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감리회와 제3대 김종우 감독
제3회 총회는 1938년 10월 5일 감리교신학교 강당에서 열렸다. 이때는 중일전쟁 발발 2년이 되는 해였기에 일제가 황민화 정책에 걸림돌로 여기던 기독교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이 시행되었던 시절이었다. 이 총회에는 미국에서 모어 감독이, 일본에서는 정궁(釘宮辰生) 감독이 참석하였다. 이날 양주삼 총리사는 강설을 통해서 9개의 항목의 제안을 했다. 첫째 일본 감리교회와 더욱 친근히 연락할 것, 둘째, 총리사의 직명을 감독으로 부를 수 있게 할 것, 셋째, 노쇠 목사의 은급을 설정할 것, 넷째, 교역자들의 자녀 교육비를 설정할 것, 다섯째, 만주 선교를 확장할 것, 여섯째, 동경에 감리교회를 설립할 것, 일곱째, 교회 재판법 개정 할 것, 여덟째, 부흥 전도에 열심을 낼 것, 아홉째, 예배에 치중 할 것 등이었다. 이 제안은 거의 가결을 하였다. 이번 총회에서 특이한 것은 감리교의 최고 책임자인 총리사의 직명을 “총리사나 감독이라 칭함”으로 개정하였다는 것이다.
제3회 총회는 제2회 총회에서 연임하게 된 양주삼 총리사가 임기를 다하였기에 삼선부득(三選不得)의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서 새로운 감독을 선출해야 했다. 감독은 총표수 2/3의 가표를 얻어야 확정될 수 있었다. 1회, 2회, 3회 계속해서 21차까지 투표를 했지만 당선자가 없어서 양주삼 총리사의 3선 연임의 권유가 자연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양 총리사는 회원 중에서 감독을 뽑으라고 울면서 호소했다. 마침 총회 기간에 별세한 벙커(A.E. Bunker) 부인 장례식이 있었다. 그때 비둘기 한 마리가 묵상에 잠긴 김종우 목사의 책상에 앉더니 날라갔다. 그 후 실시된 22차 투표에서 김종우 목사는 37표를 얻었고 23차 투표에서는 2/3가 넘는 42표를 얻어서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감독에 당선되었다. 결국 2일 반, 18시간, 23회라는 감독선거에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기록을 남기고 김종우 감독이 선출되었다.
김종우(金鍾宇, 호는 泉谷) 감독은 1883년 9월 21일에 경기도 강화군 위량면 홍천동 천곡마을에서 유학자 김철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도학자였던 할아버지(김용하)에게서 정통 유학과 유교를 교육받았다. 1901년 그의 할아버지가 기독교에 감화 받아 개종하자 그도 개신교인이 되었다. 1901년 스크랜턴에게 세례를 받은 김종우는 속장으로 임명받았다. 1907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학업과 함께 전도사로 파송 받아 활동했다. 1911년 배재학당 고등과 제3회로 졸업했다. 바로 배재학당 대학부에 진학했으나 당시 조선의 젊은이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주를 떠날 때 김종우도 함께 떠났다. 그러나 마적 떼의 습격을 받고 친구가 절명하자 만주에서 이루려던 꿈을 접고 간신히 혼자 경성으로 돌아왔다.
경성에 오자 김종우에게 일하라는 곳이 세 곳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월급 70원의 서양인 금광, 판임관으로 일하는 조정의 관청, 최병헌(崔炳憲) 목사의 요청에 따라 전도사로 일할 정동제일교회였다. 당시 전도사 월급은 10원이었으니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김종우 속장은 조상의 뜻을 버리고 물욕에 붙들려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목회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마음에 번민이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김종우 속장은 마지막 결단을 위하여 서대문 밖에 있는 진관사(津寬寺) 뒤편 꼭대기에 올라가 기도했다. 그때 하늘의 응답을 받은 김종우 속장은 본격적인 신학 훈련을 위하여 피어선 성경학원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1913년부터 정동제일교회 전도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설교가 자신이 없어졌다. 결국 이 세상의 학식이나 웅변술을 의지하여 가지고는 천국 사업을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얻은 후에야 주의 대언자 노릇을 할 수 있다고 깨달았다. 그 후 백일 새벽기도를 작정하고 서울 남산에 올랐다. 기도 중에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성령의 강한 영감을 체험했다. 다음 해부터 김종우 전도사는 각 교회 요청에 따라서 50차례 부흥회를 인도했다. 1915년 성경학원을 졸업하고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한 후 김종우 전도사는 1917년에 김창준(金昌俊), 손정도(孫貞道)와 함께 졸업했다. 1916년 3월 12일에 집사목사 안수를 받고 1917년부터 1919년까지 동대문교회를 담임하였다. 그 후 1919년부터 1923년까지 김종우 목사는 정동제일교회 담임, 1927년부터 1929년까지 경성지방 감리사,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상동교회 담임,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수표교교회 담임, 1934년부터 1938년까지 정동제일교회를 담임하며 목회에 전념했다.
1938년 10월 12일에 개최된 제3회 기독교 조선감리회 총회에서 제3대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제7회 연회는 3개 연합연회로 “주 안에서 하나 되자”(One in Christ)는 표어를 가지고 1939년 5월 3일부터 10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렸다. 신임 김종우 감독이 취임한 후 첫 번째로 열린 연회였다. 이때는 일제가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는 때였기에 일본국기 게양,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전몰상이장병과 유족을 위한 묵도 등 일제의 암울한 종교탄압의 분위기 속에서 개최되었다. 이 연회에서 조선 감리교회 최고 책임자를 총리사에서 감독으로 부르고 신학교 주일을 1월 첫째 주일로 지키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그는 제6회 만주선교연회를 1939년 6월 1일부터 5일까지 신경교회에서 개최하였다. 그러나 김종우 감독은 제7회 합동연회만 개최하고 그해 악성 패혈증에 결려 9월 17일에 별세하였다. 그가 별세한 후 여러 목사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김 감독은 행복한 사람이야, 이 오욕적인 시대를 모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야”라고 했다. 장례식은 1939년 9월 21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양주삼 목사의 주례로 감리교회장(葬)으로 치러졌고 그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월계리(陽州군 蘆海面 月溪里, 현재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동)에 안장되었다.
이처럼 김종우 감독이 이끌던 시기는 한국교회가 일제에 굴절하는 치욕의 시기였다.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총회원 일동이 평양 신사에 참배했고 감리교 총회원들도 경성 신궁에 공식으로 참배했다. 이처럼 비참하게 한국인의 기독교 신앙이 일제의 무력에 힘없이 꺾이고 말았으니 한국교회는 일제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점점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김종우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