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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반격: 포퓰리즘과 팬데믹 이후의 정치
The Great Recoil(2021)
파울로 제르바우도 지음, 남상백 옮김, 사단법인 다른백년 2022.
결론
거대한 반격이 진보정치에 끔찍한 전망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같이 ‘자신으로 회귀하는’ 정치적 순간에도 한줄기 희망은 존재한다. 현시대는 제어되지 않는 자본주의가 지닌 위험에 관해 사회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동시에, 팬데믹은 우리 모두가 다른 이들의 행동, 그리고 우리 개개인과 공동의 생존을 관장하는 집단적 구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자명한 사실로 만들고 있다. 더욱이, 기억Erinnerung에 관한 헤겔의 견해를 따라 거대한 반격은 단순히 죽어가는 시대의 종결부가 아니라, 지양Aufhebung 또는 부정sublation 국면의 도입부, 곧 현 세계질서가 극복되고 새로운 세계가 출현하는 시기에 해당한다. 30년간의 걷잡을 수 없는 신자유주의가 낳은 오류, 그리고 자본주의적 혁신의 질주본능으로 인해 내버려진 이들의 불만이 요약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프랑스어 관용구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reculer pour mieux sauter’에 표현된 대로, 전진하기 전에 필요한 후퇴국면에 서 있다. 현재는 반격에 성공하고 정의가 결국 승리할 수 있는 국면에 해당하지만, 또한 신자유주의 실패를 넘어서서 미래사회로 나아가는 변혁계획을 마침내 상상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책의 논의를 진행하면서,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거짓말이 드러남에 따라 2010년대의 만성적 위기가 최종단계에 이르게 된 과정을 확인했고, 서로 현저하게 다른 형태의 사회적 규제와 경제적 거버넌스를 동반한 새로운 세계의 윤곽을 제시했다. 신자유주의가 쇠퇴하고 포퓰리즘과 극심하게 대립하고 있는 현실은 팬데믹 충격이 낳은 공통 감각의 변화로 인해 더욱 악화되면서 보호적 신국가주의의 출현을 낳고 있는데, 이 같은 신국가주의는 기존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틀에 해당하는 신자유주의를 대체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봉쇄, 격리, 팬데믹 통제, 대규모 백신접종 캠페인, 임시 유급휴직 프로그램, 대규모 공공투자계획 등 이 모든 현상은 적극주의 국가로의 회귀를 나타낸다. 한편, 도래하는 기후 비상사태를 고려해 이미 필요하다고 여겨졌던 수준을 넘어서는 보다 많은 정부개입의 필요를 일반사람들이 인정하는 정도가 점점 더 늘고 있다. 이 같은 급격한 전망의 변화 속에서, 한 세대 동안 많은 이들에게 헤게모니를 행사했던 개인주의, 자유시장, 규제완화, 주주자본주의 같은 핵심적인 신자유주의 개념들은 점점 더 옹호하기 어려워졌고, 이데올로기적 지평이 급진적으로 재편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치적 뉴노멀
현재의 이데올로기는 부정적으로,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와의 대비를 통해서만 정의되지 않는다. 현재의 이데올로기는 또한 자신만의 독특한 내용을 지니는데, 호황을 누리던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와 근본적으로 다른 가상을 환기시키는 새로운 정치적 키워드의 출현을 특징으로 한다. 이 같은 변화를 가장 잘 대표하는 정치 어휘는 신국가주의의 삼위일체에 해당하는 주권-보호-통제이다.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 등장한 정치적 ‘뉴노멀’의 핵심을 차지하는 이 같은 강력한 기표들은 정치체의 회복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현대의 정치적 과제와 관련된 전망을 떠올리게 만든다. 곧 경제적 세계화가 유발하는 혼란에 맞닥뜨려 사회적 응집과 국가능력을 복원하고, 이 같은 세계화가 초래한 탈구와 노출감각을 치유하는 과제 말이다. 이 같은 기표들은 안정, 안보, 안전에 대한 욕구를 표현하는데, 이런 욕구들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우세하던 파괴적인 근대화의 추구와 마찰을 빚고 있다. 실제로, 여러 측면에서 이런 욕구들은 신자유주의 담론과 그 세 가지 요소에 해당하는 개방성, 기회, 기업가정신의 전도를 나타내는데, 이 같은 담론은 개인의 창조성과 민간부문의 주도권의 힘이 충분히 발휘되도록 모든 사회체계, 제도, 조직의 빗장을 풀어야 할 필요를 주장했다.
만약 이 같은 유혹적인 신자유주의 용어들이 현재 신국가주의적 대안들로 대체되고 있다면, 이는 신자유주의가 기수노릇을 한 정치프로젝트들이 처참한 결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개방성은 (국제경쟁에 대한-옮긴이) 노출로, 기회는 사회적 지위의 하락으로, 기업가정신은 탐욕의 대명사로 바뀌었다. 이런 측면에서, 신국가주의적 정치 어휘는 급격하게 변화된 사회적 조건을 이해하고, 정치적 신념과 관계없이 더는 무시될 수 없는 사회적 편견을 바로잡으려는 합리적 시도에 해당한다. 신자유주의 호황 동안 성장과 풍요의 꿈이 특히 중간계급의 많은 유권자들을 유혹했지만, 경제적 긴축상황에서 이 같은 꿈은 더는 당대의 현실과 관련이 없어 보인다. 현재의 정치논의는 사회의 존속에 필수적인, 최소한의 조건을, 재확립하는 목표를 회복하는 일에 초점을 두고 있다. 곧 성장보다는 지속가능성, 재건, 복구 등의 사안에 집중하고 있다.
프스트 신자유주의적 신국가주의의 특징인 내향정치의 핵심을 차지하는 보호, 안정, 안보, 주권에 대한 약속은 21세기 초에 드러나고 있는 쓰라린 현실에 대한 보다 적절한 대응에 해당한다. 경제적, 사회적 퇴행을 보여주는 현 국면에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적 표현들은 생존, 안정, 재생산, 곧 미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힌 세계에서 질서의식을 재확립하려는 욕망과 관련된 정치의 본능적 측면을 두드러지게 만든다. 주권, 보호, 통제는 십 년간의 경제 위기와 정치 불안 뒤에 모습을 드러낸 정치의 원점에 해당한다. 이 같은 요소는 40여 년간의 신자유주의 지배가 낳은 불확실성의 정도, 그리고 사회, 정치와 경제의 관계, 국제관계 체계라는 세 가지 영역과 관련해 각기 서로 다른 균형점을 찾을 필요를 두드러지게 만든다.
포스트 신자유주의 좌파와 우파가 공통의 전문용어를 공유한다는 사실이 (토니 블레어를 포함한 몇몇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한 대로) 현재의 신국가주의 국면이 급진우파와 급진좌파가 공모하는 국면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 책의 논의 과정에서 확인한 대로, 2010년대의 포퓰리즘 국면과 2020년대 초의 국가주의적 전회는 그 지향이 정확히 반대를 가리키는데,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극단들이 서로 마주치게 된다. 이 같은 수년간의 극심한 양극화 과정 동안 신자유주의적 교착상태를 해결하려는 급진적 대안이 탄생하고 적대적인 사회적 블록들이 형성되고 있다. 포퓰리즘 국면은 강력한 좌파와 우파 정체성의 부활로 이어지고 있는데, 곧 한편으론 민족주의, 다른 한편으론 사회주의의 부활로 이어지고 있다. 민족주의 우파와 사회주의 좌파 모두 엘리트에 맞서 인민에 호소하는 반면, 이들은 매우 다른 엘리트를 염두에 두고 있다. 또한, 이들 모두가 더욱 강력한 국가의 필요를 이야기하는 반면, 국가에 대한 이들의 전망은 극심한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현대정치의 담론을 구성하는) ‘주권’, ‘보호’, ‘통제’, ‘안보’, ‘안정’ 같은 용어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적 대응이 이뤄질 수 있는 유연한 사회적 요구로 이해하는 편이 가장 좋다. 우파의 대응은 유산자보호주의에 중점을 두는데, 이는 민족주의적 공동체주의를 초개인주의와 결합시킨다. 주권에 대한 우파의 공격적인 주장(‘미국이 우선이다America First’)은 ‘단순한 임시 거주자resident’나 ‘거류민inhabitants’에 대한 ‘완전한 시민권자’의 우위, 그리고 ‘노동자’에 대한 ‘기업소유주’의 우위를 긍정하는 일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재산에 대한 옹호를 약자에 대한 강자의 다원주의적 우월론과 결합시킨다. 좌파의 경우, 신국가주의 담론은 그 대신 사회보호주의의 형태를 띠는데, 이 같은 담론에서 보호요구에 대한 대응은 사회, 보건, 환경을 보다 많이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통해, 그리고 취약성을 느끼는 인민에 대응하는 사회적 지원체계를 강화하는 한편 사회적 호혜성과 연대를 보강하는 돌봄의 정치를 통해 이뤄진다.
역사는 이 같은 새로운 이데올로기 전망에서 좌파, 우파, 중도파 중 어느 쪽이 헤게모니를 쥐게 될지를 결정할 것이다. 실제로, 최근까지도 포스트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전투에서 민족주의 우파가 승리할 것이라 예상됐던 반면, 이 같은 우파가 팬데믹 과정 동안 반과학적 회의론을 수용함에 따라 겪게 된 곤경은 아직 승패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이며 이데올로기적 이행이 여전히 유동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민족주의 우파의 일시적인 퇴각은 신자유주의 중도파의 일시적인 복귀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는 또한 사회주의 좌파가 기회를 잡을 준비를 해야 할 시기이기도 하다.
보호 중심 사회주의
거대한 반격의 신국가주의적 전회는 오랫동안 폐기됐던 사회민주주의 아이디어의 부활을 요청한다. 보건의료 공급과 복지보장 범위의 확대, 케인스주의 통화완화와 수요관리, 그리고 심지어 국유화와 계획 등 신자유주의가 유럽 사회민주주의 나라에 침투한 1990년대 동안 존재했던 이 같은 모든 금기사항은 사람들이 고장 난 경제 시스템에 대안을 제시하려 시도함에 따라 다시 한 번 논의선상에 오르고 있다. 버니 샌더스와 제러미 코빈과 연관된 민주적 사회주의의 부활,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로 대표되는 ‘밀레니얼 사회주의’의 부상은 분명히 커다란 관심과 함께 주목을 얻고 있고, 기업의 과두지배층에게는 잠재적인 악몽이 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부활이 지닌 위험은 이 같은 부활이 당대 현실과 어떤 관련도 없는 향수적인 경향의 움직임으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내가 이 책 전체에 걸쳐 주장한 대로, 현 상황에서 사회주의의 부활은 사회보호주의라는 방침을 따라 전개돼야만 한다. 곧 사회보호와 민주적 통제라는 문제를 핵심으로 하는 ‘보호 중심 사회주의socialism that protects’를 따라 전개돼야 한다.
사회보호주의는 평등에 대한 전통 사회주의의 헌신과 사회적, 환경적 안전의 추구를 결합하는 일을 수반하고, 시민들이 비록 생존 자체는 아닐지라도 자신의 살림살이를 위태롭게 만드는 실존적 위험으로 인해 위협을 느끼게 되는 시대적 배경이 전제된다. 사회보호주의는 인구 대부분이 현재의 혼돈에 관해 품는, 너무나 합리적인 공포에 대응하는 일, 그리고 이 같은 극심한 불확실성의 시기에 대처하는 새로운 공공기관과 복지 공급을 구상하는 일을 의미한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현재 고전철학이 앞서 제기한, 정치가 수행하는 보호기능의 부활을 요구하는 많은 사회적 불만이 존재한다. 수백만 명을 빈곤 상태에 빠트리는 치솟는 실업률에 맞서려면 사회적 안전망의 복구, 그리고 보편주의적 복지 공급과 실업자에 대한 일자리 보장의 확립이 필요하다. 유사하게, 폭주하는 세계화는 전략산업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되찾는 보호주의 조치의 필요를 낳았는데, 이 같은 조치는 파괴적인 디지털 독과점으로부터 전략산업을 보호하고 글로벌 금융의 약탈로부터 지역경제를 보호하는 데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의 상실이 불러온 환경재해는 기후변화의 완화와 적응, 안전강화와 토지보호 등 폭넓은 조치를 요구한다.
이처럼 보호에 초점을 맞추는 일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공허함에서 벗어나 좌파의 우선순위를 급진적으로 재구성해야 함을 의미한다. 보호가 현재 좌파에게 친숙하지 않은 개념처럼 들린다는 사실은, 오랜 시간 동안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제도가 지닌 정책들이 다양한 개념들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곧 사회적 지위상승, 경쟁, 혁신 등과 더욱 관련된 사회적 열망이라는 신자유주의 정치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빌 클린턴, 토니 블레어, 게르하르트 슈뢰더 같은 중도좌파 지도자들은 1990년대에 신자유주의 복음을 수용하면서 복지와 노동 공급의 약화에 가담했고, 소유적, 개인주의적 틀을 수용했다. 이들은 사회적 안전망과 노동자 조직을 민간부문의 주도권과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족쇄로 여겼고, 온정주의적이고 반反기업가적으로 보이는 정부의 보호에 의구심을 갖게 됐다. 제3의 길에 대한 지지자들의 가상 속에서, 보호는 자유무역주의,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개방성과 기업가정신과 반목하는 퇴행적 태도와 동일시됐다.
현재 신자유주의의 쇠퇴를 고려할 때, 전후 사회민주주의 정신을 어느 정도 회복할 필요가 있는데, 영국에서 ‘1945년 정신’이라 불린 이런 정신은 전후 초기 NHS와 복지국가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현시점에서 이 같은 사회보호의 전통에 기반해, 이런 전통을 환경주의에서 페미니즘에 이르는, 새롭게 등장하는 대의명분에 담긴 평등주의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역사의 흐름에서, 좌파는 자기만의 보호개념을 추구해왔다. 좌파는 계급연대와 사회적 돌봄, 그리고 사회에서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한 부문들의 살림살이를 보호하는 일을 위해 싸워왔다. 좌파는 일자리 상실과 경제적 탈구를 초래하는 정책 대신에 기술향상의 이익이 동등하게 공유되도록 보장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디지털 독과점의 시대에, 좌파는 공평한 과세를 위해 싸우고 조직화된 노동의 권력을 신장시켜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생산성 향상은 마침내 임금인상과 생활수준의 진전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된다.
‘보호 중심 사회주의’라는 프레임의 채택은 좌파가 근대화와 기술변화에 대한 태도를 재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몇 년간, 좌파 쪽의 다양한 목소리에 따르면, 아찔한 기술혁신의 속도가 자본주의의 종말과 더욱 공정한 질서의 시작을 앞당길 수도 있을 것이라 주장된다. 이 같은 주장은 포스트 자본주의적 ‘가속주의accelerationism’의 주창자들과 연관된 입장에 해당하는데, 닉 서르닉Nick Srnicek, 폴 메이슨Faul Mason, 아론 바스타니Aaron Bastani 같은 저자들이 이런 주제를 다뤘다. 마르크스와 레닌에게서 발견되는 생산력 발전에 대한 강조로의 회귀는 현재의 역사적 곤경과 상충하는, 프로메테우스주의적인 낙관주의를 무심코 드러내는데, 이 같은 관점에서 기술진보는 공산주의 혁명의 전제조건으로 여겨졌다. 2010년대 중반의 가속주의가, 최근 수십 년 동안 좌파의 구상이 실패하고 그 결과 현재의 빈약해진 전망 너머를 상상하는 데에서 좌파의 무능력함을 드러내는 현실에 대한 반가운 해결책을 대표했던 반면, 현재 시점에서 이 같은 입장은 기술이나 환경위기를 통해 쫓겨나고 있는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현재의 역사적 정세는 다른 형태의 정치적 가상을 요구하는데, 곧 칼 폴라니의 용어로 ‘개선improvement’에 대한 ‘거주inhabitation’의 우위를 재천명하는 일을 조건으로 하는 가상을 요구한다. 구조적 관점에서, 현재 지형은 자본주의적 축적 속도의 둔화와 이 같은 축적의 재영토화를 통해 규정되는데, 이런 상황은 결국 자본주의가 일종의 탈출 속도에 도달하고 있다는 의견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같은 상황은 좌파에게 반드시 나쁜 징조만은 아니다. 많은 경우, 사회주의적 가능성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의 위기와 불황이라는 조건에서, 자본주의가 무력함을 드러내는 국면에서, 그리고 강요된 근대화에 맞선 봉기의 국면에서 새롭게 출현해왔다. 혁명은 반드시 자본주의의 생산력의 가속화에 따른 산물이 아닌데, 잘 알려진 대로 그람시가 러시아 혁명을 ‘《자본론》에 반하는 혁명’으로 기술했듯이 말이다. 발터 벤야민은 잘 알려진 대로 이 같은 태도를 좀 더 밀고 나갔다. 벤야민은 마르크스가 혁명을 ‘세계 역사의 기관차’라고 본 데 반해, 실제로는 대개 이와 다르다고 말했는데, 곧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인류가 비상브레이크를 잡아당기는 행위”와 유사한 모습을 띤다고 말했다. 이런 관점은 현대의 ‘외부화’된 자본주의라는 특성을 통해 특히 현실과 들어맞게 되고, 자본주의에 대한 이 같은 저항은 글로벌 흐름의 속도를 저지하는 마찰을 일으키는 일을 수반하게 된다.
현재, 새로운 국가 리바이어던에 의한 사회저항과 사회보호를 필요로 하는 위협으로 여겨지는 요인에는 기술과 자동화의 위협뿐만이 아니라, 국제적인 통상, 금융, 관광 등의 분야에 속한 글로벌 세력이 포함된다. 새로운 기술은 유의미한 사회개선과 생산성 향상을 이루는 일 없이 (기술경쟁에 대한-옮긴이) 노출을 초래했다. 보호 사회주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애호하는, 근대화를 위한 근대화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술변화와 근대화는 ‘길들여져야’ 하며, 또한 기술이 사회제도에 착근돼 사회가 변화의 충격을 흡수하게 만들 수 있는 보호 메커니즘이 수반되는 한에서만 우리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
현대정치에서 이 같은 보호의 우위는 일반적으로 다양성, 관용, 국가 간 대화를 높게 평가하는 사회를 뜻하는 열린사회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실제로, 진정한 개방성의 조성은 오직 사회보호를 보장함으로써만 가능한데, 곧 최소한의 안전감을 조성하고 어느 때보다도 분명해지고 있는 매우 다양한 위협에 대한 보호막을 구축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개방시장의 침략에 대한 방어수단이 미비하고, 어느 때보다도 더욱 복잡해진 사회적 상황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생계수단이 제공되지 않는 현실을 고려할 때, 사람들이 위험에 완전히 노출될 경우 이 같은 노출에 대한 대응 중 하나가 민족주의 우파가 제공하는 후퇴 형식일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는 분명히 공포의 시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공통의 위협에 맞선 싸움에서 새로운 일체감의 근원, 그리고 불굴의 현실주의에 근거한 신뢰할 만한 희망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사회주의 공화국의 건설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위를 재천명하는 일은 국가능력의 복원, 그리고 이와 연계된 민주적 통제의 확대를 요구한다. 이 책에서 설명한대로, 신자유주의 시대의 영적 세례는 사회민주주의적 합의, 곧 자본이동을 통제하고, 환율과 임금의 변동을 통제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를 안정화한 케인스주의 제도를 폐기하고, 정부당국을 단순히 시장경제의 촉진자와 수호자로 환원하는 일로 구성됐다. 현재의 보건위기와 기후위기의 관점에서, 돌이켜보건대 이 같은 태도는 놀랄 만큼 무모한 일이었던 듯하다. 신자유주의는 팬데믹 과정 동안 효과적이지 못한 것으로 증명됐는데, 산소호흡기와 마스크의 공급에 생사가 걸린 시기에 글로벌 시장은 사람들에게 이 같은 물품을 공급하는 데에서 무능력함을 분명하게 드러냈고, 민간주도로 대처할 수 없는 집단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정부개입이 불가피했다. 눈앞에 놓인 과제들로 인해 사회적 도전과 위협에 대처할 목적에서 방대한 자원을 동원하는 국가능력의 갱신이 요구되고 있다. 이를테면 사회적 응집을 가능하게 만들고 불평등을 줄이는 일과 관련된 공공주택, 복지지원, 교육시설, 지역사회 기반 이니셔티브 등에 대한 투자가 요구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기후변화 정책의 사례를 통해 특히 사실로 확인된다. 이런 사례에서는 환경보호가 지닌 우선순위에 새로운 시급성을 부여하려고 2020년에 호주와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산불재해를 동시대적 격변에 포함시켰다. 주요 연안의 보호, 에너지생산을 탈탄소화하기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 운송과 식량체계의 점검, 백신의 개발과 배분 등의 문제는 모두 앞으로 몇 년 동안, 유례없는 수준의 집단적 동원과 정부개입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포스트 신자유주의적 보호 국가주의의 출현은 새로운 정치적 딜레마와 적대를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 국가개입과 발전주의의 귀환이 반드시 진보를 향항 길이 아니라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엘리트주의세력이 단순히 불평등한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주의를 이용하려 할 것이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는 없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많은 정부들이 코로나19 위기 과정 동안 자본주의 기업들에게 수십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이는 2008년에 모습을 드러냈던 ‘은행가를 위한 사회주의’의 희극적인 요약 반복에 해당한다. 심지어 정부가 도산하는 기업을 구제해야 할 때도, 자유주의 ‘전문가들’은 국가가 기업의 이사회에서 손을 떼고 시장의 신비로운 과정이 방해받지 않고 펼쳐지게 내버려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2020년대에는 일종의 국가가 뒷받침하는 독점 자본주의의 출현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이 같은 독점 자본주의에서 정부권력은 대기업과 사적 개인의 이해관계가 재분배라는 지상명령의 준수를 모면하게 해주는 구명조끼로 사용된다. 분명한 점은 팬데믹이 국민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성공해온 권위주의 정부의 안정성을 높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어떤 방식이든 신자유주의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판단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우리는 부상하는 국가주의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저항이 증가하고, 노동자와 시민에게 처참한 결과를 가져다준 최악의 팬데믹이 종식되는 대로 긴축정책을 시행하라는 압력이 증가하는 상황을 목격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퇴행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국가주의의 위험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긴축요구의 주기적인 귀환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좌파는 적극주의 국가가 진정한 혼합경제의 재건을 목표로 삼게 만들어야 한다. 이 같은 혼합경제에서 강력한 정부부문과 유도계획은 (침체된 비도시 지역에 사는 이들, 임금 불평등에 마주한 이들, 특히 여성, 소수집단, 청년 등 불안정과 실업으로 고심하는 모든 이를 포함하는) 사회 내 사회경제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한 부문들의 필요를 돌보는, 탄탄한 복지국가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현재 미국에서 그리고 조금 덜한 정도로 유럽연합에서 나타나는 자유주의적 재정렬은 좌파 전략의 재고를 요구하고 있다(이를테면, 유럽연합 회복기금의 맥락 안에 있는 마리오 드라기Mario Draghi의 ‘착한 부채good debt’ 사례) 바이드노믹스는 현재의 사회적, 환경적 위협의 중대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바이든은 한 세기 전의 루스벨트와 케인스처럼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제도를 수선하고 이 제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을 목표로 한다. 눈앞에 놓인 과제는 신자유주의적 긴축에 대한 좌파의 비판을 넘어서 국유화, 작업장 민주주의, 사유재산의 재분배에 대한 사회주의적 요구에 새롭게 주목하는 쪽으로 변화하는 일에 놓여 있다. 방대한 공공재원 지출에는 지출결정에 대한 실질적 통제가 수반돼야 한다. 적극주의 국가를 단순히 민간기업의 구세주에 그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이 같은 국가는 잇따른 시장실패를 보상하는 과정에서, 일반 시민들에게 더욱 많은 부채를 떠넘기면서도, 그 대가로 권력은 주지 않게 된다. 새로운 보호주의 국가는 생태적 전환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전략자산에 대한 통제를 되찾아야 한다. 현재 종종 민족국가 자체의 권력을 능가하는 권력을 보유한 대기업들은 해체돼야 하고, 가능한 경우 국유화돼야 하며, 부유한 자산은 다시 한 번 징벌적 과세의 대상이 돼야 한다. 어떤 경제도, 어떤 사회도 두 번 다시는 이데올로기적 유산자주의proprietarianism, 그리고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그 제도들의 변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 시대의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 중 하나는 오랫동안 신뢰를 잃어온 국가계획의 귀환이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신자유주의자들은 어떤 형태의 계획이든 이단으로 여겼는데, 왜냐하면 자유시장이 자원배분의 과정에서 탁월한 지혜를 발휘한다는 가정이 자명한 사실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이 같은 계획이 자유시장에 지침을 도입하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령경제command economy의 일환인 의무계획mandatory planning에 대한 비판의 정당화는 또한 결국 보다 완화된 형태의 유도계획을 불신하는 일로 끝나게 됐는데, 유도계획은 목표설정과 엄격한 규제를 포함했고, 1980년대까지 대개 혼합경제에서 사용됐다. 국가계획은 생태적 전환과정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생태적 전환과정에서 탄소거래 같은 시장 메커니즘이 탄소배출을 제한하는 데 실패해온 한편, 대부분의 기업들은 독자적으로는 전략적이고 장기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것으로 증명됐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는 비상시기에 자원을 모으는 과정에서 국가가 수행하는 필수 불가결한 역할을 분명하게 만들었다. 이 같은 위기과정에서 필수적이라고 증명된 일은 영속성을 띠게 될 것인데, 말하자면 만연해진 위험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신속히 개입하는 일이 이런 사태에 해당한다. 궁극적으로, 그 이름에 걸맞은 어떤 진정한 민주주의도 국가가 경제정책 노선을 구성하는 고유의 능력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진보주의자는 또한 국가권력의 활성화가 테크노크라트 사회의 증대로 이어지는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 사회주의의 이 같은 관료제적 전회에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테크노크라시로의 전화가 더해진 상황은 특히 노동계급 사이에서 궁극적으로 이런 이데올로기적 경향 모두가 신뢰를 잃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전문가와 테크노크라트가 무지한 상태에 놓인 시민을 통치하고 대표하게 되는 함정을 피하려면, 새로운 민주주의 제도와 절차가 시행돼야 한다. 모든 중요한 경제적 결정은 다시 한 번 집단적 숙의와 민주적 토론의 산물이 돼야 한다. 국가와 인민주권 둘 다를 재천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수단의 범위는 노조에 유리한 입법에서부터(노조의 감소는 임금정체, 그리고 경제 산출량 중 노동자 몫의 축소로 이어지고 있다), 노동자의 기업이사회 참여와 중소기업 관련 협동조합의 육성에까지 이른다. 경제와 사회를 열린 체계로 보고, 역사를 오로지 우연 그리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의 산물로 보며, 국가가 투과되지 않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신자유주의적 견해를 넘어서 오직 인민의지를 향해 나아가는 길만이 시민에게 보호를 가져다주는 동시에, 또한 유의미한 수준의 통제를 부여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수립을 보장할 수 있다.
정치의 본국 회귀
이 책의 핵심주제는 정치공동체의 장소적, 영토적, 성격을 받아들이고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초래한 탈구 감각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에 관한 것이었다. 거대한 반격이 가져다준 한 가지 깨달음은 지리가 중요하며, 정치적 정체성이 감히 무시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코즈모폴리턴 자유주의자와 급진 좌파주의자는 탈영토화된 글로벌 민주주의, 곧 국경없는 세계라는 환상에 재미삼아 빠져들었다. 장소권력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는 일과 관련된, 영토적으로 규정된 공동체의 권리를 받아들이는 일이 필수적이다. 신자유주의 외부화는 지역과 민족 규모를 시작으로 하는, 인접한 사회정체화의 수준에서 권력을 떼어내는 결과로 이어졌다. 정치적 결정이 시민의 직접적인 경험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멀어지고 테크노크라트의 지배를 받는 상황은 민주적 통제가 결여됐다는 널리 퍼진 인식의 근거가 된다. 이 같은 탈구는 민족주의 우파에게 한 맺힌 상처로 작용하는데, 대개 민족의 권리와 열망에 맞서 글로벌 신질서가 지칠 줄 모르고 작동한다는 음모론에 영향받은 배신과 분노의 서사가 제시된다.
우파는 민족 편에 존재하는 것으로 자신을 프레이밍함으로써, 좌파를 세계화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함정에 빠트리려는 계략을 꾸며냈다. 하지만 세계화에 대한 비판을 처음 발전시킨 세력이 좌파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같은 계략은 점점 근거를 상실했고 터무니없는 주장임이 드러났다. 선거에서 경쟁력을 갖길 바라는 모든 민족주의 반대세력은 민족정체성의 존재, 그리고 정치체에 속할 자격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민족정체성의 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 같은 견해가 내가 옹호하는 민주적 애국주의의 정신에 해당한다. 하버마스의 헌정 애국주의와 대조적으로, 이 같은 애국주의가 뜻하는 것은 공통의 제도적 틀에 대한 추상적인 집착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언제나 정체화가 이뤄지는 구체적인 장소에 근거한다는 인식인데, 곧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혁신 중 하나인 민족이 여전히 탁월한 장소에 해당한다는 인식을 의미한다. 주세페 마치니의 통찰을 따라, 민주적 애국주의란 평등과 자유라는 사회주의적 목표를 특수한 장소, 관습, 어법에 정박시키는 일을 의미하며, 여기에는 진정한 보편주의란 오직 특수주의를 통과하는 여정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포함된다.
이 같은 접근은 또한 좌파의 선거전략, 그리고 합의를 둘러싼 싸움을 다시 사고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최근 몇 년간 사회주의자들의 기반은 대도시 중심과 진보적 도시 중간계급과의 과잉동일시로 인해 크게 약화됐다. 진보적 도시 유권자와 중간계급의 거품을 넘어서는 데에서 드러난 무능력함은 최근 좌파가 패배한 주된 요인이 됐다. 좌파의 부르주아화와 관련된 일부 서사는 부풀려졌고, 우리가 살펴본 대로 좌파의 사회적 블록에는 또한 서비스 프레카리아트ᄀᆞ 포함됐는데, 이들은 가장 참기 힘든 몇몇 노동조건, 특히 빈약한 급여조건에 맞닥뜨리고 있다. 그러나 진보주의자가 비도시 유권자, 특히 지방지역 산업노동자의 불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데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사회주의 좌파가 세계화의 파괴적 효과를 가장 뚜렷하게 경험한다고 느끼는 도시주변과 도시외곽 지역의 우려에 대응하는 정책을 개발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 같은 목표를 성취하는 일은 레토릭 수준의 호소를 넘어서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침체된 지역의 지역발전에 대한 대규모 투자뿐만 아니라, 너무나 오랫동안 좌파가 승리할 수 없다고 여겨진 주변부 지역의 활발한 조직화 노력을 요구할 것이다.
애국주의를 탈환하려는 진보는 세계화의 위기에 대처할 필요가 있는 반면, 이 같은 대처는 키어 스타머Keir Starmer의 지도 아래 신노동당이 그랬듯이 결코 보수적 전회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돼서는 안 된다. 내가 주장한 대로, 민족주의 우파가 동원해 많은 논란을 일으킨 ‘문화적 백래시’, 그리고 공적 영역에 침투한 인종주의, 고루한 편견, 노골적 파시즘의 물결은 오직 글로벌 경제의 하락국면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만 해석될 수 있다. 쇠락하는 도시와 공동체들이 민족주의 포퓰리즘의 메시지를 더 잘 받아들이도록 만든 원인은 대침체 뒤에 겪은 주권, 보호, 통제의 상실, 고용 기회의 축소, 공공서비스의 축소 등인데, 민족주의 포퓰리즘은 서구 정체성의 위기 상황에서 이민자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공격적인 백인 토착주의 문화를 배양하게 된다. 이 같은 유권자의 지지를 얻는 유일한 길은 문제의 핵심을 공격하는 방법인데, 곧 급격하고 제어되지 않는 세계화와 기술변화가 초래한 취약성과 불안정성이라는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는 권리를 박탈당한 공동체의 회복을 끌어올리도록 일자리와 존엄을 회복하고, 공공주택과 교육에 투자하고, 정부지출의 방향을 재조정하는 일을 의미한다.
민주적 애국주의와 지방사회주의는 칼 폴라니가 설명한 과정, 곧 자본주의의 탐욕에 공격당한 사회들이 추구하는 재내부화 과정이 정치전략의 영역에서 변형된 형태에 해당한다. 현 상황에서 재내부화는 정치의 ‘본국 회귀re-shoring’와 민주적 권력의 회복을 의미하고, 현재 글로벌 시장의 변덕에 맡겨진 다양한 경제활동을 다시 공적 통제 아래 두는 일을 의미한다. 이 같은 과정은 주의주의적 환상voluntarist dream 또는 더 나쁘게는 ‘지역적인 것’이나 ‘국민적인 것’ 같은 개념이 가져다주는 진정성 감각에 대한 향수적인 경향의 열망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같은 과정은 사회적 정체성의 동학을 통해 정당화되며, 세계화의 위기 속에서 나타나는 활발한 경제적, 지정학적 경향을 지렛대로 삼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에너지 전환은 식량생산에서 에너지공급에 이르는 많은 활동의 재지역화를 요구하게 될 것인데, 현재 이뤄지는 전 지구적인 에너지 운용은 지속불가능성의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 자본주의 자체는 ‘회복력’이라는 이름 아래 점점 더 재지역화 쪽으로 전환되고 있다. 자본가계급 중 많은 이들이 신자유주의의 외부화 모델이 자신의 운용에 심각한 위협을 제기하고, 길고 복잡한 공급사슬이 혼란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이 같은 자각은 본국 회귀re-shoring, 생산시설 자국화on-shoring, 하청의 국내화farm-shoring와 관련해 재계 내에 현재 유행하는 담화에 반영되고 있다. 재지역화 경향, 그리고 세계적이라기보다는 지역적인 통합은 사회 대다수의 이익을 위해 경제 과정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재천명할 역사적 기회가 되고 있다.
우리가 지향해 나가야 할 사회주의 공화국이 자립국가적 섬나라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우리는 고립주의라는 환상에 재미삼아 빠져들지 않아야 하는데, 향후 미국의 변덕스러운 호의에 더욱 의존하게 될 포스트 브렉시트 영국의 사례가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이 같은 환상은 너무나 자주 신제국주의나 글로벌 헤게모니 국가로 전환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민주권과 민주주의의 우위를 회복하는 과제는 국제관계로부터 가상적으로 이탈하는 과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일국적 포퓰리즘’도 오래 지속될 수 없고, 어떤 민족도 다국적기업의 권력이나 근대국가들에 둘러싸인 강대국의 권력에 홀로 당당히 맞설 수 없다. 게다가, 인민주권의 회복은 무엇보다도 국내 권력의 회복과 재편을 의미하고 실질적 민주주의의 주된 걸림돌이자 글로벌 시장의 지역중계자에 해당하는 민족자본 엘리트에 도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너무나 자주 국제적 갈등과 쇼비니즘은 국내의 계급갈등을 누그러뜨리는 수단으로 사용돼왔다. 거대한 반격의 운동방향을 따라 ‘자신으로 회귀하는’ 사회는 자신의 잘못을 전가할 외부의 타자를 모색하기보다는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몇 년간, 이 같은 주제들이 정치논쟁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이제 코로나19 이전의 정상상태로 실질적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결코 불가능하며 또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무한성장에 대한 그릇된 히망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우리 앞에 놓인 위험에는 세계경제를 집어삼키고 집단적 절망을 초래하게 될 ‘더욱 엄청난 대공황’, 시베리아 영구동토층의 급속한 해방 같은 환경재해, 정치적 폭력으로 확대될 수 있는 심각한 사회적 갈등, 그리고 심지어 미국과 중국 간 신냉전으로 확대될 수 있는 지정학적 대립가능성 등이 포함될 수 있다. 경제적 쇠락, 지정학적 혼돈, 사회적 불확실성 등의 현실로 인해 더욱 악화되는 생태적 붕괴에 대한 공포는 사회적 갈등을 보다 심화시키고 이데올로기적, 지정학적 대립을 촉발시킬 가능성이 높다. (일부는 진정으로 재앙적인 함의를 지니는) 임박한 위험의 규모를 고려할 때 안보와 안전에 대한 요구, 그리고 인민의 이름으로 국가에 권력을 되돌려주라는 지상명령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오직 사회적, 환경적 보호에 중점을 둔 진보정치의 영향을 받은 포스트 팬데믹 좌파, 곧 인민주권과 민주적 통제를 옹호하는 보호 사회주의만이 민족주의 우파의 서사를 상쇄하고 거대한 반격이 지닌 사회적 공포와 정치적 불안이라는 흐름을 더욱 안전하고 보다 평등주의적인 미래를 건설하는 방향 쪽으로 돌릴 수 있다.(433~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