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렸더라면 / 양선례
이번 설날 모임에 광주 여동생이 장염으로 오지 못했다. 친정 형제간 중 셋째로 나와는 7살 차이가 난다. 같은 교직에 있기에 시간 맞추기도 좋고, 마음도 잘 맞아서 방학이면 자유 여행도 여러 번 갔다. 비행기 표와 숙소 예약, 현지 통역까지 모두 동생이 해주고 나는 따라만 가는 여행이라서 더 부담이 없다.
내가 대학교 1학년이었을 때 동생은 겨우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맏이인 내가 잘해야 동생들도 따라 한다고 엄마는 동생이 잘못했을 때도 나를 혼냈다. 아버지 몫까지 일해야 하는 엄마는 늘 바빴다. 새벽 일찍 우리가 자고 있을 때 아침밥을 해 놓고 나가셨다. 저녁 늦게까지 일할 때도 많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저녁 식사 준비는 자연스럽게 내 차지가 되었다. 방학이면 동생들 밥 차리고 설거지와 빨래도 해야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올빼미과인 나는, 아침잠이 많다. 일찍 깬 동생들은 내가 일어나서 밥 차려주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주말에는 군것질거리를 만들었다. 만드는 법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다. 그저 한 번 먹어 본 것을 비슷하게 흉내만 냈을 뿐이지만 모든 것이 궁핍했던 그 시절엔 그조차 별미였다. 밀가루에 약간의 막걸리와 베이킹파우더를 섞어 반죽하여 아랫목에 두면 부풀었다. 그사이 물을 몽땅 부어서 팥을 삶았다. 팥이 거의 익을 무렵에 사카린을 넣고 물이 거의 졸아들도록 약한 불에서 졸였다. 찜기에 베 보자기를 깔고 팥소를 넣어 둥굴납작하게 빚은 반죽을 올려서 찌면 찐빵이 되었다. 호떡이나 튀김도 했다. 달군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설탕을 넣은 공 모양의 호떡 반죽을 올려서 국대접으로 납작하게 눌렀다. 힘을 균등하게 줘서 옆구리가 터지지 않도록 하는 게 요령이다. 설탕이 흘러나오면 프라이팬은 찐득찐득해지고 달콤한 캐러멜 냄새가 나면서 금세 타 버렸다. 엄마는 밀가루 사 놓기가 바쁘게 없애 버린다고 혼냈다.
동생 돌보는 일도 내 차지였다. 광주 여동생이 아기였을 때였다. 여러 날 젖을 먹지 않고 울기만 했다. 밤에도 잠을 자지 않았다. 이대로 두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집에 우환이 있을 때마다 와서 궂을 해주는 이웃의 무당 할머니가 오셨다. 어른들은 동생이 이리된 건 업고 다니다가 거꾸로 떨어뜨려서라고 단정하며 나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사고가 난 곳으로 가서 굿을 해야 동생이 낫는다면서 그곳이 어딘지 추궁했다. 우리 골목에는 내 또래가 많았다. 친구들이 고무줄놀이하며 노는 동안 동생 업고 있느라고 함께 놀지도 못했던 나였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동생을 떨어뜨린 기억이 없는데도 어른들의 닦달에 울면서 골목 한 귀퉁이를 가리켰다. 무당 할머니는 그곳에서 푸닥거리했다. 내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화만 내는 어른이 무서워서,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했다는 자책까지 더해져 그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 동생이 대여섯 살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동생이 없어졌다고 야단법석이었다. 점심 먹기 전에 잃어버렸는데 여즉 찾지 못했다고 했다. 파출소에 신고도 해 둔 상태였다. 그날은 집 가까이에 있는 오일장이 열린 날이었다. 할머니와 장 구경 갔는데 잠깐 사이에 손을 놓쳐 돌아보니 동생이 사라졌단다. 예나 지금이나 광양 오일장은 꽤 크다. 백운산과 섬진강, 그리고 남해를 끼고 있어 산과 강, 바다에서 나는 산물이 고루 풍요롭다. 당연하게 사람도 많이 모여서 장날이 되면 시끌벅적하다. 곡식 파는 곳을 지나면 싱싱한 해산물과 생선 파는 곳이 백여 미터 이상 이어진다. 겨울이면 광양에서 나는 김과 마른 파래를 파는 곳도 여러 곳이었다. 장날 사다 놓은 김 한 톳은 다음 장까지 기다릴 새도 없이 빠르게 없어졌다. 내 몫으로 배당된 김 두 장을 최대한 여러 쪽으로 잘랐다. 그 한쪽에 밥을 올려 참기름과 깨를 뿌린 간장 한 방울을 떨어뜨려 쌈을 싸서 먹으면 밥 한 공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이맘때쯤의 겨울방학 점심은 언제나 김치 국밥이었다. 익은 김치에 멸치 몇 마리와 물을 몽땅 넣고 끓이다가 밥 한두 공기를 넣으면 완성이 된다. 식구는 많고 먹을 양식은 적은 우리 집에서 겨울을 나는 방법이었다. 없는 사람에게 겨울은 잔인한 계절이다. 겨우 살아가는 살림에 난방까지 해야 하니까. 겨울 추수가 끝나고 마루 앞에 곡식 가마니를 그득 쌓아 두거나, 광에 몇백 장씩 연탄을 쟁여두는 집이 부러웠다. 더 시골이었더라면 나무라도 할 텐데 그럴 수도 없는 읍내 한복판이었다. 농사를 짓지 않는 우리 집은 파 한뿌리까지 사 먹었다. 아버지는 버는 돈의 반을 술값으로 쓰셨고, 한창 먹성 좋은 우리는 돌아서면 배고팠다. 쌀도, 연탄도 다 부족했다.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일년 치 쌀을 한꺼번에 사서 방에다 쌓았다. 이제 막 도정한 쌀이 밥맛이 좋다는 걸 알면서도 젊은 시절 못해본 원을 그렇게나마 풀고 싶으셨단다.
동생은 사방이 깜깜해진 저녁 무렵에야 찾을 수 있었다. 잃어버린 곳에서 족히 20분 이상은 걸어가야 하는 먼 곳의 가게에서 발견되었다. 어떤 아주머니가 동생 손을 잡고 가는데 아이가 한 걸음 걷고 멈추고, 두 걸음 걷고 버티더란다. “지비 아요?” 가게 주인이 물으니 얼버무리면서 아이를 두고 갔다고 했다. 소식을 전해 듣고 한달음에 달려간 엄마를 보고도 동생은 가겟집 아이들과 어울려 노느라고 정신이 없더란다. 어른들은 자식 없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유괴했던 건 아닐까 추측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가지고 있는 성향이나 능력은 닮은 듯하면서도 다 다르다. 역할도 제각각이다. 맏이여서 일찍 친정을 떠난 나는 무슨 일 생기면 돈으로 먼저 해결하려고 든다. 막내 여동생은 엄마랑 목욕탕 가서 등 밀어드리고 오일장에서 팥죽 사 드리는 잔정 많은 딸이다. 반면에 둘째인 광주 여동생은 한때는 아픈 오빠 병원비 대느라고 청춘을 바쳤고- 당연하게 결혼이 늦었다.- 친정 올 때마다 폭풍 잔소리하며 집을 청소하는 등 당차면서도 엄마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한 딸이었다.
몇년 전 광주 여동생과 호주 멜버른을 여행할 때였다. 에어 비엔비로 잡은 숙소는 작았으나 깔끔했다. 계획도시여서 무료 셔틀버스를 타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로얄 보타닉 공원을 서너 시간 걷거나, 마음에 드는 찻집에서 오후 내내 차를 마실 수도 있다. 도서관 앞 계단에 앉아서 오가는 사람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도 재미났다. 하늘로 쭉쭉 뻗은 야자수가 야라강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었다. 노천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했던 그 도시는 야경이 특히 멋졌다. 군데군데 거리의 악사와 미술가, 공연팀이 있어 오가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그냥 거기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자유가 느껴졌다. 이 좋은 풍경을 우리 둘만 보아서 두고 온 가족 생각에 조금은 외롭기도 했던 여행이었다.
그때 그녀를 잃어버렸더라면 어땠을까.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서 이젠 친구처럼 함께 나이 들어간다. 존재만으로도 든든하고 편안한 동생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첫댓글 어린시절, 엄마는 가장 노릇을 하느라 고생 많이 하셨네요? 큰 딸은 엄마의 빈 자리를 채우느라 어려운 점이 많았겠어요. 글을 읽으며 어떤 상황이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래도 시간의 마술 덕분에 그조차 아름답게 기억한답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하.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인정 넘치는 추억이네요.그 내공이 쌓여 선생님 품이 그렇게 넓으셨군요.아름다운 추억에 함께 빠져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네. 선생님! 가난한 집 맏딸이라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부모님 다 계셔서 정신적으로 힘들지는 않았답니다. 칭찬 고맙습니다.
힘들었던 어린시절을 그나마 버티게 해 준 울 언니와 너무나 닮아서 한참 웃었네요. 얼치기 매잡과며 찐빵ㅎㅎ 그래도 그때는 세상 맛난 간식이었지요. 우리 세대의 큰언니들께 고마운 마음 가득입니다.
얼치기 매잡과에서 빵 터졌습니다. 맞아요. 칼집 대강 넣어서 매잡과도 많이 만들었네요. 팥죽과 콩죽, 언젠가는 설을 앞두고 옥고시도 만든 적이 있었지요. 생각보다 잘 만들었다고 엄마한테 칭찬도 받고요. 동생들은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요?
세상의 모든 큰언니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당신은 행복해야 할 마땅한 분들입니다. 큰언니들의 좋은 동생이 되야겠습니다. 다복한 언니네가 부럽습니다. 여행이 자유로운 때가 속히 오길 기도합니다. 언니의 다음 전성기를 위해서요.
은주네 큰언니는 진짜 존경스런 분이고, 나는 흉내만 낼 뿐이고. 은주가 왜 우리 자매를 부러워 해. 세상 다복한 집이더구만. 2년만 고생하면 마스크 벗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안되어서 아쉬울 따름이네. 고마워, 은주!
어릴 때부터 살림꾼이었네요. 예전에는 참 위험한 일이 많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가슴 철렁한 일인데...찾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어릴 적 먹었던 김치 국밥 생각이 나 며칠 전 끓여 먹었어요. 겨울이면 엄마가 한 솥 끓여 가족 모두가 앉아서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맛이 있었을까요? 저도 생각나서 몇 년 전에 끓여 먹었는데 그 맛이 아니더라고요. 그때보다 더 맛나게 조갯살도 넣고 그랬는데도 맛이 없어서 버렸답니다.
살림꾼은요. 그저 닥치니 마지 못해 한 거지요. 선배님 이번 글 참 좋았답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큰언니 미소, 뵐 때마다 아름다웠어요. 어쩌면 웃는 모습이 그렇게 천진할 수가 있을까요?
매사에 날 서 있는 저를 반성합니다. 품 넓은 마음의 여유가 얼굴에 스며들어 미소가 예쁘신 것 같아요.
저도 아홉 살 때부터 밥하고 집안 살림했답니다. 동생들 업고 찐빵 만들어서 부모님 일하고 계신 곳에 새참 내가고,
그래서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했나 봐요. 그 역할을 너무나 잘 해내신 것 같아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