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잘 가 / 최미숙
한낮 더위가 사람을 지치게 하더니 아침 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도로에 차가 많아진 걸 보니 명절이긴 한가 보다. 남편 친구 부부와 점심을 먹고 있는데 손위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요양병원에 있는 큰언니가 위독해 마지막이 될지 모르니 얼굴이라도 보라고 연락이 왔다며 혼자 다녀오겠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위독하다는데, 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코로나 검사를 하고 결과가 나와야 면회가 된다고 했다. 30분을 기다리고 나서야 비로소 머리부터 발끝까지 중무장을 하고 병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한쪽에 방치되어 산소 호흡기를 꽂고 있는 언니는 힘겹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입을 벌리고 혀는 목 안으로 말려 들어가 있었다. 가까이 가서 손을 잡으며 부르니 고개를 돌려 한참을 쳐다 본다. 이미 손과 발은 얼음장이다.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어 보였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수간호사는 폐렴이 심해 항생제를 쓰고 있고 열은 없다고 했다. 규칙상 면회는 오래 할 수 없으니 5분만 더 시간을 준다면서 재촉한다. 쫓기듯 병실을 나오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힘들게 숨을 이어가는 언니를 혼자 두고 가버리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다른 병원(성가롤로, 순천의료원)으로 옮겨 치료라도 받게 하고 싶다고 수간호사에게 도와달라고 사정을 했다. 여러 곳을 알아봤는데 받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코로나 시국이라 병원 옮기는 것도 쉽지 않았다. 환자를 데리고 병원 찾아 돌아다니다 결국 차에서 죽었다는 뉴스가 남 일이 아니었다. 하필 추석 연휴라 의사도 없고 모든 조건이 최악이었다.
큰언니는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다. 6남매 큰딸로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듯 공부도 잘하고 동네에 소문이 자자할 만큼 뛰어났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 갑상선 비대증이란 병으로 서서히 아프기 시작하더니 우울증, 폐병 등 한순간도 병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예순여섯이 된 지금까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어렵게 생명을 이어오고 있었다. 병원을 집처럼 드나들며 살았다. 그래서 가족이 없다. 엄마가 건강할 때는 간호를 했는데 3년 전 얻은 암으로 투병을 하고 있어 가까이 사는 언니와 내가 두 사람을 돌보고 있다. 그나마 기초수급자로 등록되어 경제적인 부담은 덜 수 있었다.
다행히 성가롤로 병원에서 받아 준다고 해 앰블런스로 이동했다. 응급실 앞에서 기다리니 간호사가 이것저것 물어보며 열을 재더니 높다고 한다. 폐렴인데 열이 없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요양병원 간호사가 우기니 그런가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한 번도 재지 않고 손발이 차니 없다고 했던 거였다. 간호사 선생님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몇 번을 확인한다. 해열제와 항생제만 제때 처방했어도 저렇게까지 위독하지는 않았을 텐데 방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인 격리실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했다. 간호할 사람이 없어 둘이 꼼짝없이 매여있어야 할 판이다. 명절이라 시댁에 가서 일도 해야 하고, 언니도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오는데,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사경을 헤매는 사람 앞에서 나는 현실적인 걱정을 하고 있으니 마음이 더 복잡해진다.
교대하고 돌아오며 큰언니의 인생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온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다닐 때 언니가 다니던 순천여고 상담실에 여러 번 찾아갔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변해가는 얼굴을 볼 때마다 세일러복과 하얀 여름 교복을 입고 상담실에서 선생님, 친구들과 둘러앉아 웃고 있는 정갈했던 모습이 생각나 한숨짓게 한다. 아직 어린 내게 대학 이야기를 해 주면서 광주로 예비고사 보러 간다고 준비하던 꿈 많던 언니였는데 병원만 전전하다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해 내가 믿는 하나님을 붙잡고 어떻게 저런 삶을 줬냐고 따지고 싶었다. 아니 그동안 기도할 때마다 많이 따졌다. 기도교인이지만 언니가 살아온 것을 보며 사람에게는 가지고 태어난 팔자가 있고, 환경이 생각까지 지배하게 된다고 믿게 되었다.
아침에 병원에 있는 손위 언니에게 전화하니 다행히 호흡은 안정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 잠깐 짧은 대화를 하며 엄마를 찾는 것을 끝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불안한 사흘을 보내고 수요일 아침 마지막 임종이라도 지켜라며 빨리 병원으로 오라고 한다.
병실에 들어서서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큰언니 손을 잡고 나는 마음을 다해 기도했다. ‘좋은 곳으로 가서 건강한 몸으로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도 마음껏 하고,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게 살아. 그리고 다음 생에는 복이 가득한 인생 가지고 태어나’라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66년의 인생에서 벅차게 기뻤던 적이 있었는지, 죽을 고비를 그렇게 많이 넘겼으면 행복한 생활 한 번이라도 하고 가지 그랬으면 이렇게 마음 아프지는 않을 텐데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언니는 더 이상 눈을 뜨지 못하고 옷 한 벌과 컵, 화장지, 수건, 칫솔 1개가 들어 있는 종이가방 하나만을 남긴 채 그렇게 떠났다.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가슴을 칠 만큼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내 능력으로 어떤 것도 할 수 없어 더 절망스러웠다.
투병 중인 엄마에게는 비밀로 하고 1일장으로, 화장해서 추모공원에 모셨다. 이런 일이 생기면 다들 그동안 못했던 것을 후회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언니의 외로움을 한 번이라도 돌아봤는지 무심했던 나를 반성한다. 순간순간 마음이 변하기도 하고 힘들어 짜증날 때도 있겠지만 가족과 주변 사람에게 잘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언니 잘 가. 다음에 웃는 얼굴로 만나 어릴 적 이야기 많이 하자. 그곳에서는 편안했으면 좋겠어.
첫댓글 글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타고난 자기 복이 있는가 봐요. 그래도 그렇지 참 짠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가족은 어떤 마음이 들지 공감이 갑니다.
읽는 내내 마음이 아려오네요. 그래도 이렇게 따스한 정으로 돌봐 준 동생들이 있어서 아프신 중에도 힘을 내셨을 듯합니다.
선생님, 너무 아프고 슬픈 추석을 보내셨네요. 옆에 계시면 제가 손이라도 한번 잡아드리고 싶어요. 그동안 더 잘해 주지 못해 아프고, 볼 수 없어서 슬프지만, 이제 아픔도 슬픔도 없는 편안한 곳에 계실 언니를 생각하시고 편해지시면 좋겠어요. 언니가 좋은 글감 선물하고 가셨네요. 눈물로 쓰셨을 글, 가슴 아파하며 잘 읽었습니다.
마음 아픈 글 이네요. 좋은곳으로 가시길 기도 합니다. 힘 네세요.
그나마 마지막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었네요. 아픈 마음 잘 추스리세요.
선배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또 모르고 있었네요.
당시 순천여고를 다녔으면 정말 똑똑한 분이셨을 터인데....안타깝네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이 실감나네요.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이 동기간 덕분에 그리 외롭지만은 않았네요.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언니가 부디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빌어 봅니다.
피를 나눈 자매가 행복한 삶을 살다 갔어도 가슴 아팠을텐데, 동기간의 마음이 얼마나 애잔하셨을까요?
분명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겁니다. 선생님께서 행복하게 잘 지내시는 모습 하늘에서 보고 계실거예요.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