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내용 출처 : 정요한목사님 대하설교 ' [대하설교 349 마태 7장, 실천적 신앙]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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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새 법 ‘산상수훈’ 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7:1-5, 사람을 심판하지 말 것을 명하심
이번 단락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지켜야 하는, ‘대인관계’ 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대인관계가 당시 바리새인보다 더 의로워야 함을 말씀하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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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1-2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 지금 예수님께서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판단, 선과 악을 분별하는 판단을 금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정당한 판단과 그로인한 건강한 비판은 오히려 장려되어야 하고 예수님께서도 지금 현재 하고 계시는 것이 거룩한 판단과 비판이다. ‘진리’ 를 기준으로 한 정당한 판단과 비판은 필요한 것이고, 이것이 있어야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이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비판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크리노’는 비판보다는 ‘정죄하다’ ‘심판하다’ 는 뜻을 가지는 단어이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은 7:1-2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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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7:1-2, 새번역)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
→ 심판은 하나님의 고유 영역임을 알고 인간 스스로 심판하지 말아야 함을 말씀하고 계시다. 7:1은 비판 금지명령이 아니라, ‘심판 금지명령’ 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윗이 사울 왕을 대하는 장면을 통하여 우리는 이런 부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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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24: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사울)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 이렇게 다윗은 스스로 사울 왕을 심판하지 않았고, 겸손히 인내하며 그 심판을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맡겼다. 마태복음 7:1-2의 말씀은, 그러한 믿음의 사람 다윗처럼 살아야 함을 교훈하는 말씀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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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자신도 실제로는 율법을 범하고 있으면서, 율법과 자신들의 전통으로 형제를 비난하고 정죄하고 더 나아가 형제 심판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었다. 자신도 똑같은 죄인이면서! 자신은 그보다 더한 죄인이면서! 타인을 정죄하고 심판함으로써! 자신은 의인인양 외식하고 정죄하는 교만의 죄를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처형하는 매우 교만한 자들이었다. 마태복음 7:1-2은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서(하나님도 아니면서) 타인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교만한 태도를 지적하시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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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3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들보= 건물을 받치는 기둥을 의미한다. 3절에서 ‘티’ 는 타인의 조그마한 죄를 상징하고, ‘들보’ 는 자기 자신의 큰 죄를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는, 타인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나, 타인의 도덕적 잘못에 대해서는 눈에 불을 켜고 찾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오히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더 큰 잘못, 즉, 마치 들보와 같은 자신의 큰 죄악에 대해서는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자가 많음을 지적하고 계시는 것이다. 혹시 우리에게는, 자기 자신의 큰 죄와 큰 허물을 보지 못하는 영적 무지가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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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4-5절上: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
→ 지난 시간에도 살펴본 것처럼, 외식하는 자의 원어를 보면 ‘연극배우’ 라는 문자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마치 신앙생활을 교회생활을 연극배우처럼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자신이 의인인양 연기하는 진실성이 결여된 위선자들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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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 먼저! 자신의 허물과 죄악된 모습을 깨달아 진실히 회개하고 말씀으로 삶의 방향을 돌이킨 자만이, 타인의 잘못을 바르게 충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타인을 충고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화요모임 보충설명: 비판이 건전, 겸손해야 하고, 진리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비판, 판단이 되어야 한다. 무책임한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 책임질 수 있는 비판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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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분별력에 대한 교훈
6절은 1-5절의 연속된 교훈으로 보는 신학자들이 많이 있다. 예수님의 ‘형제를 심판하지 말라’ 라는 교훈을 잘못 이해하여 자칫 죄악에 대해서조차 묵인하라는 뜻으로 잘못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에 대비하여, 6절에서 건강한 분별력, 건강한 판단력을 가지고 죄악과 구별된 삶, 악인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교훈하고 계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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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6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
→ 거룩한 것과 진주는 ‘진리의 말씀’을 상징하고, 개와 돼지는 ‘진리를 고의적으로 반복적으로 적대시하는 자들’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완고하고 위선적인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염두하시고 이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개와 돼지가 거룩한 것의 가치를 모르는 것같이, 당시 종교 지도자들 역시 진리의 가치를 몰라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진리를 계획적으로 훼손하려고 하고 진리를 고의적으로 반복적으로 적대시하려 들 것이기 때문에 이런 자들에게는 진리를 아예 전하지 말 것을 주님께서 명령하고 계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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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정요한 목사님) 지난 시간에 6:14-15 이 주기도문 ‘용서’ 에 대한 부연설명이라고 설명드리면서,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 용서하라고 하신 것은 고의성이 없는 실수라고 해석했었습니다. 그래서 용서를 하되 인간이 용서할 수 있는 범위와 대상이 정해져 있음을 설명드렸습니다. 그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예수님께서 현재 엄하게 지적하고 계시는 것처럼, 진리를 계획적으로 훼손하고, 진리를 고의적 반복적으로 적대시했던 개와 돼지와 같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예수님께서는 과연 용서하셨을지? 마태복음 23:33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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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 이렇게 성경은 분명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 정직하게 말씀하고 있지만, 오늘날 교회들은 이러한 말씀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성경은 분명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인들이 있음을 여러 구절을 통해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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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그들을 전도하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그들에게 전도하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너희를 핍박하고 박해할까) 염려하라
→ 그래서 영적으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사납고 공격성이 강한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악한 자들에 대해서는 아예! 전도도 하지 말 것! 을 거듭해서 당부하고 계시다. 예를 들면, 전ㄱㅎ씨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주사랑교회 설교를 전달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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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참 오해가 많은 말씀이다. 여기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은, 세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 자기 소원~~ 이런 것을 열심히 구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6:10, 6:33에서 배웠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의를, 성실하게 한결같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 주님의 명령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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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7절: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더! 구해야 한다. 그러면 주실 것이다, 더! 찾아야 한다.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다.
8절: (성실하게)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진실하게)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한결같이 그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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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절: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선하고 의로운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좋은 것 : 번역이 좋지 않다. ‘선하고 의로운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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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간증을 하면, 주사랑교회를 개척하고 여기까지 오면서 제가(정요한 목사님) 교회의 재정적인 문제를 놓고 기도를 해 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더 알기를 원하고, 더 실천하기를 원합니다’ 라고는 수백 번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설교를 할 때마다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에 이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진리를 갈구하는 저에게 충분하리만큼 주셨습니다. 진리를 구하고, 찾고, 진리의 문을 제가 계속해서 두드리니까, 언제나 선한 것으로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구하지 않았던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까지도 충분히 더해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의를 성실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반드시 선한 것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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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2, 대인 관계의 핵심 윤리인 ‘황금률’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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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이 황금률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구약의 대인윤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많은 신학자들은 12절을 7-11절에 연결된 교훈으로 보지 않고, 산상수훈에서 하나의 독립된 교훈으로 보고 있다. 12절은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바로 그 수준으로! 남을 대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시다.
★7장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 ★구약 대인윤리의 핵심 , ★산상수훈의 요절 , ★황금률(황금과 같은 율법) , ★이웃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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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이요 선지자라’ 는 마지막 표현은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황금률’ 이 구약성경의 중요한 핵심적 교훈임을 밝히고 계시다. 이 교훈이 구약의 율법이요 구약의 선지자임을 말씀하고 계시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장에서 구약성경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정리해 주셨는데, 황금률은 이웃사랑에 대한 내용 이라고 할 수 있다. 이웃을 사랑하되, 황금률대로! 사랑해야 함을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을 버리고 율법을 형식적으로만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외식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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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 황금률(황금과 같은 율법!), 이웃 사랑! 이웃을 ‘대접’ 하는 것이 이웃사랑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