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포비아:러시아 혐오의 국제정치와 서구의 위선
Russie-Occindent, une guerre de mille ans(2015)
기 메탕 지음, 김창진·강성희 옮김, 가을의아침 2022
옮긴이 서문
일방적인 서구 시각을 넘어 보다 균형잡힌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기
우리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현실’은 책상 위에 놓인 꽃병 같은 정물화가 아니라 실로 다양한 군상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입체적인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사람들은 대부분 ‘편견’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데 익숙하다. 스스로 어느 편도 아니라고, 중립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편견을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또는 그것을 애써 감추려고 할 뿐이다.
사회적 관점에서 편견은 충분한 근거 없이 다른 사람이나 특정 집단을 좋다거나 나쁘다고 생각하는 태도이다. 그것은 대개 근거 없는 판단과 감정적 어조라는 두 가지 기본요소에 기대고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우호적이거나 적대적인 태도는 가끔 자신의 단편적 경험을 과잉 일반화하거나, 더욱 빈번하게는 실제 개인적 경험도 없으면서 다른 이의 의견이나 외부에서 들어온 정보를 그저 추종하면서 만들어진다. 특정 인종(race)이나 민족(ethnicity)에 대한 편견은 대개 부정적이다. 일상생활에서 민족 편견은 흔히 개개인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지만, 또한 집단 전체나 그들의 정체성이 귀속되는 국가에 관한 부당한 관념을 포함하게 된다. 따라서 민족 편견은 그것을 가진 해당 국가의 특정 대외정책을 정당화하는 사회심리적 기반으로 작용하게 된다.
1978년 에드워드 사이드가 “서양인의 의식, 나아가 근대 서양의 제국 지배영역 속에 동양을 집어넣는 일련의 총체적인 표상의 체계”로서 ‘오리엔탈리즘’을 말했을 때, 그는 서구인들이 가진 민족 편견이 어떻게 그들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인식틀로 작동하는가를 보여준 것이다. 누군가의 정체성은 어떤 이의제기도 할 수 없을 만큼 명백히 객관적인 현실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그(들)에게 관심을 가진 상대방과 맺게 되는 상호관계에 따라, 그 상대방의 특별한 의도에 따라 규정되고 이용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민족 편견에 익숙하고 그것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서구인만은 아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어떤 인종이나 민족도 이런 편견의 숲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다만,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근대 서구인들이 비서구권에 대해서 갖게 된 인종·민족 편견이기 때문에 특별히 주목을 요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자 주제인 루소포비아(Russophobia)란 ‘러시아 혐오증 또는 공포증’으로 번역될 수 있는 용어로서, 러시아라는 국가와 러시아인 일반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가리킨다. 이는 러시아라는 국가 체제와 대외정책의 어떤 특성을 과장하거나 왜곡해서 그것들이 러시아인들의 열등한 민족성으로부터 연원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또 다른 버전의 ‘오리엔탈리즘’이다. 루소포비아는 서구가 러시아라는 강력한 상대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묶어 놓고 그 행동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프로파간다의 기본틀로 이용된다. 러시아의 평판을 깎아내림으로써 서구인들이 얻게 되는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이익이 적지 않기 때문에 루소포비아는, 그 실제적 근거의 존재 유무나 타당성과 상관없이,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매력적인 대외전략의 메뉴로 자주 등장한다.
멀리는 중세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리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루소포비아는 근대에 들어와 러시아제국이 나폴레옹의 침략을 물리치고 유럽의 강대국으로 떠오른 19세기에 특별히 강화되었다. 그리고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서구의 대중매체와 정치 언어에서 러시아를 대신한 소련은 ‘악의 제국’으로 표상되었다. 고르바초프가 ‘개혁’을 외치고 옐친이 탱크로 ‘민주화’를 밀어붙이던 1980년대 말-90년대 초, 그리고 2001년 9·11 사태 직후 반테러전쟁에 미국과 러시아가 협력을 다짐했을 때 루소포비아는 잠시 가라앉은 듯 보였다. 하지만 러시아가 유라시아 대륙에서 자신의 위상을 되찾고 다른 나라들처럼 자신의 국가이익을 지키겠다고 일어선 푸틴 시대에 이르러 루소포비아는 서방측의 유력한 대중 선전술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최근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미국과 나토, 러시아의 격화된 갈등은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의 하나이다.
루소포비아의 관점에서 보면 서유럽과 미국의 언론은 러시아의 평판을 조금이라도 훼손할 수 있는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자유’, ‘인권’, ‘민주주의’ 같은 용어들이 서구가 러시아를 공격하는 전가의 보도이다. 그런 개념들이 특히 근대 서구의 경험을 반영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따라서 문명권별로 인식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는다. 또한 미국과 서유럽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그런 가치들이 완벽하게 보장되는 것처럼 전제된다.
러시아와 어떤 관련이 있을 것처럼 보이는 사건이 일어나면 그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서구의 언론과 정치가들은 바로 러시아의 ‘팽창주의’, ‘후진성’, ‘독재정권의 음모론’을 고장난 유성기처럼 상투적으로 반복한다. 세계적 수준에서 미·소 냉전이 끝났다고 선언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헐리우드 영화에서 러시아인은 그 옛날 007시리즈의 악당 역할을 도맡고 있고, 영미권 TV 드라마에서 러시아인은 줄거리와 무관하게 뜬금없이 ‘나쁜 놈’으로 소환된다. 전 세계가 코로나 사태에 휩싸였을 때 ‘스푸트니크V’와 같은 백신은 그 효능이 낮아서가 아니라(사실은 기존의 어떤 백신보다도 효능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것이 러시아인들에 의해 개발되었기 때문에 서구에서 인정되지 않았다. 서구인들은 러시아인들의 과학적 탁월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거니와 그런 백신이 국제 시장에서 유통되면 자신들이 얻을 이익의 몫을 러시아인들이 빼앗아갈 것이라고 계산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한국에서 루소포비아는 무슨 상관인가? 루소포비아는 서구인들만의 특성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러시아에 대해서 갖고 있는 편견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현상이기 때문에, 한반도 접경국이자 ‘4대 강국’인 러시아에 대한 정부의 부정적·소극적 정책의 인식론적 기반을 제공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루소포비아는 19세기 말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하 저지라는 공통목표를 가진 영국·중국·일본의 합동 선동을 통해 당시 국제정세에 무지했던 한국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1880년 일본에 갔던 김홍집이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으로부터 『조선책략』이라는 책자를 받아다 조선 궁중으로 가져간 사건이 그것이다. 그 책략의 핵심이 ‘친중결일연미거아(親中結日聯美去我)’라는 구호였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러시아는 서구 열강 중 한반도에 대한 관심과 정책이 매우 소극적인 나라의 하나였음에도 ‘러시아 제거’가 가장 중요한 대외전략으로 거론된 것이다. 그리고 21세기가 시작된 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루소포비아는 언론계와 학계, 정계, 그리고 외교·안보 부문의 정책결정자들에게 깊숙이 스며들어있다. 이는 한국인 대부분이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러시아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강화하고 정부의 소극적인 대러시아 정책을 지속하는데 그럴듯한 심리적 근거를 제공해왔다.
조선이 러시아와 근대적 조약을 맺은 것은 1884년이었다. 다시, 한 세기가 지난 1990년 9월 한·소 수교를 이루고 이제 30년이 지났다.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거대한 이웃 나라이다. 하지만 모스크바는 서울에서 보이지 않는다. 평소 한국인들 가운데 과연 몇 명이나 러시아를 접경국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그저 막연하게 두렵거나 거리감을 느꼈던 모스크바를 근래 실제로 방문한 한국인들은 그 도시의 찬란한 아름다움과 문화적 풍성함, 매혹적인 사람들의 따뜻한 태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러시아는 가장 과소평가되고, 왜곡된 이미지를 가진 나라의 하나다. 러시아를 여전히 ‘소련’과 동일시하는 기성세대가 다수이다. 냉전 체제 하에서 한국전쟁의 경험과 남북분단체제의 지속, 그리고 지속적인 반공교육의 효과일 것이다. 압도적으로 서구 담론의 영향을 받는 언론인과 지식인, 정치인, 외교관의 대다수는 러시아가 주요한 국제정치 행위자가 아니거나 국제정세의 안정을 해치는 나라로 여긴다. 예컨대, 영미권과 서유럽에서 나오는 프로파간다성 정보가 의심없이 진실로 여겨지고 러시아에서 나오는 사실 발표가 오히려 프로파간다로 치부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서구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자주 그런 상황이 지속되어 왔는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한국이 여전히 유아적인 세계 인식, 국가이익 개념에 대한 거대한 무지라고 할 정도로 편견의 장벽에 갇힌 나라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모스크바에 대한 서울의 태도이다. 서구가 조장한 러시아 혐오증에 자신도 모르게 오랫동안 중독된 상태로 지내온 탓일 것이다. 이런 중독증은 이른바 보수우익 인사들만이 아니라 진보를 자처하는 자유주의자들의 경우에도 심하게 나타난다. 여기에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 현상유지 정책을 선호하고 여전히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적극적으로 알리는데 소극성을 보이는 러시아 당국의 태도 또한 한몫하고 있다.
서울에게 모스크바는 무엇인가? 모스크바를 안다는 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또 다른 세계를 안다는 것이다. 서구에서 유일하게 고전 문화예술이 살아 숨쉬는 나라, 유럽인의 얼굴을 하고 아시아인과 마음이 통하는 러시아는 유라시아 문명이라는 새로운 세계이다. 생활환경의 엄청난 차이에도, 한국인과 러시아인은 공동체성과 평등주의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광활한 시베리아 평원에서 유럽까지 펼쳐진 러시아는 한국인의 북방 정체성을 회복하는 계기 그 자체이다.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주변 4강 중 일관되게 ‘한국의 독립, 한국인의 자치 역량, 그리고 남북한의 평화체제 구축’을 지지해온 나라이다. 에너지와 식량안보 차원에서부터 세계에서 으뜸 수준의 과학기술 협력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북방 정책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파트너가 바로 러시아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미·중 전략경쟁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어떤 균형추를 찾고자 한다면 가장 가깝고 중요한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상대가 바로 러시아이다.
이 책은 서구의 루소포비아 현상을 역사적으로, 국제정치적으로, 사회심리적으로 아주 생생한 근거를 들이대면서 깊이 있게 파헤친 스위스 언론인 출신 기 메탕(Guy Mettan)의 저서를 옮긴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중세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 등 서방측이 동방교회 및 러시아에 대해 심지어 역사적 문서를 날조하고, 번번이 사실을 왜곡하고, 편견에 찬 자기중심적 해석을 일삼아 왔는가를 구체적 사례들을 통해 낱낱이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사실은 ‘서구 문명’이라는 정체성의 결여 탓임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서구인들이 국제문제에 대해 상대방과 자신들에게 전혀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는 이중성과 위선적 태도의 이면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저자의 목적은 러시아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도 서구 국가들만큼 자신의 정체성과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국가라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옮긴이의 가장 큰 바람은 이 책을 누구보다도 먼저 우리 언론인들과 외교관 그리고 지식인들과 정치가들이 읽는 것이다. 그들이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를 비롯해 세계를 보아온 기존 시각과 인식틀이 얼마나 일방적인 것이었는가를 깊이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를 주리라 믿기 때문이다.(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