모두 나와서 항복하였다. - 정종 1권
위의 기록은 조선 통신관과 일본 대장군의 대화인데, 조선이 삼도에 할거하는 왜구를 일본에게 소탕할 것을 명하는 내용이다. 아래에서 계속 살펴보면,
일본국(日本國) 대상국(大相國)이 왜적을 격파하였다는 말을 듣고, 배타는 일을 정파(停罷)할 것을 의논하였다. - 정종 2권
일본은 지속적으로 왜를 소탕한다. 당시의 일본과 왜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일본은 대륙의 동남부 조선의 번리 속국이며 왜구란 도서의 해적 집단들을 이르는데, 이들이 삼도왜구라 불린 이유는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와 보르네오, 필리핀의 필리핀제도 등의 세 제도에서 주로 할거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이 주로 필리핀제도를 통해 대륙의 동남해안인 절강성, 복건성 등을 주로 침략했을 것이기에, 이러한 이유로 일본에서는 명치유신 이전까지 무인정권인 막부 체제가 수백년간 지속되었을 것이다.
조선의 명을 받는 번리 속국인 일본막부의 정권 존재 이유 자체가 왜적 방어에 있었지만 이 일본인의 본질 역시 대륙왜인이므로 왜의 힘이 강성해지면 왜에 투항하여 도리어 조선을 공략하는, 힘에 의해 유지되는 집단들이었을 것인데, 이러한 역사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임진왜란 전후의 일본사다. 임진왜란 직전의 전국시대는 일본과 왜의 결합 혹은 투쟁 과정이었으며, 임진왜란 직후의 강호막부는 조선의 힘에 의한 전후정리에 해당할 것이다.
임금이 조회를 보았다. 유구국(琉球國)의 사신과 오량합(吾良哈)의 사람들이 조회에 참예하였다. 유구국의 사신은 동반(東班) 5품의 아래에 자리를 잡았고, 오량합은 서반(西班) 4품의 아래에 자리를 잡았고, 그 종자(從者)들은 6품의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유구국에서 방물(方物)을 바치었다. - 태조 2권
유구 국왕(琉球國王) 상원(尙圓)이 범경(梵慶)을 보내어 내빙(來聘)하였는데,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유구 국왕 상원(尙圓)은 조선 국왕 전하(朝鮮國王殿下)께 엎드려 아룁니다. 삼가 우리 작은 부용(附傭)의 나라를 큰 섬이라고 여겼었는데, 근래에 일본(日本)의 갑병(甲兵)이 와서 빼앗고자 하므로, 이로 인하여 전사(戰死)한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후략)” - 성종 279권
유구는 현재의 대만과 오키나와 등을 말하는데, 위의 실록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 유구 역시 조선에 공손히 조공하던 나라이며, 일본의 무도함을 조선 국왕에게 극진히 엎드려 고하고 있으니, 대륙의 패자가 누구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유구를 침략하여 땅을 빼앗은 무도한 일본 역시 수천리 바다 건너의 열도가 아니며 뱃길로 몇 시간이면 당도할 수 있는 복건성 일대에 있던 일본을 말했을 것이며, 이를 중재할 수 있는 조선의 조정 역시 한반도로만 한정된 작은 나라가 아닌 대륙의 지배자를 일렀던 것일 테다.
참고로 정유재란 중 왜군에게 포로로 끌려가서 왜국에서 환란의 세월을 보낸 조선인 강항은 '왜국지도'를 필사했는데, 그 지도 속의 왜국은 분명 오늘날의 일본열도처럼 남북이 긴 제도가 아닌 동서가 긴 제도인데, 이는 오늘날의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는 먼저 허의후(許儀後)를 통하여 역시 왜적의 음모를 듣고는 우리나라로 하여금 섬라(暹羅)·유구(琉球) 등과 결합하여 병사를 합쳐 일본을 정벌하여 무찌르도록 하였다. - 선조 27권
위의 기록 역시 임진왜란의 주요 전장이 한반도가 아님을 간접적으로 증거하는 사료인데, 한반도와 열도의 전쟁에 수천리 건너의 유구라는 대만 군대나 만리 건너의 섬라라는 인도차이나반도 군대가 동원되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가 없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주요 전장이 복건성과 광동성 등의 지역이었다면 그와 지리적으로 밀접한 유구와 섬라의 군대가 동원되는 것은 아주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이 대륙 그 자체였을때 그 군대들을 동원시킬 수 있는 힘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데,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왜놈들이 우리의 위대한 역사를 아무리 숨기고 가리려 했어도 그 판때기가 너무나 커 다 가릴 수가 없다. 결국엔 다 드러나고 말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