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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2
팔만대장경과 최치원
<해인사>2
해인사가 법보종찰이라 하는 근거인 팔만대장경과 그보다 먼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 장경판전은 내용과 그릇이 어떻게 맞물려며 존재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또한 불교가 우리 전통문화의 핵심임도 함께 확인한다. 최치원의 흔적은 그 불교적 기반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1.방문지 대강
명칭 : 해인사
위치 : 경남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전화 : 055-934-3000
입장료 :
방문일 : 2023.10.22.
2. 둘러보기
2.1. 팔만대장경 소개
2.1.1.
국보 제32호. 목판본은 1,516종에 6,815권으로 총 8만 1,258매인데 이 가운데 후대에 판각된 15종의 문헌은 보유판(補遺板)이라고 한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과 속장경(續藏經)이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된 뒤 1236년(고종 23) 당시의 수도였던 강화에서 시작하여 1251년 9월에 완성되었다. 이 사업은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주관했으며, 제주도·완도·거제도 등에서 나는 산벚나무를 재료로 사용했는데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먼저 나무를 바닷물에 절인 다음 그늘에서 충분히 말려 사용했다.
이 대장경은 조선 초기까지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해인사로 언제 옮겨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 1398년(태조 7)에 옮겼을 것이라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때 2,000명의 군인들이 호송하고, 5교양종(五敎兩宗)의 승려들이 독경(讀經)했다"라고 한다.
이것은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보관함의 순서는 천자문 순서대로 배열했으며, 오자(誤字)와 탈자(脫字)가 거의 없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색에 의해서 그 내용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첫째, 인류 최초의 한문대장경인 송나라 관판대장경(官板大藏經)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며, 현재 전하지 않는 거란판대장경(契丹板大藏經)의 내용을 짐작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특히 〈대승법계무차별론 大乘法界無差別論〉 권1은 어느 대장경에서도 볼 수 없다.
둘째, 사전류의 저술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법원주림 法苑珠林〉·〈일체경음의 一切經音義〉·〈속일체경음의 續一切經音義〉 등 중요한 전적과 〈대승보살정법경 大乘菩薩正法經〉·〈제법집요경 諸法集要經〉 등 중요한 대승경론이 포함되어 있다. 셋째, 자체(字體)의 예술성이다. 하나의 목판에 대략 가로 23행, 세로 14행으로 310자 내외를 새겼는데 그 정교한 판각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조선의 명필인 한석봉은 이를 두고 "육필(肉筆)이 아니라 신필(神筆)이다"라고 경탄했다. 이 팔만대장경은 뒤에 5차례나 간행·유포되었다는 역사기록이 있는데 고려말에 이색(李穡)이 인출한 대장경 1부가 여주 신륵사에 봉안되어 있으며, 조선 초기까지 왜구들이 빈번하게 침략해와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대장경판을 요구했는데 1389~1509년에 83차례나 요구했지만 대부분 거절하고 간혹 인본(印本)을 주었다고 하며, 1410년(태종 10)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관찰사에게 도내에서 생산되는 인경지(印經紙) 267묶음을 해인사로 보내 인경(印經)하도록 명했으며, 세조는 신미(信眉)·수미(守眉)·학열(學悅) 등으로 하여금 해인사 대장경 50부를 인출하여 각 도의 명산 거찰에 나누어 봉안하도록 했으며, 1898년 용악(聳岳)이 4부를 인출하여 통도사·해인사·송광사 등에 1부씩 봉안했다.
고려 중반부터 장경도량(藏經道場)이라는 이름으로 봄·가을에 6, 7일씩 거의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으며, 현재 해인사에서는 1년에 1번씩 대장경판을 머리에 이고 탑 주위를 도는 행사를 하고 있다.
팔만대장경의 특수성은 첫째, 사상적인 것으로 국토가 유린된 상황에서 이 커다란 불사(佛事)를 통해 경전을 수호한 호법적(護法的) 성격을 띠었다는 것이다(호국신앙). 이규보(李奎報)의 〈군신기고문 君臣祈告文〉은 이 대장경조조의 사상적 의의를 천명한 글로 몽골을 야만시하고 문화적 긍지를 드러내고 있다.
둘째, 경제적인 것으로 대장경의 역사(役事)에 대한 막대한 경비를 정부가 부담하므로 국민에 대한 재투자적인 면이 고려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내용적인 것으로 과학적인 배열과 엄격한 자료수집으로 정평이 나 있는 것이다. 고려대장경 이후에 편집된 중국판 빙가장경, 일본판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 등은 모두 이것을 모본으로 하여 판각된 것이다. 즉 이 팔만대장경은 현존하는 한문대장경의 완벽한 '연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967년부터 이 한문본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한글판 대장경을 간행하고 있는데 현재 120권이 출판되었다. (다음백과 전재)
2.1.2.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경판은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대장경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1232년(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타자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崔瑀) 등을 중심으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6년 만인 1251년 9월 25일(양력으로 10월 11일)에 완성한 것이다.
몽골군의 침입을 격퇴하려는 민족적인 염원에서 국력을 기울여 한자 한자 정성을 다하여 판각하였으며, 가장 완벽한 대장경으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대장경판을 통하여 초조대장경인 북송(北宋)의 관판대장경(官板大藏經)과 거란판대장경(契丹板大藏經)의 내용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문화사에서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과시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일반적으로 이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이라고 하며, 매수가 8만여 판에 달하고 8만 4000번뇌(煩惱)에 대치하는 8만 4000법문(法門)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고려 현종 때 새긴 판을 ‘초조대장경판’이라 하고, 고종 때 이것이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버려 다시 대장경을 새겼기 때문에 ‘재조대장경판’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고종 때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새겨진 판으로 지금 해인사에서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해인사고려대장도감(각)판〔海印寺高麗大藏都監(刻)板〕’이라고 함이 가장 정확한 명칭이다. 이 대장경은 강화도의 대장도감과 남해·강화의 분사(分司)대장도감에서 16년의 기간이 걸려 완성한 것이다.
이 때 최우의 참여가 큰 힘이 되었고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인 수기(守其)가 내용 교정을 맡아 북송관판과 거란본 및 우리나라 초조대장경을 널리 대교(對校)하여 오류를 정정하였다.
이 대장경판을 새길 때의 배경은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잘 나타나 있다. 즉, 몽고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에서 대장경판 판각을 부처님에게 고하고 있다. 1237년(고종 24)에 쓴 이 기고문에 이미 대장경 판각을 위하여 담당관사를 설치하였음이 나타나 있다.
이 대장경판은 성격상 정장(正藏)과 부장(副藏)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장은 『대장목록(大藏目錄)』에 수록되어 있는 경을 말하고, 부장은 『대장목록』에 수록되지 못한 『종경록(宗鏡錄)』 등 4종을 말한다. 정장은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1,497종 6,558권의 경을 말하며, 부장은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된 4종 150권이 있다.
정장의 함별(函別) 구성을 보면 경의 순서에 따라 천함(天函)에서 동함(洞函)까지 639개함에 나누어 수록되어 있는데, 첫번째 경인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600권)은 천함에서 시작하여 한 개의 함에 10권씩 묶어 60번째 함의 나함(奈函)까지 수록되어 있다.
이렇듯 한 개의 경도 분량이 많은 것은 여러 개 함으로 나누어 수록되어 있으나, 단권(單卷)의 경인 경우 여러 개의 경이 한 개의 함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함별구성에는 일정한 원칙이 없다. 첫번째 경의 경우처럼 10권씩 묶어 한 개의 함을 구성하고 있는가 하면, 79번째의 경은 12권씩 묶어 한 개 함을 이루고 있으며, 1,256번째 경은 6권씩 묶어 한 개의 함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상함(傷函: 函順160番)의 경우는 단권의 경 29권을 수록하고 있다.
이 대장경판의 저본경(底本經)은 천함(經順 1)에서 영함(英函: 經順 1087)은 『개원석교목록(開元釋敎目錄)』의 경이며 반함(磻函, 經順 1263)∼합함(合函: 經順 1387)은 『속개원석교록(續開元釋敎錄)』에 있는 경을 수록하였다.
이외의 사함(社函: 經順 1088)∼명함(銘函: 經順 1262)과 제함(濟函: 經順 1388)∼동함(洞函: 經順 1497)은 별개의 것인데 이들 판의 저본은 현재 미상이다.
각 판의 대부분은 상하 단변(單邊) 무판심(無版心)이며 권자본형식(卷子本形式)의 판식(版式)으로 한 면에 23행 14자씩 새겨져 있다. 그러나 경순 1256, 1404, 1497은 판심이 있고, 경순 1257은 행자수가 18행(小字는 36行)이며, 자수가 일정하지 않다.
그리고 1258은 22행 13∼15자(小字는 44行17字)이고 1259는 21행 13∼14자(小字는 42行16字)이며, 1260은 22행 13자로 전부 소자(小字)이고 1261은 25행 16자이다.
이들 경순 1256의 녹함(祿函)에서 1261의 무함(茂函)까지는 『종경록』과 함순이 중복되는 경으로서 일반 정장과는 판식을 달리하고 있음이 특이하다. 그리고 간기(刊記)가 예외없이 고려국(분사)대장도감봉칙조조〔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雕造〕라 되어 있다.
이들 간기를 중심으로 정장을 판각연도별로 분류하여 보면 연도별 판각량이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 이를 통해 볼 때 해마다 일정량의 판각계획에 의하여 판각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련항목 부분전재)
대비로전
2007년 11월 24일 정면 3칸, 측면 3칸 그리고 다포형식을 가진 대비로전을 낙성하고 대적광전과 법보전의 ‘동형쌍불(同形雙佛)’인 두 비로자나 부처님을 나란히 안치하였다.
쌍둥이 비로자나불은 2005년 7월 개금하는 과정에서 불상 내부에 문서가 발견돼 883년 통일신라시대 제작된 국내 최고(最古)의 불상임을 확인하였다.(홈피)
해인사는 화엄경의 도량이라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다. 대적광전에도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학사대 전나무
2012년 11월 13일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2019년 태풍(링링) 피해로 인한 생물학적 가치 상실로 2020년 2월 3일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다. 수령은 250년 정도로 추정되었으며 나무높이는 30m에 달하였다. 이 나무는 1998년 11월 13일에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바 있다.
합천 해인사 학사대 전나무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신라 말기의 대학자이자 문장가인 최치원과 관련된 기록과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최치원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에 꽂아두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는데 그 후에 이 지팡이에서 움이 돋아나 자라 지금의 전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백불암집(百弗庵集)』에는 1757년경 후계목을 식재한 기록도 남아 있어서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인정된다. 천연기념물 제495호로 지정되어 있는 진안 천황사 전나무와 비슷한 크기로 수목 규모와 역사성이 우수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최치원
최치원(崔致遠)의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지만, 857년(헌안왕 1)에 태어나 908년(효공왕 12) 이후까지 활동하였다. 최견일(崔肩逸)의 아들이자 승려 현준(賢俊[賢儁, 賢雋, 玄準])의 동생으로, 최인연(崔仁渷[崔彦撝]) · 최서원(崔棲遠(崔栖遠))과는 4촌 내지 6촌의 형제 사이였다. 최견일은 861년(경문왕 2)부터 시작되었던 곡사(鵠寺)의 중창 불사에 참여하였고, 현준은 880년대 중반부터 해인사에 머무르며 왕실이 주관하는 불사(佛事)를 맡았다. 최서원은 884년(헌강왕 10) 견당사(遣唐使)의 수행원으로 활동하였고, 최인연은 한때 집사(執事) 시랑(侍郞)을 맡았다. 이들은 관료나 승려로 활동하면서 유교와 불교에 관심을 가졌다.
최치원은 화엄 불교를 중시하는 불교 사상을 가졌다. 화엄 사상은 왕실이 주관한 화엄 결사의 발원문이나 불국사와 해인사 관련 기 · 찬, 그리고 화엄 승려의 전기에 반영되었다. 최치원은 귀국 직후인 885년 3~8월 사이에 지엄과 의상을 추모하는 불사와 헌강왕의 명복을 비는 불사의 발원문을 작성하였다. 특히, 헌강왕 추복(追福) 불사는 왕족과 함께 결언 · 현준 등 해인사 승려가 주관하여 화엄 결사로 설행되었다.
불사는 정강왕 대에도 불국사를 중심으로 계속 설행되어 정토를 비는 결사가 이루어졌으며, 최치원은 결사의 기와 찬을 도맡아 작성하였다. 왕실 불사와 관련된 글을 찬술할 때, 그는 886년 7월부터 893년까지 진감 · 낭혜 · 지증 3명의 선사와 왕실의 원찰인 숭복사에 대한 비명도 작성하였다.
당나라에서 유학을 습업한 뒤 귀국한 그의 저술은 대체로 불사와 관련하여 이루어졌다. 최치원은 895년 7월에 해인사를 지키다 죽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해인사묘길상탑기(海印寺妙吉祥塔記)」를 찬술한 뒤 898년 정월부터 해인사 중창 관련 글을 지었다. 그것은 그가 898년(효공왕 2) 정월 해인사에 들어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형인 해인사 현준을 비롯하여 결언 · 성기(性起) · 승훈(僧訓) · 난교(蘭交) · 희랑(希朗) 등 해인사 승려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현준의 부탁을 받아 901년(효공왕 5)부터 해인사 관련 승려의 전기를 찬술하였다.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의 전기를 쓴 다음에는, 신라와 중국의 화엄 교학을 정립하는 데 공헌한 의상(義湘)과 법장(法藏)의 전기를 지었다. 그의 불교 관련 저술은 당시 해인사의 화엄 사상과 깊은 관계를 가지며 작성되었다.
해인사의 승려인 결언 · 현준 · 성기 · 승훈 · 난교 등은 경문왕계 왕실의 왕명을 받아 결사를 맺거나 사찰을 창건하였다. 현준이 주로 헌강왕 대 말년 이후에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면, 결언은 이미 경문왕 대 초반부터 왕실과 친밀하였다. 다만, 현준은 아버지 최견일을 통해 이미 경문왕 대 초반부터 왕실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승훈과 난교는 해인사가 경문왕의 친동생으로 진성왕의 남편이자 숙부였던 위홍의 원당이 된 이후 경문왕계 왕실과 가까웠다. 그들은 진성왕의 해인사 입산 전후에 해인사의 중창 불사를 주관하였다.
해인사 승려들은 적어도 경문왕 대부터 진성왕 대까지 경문왕계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신라 말에 해인사는 의상계 화엄종을 대표하는 사찰이었다. 해인사 승려인 결언과 현준은 의상의 융섭적(融攝的)인 화엄 사상을 중심으로 유식 사상을 포함한 법장의 화엄 사상을 아우르려는 경향을 가졌다. 최치원은 901~904년 사이에 「석순응전(釋順應傳)」과 「석이정전(釋利貞傳)」, 그리고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을 지어 신라 화엄종의 형성 과정과 의상 화엄 사상을 정리하였다. 904년에는 의상과 가까웠던 중국 화엄종 법장의 전기인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지었다. 그는 「부석존자전」에서 의상과 문무왕의 관계를, 「법장화상전」에서는 법장과 측천무후의 관계를 특기(特記)하였다.
최치원은 화엄 승려의 전기를 지으면서 화엄 승려와 왕실의 관계를 특별히 부각하였다. 원칙을 중시하는 화엄 사상이 신라 왕실을 상징한다면, 차별을 인정하는 유식 사상은 지방 곳곳에 자리한 호족 세력을 의미하였다. 최치원이 불교 관련 저술을 찬술할 때, 신라 사회는 진골 귀족 세력과 호족 세력에 의해 분할되었고, 왕실은 점차 왕경 주변 지역에만 영향력을 미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치원은 화엄 승전을 찬술하면서 융섭적인 화엄 사상을 통해 지방 세력을 인정하면서도, 신라 국가의 지배 질서 안으로 편제하여 신라 국가를 재건하려는 염원을 담았다.
최치원은 재당 시절에 고변을 통해서 금단도(金丹道)를 중심으로 신선도(神仙道)를 이해하였고, 재사(齋詞)를 작성하면서 유교의 ‘좌국부민(佐國扶民)’ 사상과 관련된 도교 사상을 익혔다. 재당 시절 그의 도교 인식은 유교를 중심으로 이해되었는데, 당시 당나라 사람들이 가졌던 도교 의식과 다르지 않았다. 귀국 후에 그는 신선도를 중시하면서 외형보다 내면의 수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도교 사상을 정립해 나갔다. 그것은 금단도의 비판과 도교 사상 자체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보덕전(普德傳)」에 반영되었다. 최치원은 「보덕전」에서 보덕의 『열반경』 40권 강경과 도교 존숭으로 인한 보덕의 고대산 이거 과정을 특기하였다.
유교를 기초로 도교 사상을 이해했던 그에게 도교를 일방적으로 진흥하여 왕권을 억압한 연개소문은 호감을 받을 수 없었다. 최치원은 불교와 관련 없이 옥황(玉皇)을 존숭하는 도교적 신선술을 비판하면서 도교 사상에 대한 이해를 위해 노자(老子)와 『도덕경(道德經)』을 중시하는 경향을 내세웠다. 신라 사회에서는 이미 유학 사상과 관련하여 『도덕경』을 이해하고 있었다. 유학을 익혔던 6두품 출신은 은일적 노장 사상에 심취되어 심신의 수련을 통해 득선(得仙)을 구하려고 하였다.
최치원은 6두품 유학 지식인이 희구하였던 신선사상을 계승하여 내심(內心)을 닦아 사람을 구제하는 수련적 신선사상을 제시하였다. 신라에서 신선사상은 일찍부터 유교 · 불교와 연관되었다. 최치원은 신라 전통에 의지하여 수용된 유교와 불교를 특별히 ‘유(儒)’와 ‘선(仙)’으로 표현하였다. 자연히 불교의 수용과 발전은 신선의 관념과 관련되어 강조되었다.
최치원은 신라 고유의 전통을 중시하며 유교와 불교를 존숭하여 내심을 수련하였던 신라의 왕을 최고의 신선으로 정의하였다. 신선이 머무르는 신라에서 조덕을 추복하였던 경문왕과 헌강왕은 최치원에 의해서 최고의 신선으로 상정되었다. 최치원은 귀국 후 신선사상을 중심으로 도교 사상을 정립하면서 경문왕계 왕실의 위엄을 강조하려고 하였다.
귀국 후 그의 도교 사상은 신라의 유교 · 불교와 관련되어 나타났지만, 특별히 불교적인 기반을 가졌다. 최치원은 불교에 토대를 둔 수련적 신선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는 불교와 도교를 함께 이해하는 경향을 가졌다. 자연히 불교와 유교를 또한 함께 이해하고자 하였다. 최치원은 불사 발원문에서 죽은 왕실 친족의 혼백이 불보살(佛菩薩)의 가피력(加被力)으로 불국정토(佛國淨土)에 이르게 되기를 염원하였다. 이것은 효 · 우애의 유교적 관념이 불법(佛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염원은 「사산비명」에 주로 반영되었다. 헌강왕과 정강왕, 진성왕의 경문왕계 왕실은 최치원에게 「지증비명」 · 「숭복사비명」 · 「진감비명」 · 「낭혜비명」의 찬술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최치원은 찬술을 명령받은 차례와 관계없이 887년 7월부터 893년까지 약 7년 동안 비명의 체재를 달리하면서 「진감비명」 · 「숭복사비명」 · 「낭혜비명」 · 「지증비명」을 차례로 작성하였다. 비명의 체재를 달리한 것은 최치원이 각 비명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려는 의도를 담았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진감비명」에서 유교 · 불교 양교를 구분하여 이해하거나 갈등을 조장하는 당시의 사조를 비판하면서 양교를 함께 이해하는 사상 경향을 제시하였다. 「숭복사비명」에는 유교적 효도의 추구가 불교의 추복(追福)에 의해서 가능함을 제시하여, 유교 · 불교 양교 교의(敎義)의 교섭뿐만 아니라 실천 덕목의 일치를 강조하였다. 「낭혜비명」에는 삼외(三畏)와 삼귀(三歸), 오상(五常)과 오계(五戒)의 조화로운 융화를 강조하면서 불사를 통해서 조덕을 추복하는 호법(護法)이 왕도정치를 구현하는 방편임을 부각하였다. 「지증비명」에는 도헌의 생애를 육시(六是)와 육이(六異)로 정리하면서, 유교 · 불교의 융화를 강조하면서도 유교적 관념을 불교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사산비명」에서 유불 교섭의 사상 경향을 제시하고 호법에 의한 왕도정치를 강조하였다.
최치원은 이전의 유학 지식인이 제시한 유불 교섭의 사상 경향을 수용하였다. 그는 재당 시절은 물론 귀국 직후에 『계원필경집』을 헌강왕에게 진상하면서, 유교를 중심으로 도교와 불교를 이해하였다. 하지만 귀국 직후 불사 관련 글을 작성하면서는 불교를 중심으로 유교와 불교를 함께 이해하는 사상 경향을 보였다. 특히, 신라 사회에 상존하는 유불 교섭 사상의 경향이 신라의 전통과 밀접하게 연관되었음을 강조하였다. 경문왕계 왕실은 신라 전통을 계승한 유교와 불교를 존숭하고 진흥하였는데, 그것은 호법을 통해 왕도정치를 펴려고 의도한 것이었다.
결국, 최치원은 유불 교섭 사상의 경향을 토대로 호법 왕도론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시무책과 함께 신라 사회를 개혁하려는 또 다른 방안이었다. 또한, 그것은 유교 · 불교와 함께 삼교의 사상적 융합을 도모하는 바탕으로 기능할 소지를 지녔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때 활동하였을 때, 당시 당나라에서 성행한 삼교 융합의 경향을 익혔다. 귀국 후에도 그는 「사산비명」을 찬술하면서 불교를 통해서 유교와 도교를 인식하거나 융합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신라 말 유학 지식인이 가졌던 것이었다.
최치원은 특별히 불교와 연관된 선(仙)에 관심을 가졌다. 귀국 후 그의 삼교 융합론은 신라 사회에 상존하는 신선사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신라 사회에서 신선사상은 일찍부터 제시되었다. 그것은 신라에 수용된 유교 · 불교와 융화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화랑은 유교 · 불교 · 도교 삼교와 관련되었는데, ‘나라의 신선인 국선(國仙)’이라고 불려졌으며, 토착적인 산신의 도움으로 신라에 등장하였다.
자연 삼교는 신라 고유의 신선사상과 관련된 화랑을 통해 융합될 수 있었다. 경문왕은 ‘국선’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즉위 후 요원랑(邀元郞) 등 4명의 국선에게 지지를 받았다. 최치원은 화랑이었던 경문왕이 풍류를 떨치며 삼교를 융합하였다고 내세웠다. 그는 군주인 화랑, 곧 ‘난랑(鸞郞)’인 경문왕을 기리기 위해서 「난랑비서」를 찬술하였다.
최치원은 「사산비명」에서 유불 교섭 사상의 경향과 함께 삼교 융합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유교 · 불교 · 도교를 모두 경문왕계 왕실과 관련하여 이해하였고, 경문왕계 왕실의 권위와 위상을 높였다. 자연 경문왕계 왕실이 몰락한 뒤 신라의 존재가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자, 최치원은 신라 재건의 이상을 꿈꾸면서 경문왕계 왕실의 몰락을 아쉬워하였다.
그는 경문왕계 왕실을 연 국선 경문왕을 ‘난랑’으로 부각하고, 그가 신라 고유의 풍류 사상을 통해 삼교를 융합하였음을 애써 강조하였다. 자연히 「난랑비서」는 특별히 화랑 출신이 정국의 전면에 다시 등장하였을 때 찬술되었다. 최치원은 902년(효공왕 6)에 화랑 출신인 효종랑(孝宗郞)이 시중에 오르자, 국선인 경문왕을 강조하려는 뜻을 담아 「난랑비서」를 찬술하였다.
역사의식
최치원은 약 17년 동안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익혔다. 하지만 그는 신라 전통을 은연 중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중국과 신라의 왕실을 중심으로 두 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제왕연대력』에 반영되었다. 최치원은 신라를 군자국으로 인식하였다. 그것은 유교적 이상인 인(仁)에 투철하였고, 중국 문화의 기반인 유학을 진흥하여 인을 크게 흥성하였기 때문이었다.
유학 진흥을 강조한 군자국 인식은 최치원뿐만 아니라 신라 하대에 활동하였던 유학 지식인들에게 공유되었다. 최치원 역시 다른 유학 지식인처럼 신라가 중국의 제후국임을 유념하였다. 다만, 그는 자신과 같은 한림(翰林)에 의해서 신라가 중국의 문물과 제도에 투철하여 중국을 개벽할 만큼 중국의 제후국 가운데 가장 뛰어난 나라로 발전하였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러한 발전이 이미 신라가 어진 나라였기에 비로소 가능하였음을 설명하였다. 최치원은 신라를 중국의 제후국으로 위치하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가졌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중국 문화의 수용과 발전이 신라의 전통적 토착 문화를 토대로 구현되었음을 부각하는 소중화적 자존의식(小中華的 自尊意識)도 함께 지녔다.
최치원은 선사의 비명과 사찰 관련 글을 작성하면서 신라의 고유 제도나 언어를 제시하였다. 특히, 중국적 세계관을 유념하면서 중국 독자를 염두하여 그 뜻을 세주(細註)로 풀이하였다. 그의 신라 토착 문화에 대한 이해와 언급은 중국 문화와 대비하는 과정 속에서 제시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이전부터 신라 전통으로 전해져 왔던 토속어(土俗語)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불교적 의미를 함축한 고유어에 특별히 유념하였다.
신라 불교의 융성과 승려의 업적을 찬양하면서, 그것이 신라 문화의 발전과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던 요인이었음을 강조하였다. 다만, 신라의 불교와 유학이 동일한 신라 전통에 기반하여 비로소 발전하였음을 특기하였다. 그는 신라를 중국의 제후국으로 상정하는 인식을 유지하면서, 한편으로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적극 수용하고 유학의 진흥과 불법의 숭상을 통해서 왕권강화를 도모하였던 경문왕계 왕실의 치적을 강조하였다. (다음백과 전재)
독성각. 스승없이 홀로 수행하여 깨친 나반존자를 모시고 있는 전각.
那般尊子.
독성각
한때 독성 용왕 삼신상을 모시고 삼성각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현재는 독성 한 분만을 모셔서 독성각으로 불린다.
해인사 장경판전
장경판전은 대장경을 모신 건물로, 이 형국은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부처님께서 법보인 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을 나타내므로 더욱 뜻깊다.
국보 52호로 지정된 이 장경각을 처음 세운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진 때가 1397년임을 미루어 볼 때 지금의 건물은 조선초 무렵인 1488년 쯤에 세워졌으리라고 여겨지는데, 여러 차례에 걸친 부분적인 중수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다. 장경판전은 모두 네 동으로 되어 있다.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하고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전이라고 하는데, 이 두 건물을 잇는 작은 두동의 건물에는 사간판대장경이 모셔져 있다. 이 장경각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조선조 초기의 건축물 가운데에서 건축 양식이 가장 빼어나서 건축사적인 면에서도 퍽 중요하게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이 건물은 대장경을 보관하는 데에 절대적인 요건인 습도와 통풍이 자연적으로 조절되도록 지어졌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장경각의 터는 본디 그 토질 자체도 좋거니와, 그 땅에다 숯과 횟가루와 찰흙을 넣음으로써, 여름철의 장마기와 같이 습기가 많을 때에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또 건조기에는 습기를 내보내곤 하여서 습도가 자연적으로 조절되게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 기능을 더 원활하게 하려고, 판전의 창문도 격자창 모양으로 하였으며, 수다라전의 창은 아랫창이 윗창보다 세배로 크게 하였고 법보전의 창은 그 반대 꼴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아주 과학적인 통풍 방법으로서, 오히려 건축 방식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따라가기 어려운 우리 선조들의 슬기를 잘 보여 준다.(홈피)
장경판
장경판전 내부. 8만대장경판
법보전
법보전 내부
대비로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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