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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답변과 논의된 내용을 정리한 후기입니다. 사실과 다른 내용이나 이견이 있으면 다음 세미나에서 말씀해주세요.
1.폭력의 문제
소련에 대한 반감, 반공주의, 반소주의에 대한 핵심이 숙청에 대한 두려움이다. 페터바이스만 해도 공산주의 싫어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당 고위층에 있으면서도 언제라도 숙청당할 수 있는 두려움, 계속 줄타기 하는 모습 그려낸다. 파시즘 쪽에서 들어오는 공격보다 더 무서워한다. 당에서 제거될 것에 대한 두려움. 동지애로 뭉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 그래서 운동이 살아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있다. 가차 없이 제거해 버리는 오류. 브레히트가 소련에 갔을 때 거리에서 여자 친구가 공개 처형되는 모습을 보고 미국으로 갔다. 루카치는 레닌주의자인데 루카치도 끌려가서 신문을 받는다. 조건이 맞아서 살아나긴 했지만 자유로운 사람이 없었다. 왼팔 부하린, 오른팔 지노비예프 잘려나갔다. 스탈린은 오류가 없느냐. 오류를 덮기 위해서 제거하는 측면도 있다.
소련 자체는 그 당시 내전에서 서로 죽이는 상황이었고 그대로 연결되어서 파시즘으로 나왔고 제국주의 계속 포위해서 공격하고 레닌시대만 해도 독일이나 다른 데서 성공 못하면 소비에트 얼마 못 가는 상황이었다. 앞으로 뭔가를 바꾸려고 할 때 적대세력을 상대로 할 때 적을 죽일거냐. 그래서 되겠냐는 문제다. 물리적 관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죽이는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죽이자고 하면 안 되지 않느냐. 폭력의 의미를 어디까지 해석해야 하느냐. 법적인 폭력, 여론적인 폭력을 뒤집어야 하는데, 그 자체가 폭력일 수 있다. 거기서 어디까지 더 나갈 수 있느냐. 사형제 폐지, 사람을 죽이는 단계까지 가야하느냐. 숙청, 소환을 할 경우 재교육 문제에 머물러야 하느냐.
힘을 갖기 위해서는 대중을 끌어들여야 하는데, 운동의 기본생리가 사람을 죽이는데 까지 간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느냐. 내전 상황에서 안 죽이면서 헤게모니적으로 동의하게 하면서 끌어들일 수 있느냐. 절박한 상황이 되면 죽일 수밖에 없는가라는 문제가 있다.
맑스주의 윤리학 문제일 수 있다. 윤리 관점에서 계급의 적은 공존하기 힘들다. 타도의 성격이 사회적인 죽음, 명예라든지, 지위라든지 권력을 박탈하는 것으로 끝나느냐. 죽임으로 가느냐. 죽으면 끝이라고 보면 거기까지 가야하느냐.
평화적인 시기의 운동과 내가 살려면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의 판단과는 전혀 다르다.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권력을 소유한 경우 권력을 이용해서 사람을 죽였을 때의 문제는 달라지겠다. 내전으로 전화되고 내부의 적대세력과 계급투쟁 상황에서의 판단의 문제가 있다. 전시 상황내지 노동자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경우가 발생한다.
조직의 문제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무장투쟁도 준비해야하겠지만. 조직을 탄탄하게 만드는 부분이 필요한 것 아닌가. 조직의 윤리가 어떠해야 하는가. 전쟁 때 여성을 성폭행하지 말고, 민간인 죽이지 마라는 윤리가 있다. 내부의 배신자, 첩자, 실제로 제거해야 하는데 축출하고 마느냐. 죽여야 되느냐. 상황에 따라 다르다.
조직 내에서 여러 분파 활동이 이루어질 때 분파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상대편을 정적으로 여기는 자세들이 내부 민주주의로 차이를 인정해주면서 갈 수 있는 조직 분위기가 되느냐. 자기 분파가 철저하게 주도권을 잡고 가기위해서 반대파를 제거하는 적의 앞잡이라고 볼 수 없음에도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제거를 하는 것이 문제다.
형식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조직이 막강하고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한 상황에서는 그렇게 쪼잔하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 강력한 힘을 가진 세력이 국가권력을 장악해서 대중들의 지지를 압도적으로 받는다면 굳이 사람들 제거하고 그럴 필요가 없다. 흡수해버리면 된다.
막강한 힘이 있으면 작은 문제들은 끌어안을 것 같은데 오히려 막강한 힘이 있기 때문에 더 막강한 힘을 이용해서 더 억압하는 측면이 있다. 민중들의 힘을 자기들에게 결집시키기 위해서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마타도어, 편집증이 생긴다. 실제 현실적인 힘이 될 징후만 보여도 그렇다. 아직도 한국은 빨갱이 혐의만 씌워도 통한다. 매도시킬 수 있다. 최고의 폭력적 언어가 빨갱이 아닌가.
PT독재라는 표현이 PT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의미라면 PT권력화라는 표현도 괜찮지 않는가. 독재라는 표현이 거부감이 있다. 노동자민주주의가 무난하다. 민주주의라는 말을 계급적 관점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노동자 민주주의 자체가 노동자를 위한 민주주의라면 자본가들에게는 독재가 된다. 자본독재라는 표현을 자꾸 써야 한다. 현재 민주주의가 다 된 것처럼 말하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다. 자본독재가 아닌 진짜 민주주의로서 노동자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숫자 개념으로 봐도 노동자 일반서민이 국민의 압도적 다수인데 자본가 해봐야 소수다.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라면 적어도 노동자와 일반 민중 농민들이 주인이 된 사회만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붙일 수 있다. 소수의 가진 자들이 지배하는 사회를 민주주의라고 한다는 것은 환상이다.
환상인데 형식적으로 보면 노동자, 민중 다수가 윤석열 지지하고 국힘당 좋아한다. 노동자라면 노동자 후보 찍는 게 당연한데 실제로는 노동자후보 찍으려 해도 찍어서 되나하는 현재의 지형, 의식, 욕구를 어떻게 바꾸냐는 문제다. 자본가들이 자본가를 위한 국가라고 해서 외형상으로 자본가를 위한 국가인 것처럼 나와서는 자본가를 위할 수 없다. 항상 그렇지 않다고 등장하고 노동자 서민을 위한 후보라고 해야 표가 된다. 실제로 나타나기는 전 국민을 위한 국가의 외양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깨느냐. 본질이 뭔지 볼 수 있느냐는 문제다.
본질을 폭로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선거에 의해서 다수에 의해서 뽑혔다는 것이다. 박근혜도 히틀러도 다수에 의해서 뽑혀서 세계전쟁도 국민 다수의 힘으로 일으켰다. 다수의 선거라는 것에 대한 환상이 있다. 선거가 이 체제 유지를 위해서 제일 중요하다고 말한다.
2.관료주의와 계획경제
소련의 계획경제를 어떻게 보는가. 단위에서 계획을 세워서 위로 올리고 위에서 밑으로 피드백을 한다. 이 과정을 몇 차례 통해서 확정을 한다. 지령경제, 명령경제하고 하지만 아무 근거도 없이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기업도 한 기업 내에서는 계획경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논리를 깨는 것이 밑에서 올릴 때 생산해낼 수 있는 양은 줄이고 필요한 것은 더 늘리고 하면서 처음부터 자료 자체가 오류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계획을 세우려고 해도 올라오는 자료들이 각 단위들이 편한 대로 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오차가 생겨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평등이 인간본성에 맞겠냐는 반론이 있다. 현재 자본주의 속에서 좀 더 살아남기 위해서 더 먹기 위해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인간본성, 욕구들을 전제로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한동안 작동한다고 보고 그러면 계획이 사실상 좀 틀릴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계획이 의미가 없냐. 두 가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본성은 변한다. 낮은 단계에서는 그런 오류를 만들 수 있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단계로 가면 그렇게 속여가면서 더 많이 챙기려고 할 필요가 없어진다. 굳이 영구불변의 무엇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낮은 단계에서는 그렇다. 좀 더 사회가 살 조건이 좋아지고 생산력이 늘어나서 소련 초기처럼 필수품들 때문에 전쟁을 치르는 단계가 아니라 욕구 자체가 변해가고 나눌 만한 기본적인 물적 조건이 되기만 하면 그런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되지 않겠나. 그러기 위한 전제조건이 평등한 사회로 많이 가야한다는 것이다. 관료가 여러 견제를 받고 결합도 안 되고 경쟁하는 것 때문에 하나의 계보로 볼 수 없다고 하지만 문제가 있는 것이 자기들끼리 생사를 걸고 싸우는 것은 자본가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큰 차이가 아니다. 문제는 관료의 위치에서 사적 소유로 처분하거나 계승은 못하더라도 권력을 얼마나 갖느냐의 문제다. 균형을 맞춰서 견제를 받아서 자기 마음대로 못하고 구성원들에 의해서 공동으로 의사결정을 해나가는 과정을 민주주의적인 절차를 겪을 수 있느냐. 아니면 그것들을 상당히 배제하면서 자기 편한 대로 할 수 있는 빈틈이 있느냐의 문제다. 얼마나 관료가 실질적으로 의사결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느냐 그걸 봐야한다. 소련사회가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시스템이었다면 관료가 욕먹을 일은 없었을 것 같다. 그게 아니라 관료가 특권화해서 사적인 것을 챙기거나 사람들 괴롭히거나 인사권 돌리거나 자산 처분권을 어디다 얼마나 투하하느냐, 행정하면서 얼마나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느냐 제한되어서 의견을 모아가면서 민주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위치에 있느냐의 문제다. 법적인 형식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질적 권한을 독점하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자유로운 연합 쪽에서는 그것을 시비를 건다.
사회주의에서는 모든 사람이 주인이다 보니까 복잡한 문제가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선거를 통해서 눈치를 보게 되는데 소련이나 북한은 관료주의 문제가 있다. 인간 사회에는 어디나 그런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잣대를 어디다 둘 것이냐의 문제다. 자본주의와 비교를 하면 새발의 피이지만 완전하지 못하다는 문제는 있다. 소련 붕괴도 관료주의 때문이라고 동의를 한다. 관료화되는 것은 삽시간이다. 항상 나타날 수 있는 문제다.
스탈린이 당은 대중들의 신뢰를 매일 매 순간 새롭게 얻어야 된다고 말한다. 옛날에 내가 투쟁했으니까.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매 순간 대중들의 신뢰를 얻어가야 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소환제가 소환당하면 끝장이다가 아니라 일하다 문제가 되면 당연히 소환되고 남이 하면 되는 인재풀이 있으면 아무 문제도 아니다. 문제가 있을 때 소환되는 것이지 문제가 안 되면 소환될 일이 없다.
계획경제 실패가 소련 붕괴의 원인인가. 왜 잘 안되었다고 보는가. 관료주의 문제다. 북한에서는 공장단위가 지배인, 근로자 대표, 공장장이 트로이카로 서로 견제하는 시스템이다. 사무직은 일주일에 한 번씩 노동을 간다. 생산직은 일주일에 한번 씩 학습을 받아야 한다. 붕괴의 원인 중에 사회주의 일반 인민들이 자본주의 모순이나 제국주의에 대한 피부에 와 닿는 심각성을 실질적으로 느끼는 절박성이 떨어졌다는 것이 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만 살다 보니까 관료주의를 통제하려고 트로이카 체제를 도입했지만 문제가 있다. 사회주의에서는 관료주의 문제가 있지만 자본주의의 빈부양극화나 실업, 우울증, 정신병은 별로 없다.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인간의 본성은 자기 이익을 우선한다. 성과에 따른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경쟁자본주의가 이기고 사회주의가 붕괴됐다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성과에 따른 보상 내지 이익을 안겨주는 것 경쟁에 따른 기술개발이 더 우위라는 것인데 이게 먹혀들어갔다. 계획경제는 국가가 획일적으로 사람들에게 실시함으로써 전체주의 내지 통제사회가 되니까 사람들의 능동성이 없어졌다는 논리다.
3.새로운 사회를 위한
이데올로기 전쟁에서는 인간학, 인간의 본성의 문제, 욕구, 보상체계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이런 것들을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면 어떻게 설득력 있게 만들 것인가. 새로운 사회에서는 돈으로 하지 않고 가능할 것인가.
혁명 분위기에서는 열정으로 힘들어도 참는데 장기화되면 힘들다. 사회주의적인 인간상을 만드는 교육시스템이 필요하다. 새로운 사회에서 갖고 있는 개인의 이익보다 사회전체가 개인의 발전을 추구하는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극단적인 경쟁 공정 떠드는 분위기가 IMF 이후에 더 심해졌다. 대학이 학부제 만들면서 존폐 분위기 만들어서 줄 세우고 살아남자하면서 취업학원으로 변했다. 역사적인 것이지 인간의 근원적 본성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본 이데올로기가 적극적으로 잘 활용했다. 반면에 노동 쪽에서 대응 논리가 빈약했다. 철학적인 논거 준비가 대응이 빈약한 것도 문제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해가는 과정 그 자체에서 공동체적인 의식이 형성되어가고 그 연장선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중앙체제만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나 노동자국가에서도 활용할만한 선진적인 교육시스템이 있다면 한국 사회에 맞게 단계적으로 조건 따져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소련은 망했으니까 치우자거나 사민주의는 느끼하니까 치우자가 아니라 세부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그것으로 대중들과 접해야 하고 설득해야 한다. 조직적으로 규모를 넓혀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자꾸 만들어가야 한다. 자생적으로 돌아가는 흐름에서는 그냥 굴러가는 대로 가면 자본이데올로기에 끝없이 당한다.
북유럽 모델도 참고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러시아 비고츠키 교육론에서 소련이 중앙조직이 바뀌면서 교육적인 모델에 의해서 한 마을 자체가 바뀌어가는 공동체 의식 속에서 자기 발전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반자본주의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이미 자본주의 모순으로 가장 힘든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극복하자는 공동체적으로 극복해가는 과정이 인간적으로 훈련이 되고 연장선에서 사회주의가 탄생한다. 그것은 교육의 힘만이 아니라 생활패턴 자체가 공동체의 힘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목적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북유럽 사민주의는 노동조직률이 높다. 6-70%된다. 노조가 사회적 파급력이 큰 사회다.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자본가 그룹과 노동자 연합 그룹과의 사회적 합의주의를 제도화한다. 사회 정책을 노동자들이 내서 정착시키는 모델이다. 신자유주의 광풍이 불면서 대규모 독점자본들과 영세한 북유럽 자본가들이 경쟁해서 무너지니까 변질이 되고 있기도 하다.
교육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한다. 현재 노동조합에서 대규모로 하는 형태가 아니다. 산발적이다. 체계화해서 노동자 대학이든 장학생도 만들고 정치가, 전문가들 키울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한다. 준비해야 할 작업들 중에 인간학, 윤리학, 환경 등이 포함되어야 한다. 만들어가는 과정도 전쟁이고 만들어서 얼마나 공유하는가의 싸움이다.
민주노총 조합원이 130만이 되었는데 전체적으로 예전에 비해 희망도 없고 변질이 되었다. 인원은 늘었는데 개인이익, 경제적 실리주의로 노조가 변질되고 있다. 사회를 개혁해야하고 노동자들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조합원 교육, 파업하면서 왜 싸워야 하는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배우고 했는데 지금은 그런 교육이 안 되고 있다. 노조 자체가 노동자들을 총 단결시키는 사회적 무기다. 지금은 같은 노동자들이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싸우는 형태가 되고 있다.
교수들도 노동자인데 노동자 얘기하면 자기는 아니라고 여긴다. 노동자 하면서 떠드는데 자기는 빼놓고 이야기 한다. 억대 연봉에 학진 지원체계에 다 흡수되어서 학술도 사라졌다. 학생들에게 세상 바꿔야 한다는 말 하지 않는다. 반공극우 경쟁체제에 절어있는 학생들이 교수들을 평가하는 시스템이 되었다.
현재의 이데올로기 지형, 현재의 물적 조건으로 보자면 노동자국가, 사회주의 운동 막막하다. 실질적으로 자본주의가 잘 가면 문제가 아닌데 당장 실업문제, 전쟁, 환경문제 어떻게 할 것인지. 심각한 자본주의로 인한 문제들은 다가오는데 준비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데, 그 대안을 자본가들이 만들겠나. 자본가들이 스스로 저질러온 건데, 만들어도 자본은 빠져나간다. 나가면서 노동자들에게 덮어씌우고 괴롭힌다. 피부로 느끼는 사람들은 쉽게 공감할 수 있고 현장 들어가서 설득하는 것은 굉장히 빠를 수 있다. 직접 당한 사람들이 결합되는 것은 빠르다. 잘 나가는 사람들도 불안하다. 이런 상황에서 잠재력들은 사방에 있다. 제대로 된 대안논리 가지고 접근해 가야한다. 그런 준비가 안 되면 수백만이 들고 일어나도 흐지부지된다.
2008년도에 미국 안에서도 경제시스템이 붕괴하는 현상을 보면서 새로운 위기의식을 갖고 있음에도 새로운 젊은 세대들은 경제위기 자본주의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자라난 젊은이들이 자기 일자리 희망을 점점 찾기 힘들어지니까 유럽이나 아시아의 젊은 세대들이 사회변혁 운동을 기존 시스템의 하나로 간주하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극 보수화하는 현상이 젊은 층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세계적 차원에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잘 느낄 수 있는 학습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중고등학교 교사들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은가. 교사들도 꼼짝 못한다. 학부모들이 찾아와서 교사들 문제 삼는다. 교장들도 학부모 민원을 이용해서 교사들을 조인다. 입시 준비 이외에 다른 이야기 못하게 한다. 행정 차원에서 국가권력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대학 등록금 무료화하면서 대학 평준화하면 조금 완화될 수 있다. 평준화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15조면 가능하다. 사립대들을 공립형 사립대로 등록금 무료화하고 국가가 지원하는 형태로 가면된다. 학생들 빠져나간 자리에 일반인들 채워서 평생 교육해야 한다.
인민무장을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레닌이 즐겁게 이야기한다. 해방된 인간이 옛날부터 알려져 왔고 수천 년에 걸쳐 모든 교훈서에서 반복된 사회적 공동생활의 기본 규칙들을 폭력 없이 강제 없이 복종 없이 국가라고 하는 특별한 강제기관 없이 준수하는 데 습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면 궁극적으로 높은 단계의 공산사회에서 뭔가 된다는 건데. 공동생활의 기본 규칙이란 게 있냐. 수천 년에 걸쳐서 인류 역사가 계급사회였는데 삼강오륜부터 해서 지배계급들이 길들이려는 것인데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더라도 습관화한다고 꼭 좋은 거냐. 늘 갈등과 현대적 관점에서 새로운 윤리로 따져야 할 것들이 꽤 있지 않은가. 습관화의 관계에서도 비판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놓고 다시 검토해서 윤리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작업들을 계속해야 한다.
전쟁 이야기는 간단하지 않다. 무장을 어떻게 할 것이냐, 폭력의 문제가 자명하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 폭력을 어떤 식으로 조직할 것인가. 어떤 폭력을 쓸 것이냐. 화염병, 소총은 무기력하다. 폭력혁명은 동어반복이다. 혁명 자체가 이미 뒤집는 것인데 어떤 식이든 반대파들은 어마어마한 폭력에 직면하는 것이다. 목숨까지도 위협받는 그 자체가 이미 폭력적이다. 그럴 때 폭력의 구체적인 성격들 문제, 정보전 문제도 있다. 개발하고 싸울 것인가.
당이 지도기관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당의 위치, 역할. 스탈린은 PT독재 기간 내우외환 전쟁 기간에 참모부 없이 전쟁할 수 없다고 말한다. 레닌은 중앙위원회를 거치지 않고는 중요한 의사 결정하는 것은 없다. 중앙 집중 이야기 하는데, 민주주의 결정과 로쟈가 격하게 반대한다. 오늘날도 민주적인 결정들이 상식화되거나 자명하게 들어와 있어서 이런 부분들은 어떻게 해소하느냐. 당이든 중앙위원회가 모든 결정을 다 할 수밖에 없는 부분과 실제로 오류에 빠지게 되는 해서는 안 되는 부분을 섬세하게 따져야 한다. 모두 자명한 부분이 없다. 다 논쟁거리다. 운동조직논리도 깊이 연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소련으로부터 배울 것, 비판해야 할 것이 있겠지만 우리 시대에 맞는 것은 무엇인지는 새로운 문제로 남는다. 운동 원리, 자세, 주체적인 문제, 객관적인 상황 문제도 있다.
소련을 긍정적으로 보는 부분은 무엇인가.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들, 실업 문제 극복, 무상교육, 무상 주택, 무상의료를 실천했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에서 오류와 한계가 있지만 혁명으로 이룬 성과다.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이성사회에 접근하고 시도했다는 의미는 있다. 지금은 후손들이 무감각해졌다. 당연하게 여긴다. 유산 물려주면 당연하게 여기는 것과 같다. 소련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정파가 갈라져 있다는 문제는 있다. 28년부터 스탈린부터 문제라는 입장도 있다. 그럴 때 명확히 규명해야 할 것이 17년부터 28년까지와 그 이후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라는 문제다.
지젝은 17년부터 10여년은 과거와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그 후 10년은 완전히 다른 사회라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정착되어 간다는 것이다. 혁명 이후의 10년과 그 다음의 10년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는 것이다. 나치 쪽은 자본주의 그대로 밀고 간 거다. 소련 쪽은 객관적인 측면에서 다르다고 말한다. 스탈린주의자처럼 말한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전 세계 역사를 바꾸고 왕, 지주계급, 자본가 소수계급에 의해서만 국가가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서민 민중들이 사회의 주체가 되어서 움직일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최초로 실험을 했다는 것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이것이 이상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가는 숙제다. 자본가 기득권세력이 뒤집으려고 하는 상황에서 해 나갈 수 있는가는 숙제다.
스탈린으로 넘어가지 않고 권력 구조가 달랐다면 더 나았을까. 트로츠키가 유력했는데 트로츠키의 입장이 스탈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집산화 정책 말하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다. 로쟈 입장으로 갔으면 오래 못 갔을 것이다. 세계사적인 역부족, 세계 자본주의와의 관계의 문제다. 외부의 세계 자본주의 문제, 내부에서 대응을 더 잘할 수 있었는가라는 문제는 있다. 그래도 엄청 많이 퍼져 나간 것이다. 독일 혁명은 실패했고 유럽에서 연속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패착이다. 맑스가 예상했던 자본주의의 한계, 붕괴까지는 그 때는 멀었던 상황이었다. 자본주의가 생산력을 키울 수 있었다. 오늘날은 미지수가 되었다. 불변자본 비중이 커졌고 노동자 잘라내는 것이 자본의 생존의 문제가 되었고 드디어 사회주의가 제대로 시작될 때가 온 것 같다. 자본주의가 하고 싶은 대로 놔뒀을 때는 그런 조건이 되었을 때 지옥을 만들면서 자기들끼리 살아남을 구조를 만들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최악을 만들려는 것을 이성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가, 인간이 이성적으로 그 짓 못하게 막아가는 과정이라고 봐야 한다. 혜성충돌로 지구가 망할 수도 있지만 인간이 스스로 지옥 만들어서 좀비 되는 사회로 가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런 위기가 코로나에서도 느꼈지만 그 이전부터 미세먼지, 해수면 상승, 후쿠시마 해서 하루하루 다가오는 분위기가 있다. 노동 쪽에서는 비정규직 나가야 한다는 구조가 자꾸 생긴다.(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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