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 게바라, 혁명의 경제학
‘Che’ Guevara: The Economics of Revolution(2009)
헬렌 야페 지음, 류현 옮김, 실천문학 2012.
화폐, 재정, 은행
체의 안과 카를로스(국립농업개혁원장 라파엘 로드리게스)를 지지하는 자들이 내놓은 안의 차이는 재정, 즉 직간접적인 재정 메커니즘에 있었다. 직접 메커니즘은 신용, 세금, 물가였다 (중략) 자율재정시스템은 은행 신용bank credit과 결부되어 있었다. 은행 신용이 없다면 이것(AFS)은 작동할 수 없을 것이다 (중략) 주된 차이는 재정 집중화냐 탈집중화냐였다. -호아낀 인판테
국유화 조치 이후, 국유화된 미국 기업들의 회계 장부를 확인한 게바라는 이들 기업들이 자회사들에 청구서를 발행한 적도, 반대로 자회사들이 모회사들에 실제 비용을 지급한 적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선진 회계 처리, 괸리, 분석 기법을 가지고 있던 미국 기업들은 화폐를 생산물의 가치를 계산하는 수단, 즉 계산 화폐money of account(*저자주-계산 용도로만 사용되고 실제로는 통화로 유통되지 않는 화폐.)로 한정했다. 게바라는 예산재정시스템에서 이런 방식을 채택했다.
“우리 시스템(BFS)에서 화폐는 측정 수단으로, 즉 기업 성과를 반영하는 가격으로 기능할 뿐이다. 중앙정부는 이를 통해 기업 성과를 통제할 수 있다. 경제계산에서 화폐는 이런 목적으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지급 수단으로도 사용된다. 지급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기업 행동에 대한 간접적인 통제 수단이란 뜻으로, 그 이유는 기금 없이는 생산 단위가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생산 단위와 은행의 관계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적 생산자와 은행 간의 관계와 비슷하다. 자본주의에서 사적 생산자가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위해서는 사용 계획을 설명하고, 빌린 돈은 어떻게 상환할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중략) 결과적으로 이런 식으로 화폐가 사용되기 때문에 우리(BFS) 기업들은 자기 자금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금 인출과 예치에 필요한 은행 계정이 각각 나뉘어 있다. 기업들이 중앙계획에 따라 일반비용계정general expense account과 특별임금계정special wages account에서 자금을 인출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예금이 자동적으로 국가의 통제를 받는다.”(123-124)
계산 화폐는 중앙계획이 생산 및 투자 결정 인자로 기능하도록 보장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계산 화폐는 회계 보고, 감독, 재고 관리를 강조하는 관리통제기구의 역할과 기능에 힘을 실어주었다. 자율재정시스템에서 재정 자율성을 부여받은 기업들은 자기 자금과 투자를 관리할 책임이 있었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이윤’ 같은 자본주의 범주에 의존했다. 결론적으로 두 시스템은 전혀 다른 화폐, 재정, 은행 기능을 가졌다.
1963년에 국립은행총재에 오른 마르셀로 페르난데스 폰트는 자율재정시스템 지지자였다. 그는 은행을 모든 경제 활동의 핵심 조정자라 생각하면서 은행이 ‘페소’로 기업들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레닌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인용했다. “대규모 은행들 없이 사회주의는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중략) 규모로는 단연 으뜸인 단일 국영 은행이 사회주의국가 장치의 9할을 차지할 것이다. 이에 대응해 게바라는 화폐는 생산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상품 생산에 기초한 사회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또한 우리는 은행이 화폐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은행의 존재는 그것이 아무리 고차원적 형태라고 하더라도 상업적 생산관계를 전제로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산관계는 생산력이 발전하고, 사회주의적 의식이 가치법칙을 잠식할 조건을 만들면서 점차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게바라에 따르면,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장치에 대한 레닌의 정식이 갖는 의미를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마르셀로가 추구하는 집중화는 재무부Treasury Ministry를 모든 국가장치 가운데 가장 막강한 힘을 갖는 ‘회계 및 통ㄹ제’ 기구로 만들면 달성할 수 있다.124-125
재무부장관 루이스 알바레스 롬은 예산재정시스템을 지지하는 게바라의 편이었다. 결국 이 두 가지 재정 제도의 역할에 대한 논쟁은 상대편의 입장을 거부하는 파벌 논쟁으로 비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바라의 주장은 사회주의 제도들에 질적으로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고자하는 견해와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BFS 기업들은 자기 자금을 보유하지 않았다. 그들은 은행에서 직접 대출 받을 수 없었다. 투자 계획안을 산업부 경제차관 앞으로 보내면 검토를 거쳐 필요한 자금이 이 부서의 예산 계정에서 집행됐다. 반대로 자율재정시스템 기업들은 은행에서 자금을 직접 대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업들끼리는 돈을 빌리거나 빌려주는 것이 금지됐다. 폰트는 “신용 대출은 은행의 고유 기능으로 사회주의 건설 기간 동안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균형 잡힌 경제 발전, 즉 중앙계획의 이행을 보장하는 유연한 수단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했다. 게바라는 이런 주장을 반대하면서 마르크스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인용했다.
“첫째, 귀금속 형태의 화폐가 본성상 이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신용 제도의 토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둘째, 신용 제도가 개인들에 의한 사회적 생산수단의 독점(자본 및 토지 소유권 형식으로)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독점이,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내재적 형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보다 더 고차원적이고 궁극적인 (사회) 형태로 발전해나가기 위한 원동력이다 (중략) 마지막으로 신용 제도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연합한 노동의 생산방식으로 이행하는 동안 강력한 지렛대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중략) (그러나) (토지의 사적 소유가 폐지되는 것을 포함해) 생산수단이 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이 중단되자마자 이와 같은 신용 제도는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다.”125-126
폰트는 자율재정시스템에서 은행 신용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예산재정시스템 지지자들과 설전을 벌였다. 그에 따르면 1961년에서 1963년까지 산업부 기업소들은 당초 계획한 순소득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국가예산도 사실상 충당하지 못해 적자를 면치 못했다. 폰트에 따르면 이것은 은행이 적자를 본만큼 자동적으로 신용 대출을 해주는 것과 다름없다. 왜냐하면 은행이 금고가 비었는데 자금을 언제든 제공한다는 것은 간접 신용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사회주의 경제의 한 범주로서 은행 신용은 사라지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은행은 기존에 맺고 있던 생산이나 유통과의 관계는 상실한다. 그리고 경제 통제의 역할도 확실히 줄어든다.’ 게바라는 이런 주장을 철저히 반대했다.
“이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완전 허구다. 은행 신용을 공공 기금과 비교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은행은 한 손으로 대출해주고 다른 손으로 대출해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은행은 빌려준 돈을 받으면서도 국민에 대한 영원한 채권자로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국가에서 독립적인 은행이, 비록 실재하지 않는 돈을 법적으로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빈털터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126-127
사회주의 국가는 은행과 그것의 수입, 은행이 자금을 제공한 공장들, 그리고 그것들이 생산한 재화의 소유자다. 따라서 게바라는 사회주의에서는 신용이 작동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신용이란 가치법칙의 지배를 받는 사적 소유와 상품 교환의 한 기능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에서 신용이 있을 수 없다면, 이자 또한 있을 수 없다. 게바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해 기업들의 은행 대출에 대해 이자를 부과하는 국립은행을 공격했다. “자본 관계들은 이자를 낳는 자본 형태를 상정하는데, 이 형태는 내면적인 자본 관계들이 가장 외부화되고 가장 물신화된 형태이다.” 그리고 “은행 신용은 (중략) 항상 이자를 낳는다. 그리고 이것이 은행의 가장 기본적인 수익 원천이다”라는 폰트의 주장에 이렇게 맞대응했다. “만일 이런 상황이 일반적인 것이라면, 그리고 이자가 엄밀히 말해 기업의 비용 요소가 아니라 국가 예산 수입을 구성해야 할 노동자의 잉여노동에서 공제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이자는 은행의 운영비를 충당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닐까?” 사회주의에서 이런 공제, 즉 이자는 은행의 운영비를 충당하기 위해 사용되어야지, 자본주의에서처럼 은행의 수입원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폰트는 국립은행이 “농업 생산의 규모를 키우고 사회주의 산업화의 토대를 쌓는 쪽으로 투자 방향을 잡기 위해 (중략) 투자 결정을 해당 기관에 돌려줄” 의향이 있다고 선언하자 게바라가 이렇게 비난하고 나섰다.
“문제의 본말이 전도된, 또는 같은 말이지만 생산관계의 본질을 숨기는 물신주의적인 발언이다. 이런 기능은 은행이 자체 자원을 사용해 투자에 자금을 댈 수 있을 때라야 가능한데, 이것은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은행이 하는 일은 투자 계획에 따라 이미 책정된 금액을 국가 예산에서 기업들에 할당하는 것뿐이다.”127-128
게바라는 예산재정시스템에서는 은행이 투자 결정에 관여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투자 결정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문제로 중앙계획위원회가 담당할 일이다. 재무부가 국가예산 집행에 책임을 지기 때문에 투자에 대한 재정 통제 역시 재무부의 몫이었다. “이것이 효과적으로 사용된다면 잉여 생산물이 귀속해야 할 유일한 지점은 재무부이다.” 게바라가 ‘효과적으로 사용된다면’이라고 한 것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들의 축적과는 다른 국가 발전 전략의 맥락에서 말한 것이다.
자율재정시스템에서는 국영 기업들 사이에 재화가 이전될 경우 현금이 같이 오갔다. 게다가 잉여 생산수단도 한 작업장에서 다른 작업장으로 판매할 수 있었다. 이때 벌어들이는 수입은 재정 계획을 충당하고, 대출금을 상환하고, 중앙계획에 잡혀 있지 않은 ‘분산된’ 투자들에 자금을 대고, 또는 노동자들에게 물질적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산재정시스템에서는 생산 단위들 또는 연합기업소들 사이에 어떠한 재정 관계도 없었다. 한 공장에서 다른 공장으로 넘어간 생산물은 상품의 판매나 구매가 아닌 ‘생산물 배달delivery of products’로 표기됐다. 상품 교환은 소유권 이전을 의미한다는 마르크스의 전제에 입각해 게바라는 국영 기업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교환은 소유권 이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결산 목적에서만 ‘생산물 배달’이 ‘가격’으로 표기되고, 이에 맞춰 재무부가 보유하고 있는 기업 계정에 반영됐다. 생산물 배달은 시장의 강제에 종속되기보다는 질, 수량, 납품 시기를 명시한 생산계약에 근거해 통제됐다. 이에 차질이 생길 경우 재정상의 제재보다는 행정상의 제재를 부과했다. 잉여 생산수단은 다른 기업들에 판매할 수 없었고, 대신 내구재에 한해 지역산업위원회(CILOs)의 조정과 연합기업소 관리 기구의 승인을 받아 재분배됐다. 재고 목록은 이런 생산물 이전을 반영해 항상 최신 상태로 유지했다.128-129
모든 사람이 생산 비용을 낮추는 것이 노동 생산성을 높이고 효율성을 키우기 위한 핵심이라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자율재정시스템에서 이것은 시장의 강제를 통해 나타나는 이윤 동기를 통해 실현됐다. 반면, 예산재정시스템에서는 이를 달성하기 위해 기술과 조직 혁신, 도덕적 인센티브와 숙련도 향상에 초점을 두었다.
게바라가 주안점을 둔 것은 “비용 절감 노력의 성과에 따라 공정하게 상벌을 내릴 수 있는 종합적인 비용계산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연구해봐도 모든 것이 노동 생산성 향상이라는 공통분모로 귀결됐다. 노동 생산성 향상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건설을 위해 아주 중요하다.” 비용관리는 낭비를 막고, 전력과 연료 소비를 줄이고, 노동 생산성을 높이고, 장비의 유지를 개선하면서 기술 개발에 초점을 두는 것을 의미했다. 계획 및 기술 개발에 관리 역량을 집중하면서 경제를 규제하고, 다양한 생산 분야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소비와 자본 축적 사이에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기 위해 수학 분석 기법을 사용해 비용관리cost control를 자동적인 것으로 바꾸고자 했다.
게바라는 경제 게획이 내포한 일반적인 문제들, 즉 조직 문제들, 경험 부족, 불안정한 해외 시장 의존에서 비롯하는 문제들이 지금 쿠바에서 비용관리를 저해하고 있지만, “이보다 더 큰 걱정은 이런 현상이 나타나자마자 바로 눈치 채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이다”라고 지적했다. 기업 관리자들에게 더 많은 관리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생산 비용을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했다. “우리는 계속해서 경제성과를 높이고, 재고 관리를 체계화하고, 모든 경제 지표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작업 집단별로 비용 절감을 도모하기 위해 인센티브를 도입해야 했다. 산업부는 집단적 인센티브 제도가 비용 절감에 얼마만큼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일부 공장을 선택해 시범 연구를 진행했다.129-130
자율재정시스템을 옹호한 폰트는 비용관리가 유용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페소에 의한’ 기업의 자기 통제를 대신할 수 없는 사후적 통제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기업의 자기 통제는 수입으로 운영비를 충당하는 것이 기업의 의무라는 것, 그리고 소속 노동자들이 생산한 물질적 이익을 집단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소비자와 페소를 통한 은행의 재정 통제가 이를 뒷받침한다.” 결국 이 모델은 자본주의의 시장 경쟁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중앙계획위원회의 농업 부문 책임자로 예산재정시스템을 지지한 마구엘 코씨오는 이윤 동기를 자본주의에서처럼 핵심 동기로 사용하는 것을 이렇게 경고했다.
“이윤, 예금, 또는 잉여는 확대재생산의 변증법적 함수이고, 따라서 이런 것들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확대재생산에 의해 곧장 조건 지어진다. 이런 것들이 확대재생산에 기초하는 한 생산은 ‘생산을 위한 생산’ 될 것이고, 나아가 사회의 점증하는 욕구를 충족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생산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될 것이고, 이어 집단적 이익에 복무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에서 기업은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이윤을 생산할 수도 있고, 반대로 안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에서 기업은 이윤을 생산하든 하지 않든 결국은 사회의 집단적 이익을 위해 작동하기 때문이다.130-131
예산재정시스템을 지지한 코씨오는 이윤의 증대라고 하는 것은 결국 국가 전반에 걸쳐 생산이 늘고 비용이 줄어야 달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만일 가치법칙의 작동이 잠식됐다고 한다면, 게바라가 주장한 대로 ‘어떻게 가격을 가치와 일치시킬 수 있을까?’ 쿠바 혁명 정부는 가격을 동결했고, 배급제를 도입했고, 소비에트 블록에 세계시장 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수출해 수익을 냈으며, 사회 정의를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순위에 두었다. 이런 모든 조치들이 자본주의에서 가격을 결정하는 시장 메커니즘을 잠식했다. 가치법칙의 지배를 용인하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 “체는 한 가지 모순에 봉착했습니다.” 지난 40년의 세월을 회고하던 곤잘레스가 이렇게 말했다. “시장이 없는데 어떻게 가격을 책정할 수 있을까요? (중략) 체는 이 문제가 얼마나 복잡한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확답은 피했습니다. 여러 제안들을 내놓았지만, 결정적인 것들은 없었습니다.”
자율재정시스템에서는 가격이 가치법칙에 따라 결정된다는 주장에 대해 게바라는 이렇게 되받아쳤다. “가치법칙의 어떤 차원?” 그가 지적하고자 한 것은 가치법칙에 내재하는 하나의 개념으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구성물이라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세계의 경쟁 결과인 기술 발전은 필요한 노동 지출을 줄이고, 따라서 생산물의 가치를 낮춘다. 외부와 단절된 사회라면 이와 같은 노동시간의 변화를 무시해도 되겠지만 생산물의 가치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세계시장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가격은 국내 기준에 따라 결정할 수 있지만 세계 생산 기준을 적용하지 않으면 그것이 가치법칙의 작용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사실 게바라는 이런 비교가 가치법칙의 본질적 측면이라 생각했다. “국내 가격 구조는 해외 시장의 가격 구조와 연동되어야 한다.” 그는 쿠바와 같이 대외무역에 의존하는 국가에서 폐쇄적인 가격 구조가 초래할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131-132
게바라는 1963년 6월에 이미 가격 구조에 대해 몇 가지 제안을 내놓은 적이 있었다. 그 후, 1964년 2월에 다시 이 주제로 눈을 돌려 아래와 같은 원칙에 기초한 가격 지표를 제시했다.
“1. 평균 세계시장 가격에 근거해 고정 가격 및 안정된 가격으로 원자재를 수입할 것(여기에는 운송비용과 대외무역부 시설들의 관리 비용을 포함하는 몇 가지 비용 요소들을 더할 것).
2. 쿠바가 생산하는 원자재는 돈으로 환산한 실재 생산 가격에 근거해 가격을 책정할 것(국가가 정한 노동 비용과 감가상각을 더할 것). 이 가격은 국내 기업이 다른 국내 기업에 또는 국내상업부Ministry of Internal Commerce에 공급한 생산물의 가격일 것이다.”
모든 가격이 세계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 가격을 반영하는 지표에 맞춰 계속 조정된다. 예산재정시스템 기업들은 국가가 정한 가격을 토대로 작동하고, 기업 자신을 위해 이윤을 생산하지 않는다. 모든 이윤은 국내 무역부로 넘어간다. 가격 지표가 쿠바의 생산이 얼마나 효율적인지 보여줄 것이다. “이런 변화가 초래할 결과로 인해 인민들이 고통 받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들이 구매하는 상품의 가격은 각 상품에 대한 수요 및 필요에 따라 독자적으로 책정된다.” 가격 책정 및 무역에 대한 결정은 정치 또는 전략적 이유 때문에 꼭 수학적으로만 매달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132-133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작업을 외부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과 비교하기 위해 항상 전면에 거울을 설치해둘 것이다. 가격은 세계시장 수준에 맞춰 항상 조정될 것이다. 가격은 앞으로 몇 년 동안 기술 발전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할 것이고, 사회주의 시장과 국제 노동 분업이 확고히 자리매김하면서 변동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지금의 가격 체계보다 더 합리적인 세계 사회주의 가격 체계가 완성된 뒤의 일이다.”
게바라는 쿠바 사회주의가 태어나고 있는 독점자본주의의 조건들이 1920년대 러시아의 그것들보다 기술적으로나 관리 메커니즘 측면에서 더 앞선 것들이라고 주장했다. 과제는 맹목적인 이윤 동기와 가치법칙의 작용을 제거하는 한편으로 이들 독점자본의 이점들을 사회주의 틀 안에 도입 활용하는 것이다. 화폐, 재정, 은행의 역할에 대한 논쟁은 이런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그 방안을 정하는 데 아주 중요했다. 국립은행과의 의견 차이는 게바라가 정부 관료로 일하는 동안에는 한 치도 좁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몇 가지 아이디어들이 산업부에서 시행됐다. 즉, 화폐가 계산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기업들 간의 상업관계, 그리고 다른 자본주의적 지렛대들은 전부 폐지됐다.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