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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권
PTS본 5권 ?대품 모음(Mahāvagga)? 가운데 3/4번째에 해당하는 경전의 모음집이다.
이 한글 쌍윳따 제10권에는 다음과 같은 제49쌍윳따에서 제53쌍윳따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 제목은 아래와 같다.
「제49쌍윳따 올바른 노력(Sammappadhāna-Saṁyutta)」
「제50쌍윳따 힘(Bala-Saṁyutta)」
「제51쌍윳따 신통의 기초(Iddhipāda-Saṁyutta)」
「제52쌍윳따 아누룻다(Anuruddha-Saṁyutta)」
「제53쌍윳따 선정(Jhāna-Saṁyutta)」
제49쌍윳따는 5품 54개의 경으로, 제50쌍윳따는 10품 110개의 경으로 제51쌍윳따는 8품 86개의 경으로, 제52쌍윳따는 2품 24개의 경전으로 이루어져있다.
제49쌍윳따 「올바른 노력(正勤: sammappadhāna)이란 여덟가지 길 가운데 한 요소인 올바른 정진(正精進:sammāvāyāma)을 말하며 그것과 동일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다만 올바른 정진은 올바른 생활을 토대로 건전하고 선한 힘에 의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건전하고 선한 힘은 물론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사유를 수반하는 도덕적 요인으로부터 나온다. 일반적인 선한 상태의 힘의 경우에는 그것이 생사윤회의 범주 안에서의 공덕을 쌓는 데 국한된다. 그러나 8정도의 계열 속에서의 선행적인 것을 수반으로 하는 정진의 힘은 전체적인 성스러운 길에 방향을 정초시키는 보다 고차원적인 정신적 현상의 계발의 단초가 된다. 정진의 힘에 의해서 오염된 마음이 해탈된 마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37가지의 깨달음에 도움이되는 길로서 8정도와는 독립적으로 제시된 것이다.
이러한 올바른 노력에는 네 가지의 노력(四精勤)이 있는데 불건전한 것을 버리고 건전한 것을 추구하는 노력을 말한다. 불건전한 상태(不善法:akusalā dhammā)는 행위를 유발하건 유발하지 않건 간에 오염된 사유, 감정, 의도 등의 마음의 상태를 말하며 건전한 상태(善法:kursalā dhammā)는 해탈로 이끄는 오염되지 않은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궁극적으로 불건전한 것은 해탈에 장애가 되는 속박의 연기에 소속되는 것으로 방지되고 버려져야 하는 것이며, 건전한 것은 해탈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지속시키고 계발하여야 하는 해탈의 연기에 소속되는 것이다.
1) 방지의 노력(律儀勤:saṁvarappadhāna):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건전한 상태의 발생을 방지하는 것을 방지의 노력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건전한 악한 상태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노력한다.”
올바른 노력의 첫번째 측면은 오염된 마음의 불건전한 상태를 극복하고 초월하는 데 두어져 있다. 이러한 불건전한 상태가 정신의 집중과 있는 그대로의 깨달음을 방해하는 만큼 장애라고 불리우며 이 장애에는 다섯가지 장애(五障:pañcanīvaraṇā)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다섯가지 장애가 있다. 어떠한 것이 다섯가지인가? 감각적 쾌락의 장애, 분노의 장애, 해태와 혼침의 장애, 흥분과 회한의 장애, 의심의 장애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것이 다섯가지 장애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다섯가지 장애를 잘 알고 완전히 알고 완전히 소멸하고 버리기 위해 네가지 올바른 노력을 닦아야 한다(SN. V. 248)
위의 다섯가지 장애를 좀더 상세히 분류하여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 감각적 쾌락(愛貪:kāmacchanda)
② 분노(惡意:byāpāda)
③ 해태와 혼침(昏寢睡眠:thīnamiddha)
④ 흥분과 회환(悼擧惡作:uddhaccakukkucca)
⑤ 의심(疑:vicikicchā)
앞의 두 가지 장애, 감각적 쾌락과 분노는 가장 강력한 것으로 선정이나 삼매의 수행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인데, 그것들은 탐욕과 진에를 수반하고 있다. 다른 세 가지 장애는 비교적 덜하지만 장애적인 요소가 강한 것으로 우치를 수반하고 있다. 감각적 쾌락은 감각적 욕망으로 두 가지로 해석된다. 일반적으로 색깔, 소리, 냄새, 맛, 감촉의 다섯 가지 감각의 장에서 일어나는 욕망(五欲樂)을 말하지만 때로는 넓은 의미로 감각적인 쾌락뿐 아니라 부, 권력, 지위, 명예 등에서 발생하는 욕망도 의미한다. 두번째의 장애인 분노는 첫번째 장애와 다른 극단적 형태의 진에를 수반하는 것으로 자타에 대한 증오, 화냄, 원한, 혐오 등을 속성으로 한다. 세번째 장애는 해태와 혼침이다. 해태는 정신적으로 아둔한 것을 의미하고 혼침은 마음이 무겁고 가라앉아 졸리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세번째 장애와 다른 극단적인 형태가 네번째의 장애이다. 흥분은 마음의 들뜸, 불안정을 의미하고 회한은 걱정으로 과거에 대한 후회와 원하지 않았던 결과에 대한 근심을 뜻한다. 이것은 우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섯번째 장애는 의심이다. 의심은 우치를 수반하는 상습적인 미결정과 미해결, 신뢰의 결여 등을 뜻한다. 경전에는 이들 다섯 가지 장애에 관해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감각적 쾌락은 다섯 가지 색깔로 물든 물에 비유되고, 분노는 부글부글 끓는 물에 비유되며, 해태와 혼침은 이끼가 낀 물, 흥분과 회한은 바람이 불어 파도치는 물, 의심은 흐린 흙탕물에 비유된다. 이러한 장애의 물을 버리고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마음의 상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이와 같은 장애를 막는 첫번째의 정진을 1)방지의 노력이라고 한다. 이러한 장애의 제거는 삼매의 수행에 지속적으로 수반된다. 마음의 장애는 정신적인 흐름 속에 지속되지만 감각적 체험의 유입을 통해서 활성화된다. 감각적인 체험은 감각자료, 즉 시각자료(色), 청각자료(聲), 후각자료(香), 미각자료(味), 접촉자료(觸)로 구성된다. 이러한 감각자료들은 의식에 의존하는 감각과 만나게 된다. 이때 의식이 함께 수반하면서 감각자료는 지속되고 평가되고 적절한 반응을 일으킨다. 의식이 그러한 자료적인 인상을 주의 깊고 현명하게 숙고(如理作意:yoniso manasikāra)하지 않으면 감각자료는 불건전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로 오염되어 진행된다. 이러한 오염의 경향성은 감각대상에 따라서 규정된다. 매력적인 대상은 탐욕, 혐오적인 대상은 진에, 중성적인 대상은 우치를 수반하는 오염을 일으킨다. 그래서 붓다는 이러한 오염을 제거하기 위해 감관의 제어, 즉 근율의(根律儀:indriyasaṁvara)를 중심으로 방지의 노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것이 방지의 노력(律儀勤)인가? 이 세상에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들이 눈으로 형상을 보되 그 현상(現相)을 취하지 않고 그 특징(隨相)을 취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눈의 기관을 제어하지 않으면 탐애(貪愛)와 근심과 악(惡)과 불건전한 상태(不善法)가 유입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수행하고 눈의 기관을 보호하고 눈의 기관을 제어하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다른 모든 감각기관에 대해 동일한 설명이 반복된다. 감각기관의 제어가 제어에 의한 정진, 즉 율의근의 중요한 실천적 덕목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으로 형상을 보되 그 현상(現相)을 취하지 않고 그 특징(隨相)을 취하지 않는다(cakkhunā rūpaṁ disvā na nimitta-ggāhī hoti, nānuvyañjanaggāhī hoti)’는 말은 감관의 제어가 무엇인지를 해결해주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현상(現相:nimitta)이란 말은 대상의 겉모습이고 특징(隨相:anuvyañjana)은 사소한 특징을 의미한다. 정형화된 연기에 의하면 의식은 항상 감각영역에 수반하므로 감관이 잘 제어되지 못하면 의식은 무모하게 흐르면서 사물의 겉모습에 끄달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오염을 야기시키고 사소한 특징을 조작하여 희론에 의한 오염을 증폭시키며 불건전한 상태(不善法)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감관의 제어는 올바른 마음새김과 올바른 집중을 통한 성숙된 지혜의 수습적인 조건이 되는 것이다.
2) 버림의 노력(斷勤:pahānappadhāna):이미 일어난 불건전한 상태를 버리는 것을 버림의 노력이라고 한다. 이미 생겨난 악한 불건전한 상태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노력한다.
감관을 제어하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장애들을 극복하였더라도 과거의 업으로부터 유래된 불건전한 사유가 남아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 바로 이 두번째의 정진이 필요한 것이다. 이 노력을 ‘버림의 노력’이라고 한다. 경전은 이것이 무엇인가 좀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버림의 노력인가? 여기에 수행승들이여, 한 수행승이 있어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사유들, 이미 생겨난 분노에 대한 사유들, 모든 이미 생겨난 악한 불건전한 상태들을 수용하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파괴하고 없애는 것이다.”
모든 이미 생겨난 불건전한 상태에는 앞서 언급한 다섯 가지의 정신적 장애가 포함된다. 경전에 의하면 이러한 장애에 대처하는 방법은 응병여약(應病與藥) 식으로 각각의 경우에 맞게 주어진다. 다섯 가지 장애는 탐욕, 진에, 우치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그 조건을 소멸시킴으로써 장애를 제거할 수 있다.
[중부니까야]에 따르면 불건전한 오염된 사유는 그와 대치되는 건전한 사유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
그 [불건전한] 현상(現相)과는 다른 건전한 것을 수반하는 현상을 숙고하는 자에게는 탐욕을 수반하고 성냄를 수반하고 어리석음을 수반하는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은 버려지고 소실된다. 그것들을 버림으로써 안으로 마음이 안립되고 고요해지고 하나로 되고 집중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를 없애는 것은 선하고 건전한 것에 대한 숙고를 통해 없어지지만 궁극적으로는 선하고 건전한 것에 대한 사유마저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善)으로 불선(不善)을 대치하는 것은 마치 능숙한 미장이나 그 도제가 작은 쐐기로 큰 쐐기를 제거하는 것(sukhumāya āṇiyā olārikaṁ āniṁ a-bhinihaneyya)과 같다고 했다. 궁극적으로는 그 선(善)도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 생겨난 다섯 가지의 장애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대치법(對治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자비에 대한 명상을 통해 모든 탐욕과 진에, 또는 애탐과 악의 등은 사라지며 해태와 혼침의 제거를 위해서는 빛나는 광명체에 대한 시각화, 활발한 행선(行禪)의 수행, 죽음에 대한 명상(maraṇānussati), 또는 단지 정진을 지속할 확고한 결심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흥분과 회한은 마음을 전환해서 관심 있는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고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힘으로써 제거될 수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소멸될 수 있다. 의심에 대한 해결은 질문, 탐구, 학습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미 생겨난 불건전한 상태는 그러한 장애를 몰아내는 일대일 대응의 대치법을 첫번째로 하는 이외에 두번째로 부끄러움(懺:hirī)과 창피스러움(愧:ottappa)이란 도덕적인 양심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사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세번째 방법은 불건전 생각이 일어날 때 관심의 방향을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네번째 방법은 관심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정면돌파해서 상태의 속성과 그 원인을 조사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마음의 상태는 소멸한다. 다섯번째 방법은 의지의 힘으로써 억제함으로써 불건전한 상태를 극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방법으로 우리는 마음의 노예가 아니라 그 주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의 상태를 소멸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수반적 자유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무엇이든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불건전한 상태를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다.
3) 수행의 노력(修勤:bhāvanāppadhāna):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키는 것을 수행의 노력이라고 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키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켜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을 책려하여 노력한다.
불건전한 상태의 제거를 통해서 올바른 정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의 계발을 수반한다. 이것을 수행의 노력이라고 한다. 수행은 다양한 측면을 가지지만 경전에서 특히 일곱 가지의 깨달음의 요소(七覺支:satta bojjhaṅgā)를 들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수행의 노력인가? 수행승들이여, 여기 수행승이 멀리떠남에 의지하고 사라짐에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보내버림으로 열반으로 끝나는 새김의 깨달음 고리, 탐구의 깨달음 고리, 정진의 깨달음 고리, 희열의 깨달음 고리, 안온의 깨달음 고리, 집중의 깨달음 고리, 평정의 깨달음 고리을 수행한다.”
이 깨달음의 고리들은 깨달음의 조건이 되면서 궁극적으로 깨달음에 수반되어 그 속성이 되는 것들이다.
깨달음의 길은 새김(念:sati)을 출발로 해서 시작된다. 새김이란 탐욕, 진에, 우치를 수반하는 사유들이 제거되고 일체의 선입견이 소멸되어 현재의 시점에서의 사물에 대한 관찰을 의미하는 깨달음의 요소이다. 이 사물에 대한 관찰은 그 특징이나 조건이나 결과에 대한 조사를 의미하는 탐구의 깨달음 고리를 수반하게 된다. 이때 새김은 기본적으로 수동적이며 탐구는 능동적인 인식의 측면을 갖고 상호 수반하는 관계에 있다. 새김과 탐구가 이루어지면 올바른 길을 알게 되고 힘(精進力:viriya)을 얻게 되는 정진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이 정진에서 정진력이 진행되면 희열이 등장하며 희열은 점차로 형성되어 정점에 달하면 지복의 파도가 몸과 마음을 감싸면서 안정되어 몸과 마음에 괴로움이 없고 평안한 안온의 깨달음 고리를 수반한다. 이러한 안온을 토대로 마음의 집중에 도달한다. 이러한 정신의 집중이 깊어지게 되면 결국 깨달음의 마지막 요소인 마음의 평정에 이른다. 이러한 깨달음에 수반되는 요소들이 곧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로서 수행되어야 할 것들이다.
4) 수호의 노력(守護勤:anurakkhaṇāppadhāna):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수호의 노력이라고 한다.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여 잊어버리지 않고 증가시키고 확대시키고 계발시키고 충만하도록 의욕을 일으키고 정진하고 정근하고 마음은 책려하며 노력한다.
이것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생겨나도록 하는 수행의 노력(修勤)을 조건으로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는 노력을 말하며 이 수호의 노력은 정신의 집중을 통해 나타나는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苦聖諦)를 상기시키는 지각의 현상(現相:nimitta)을 수호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수호에 의한 정진인가? 여기 수행승들이여, 한 수행승이 있어 이미 생겨난 선한 삼매(三昧)의 현상(現相), 즉 골상(骨想), 충담상(蟲啖想), 청어상(靑瘀想), 농란상(膿爛想), 천공상(穿孔想), 팽창상(膨脹想)을 수호하는 것이다.”
골상은 해골과 뼈로 구성된 시체에 대한 지각, 충담상은 벌레들이 모여 우글거리는 시체에 대한 지각, 청어상은 푸르게 멍든 어혈을 지닌 시체에 대한 지각, 농란상은 고름이 가득 찬 시체에 대한 지각, 천공상은 부패해서 갈라진 시체에 대한 지각, 평창상은 부푼 시체에 대한 지각을 말한다.
경전에서 이미 생겨난 깨달음의 요소를 수호하기 위한 정진으로 이러한 조건지어진 존재의 궁극적인 괴로움, 즉 죽음에 수반되는 현실의 처참함을 강조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조건지어진 것으로부터 염리(厭離)를 도모하여 해탈을 수호하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삼매에 의해 밝혀지는 괴로움의 현상(現相)을 수호함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쌍윳따 힘은 다섯가지의 힘(五力:pañca balāni)에 관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다섯가지 힘이 있다. 다섯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① 믿음의 힘, ② 정진의 힘, ③ 새김의 힘, ④ 집중의 힘, ⑤ 지혜의 힘이다. 수행승들이여, 다섯가지 힘이란 이와 같다....수행승이 다섯가지 힘을 닦고 다섯가지 힘을 익히면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기울고 열반으로 임한다.
위의 다섯가지 힘은 ?쌍윳따 니까야?(SN. V. 252)에 따르면, 계행에 의지하고 계행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한다. 따라서 다섯가지 힘은 8정도처럼 완전한 독립된 수행체계로서 길이라고 볼 수 없지만 악하고 불건전한 법을 없애거나 장애를 척결하거나 열반에 이르게 하는 힘이다.
세번째 쌍윳따 「신통의 기초」이다. 신통의 기초(iddhipāda)란 ‘초자연적인 힘의 기초’ 또는 ‘영적인 힘의 기반(Basis for spiritual power)’, ‘정신력의 기반(Bases of psychic power)’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원래 신통(iddhi, sk. ṛddhi)라는 말은 ‘성공, 성장, 번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인도의 요가를 위시한 명상수행의 전통 속에서는 명상의 결과로 얻어지는 특별한 성취나 놀라운 능력을 말한다. 그러나 인도에서 그것은 초자연적인 기적이라기보다는 정신의 집중을 통해 얻어지는 자연적인 인과적인 산물로 보고 있다.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은 마음의 집중을 통해 일상적인 감각으로는 보이지 않는 정신과 물질에너지의 미묘한 고리를 파악하여 그 심오한 인과관계의 흐름 속에 들어가 기적으로 보이는 영적인 성취를 가능하게 하였다.
초기불교는 순수한 윤리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빠알리 니까야에서 부처님 스스로 이러한 놀라운 능력의 영적인 성취를 발휘했을 뿐만아니라 그러한 기술에 능숙한 제자를 극구 칭찬하기도 했다. 부처님께서 부정한 것은 이러한 놀라운 능력의 영적인 성취가 아니라 신통술을 사특한 목적으로 잘못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수행승들에게 이러한 신통술을 보여 재가신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금하고 신통술이 있다고 해서 완전한 지혜를 성취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초기불교에서 진정한 기적은 악을 극복하고 선을 구현시키는 ‘가르침의 기적(anusāsanipaṭihāriya)’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전에서는 ‘다양한 신통의 종류(anekavihitaṃ iddhividhaṃ)’를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한역에서는 이 협의의 신통을 신족통(神足通)이라고 번역한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신통의 종류는 여섯가지의 보다 광의의 범주인 초월적 또는 직관적 인식능력 즉 육신통(六神通: chaḷabhiññā)에 소속된다. 불교에 따르면 초월지는 초감각적 실재에 대한 신비적 직관이 아니고 단지 조건적으로 발생되는 감각적 능력의 확장과 정제의 결과이다.’이러한 육신통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SN. V. 263)
1) 신족통 (神足通:iddhi):① 그는 하나에서 여럿이 되고 여럿에서 하나가 된다. ② 그는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③ 자유로운 공간처럼 장애 없이 담을 통과하고 성벽을 통과하고 산을 통과해 간다. ④ 그는 물 속처럼 땅 속을 들어간다. ⑤ 그는 땅 위에서처럼 물 위에서도 빠지지 않고 걷는다. ⑥ 그는 날개 달린 새처럼 공중에서 앉은 채 날아다닌다. ⑦ 그는 손으로 이처럼 큰 신비를 지니고 이처럼 큰 능력을 지닌 달과 해를 만지고 쓰다듬는다. ⑧ 그는 범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육신으로 영향력을 미친다.
2) 천이통(天耳通:dibbasota):“청정한 인간을 뛰어넘는 하늘귀로서 멀거나 가까운 하늘사람과 인간의 두 소리를 듣는다.”
3) 타심통(他心通:parassa cetopariyañāṇa):“그는 나 자신의 마음으로 미루어 다른 뭇삶이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안다. 그는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을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고 알고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을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안다. 그는 화냄으로 가득 찬 마음을 화냄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고 알고 화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화냄에서 벗어나 마음이라고 안다. 그는 어리석음에 가득 찬 마음을 어리석음에 가득 찬 마음이라고 알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마음을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안다. 그는 통일된 마음을 통일된 마음이라고 알고 흩어진 마음을 흩어진 마음이라고 안다. 그는 최상으로 노력하는 마음을 최상으로 노력하는 마음이라고 알고 최상으로 노력하지 않는 마음을 최상으로 노력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안다. 그는 보다 높은 목표를 지향하는 마음을 보다 높은 목표를 지향하는 마음이라고 알고 보다 높은 목표를 지향하지 않는 마음을 보다 높은 목표를 지향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안다. 그는 삼매에 든 마음을 삼매에 든 마음이라고 알고 삼매에 들지 못한 마음을 삼매에 들지 못한 마음이라고 안다. 그는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이라고 알고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해탈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안다.”
4) 숙명통(宿命通:pubbenivasānussati):“그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한다. 예를 들어 ‘1번 태어나고 2번 태어나고 3번 태어나고 4번 태어나고 5번 태어나고 10번 태어나고 20번 태어나고 30번 태어나고 40번 태어나고 50번 태어나고 백번 태어나고 천번 태어나고 십만번 태어나고 세계 파괴의 수많은 겁을 지나고 여러 세계 창조의 겁을 지나고 세계 파괴와 세계 창조의 수많은 겁을 지나면서 당시에 나는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맛보고 이러한 목숨을 지녔다. 내가 그곳에서 죽은 뒤에 나는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기억한다.”
5) 천안통(天眼通:dibbacakkhu):“청정한 인간을 뛰어넘는 하늘 눈으로 뭇삶을 본다. 그는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뭇삶을 본다. 예를 들어 ‘이 뭇삶들은 몸으로 악행을 갖추고 말로 악행을 갖추고 뜻으로 악행을 갖추었다. 그들은 고귀한 분들을 비난하고 잘못된 견해를 갖추고 잘못된 견해에 따른 행동을 갖추었다. 그래서 이들은 육체가 파괴된 뒤 죽어서 괴로운 곳, 나쁜 곳, 즐거움 없는 곳,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 뭇삶들은 몸으로 선행을 갖추고 말로 선행을 갖추고 뜻으로 선행을 갖추었다. 그들은 고귀한 분들을 비난하지 않고 올바른 견해를 지니고 올바른 견해에 따른 행동을 갖추었다. 그래서 이들은 육체가 파괴된 뒤 죽어서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청정해서 인간을 뛰어넘는 하늘 눈으로 뭇삶을 살펴보고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뭇삶들에 관하여 분명히 안다.”
6) 누진통(漏盡通:āsavakkhaya):번뇌가 부수어지고 번뇌없는 마음의 해탈, 지혜의 해탈을 현세에서 스스로 잘 알고 깨달아 성취한다.
여기서 첫 번째 다섯은 수행자의 명상의 부산물과 같은 것으로 세간적인 것이며 해탈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마지막 누진통은 출세간적이고 궁극적인 것이다. 이러한 신통을 얻기 위해 필요한 수행이 바로 네가지 신통의 기초이다. 이것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37조도품 가운데 소속되어 있지만 다른 조도품과 다른 것은 육신통의 성취를 가져온다고 하는 것이다. 네가지 신통의 기초(四神足:cattāro iddhipādā)란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이 ① 의욕에 바탕을 둔 집중과 그 의도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신통의 기초를 닦으며, ② 정진에 바탕을 둔 삼매와 그 의도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신통의 기초를 닦으며, ③ 마음에 바탕을 둔 삼매와 그 의도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신통의 기초를 닦으며, ④ 사유에 바탕을 둔 삼매와 그 의도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신통의 기초를 닦는다.(SN. V. 254)
위의 네가지 신통의 기초에 관하여 한역에서는 각각 ① 욕삼마지근행성취신족(欲三摩地勤行成就神足:chandasamādhipadhānasaṅkhārasamannāgatam iddhipādaṃ), ② 근삼마지근행성취신족(勤三摩地勤行成就神足:viriyasamādhipadhānasaṅkhārasamannāgatam iddhipādaṃ), ③ 심삼마지근행성취신족(心三摩地勤行成就神足:cittasamādhipadhānasaṅkhārasamannāgatam iddhipādaṃ), ④ 관삼마지근행성취신족(觀三摩地勤行成就神足:vīṃaṃsasamādhipadhānasaṅkhārasamannāgatam iddhipādaṃ)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도적인 노력(勤行:padhānasaṅkhāra)은 바로 올바른 노력을 뜻하므로 것이므로 앞에서 언급한 네가지 올바른 노력이나 정진과 관련시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에 대하여 경전은 “누구든지 과거세, 미래세, 현세에서 수행자나 성직자로서 신통의 한 부분를 성취한 자는 그 모두가 네가지 신통의 기초의 한 부분을 닦고 익혔고 닦고 익히고 닦고 익힐 것이다.(SN. V. 257)”라고 기록하고 있고 누구든지 과거세, 미래세, 현세에서 수행자나 성직자로서 위대한 신통, 위대한 능력을 가진 자라면 그 모두가 네가지 신통의 기초의 한 부분을 닦고 익혔고 닦고 익히고 닦고 익힐 것이다.(SN. V. 273)”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네가지 신통의 기초를 닦아 부처님도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이(如來, 阿羅漢, 正等覺者)가 되었다.(SN. V. 257) 붓다고싸는 주석에서 의욕은 ‘하고자 원하는 것(kattukamyatā)’이고 사유는 ‘지혜’라고 설명할 뿐 정진과 마음에 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바른 집중 속에는 탁월한 삼매를 얻기 위한 의욕, 정진, 마음(의식), 사유가 선을 향한 올바른 노력과 더불러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쌍윳따 안에 탑묘(SN. V. 258)라는 흥미로운 경전이 있다. 이 경전은 고따마 붓다가 완전한 열반에 들기 전에 여래로서 아난다가 “세존이시여, 세상에 존경받는 님께서는 한 우주기 동안 머무르십시오, 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한 우주기 동안 머무르십시오.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인간의 이익, 행복, 안락을 위하여 선서께서는 한 우주기 남짓 머무십시오.”라고 간청했다면, 한 우주기 남짓 세상에 더 머물 수도 있었다는 담론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 한 우주기 남짓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은 바로 네가지 신통의 기초를 닦는 것이다. “아난다여, 누구든지 네가지 신통의 기초를 닦고 익히고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아 확립하고 쌓아나가고 잘 성취했다고 하자. 아난다여, 그가 원한다면 한 우주기나 한 우주기 남짓 머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누구든지 네가지 신통을 성취한 자는 수명을 우주기 내에서 자유자재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일겁(劫:kappaṃ)이란 우주기 곧 우주의 성주괴공에 걸리는 엄청난 기간을 암시하지만, 붓다고싸(Srp. III. 251)에 따르면, 단지 ‘목숨이 붙어있는 기간 곧 수명(āyu-kappaṃ)’을 말한다. 곧 ‘특정한 시대에 인간의 완전히 채운 정상적인 수명(tasmin tasmiṃ kāleyaṃ manussānam āyuppamāṇaṃ, taṃ paripuṇṇaṃ karonto)’을 말한다. 한 우주기 남짓’이란 한 우주기를 ‘수명’이라고 해석한다면 네가지 신통의 기초를 성취한 자는 ‘100세나 100세 남짓’ 이 세상에 머물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주석서(Srp. III. 251)에는 마하씨바(Mahāsiva) 장로가 ‘부처님은 현겁(賢劫; bhaddakappaṃ) 동안 머물 것이다’라고 했다는 주장이 동시에 실려 있다. 비구 보디(Cdb. 1940)에 따르면, 니까야에서 결코 우주기가 수명(āyu-kappaṃ)으로 쓰인 적이 없다. 역자는 문맥상 다음 문장의 ‘광대한 징조’라는 말과 일치시키기 위해 그대로 우주기라고 표현한다.
네번째 쌍윳따 「아누룻다」에서는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네가지 새김의 토대에 관하여 아누룻다와 다른 수행승들과의 담론을 기술하고 있는데 [쌍윳따 니까야] 제9권의 쌍윳따 「새김의 토대」와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제9권의 역자해제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 쌍윳따에서 독특한 점은 아누룻다가 여섯가지의 초월적인 지혜 내지는 육신통을 얻은 것은 네가지 신통의 기초를 닦아서라기보다는 네가지 새김의 기초를 닦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SN. V. 303~304) 그리고 이 네가지 새김을 실천하여 아누룻다가 여래의 열가지 힘(如來十力:dasa tathāgatabala)를 성취했음을 기술하고 있다.(SN. V. 304~305):
① 나는 조건을 조건으로 조건이 아닌 것을 조건이 아닌 것으로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ṭhānañ ca ṭhānato aṭṭhānañ ca aṭṭhānato yathābhutaṃ pajānāmi.)
② 나는 과거, 미래, 현재의 업을 받을 때에 조건과 원인별로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atītānāgatapaccuppannānaṃ kammasamādānānaṃ ṭhānaso hetuso vipākaṃ yathābhūtaṃ pajānāmi)
③ 나는 모든 곳으로 인도하는 길에 관해 분명히 안다. (sabbatthagāminīpaṭipadaṃ yathābhūtaṃ pajānāmi)
④ 나는 수많은 요소, 다양한 세계의 세상을 있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anekādhātunānādhātulokam yathābhūtaṃ pajānāmi)
⑤ 나는 뭇삶들이 여러 가지 경향에 관해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sattānaṃ nānādhimuttikataṃ yathābhūtaṃ pajānāmi)
⑥ 나는 다른 뭇삶, 다른 사람들의 능력의 높고 낮음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parasattānaṃ parapuggalānaṃ indriyaparopariyattiṃ yathābhūtaṃ pajānāmi)
⑦ 나는 선정, 해탈, 삼매, 성취에서 잡염되거나 청정해지거나 출정(出定)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jhānavimokkhasamādhisamāpattīnaṃ saṅkilesaṃ vodānaṃ vuṭṭhānaṃ yathābhūtaṃ pajānāmi).
⑧ 나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모습을 기억한다.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āmi)
⑨ 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 눈으로 뭇삶을 살펴보고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뭇삶들에 관하여 분명히 안다. (dibbena cakkhunā visuddhena atikkantamānusakena satte passāmi. cavamāne upapajjamāne hīne paṇīte suvaṇṇe dubbaṇṇe sugate duggate yathākammupage satte pajānāmi)
나는 번뇌가 부수어지고 번뇌없는 마음의 해탈, 지혜의 해탈을 현세에서 스스로 잘 알고 깨달아 성취한다. (āsavānaṃ khayā anāsavam cetovimuttim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āmi)
다섯번째 쌍윳따 「선정」은 첫번째 선정에서 네번째 선정에 이르기 까지의 네가지 선정(四禪定)에 관한 담론을 마치 37가지의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조도품처럼 취급하여 확대한 것이다.
1) 첫번째 선정(初禪:pathamaṃ jhānaṃ):초선은 앞서 언급한 다섯 가지 선정의 요소가 기본적으로 모두 갖추어지면서 성립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은 감각적 욕망을 떠나고 착하지 못한 법(不善法)을 떠나서 사유(尋)과 숙고(伺)를 갖추고 멀리떠남(遠離)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번째 선정(初禪)에 든다.”
첫번째 선정에 의해 집중된 마음은 감각적 욕망이나 착하지 못한 법을 떠나서 사유(尋)과 숙고(伺) 그리고 정신적 장애의 원리(遠離)에 의한 희열과 행복을 수반한다. 그런데 경전의 다른 곳에서는 ‘초선에 도달한 자에게는 언어가 소멸하게 된다(pathamaṁ jhānaṁ samāpannassa vācā niruddhā hoti)’라고 또 다른 과정상의 속성이 부가되어 있으나 그것은 대상 지향적인 감각적 욕망을 떠나는 과정에 수반되는 지칭적 언어표현의 소멸을 뜻한다. 그러나 개념화된 언어로 대상을 이해하는 사유나 숙고는 아직 제거되지 않는다.
2) 두번째 선정(二禪:dutiyaṃ jhānaṃ):두번째 선정의 과정에서는 첫번째 선정이 갖추고 있던 선정의 요소 가운데 사유와 숙고가 다른 요소보다 다듬어지지 않은 존재로서 제거된다.
“사유(尋)과 숙고(伺)를 멈춘 뒤에 내적인 평온, 마음의 통일(心一境性), 무사유(無尋), 무숙고(無伺),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번째 선정(二禪)에 도달한다.”
이선에서는 언어에 기초한 개념적 사유(尋)과 숙고(伺)의 연생을 지멸하고 더욱 깊은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속성으로 하는 삼매에서 생겨나는 더욱 커다란 희열과 행복을 수반한다.
3) 세번째 선정(三禪:tatiyaṃ jhānaṃ):이선에서 마음은 더욱 평정해지고 집중되었지만 희열은 삼선에 와서 집중상태가 깊어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다른 것보다 거칠게 지각되어 제거된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희열이 사라진 뒤에 평정(捨)하고 주의깊고 사려깊고 육체적으로 행복을 느낀다. 바로 고귀한 이들이 ‘평정하고 주의깊어 행복하다’라고 한 세번째 선정(三禪)에 도달한다.”
따라서 세번째의 선정의 과정에서는 다섯 가지 선정의 요소의 과정 가운데 더욱 심화된 행복과 심일경성만이 남는다. 이때에 평정함이 심화되고 마음새김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4) 네번째 선정(四禪:catutthaṃ jhānaṃ):세번째와 네번째의 선정으로 집중이 더욱 진행되면 중성적인 평정의 느낌보다 거칠게 지각되는 육체적인 행복이 제거된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행복을 버리고 고통을 버리고 이전의 희열과 우울이 사라진 뒤에 행복도 없고 고통도 없는 평정하고 주의깊고 청정한 네번째 선정(四禪)에 도달한다.”
여기 세번째와 네번째의 선정에서의 행복의 상태마저 제거되는 순수한 선정의 집중(心一境性) 상태만이 남아 있으며 거기에 마음새김이 수반된다. 그런데 경전의 다른 곳에서는 ‘네번째 선정(四禪)에 도달한 자에게는 입출식(入出息)이 소멸하게 된다(catuttham jhānaṁ samāpannassa assāsapassāsā niruddhā honti)’라고 또 다른 과정상의 속성이 부가되어 있다. 이는 삼선과 사선을 통해 육체적인 행복과 입출식(入出息)이라고 하는 육체적 형성(行)이 소멸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해서 첫번째와 두번째의 선정에서 언어적 형성이 세번째와 네번째의 선정에서 육체적 형성이 소멸된다.
이러한 선정들은 마치 허공에서 부는 바람과 같아 이 선정들을 닦으면 허공에서 부는 모든 깨달음에 이르는 청량한 바람을 몰고 온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허공에는 여러 가지 바람이 분다. 동쪽에서도 바람이 불고, 서쪽에서도 바람이 불고, 북쪽에서도 바람이 불고, 남쪽에서도 바람이 불고, 먼지바람이 불고, 먼지 없는 바람이 불고, 찬 바람이 불고, 더운 바람이 불고, 미풍이 불고 태풍이 분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네가지 선정을 닦고 네가지 선정을 익히면 네가지 새김의 토대를 닦고 원만히 하며, 네가지 올바른 노력을 닦고 원만히 하며, 네가지 신통의 기초를 닦고 원만히 하며, 다섯가지 능력을 닦고 원만히 하며, 다섯가지 힘을 닦고 원만히 하며, 일곱가지 깨달음 고리를 닦고 원만히 하며,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을 닦고 원만히 한다.(SN. V. 309)” 또한 네가지 선정은 한여름에 진흙과 먼지를 씻어 내리는 구름에 비유된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한여름의 마지막 달에 먼지와 진흙이 흩날리면 커다란 구름이 순간적으로 일어나 그것들을 홀연히 사라지게 하고 그치게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네가지 선정을 닦고 네가지 선정을 익히면 이미 일어난 악하고 불건전한 법은 홀연히 사라지게 하고 그치게 한다.(SN. V. 309)”
■제11권
PTS본 5권 ?대품 모음(Mahāvagga)? 가운데 4/4번째에 해당하는 경전의 모음집이다. 이 11권으로서 한글 [쌍윳따 니까야]는 대단의 막을 내린다.
이 한글 쌍윳따 제11권에는 다음과 같은 제54쌍윳따에서 제56쌍윳따의 세 쌍윳따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 제목은 아래와 같다.
「제54쌍윳따 호흡(Ānāpāna-Saṁyutta)」
「제55쌍윳따 흐름에 든 님(Sotāpatti-Saṁyutta)」
「제56쌍윳따 진리(Sacca-Saṁyutta)」
제54쌍윳따는 2품 20개의 경으로, 제55쌍윳따는 7품 74개의 경으로 제56쌍윳따는 11품 131개의 경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책의 첫번째 쌍윳따의 호흡(呼吸, 按搬:ānāpāna)은 빠알리 경전에서 가장 중요한 명상을 다루고 있다. 호흡에 대한 명상을 초기불교에서는 호흡새김(安般念:ānāpānasati)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 위대한 깨달음을 이루기 직전의 밤에 수행한 것이 바로 이 호흡새김이며, 부처님께서 종종 홀로 명상에 잠길 때마다 수행하신 것이 바로 이 호흡새김이다. 경전에 의하면 호흡새김이란 바로 청정한 여래의 삶을 말한다: “거룩한 삶, 청정한 삶을 영위하는 여래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곧 호흡새김에 대하여 집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SN. V. 327)”
이 호흡쌍윳따에는 호흡새김의 단계는 16가지가 경전마다 주어져있다.(SN. V. 311)
1) 길게 숨을 들이 쉴 때는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길게 숨을 내 쉴 때는 나는 길게 숨을 내 쉰다고 분명히 안다. 2) 짧게 숨을 들이 쉴 때는 나는 짧게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짧게 숨을 내 쉴 때는 나는 짧게 숨을 내 쉰다고 분명히 안다. 3) 온 몸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온 몸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4) 몸의 형성을 멈추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몸의 형성을 멈추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5) 희열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6) 행복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7) 마음의 형성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마음의 형성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8) 마음의 형성을 멈추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마음의 형성을 멈추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9) 마음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10) 마음을 희열로 채우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마음을 희열로 채우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11) 마음을 집중시키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마음을 집중시키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12) 마음을 해탈시키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마음을 해탈시키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13) 무상함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무상함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14) 사라짐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사라짐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15) 소멸함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사라짐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16) 보내버림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배우고 보내버림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 쉰다고 배운다.
위의 열여섯 가지는 호흡의 순차적인 단계라기 보다는 호흡명상의 어떤 국면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의 네가지는 「새김의 토대」 쌍윳따에서 몸에 대한 새김을 설명하면서 이미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하는 16가지는 몸(身)에 대한 관찰뿐만 아니라 감수(受), 마음(心), 사물(法)의 원리와 관계된 것들이다.(SN. V. 323) 여기서 필자는 법을 ‘사물(事物)’이라고 했는데, 이 때에는 ‘조건(條件)에 의해서 일어나는 사건(事件)’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사용한 사물이란 광의의 의미로 곧 유위법(有爲法) 전체를 지시한다. 비구 보디(Cdb. 1777)는 ‘현상(phenomena)’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렇게 되면 불교를 단순히 현상론으로 해석할 소지가 많으므로 이 말은 피했다. 야후 국어사전에 보면 사물이란 ‘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일체의 물체와 현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물의 개념은 현상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등불이라는 경(SN. V. 316)에 따르면, 아홉가지의 선정에 들기 위해서는 이 호흡새김에 대한 집중에 몰입해야한다고 기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호흡새김을 익히면 모든 감수에서의 해탈과 심지어 “수행승이 육신의 한계에 도달한 감수를 느끼면 육신의 한계에 도달한 감수를 느낀다고 분명히 알며, 그가 목숨의 한계에 도달한 감수를 느끼면 목숨의 한계에 도달한 감수를 느낀다고 분명히 알며, 육신이 파괴된 후에 목숨이 다해서 이 세상의 모든 감수가 향유를 잃고 냉정해졌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베쌀리라는 경(SN. V. 83)은 흥미로운 기사를 기록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몸의 더러움을 관찰하는 부정관(不淨觀)을 수행하던 많은 수행승들이 부처님이 보름동안 홀로 명상에 든 사이에 자신의 몸을 수치스럽고 혐오스럽게 생각하여 자결했다. 그래서 이 소식을 나중에 알게된 부처님은 수행승들에게 부정관을 중지시키고 호흡새김에 대한 집중을 닦고 익힐 것을 권했다.
그리고 아난다(SN. V. 328)라는 경에서는 호흡새김에 집중하면 네가지 새김의 기초를 원만히 하게 되고 다시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완성시키고 명지와 해탈을 이루게 한다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두 번째의 「흐름에 든 님」 쌍윳따는 한역에서 예류자(豫流者:sotāpanna)라고 하는 ‘진리의 흐름에 든 이’에 관하여 다루고 있는 경전의 모음집이다. 흐름은 곧 여덟가지의 성스러운 길을 말하고 흐름에 든 이란 이 여덟가지의 성스러운 길을 갖추는 자를 말한다.
싸리뿟따여, 흐름, 흐름이라고 하는데 싸리뿟따여, 흐름이란 어떠한 것인가? 세존이시여, 그것은 바로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입니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입니다. 싸리뿟따여, 흐름에 든 이, 흐름에 든 이라고 하는데 싸리뿟따여, 흐름에 든 이란 어떠한 사람인가? 세존이시여, 이러한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을 갖추면 그 사람을 흐름에 든 이라고 부릅니다.(SN. V. 347)”
그리고 네가지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cattāri sotāpattiyaṅgāni)는 정확히 번역하자면 ‘네가지 흐름에 듬(豫流)의 요소’라는 듯이 되겠지만 표현을 보다 매끄럽게 하기 위해 그렇게 번역한 것이다. 이 경지에는 불법승 삼보에 대한 귀의와 청정한 계행의 준수라는 네가지 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네가지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이 재가신자의 삶의 목표를 달성하게 하는 길로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벨루드와라의 사람들’ 이라는 경(SN. V. 352)에서 바라문 장자들의 세속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세존이신 고따마여, 저희들에게 이와 같은 욕망이 있고 이와 같은 의도가 있고 이와 같은 소망이 있으니 저희들은 어린아이들로 북적이는 집에서 살고 싶고, 까씨의 전단향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화환과 향과 크림으로 치장하고 싶고, 금과 은을 향유하고 싶습니다.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나고 싶습니다. 세존이신 고따마여, 저희들은 이와 같은 욕망이 있고 이와 같은 의도가 있고 이와 같은 소망이 있으니 저희들은 어린아이들로 북적이는 집에서 살고 싶고, 까씨의 전단향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화환과 향과 크림으로 치장하고 싶고, 금과 은을 향유하고 싶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나고 싶은데 가르침을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물었을 때에 부처님은 불살생 등의 일곱가지의 법과 네가지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을 실천할 것을 가르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특히 이 네가지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은 ‘법의 거울(法鏡:dhammādāso, SN. V. 357)’이라고 불린다. 또한 ‘성스러운 계율 속에서 싫어하여 떠남이나 사라짐이나 소멸이나 적멸이나 완전한 지혜나 올바른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상승의 길(昇道:udayagāminī paṭipadā, SN. V. 361)’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 네가지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들을 성취하게 되면 “모든 나쁜 운명, 타락한 운명의 두려움을 뛰어넘어(SN. V. 364)”, “이 세상의 어떠한 뭇삶이라도 몸이 파괴되고 죽은 후에 하늘 나라에 태어난다.(SN. V. 18)” 그리고 네가지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들은 “공덕을 넘치게하고 선행을 넘치게 하고 지복의 자양분이 되게 하는 것(SN. V. 391)”이며 “청정하지 못한 뭇삶들을 청정하게 하고, 순결하지 못한 뭇삶들을 순결하게 한다.(SN. V. 392)”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경전이 있다면, ‘싸라까니’라는 경(SN. V. 375)이 있다. 그는 술을 좋아했음에도 부처님으로부터 흐름에 든 이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술을 좋아하는 싸라까니에게 수기를 주었다고 불평하자 마하나마 존자가 대신해서 부처님께 그 이유를 묻자 부처님은 “마하나마여, 만약 오랜 세월 재가의 신자가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가르침에 귀의하고 승가에 귀의했다고 올바로 말할 수 있다면 싹까족의 싸라까니를 두고 올바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하나마여, 오랜 세월 싹까족의 싸라까니가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가르침에 귀의하고 승가에 귀의했는데 어떻게 타락한 곳으로 갈 수 있겠는가?”로 반문하고 부처님은 “마하나마여, 이 커다란 쌀라 나무가 잘 설해진 것과 잘못 설해진 것을 알 수 있다면 나는 이 커다란 쌀라 나무도 진리의 흐름에 들어 타락하지 않고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고 수기를 줄 것이다.”라고 단호히 선언한다. 싸라까니는 죽는 순간에 공부를 해 마쳐 흐름에 든 이가 되었다.
그러나 네가지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 가운데 계행 대신에 다음과 같이 “또한 마음 속에 인색의 때를 제거하여 시여를 베풀고 손을 정화하여 보내버림을 기뻐하고 구걸에 응하여 보시하고 나누는 것을 좋아하며 집에서 산다.”라는 보시라는 덕목이 들어가 있는 두 개의 경전이 있다.(SN. V. 348, 396) 그리고 동일하게 위의 보시를 포함한 네가지가 곧 “공덕을 넘치게 하고 선행을 넘치게 하고 지복의 자양분이 되는 네가지”라고 규정한 두 개의 경전(SN. V. 392, 401)이 별도로 존재한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것으로 네 번째의 계행은 보시에 의해서도 때로는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네 번째의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은 “생성과 소멸에 대한 지혜(SN. V. 392, 401)”가 대체되는 경우도 있다.
위의 네가지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은 물론 거룩한 제자의 궁극적 목표는 아니며 단지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시작단계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은 “모든 번뇌를 부수는데 도움이 된다.(SN. V. 396)”라고 하고 그 법들을 닦으면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기울고 열반으로 임한다.(SN. V. 371)”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 밖에 어떤 경전은 “네가지 법을 갖추면 신들이 기뻐하여 자신들과 동류가 되었다고 말한다.(SN. V. 394)”라고 쓰고 있고 때로는 “재가신자가 병이 들어 죽음이 임박했을 때에 그를 위로하는 네가지의 안정법(catuhi assāsaniyehi dhammehi; SN. V. 408)”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네가지 법들은 “여섯가지 종류의 명지의 법을 닦기 위한 전제조건(SN. V. 345)”에 불과하다. 이 때에 여섯가지의 궁극적인 지혜는 다음과 같다: “① 모든 형성된 것에 대하여 무상하다고 관찰하여야 하며, ② 무상한 것에 대하여 괴로움을 지각하고, ③ 괴로운 것에 대하여 실체가 없음을 지각하고, ④ 버림을 지각하고 ⑤ 사라짐을 지각하고 ⑥ 소멸을 지각하는 것”
특히 지금까지의 정의와는 완전히 다른 네가지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① 참사람과 사귀는 것, ② 올바른 법을 배우는 것, ③ 이치에 맞게 숙고하는 것, ④ 진리를 법답게 실천하는 것(SN. V. 347, SN. 410-413)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흐름에 든 경지의 특징이라기 보다는 모든 네가지 경지(四果)와 13가지 지혜의 성취에 도움을 주는 특징이기도 하다.
마지막의 「진리」 쌍윳따는 네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것 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 법문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그래서 이 진리의 쌍윳따가 모든 [쌍윳따 니까야]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다. 네가지 거룩한 진리는 부처님께서 바라나시에서 처음 설한 법문으로 전법륜경(Dhammacakkapavattana Sutta)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경전은 많은 유사한 모음가운데 나타나는데 여래의 말씀이라는 경(SN. V. 420)에 그 원형적인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이 경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할 때에 “이와 같이 그 찰나, 그 순간, 그 잠깐 사이에 범천계에 까지 소리가 미쳤다. 또한 이 일만 세계가 움직이더니 흔들이고 크게 진동했다.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부처님이 가르친 네가지 거룩한 진리가 공시적으로 전 우주에 걸쳐 보편적인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경에서는 그것이 단지 고따마 부처님 당시에 알려진 역사적인 진리가 아니라 통시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진리(SN. V. 415)임을 기술하고 있다. 궁국적으로 고따마 부처님이 부처님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까닭이다: ‘이러한 네가지 거룩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르고 원만하게 깨닫는 까닭에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바르고 원만히 깨달은 님(如來, 應供, 正等覺)이라고 불린다.(SN. V. 433)’
이 네가지 거룩한 진리는 여래의 말씀이라는 경(SN. V. 420)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苦聖諦:dukkha-ariyasacca):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자면 다섯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이것과는 다른 정의도 있다. “그것은 여섯가지 내부적 감역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섯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시각감역, 청각감역, 후각감역, 미각감역, 촉각감역, 정신감역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고 말한다.
2)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苦集聖諦:dukkha-samudaya-ariyasacca):“그것은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 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인데 그것은 곧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3)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苦滅聖諦:dukkha-nirodha-ariyasacca):“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리면 집착없이 해탈하는 것이다.”
4)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苦滅道聖諦:dukkha-nirodha-gāminīpaṭipadā-ariyasacca):“그것은 바로 여덟가지 성스러운 길이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네가지 거룩한 진리가 거룩한 이유는 ‘여실한 것이고 허망하지 않은 것이고 다르지 않은 것이다.(SN. V. 433)’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실한 것(tatthāni)은 진리의 객관성을 말하고 허망하지 않은 것(avitatthāni)은 진리의 필연성을 말하고 다르지 않은 것(anaññathāni)은 진리의 항상성을 말한다. 이러한 원리는 연기법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역자의 연구에 의하면 위의 원리는 괴로움(苦:dukkha)을 조건지워진 모든 것의 괴로움(行苦)으로 확대했을 때에 다음과 같은 진리가 될 수 있다: ① 연성제(緣聖諦:paccaya-ariyasacca):조건의 거룩한 진리 ② 연집성제(緣集聖諦:paccaya-samudaya-ariyasacca):조건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 ③ 연멸성제(緣滅聖諦:paccaya-nirodha-ariyasacca):조건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④ 연멸도성제(緣滅道聖諦:paccaya-nirodha-gāminīpaṭipadā-ariyasacca):조건의 소멸에 이르는 거룩한 진리.
이러한 네가지 거룩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누구나 오랜 세월을 유전 윤회한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어 보지 못하면 나나 그대들이나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한다.(SN. V. 431)” 뿐만아니라 수행자나 성직자라고 인정할 수도 없다: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생성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면,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들 수행자나 성직자들을 수행자 가운데 수행자나 성직자 가운데 성직자라고 인정하지 않는다.(SN. V. 432)” 또한 진리를 보지 못하면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게 된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막대기를 공중에 던지면 한번은 밑 둥지로 떨어지고 한번은 가운데로 떨어지고 한번은 꼭대기로 떨어진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무명에 뒤덮이고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는 뭇삶들은 한번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고 한번은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온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수행승들이여, 그들은 네가지 거룩한 진리를 보지 못한 까닭이다.(SN. V. 439)” 왜냐하면, 결국 무명이란 네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한 무지를 뜻하기 때문이다: “수행승이여, 괴로움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무지가 있는데 수행승이여, 이러한 것을 무명이라고 하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무명에 빠진다.(SN. V. 429)” 반대로 네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아는 것을 명지(明智)라고 한다: “수행승이여, 괴로움에 대하여 아는 것, 괴로움의 발생에 대하여 아는 것,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아는 것,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아는 것이 있는데 수행승이여, 이러한 것을 명지이라고 하고 이런 방식으로 명지에 도달한다.(SN. V. 429)” 그리고 이러한 명지는 오로지 부처님의 출현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 올바로 깨달은 이가 출현하는 한, 커다란 빛, 커다란 광명이 세상에 나타나며 눈먼 어둠이나 칠흑같은 암흑은 사라지므로, 그만큼 사람들은 네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설명하고, 시설하고, 확립하고, 열어 보이고, 분별하고, 명료하게 가르친다.(SN. V. 442)”
그리고 저 유명한 씽싸빠숲(Siṁsapavana)의 비유에 관한 경(SN. V. 437)이 있는데 그 비유는 바로 이 네가지 거룩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부처님께서 설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손으로 집어든 적은 양의 씽싸빠 나뭇잎과 저 위의 씽싸빠 숲에 있는 나뭇잎과 비교하면 어느 것이 더욱 많겠는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손으로 집어든 적은 양의 씽싸빠 나뭇잎보다 저위의 씽싸빠 숲에 있는 나뭇잎이 훨씬 많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내가 알고 나서 그대들에게 설한 것은 매우 적고 설하지 않은 것이 훨씬 많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부처님이 가르친 적은 양의 가르침은 모두 바로 네가지 거룩한 진리 안에 포함된다. 그 거룩한 진리는 “바른 이치에 맞고, 청정한 삶을 시작하는데 맞고, 싫어하여 떠나기 위한 것이고, 사라지기 위한 것이고, 소멸하기 위한 것이고, 그치기 위한 것이고, 잘 알기 위한 것이고, 올바로 깨닫기 위한 것이고, 열반에 드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SN. V. 438)”
그러나 이 네가지 거룩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꿰뚫는 것은 “멀리서 활쏘기를 하는데 아주 작은 열쇄구멍으로 화살을 재빠르게 갈아 끼우면서 놓치지 않고 화살을 쏘는 것과 한 개의 터럭을 백개로 쪼개서 그 끝에서 끝을 꿰뚫는 것(SN. V. 453)”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수행승들은 이 네가지 거룩한 진리를 알기 위해 “터어반이나 머리가 불붙었다면 터어반이나 머리의 불을 끄듯이(SN. V. 440)” 커다란 의욕과 노력을 기우려야한다.
위의 네가지 거룩한 진리는 세번 굴린 열두 갈래의 형태(三轉十二行相: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로서 우리에게 인식된다(SN. V. 422: ① 시전(示轉):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는 진리에 대한 네가지 지식(saccañāṇa)이라고 한다. ② 권전(勸轉):괴로움은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발생은 제거되야한다, 괴로움의 소멸은 깨달아져야한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닦여져야한다라는 진리에 대한 수행을 권하는 것으로 해야할 일에 대한 지식(kiccañāṇa)이라고 한다. ③ 증전(證轉):괴로움은 스스로 알았다, 괴로움의 발생은 제거되었다, 괴로움의 소멸은 깨달아졌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닦여졌다라는 진리에 대한 증거하는 것으로 한 일에 대한 지식(katañāṇa)이라고 한다. 고따마 부처님 뿐만아니라 과거세의 모든 부처님도 이러한 세번 굴린 열두가지 형태를 있는 그대로 알고 또한 보아서 아주 청정하여진 까닭으로 신과 악마와 범천들의 세계에서, 그리고 수행자와 성직자와 하늘사람과 인간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깨달았다.
그밖에 네가지 거룩한 진리와 관련하여 수많은 비유들이 등장한다:「절벽의 품」은 절벽의 공포(SN. V. 448)를 바라보면서 네가지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이 절벽의 두려움보다 무서운 것이라는 법문이 전개된다.
재미있는 경전은 “네가지 군대가 연꽃 뿌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SN. V. 446)”을 보고는 헛 것을 보았다고 생각하여 미쳐버린 사람의 이야기가 있는데 부처님은 그것이 헛것이 아니라 사실을 본 것임을 밝히고 세상사에 너무 골똘함을 경계하고 네가지 거룩한 진리를 명상할 것을 권하고 있다.
「현관의 품」은 네가지 진리를 현관(現觀)하는 것의 어려움과 지리를 현관한 자의 희소성에 대한 많은 비유(SN. V. 456)- 이를테면 구멍 뚫린 나무조각과 거북이의 비유 - 가 있다.
「수레바퀴의 확대품」과 「몇몇 절제의 품」, 「날곡식의 확대품」에는 사제의 진리를 알아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의 ‘희소성에 대한 비유(SN. V. 467)등 주로 계행과 관련된 다양한 비유들이 전개되고 있다. 그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종자와 초목에 관련한 환경친화적인 교훈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종자와 초목의 훼손을 삼가는 뭇삶은 매우 적고 종자와 초목의 훼손을 삼가지 않는 뭇삶들은 매우 많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수행승들이여, 네가지 거룩한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쌍윳따니까야의 번역상의 문제점과 고쳐읽기
아마도 이 책은 역사적으로 현대의 일상어로 번역한 최초의 우리말 경전이다. 한문 용어에 익숙한 불자들에게는 다소간 생소할지 모르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필자는 번역을 강행해나갔다. 그 결과 예상했던 대로 중생, 탐진치나 오온 등의 불교한문 용어에 익숙한 세대는 이 번역에 대하여 약간의 저항감을 표명한데 비해 현대적인 교육이나 철학적인 수업을 받고 이제 불교에 입문하려는 한글세대는 오히려 기존의 불경이나 입문서 보다도 읽기에 편하다고 이 번역을 선호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너무 일상용어로 번역하다보니 내용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많은 문제에 당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번역을 하면서 필자가 가장 곤혹스러워 했던 것은 법(法:Dhamma)이라는 용어였다. 가이거도 빠알리 불교를 이해하는데 가장 큰 난관이 이 법이라는 단어라고 고백하고 있다. 법이라는 용어는 전혀 오늘날 법학에서 쓰는 법이나 법률이라는 의미와는 상당히 다른 의미로 쓰이므로 일상용어로서 법이라는 번역을 택할 경우 현대의 독자들에게 난해한 감을 주기가 십상이다. 불교에서 법은 철학적으로 그 핵심에 놓여있는 단어일 뿐만아니라 가장 광범위한 외연을 가지고 있고 이해하기 힘든 말 가운데 하나이다. 일찍이 붓다고싸는 법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다음과 같이 다섯가지로 내린 바가 있다.
① guṇa:본질, 능력, 덕성
② desanā:가르침, 법문
③ hetu:원인
④ pariyatti:성전
⑤ nissatta(=nijjīva):사물, 사건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법이라는 말은 ‘견고하게 서있는 것, 법칙’을 뜻한다. 자연의 법칙이나 인과의 법칙, 나가서 국가에서 제정한 통치법률, 규율, 계율을 뜻한다. 또한 붓다가 설한 세계의 생성과 소멸의 법칙을 뜻하므로 가르침, 교리를 의미한다. 붓다의 가르침이 진리라는 의미에서 진리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최고의 진리라는 뜻에서 열반을 의미하기도 한다. 역자는 법을 일상어로 번역함에서 주로 문맥에 따라 이러한 다양한 의미를 원용하였다.
그러나 이 단어의 의미가 사물에까지 이르면 원래의 뜻과는 동떨어진 느낌을 주고 어떻게 보면 원래의 의미와는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사물 속에서 생성과 소멸의 인과적인 법칙이 개현된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법을 사물로 해석하는 것은 그다지 모순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식론적인 입장에서 정신(意:manas)의 대상이 되는 것(法)은 경험적인 사물이다. 역자는 이럴 경우에 현상이라는 말 대신에 사물이라는 단어를 번역에 사용했다. 그 이유는 단지 불교가 현상론만은 아니라는데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정신의 대상을 현상이라고 할 것인가 사물이라고 할 것인가를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사물이라고 결정을 해버렸으나 현상이라고 번역했더라면 법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던 모순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지 않나 반성 해보기도 한다.
내적인 경험적 사물에는 성격이나 능력이나 상태와 같은 정신현상이 포함된다. 그러나 외적인 경험적 사물은 일상적인 사물을 의미한다. 야후 국어 사전에서는 사물을 ‘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일체의 물체와 현상’을 의미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정신의 대상이 가르침 또는 가르침이 실제로 구현된 정신적인 상태를 지시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데 그것을 사물로 번역한다면 커다란 오해를 나을 수 있다. 그럴 때에는 독자들은 사물을 현상으로 고쳐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물이라는 단어보다는 사실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현상이라고 하면 세계를 순전히 주관적으로 환원시켜 인과법칙을 무시하게 되는 모순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다음으로 역자가 번역하는 데 망설였던 것은 행(行:saṃkhārā)을 어떻게 일상어로 번역하느냐의 문제였다. 한문 용어인 행과 연관시킨다면 행위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예를 들어 신행(身行은 신체적인 행위, 구행(口行)은 언어적 행위, 의행(意行)은 정신적 행위라고 하면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많은 학자들은 행을 의도라고 번역하는데 그 번역은 행의 하위개념으로 경전에서 사용되는 다른 용어(sañcetanā)와 충돌을 일으키고 신체적 행위를 신체적 의도라고 번역한다면 어딘가 어색한 감을 준다. 그러나 문제는 그 원어인 쌍카라(saṃkhārā)라는 말은 법이라는 용어 다음으로 가장 외연이 넓은 의미를 지닌다는데 있다. 이 쌍카라는 ‘결합, 구성, 형성’이라는 뜻을 지녔다. 불교철학적으로는 제행무상(諸行無常:sabbe saṃkhārā aniccā)이라는 문맥에서 모든 조건지워진 것을 가르킬 때에도 이 용어를 사용한다. 그럴 때에 ‘모든 조건지워진 것’을 행위라고 번역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역자는 결합이나 구성보다는 신체적 형성, 언어적 형성, 정신적 형성이라고 적용했을 때에 잘 어울리는 형성이라는 번역을 택했다.
그 다음으로 역자가 번역하면서 중간에 달리 번역한 단어는 오취온(五取蘊:pañca upādānakkhandhā)이라는 단어에 대한 것이다. 처음에는 ?쌍윳따 니까야? 1권~9권에 걸쳐서 ‘다섯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이라고 번역했다가 10권, 11권에서는 ‘다섯가지 존재의 취착다발’이라고 바꾸어 번역했다. 한역에서 온(蘊:khandhā)이라고 하는 것은 ‘덩어리, 어깨, 줄기’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한글 대장경에서는 ‘쌓임’이라고 번역했으나 이것은 원어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원어인 칸다는 ‘어깨에 근육의 다발’이나 ‘나무 줄기와 가지가 서로 얽혀진 다발’을 뜻한다. 따라서 온을 역자는 ‘존재의 다발’이라고 번역하고 예를들어 행온(行蘊)은 ‘형성의 다발’이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취(取蘊:upādāna)라는 말을 번역하는데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여기서 취는 집착 또는 취착의 의미로 취착된 것(upādiṇṇa)을 의미한다. 특히 취착된 것이라는 것은 경전에 의하면 ‘이것은 나의 것이다. 내가 이것이다.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etaṁ mama, eso'ham asmi, m'e so attā)’라는 자아의식이 개입된 것이란 뜻이다. 그래서 역자는 처음에 오취온을 ‘다섯가지 취착된 존재의 다발’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다섯가지 취착하는 존재의 다발’이라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번 ‘취착된 존재의 다발’들은 다른 존재의 다발을 취착하기도 함으로 ‘취착하는 존재의 다발’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래서 필자는 번역을 아예 오취온의 경우 ‘다섯가지 존재의 취착다발’이라고 바꾸기로 했다. 예를 들어 행온은 ‘형성의 취착다발’이라고 바꾸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연구실에서 전 재 성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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