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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자본주의 사회 인식의 기초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까요?
우리는 기사를 통해서 직접적인 삶의 경험을 통해서 부당한 일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의 개별적 사건으로 인식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 전체의 구조로부터 야기되는 하나의 현상이라기보다는, 당사자들이 가진 잘못된 인식, 혹은 그 집단의 특수한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사회전체의 문제라고 생각하더라도, 문제의 원인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의식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필연적인 사회구조의 결과라기보다는 혐오의식의 문제로 보고 그러한 의식을 많은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정리하면 우리는 우리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사회 전체의 구조와 결부시키기보다는 (1)따로 떨어진 개별적인 사안들로 보고, (2)사회 문제를 단순히 인식 부재, 혹은 사회적 의식의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을 다시 한마디로 정리하면, <중구난방의 인식을 하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모든 개별 현상들은 다른 개별 현상들과 그것들을 야기시키는 본질적 관계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모든 학생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학생이라는 존재조건(학교 일정, 취업의 준비 등등)이라는 몇몇 특정한 내용이 침투되어 있습니다. 여기는 예외가 있을 수 없죠. 마찬가지로 모든 사회문제들에서도 사회의 본질적인 관계들의 내용이 침투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회에 있어서 그 본질적인 관계는 사회경제구조, 즉 물질적 생산(자연으로부터 노동을 통해 생산물을 얻는 작업)을 둘러싼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고, 그 사람의 사회적 내용을 형성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 만든 생산물을 이용함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생산물의 생산을 둘러싼 사람들 간의 관계는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역사시대마다, 즉 원시공동체,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까지 그 관계의 형태는 변화해왔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 근저에 있는 본질적 관계들은 바로 자본주의적 경제관계이고, 그 운동법칙입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모든 경험과 우리 자신의 삶 자체를 결정짓는 근본적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도,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법칙에 대해서 모른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의 내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그러한 것들에 휘둘리게 됩니다. 예를들면 실업대중의 존재는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조건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산업이 팽창하는 시기와 수축하는 시기가 있는데, 실업자 대중이 없다면, 팽창하는 시기에 임금이 극도로 높아져서 이윤실현에 방해가 됩니다. 또 수축하는 시기에는 해고할 수 없기 때문에 또 자본이 유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실업의 존재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면, 실업이 나의 탓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말하는 극우적 담론에 휘둘리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작동방식, 그 운동법칙, 발생과정과 소멸과정을 이해하고, 그것에 따라서 모든 사회현상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그 문제를 다루기 전에 예비적으로 간단하게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을 몇가지 추려 설펴보고 그 다음 인권을 옹호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인식의 방법과 그 근거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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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 생산을 둘러싼 사람들 간의 관계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노동자로부터 생산수단의 분리; 노동자는 자신이 가지고 사용해서 먹고 살 것을 마련할 수 있는 생산수단(토지, 기계 등등)이 없습니다.이는 과거 토지와 농기구를 소유하고 있었던 농민들이 그 생산수단들을 빼앗긴 결과입니다. 따라서 빼앗긴 농민, 즉 노동자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에게 종속되게 됩니다.
(2) 노동력의 상품화;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의 사용권을 자신으로부터 분리하여 시장에 상품으로 팔게 됩니다. 즉 노동활동하는 나의 능력의 일정기간의 사용권을 자본가에게 판매함으로써 노동활동 자체에 노동자 자신의 목적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노동활동은 자본가에게 완전히 지배되게 됩니다. 노동자는 자신의 생존과 사회적 삶을 유지할 임금을 그 대가로 받게 됩니다.
(3) 노동자의 빈곤화 경향;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노동자의 상대적, 절대적 빈곤화가 진행됩니다. 값비싼 토지와 거대한 기계설비, 막대한 자본금을 가진 극소수의 자본가계급은 날이 갈수록 더욱 부유해지는 반면, 대다수의 노동자계급에게는 저임금, 불안정노동, 실업의 경향성이 더욱 짙어지게 됩니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에서 신기술의 도입, 자동화‧무인화가 노동자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자본보다 더 싸게 생산하고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경쟁매커니즘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술의 발전은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풍족하게 살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의 현실화는 단지 불가능하고, 그것은 결국 대다수 민중의 실업과 마약, 정신적 파탄을 낳게 됩니다.
(4)경제의 무정부‧무질서적 성격;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각 자본가들은 생산수단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산수단들은 자본가 자신의 이윤을 최대로 높여줄 목적으로 사용되는데, 이는 다른 자본가와의 경쟁을 동반합니다. 남들이 넘보지 못할 수준으로 상품을 더 싸게,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는 기술설비를 보유하는 것은 자본가에게 높은 이윤을 보장합니다.
이렇게 자본가들이 서로 더 싸게, 더 많이 판매하려고 하는 경향은 자연에 대한 거대한 파괴를 야기하게 됩니다. 동시에 공급과 수요의 불일치를 항상적으로 야기됩니다. 이는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빈곤해지고 구매력이 떨어지게 되는 반면, 자본가들이 자신의 상품을 팔아 이윤을 실현하기 위해서 더 많은 상품을 판매해야 한다는 모순을 뜻합니다. 결국 자본가 중에는 재고를 처리하지 못해, 대출금을 못갚고 파산하는 일도 빈번히 발생합니다. 만약 거대한 자본이 이러한 방식으로 파산하게 된다면, 그 자본가 산업적, 금융적으로 연관된 자본들이 줄줄이 도산하게 되고, 거대한 경제대공황이 초래하게 됩니다.
1.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결정되는 인식과 그 내용의 차이.
사실을 부정하는 태도, 현상을 나열하고 그것들 간의 관계를 밝히지 않는 태도,
현상들을 그릇되게 관계짓기·배열하는 태도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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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태도들은 모두 현상에 대한 피상적·외면적 인식에 불과하다.
즉 같은 인식의 다른 표현들이다.
어떤 사태와 관련하여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면서 받아들이는 내용들은 보통은 대게 비판·반성되지 않고 그 사회적 맥락 속에서 들어오게 된다. 현상들 간의 객관적 연관을 파악한다는 것은 결국 대상의 인식을 방해하는 주관적 방해물을 제거하고 인식 외부의 대상과 상호작용(실천)하면서 대상을 둘러싼 연관들의 전면적 파악, 즉 본질을 파악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인식 속에 무비판적으로 들어온 내용들이 참된 것인지 곱씹어 보지 않는다면, 그런 내용들을 생산한 사회 내부의 다른 세력들에게 종속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 혹은 살면서 그냥 흡수한 내용들은 자명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근본적 이해관계의 충돌(지배와 피지배 관계, 자본가와 노동자의 투쟁)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적대가 그 내용 속에 깃들어 있다. 중요한 사실은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가계급에 의해 만들어진 담론들이 대부분 우리의 상식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인식을 방해하는 주관적 방해물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위의 태도들은 한 인간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태도이다. 위의 참된 인식을 방해하는 태도의 원인은 그의 사회적 조건들의 총체, 즉 그 사회의 역사적 발전 단계에 따라 규정된 사람들 간의 관계들의 총체로부터 찾아야 한다. 즉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 이해관계의 적대적 분할의 요소를 파악하고, 이것으로부터 왜 사람들이 참된 것의 인식을 주저하고 회피하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아야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담론을 생산하는 언론, 출판, 교육은 모두 자본이 담당하고 있다. 자본의 목적이 그러한 사회적 이데올로기 속에 모두 침투되어 있다. 대중들로부터 비롯된 담론이라 할지라도 (1) 담론을 생산한 그 대중들이 자본주의적 교육을 받았다는 점, (2) 자본의 이익과 정면 충돌하는 담론을 자본은 배척하고 배재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듣는 메시지, 담론들, 가치관, 상식 등등은 모두 자본의 의도와 근본적 지배질서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또 그러한 지배질서가 내용적으로 침투된 채로 존재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사회 전체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서 깊이 숙고하지 않는다면, 지배질서에 동화되고,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어, 실제 우리 사회의 참모습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예컨대 우리는 대한민국이 수립되는 과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대한민국이 수립되는 과정이야 말로 아주 자세히 다각도로 전면적으로 배워야하는 것이 상식 아닐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혀 모르거나 매우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이 성립되는 과정이 미국에 힘입어 친일파가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다시 등장하고 하고, 이북을 제외한 민족분단정부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것에 반대하는 노동자‧민중, 독립운동가들을 모두 학살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함이다. 즉 이 경우에는 역사적 과정 자체가 한국 사회 지배질서에 큰 타격을 주기 때문에 왜곡하거나 아예 교육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릇된 파악의 한 예시
(잘못된 인과를 설정하는 경우)
ex)어떤 학생의 자살시도를 둘러싼 인과설정
1. 극심한 경쟁사회 ―> 자살시도
2. 뇌 기능의 이상 ―> 자살시도
어떤 사람들은 어떤 개인의 자살에 대해 그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정신병’의 소산이라고 보고, 두뇌에서 발생한 문제가 자살의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본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인간은 오직 사회적일 때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에, 그의 ‘정신’에 문제 생겼다고 할 때, 그것은 사회적인 기원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본다.
두 가지 원인을 두는 태도들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자살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뇌 기능의 이상을 원인으로 두는 것은 상관작용의 극히 일부분만을 취하는 것이다. 사회적인 문제가 이 사태에 주요하게 연관된다는 것을 부정하게 되거나 부차화한다. 즉 그 중요성을 충분히 담지 못하고, 무시하게 된다. 따라서 이 문제의 근본적 해결로는 전혀 나아가지 못하고 약처방과 의사상담으로 이 문제를 무마하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똑같은 문제는 계속 발생할 수 밖에 없고, 대처는 사후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이에 반해, 후자의 관점은 어떤 사람을 자살에 이르게 하는 사회구조적 원인의 억압성이 개인의 두뇌 건강에까지 악영향을 끼쳐 자살에 이르게 되었음을 전면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이의 자살을 필연적이게끔 하는 그 사회구조적 모순의 해결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방식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이다.
어떤 사태를 인식함에 있어서 어디에서 어디까지 인식할 것인가는 인식자의 목적의식이 개입된다. 따라서 만약 자살에 대해서 뇌의 이상만 문제삼는 다면, 그것을 야기시킨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인식을 거부한다는 분명한 목적성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어떤 사태를 인식하는 나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인식 태도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파악된 내용도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목적은 나의 가치관‧세계관에서 기인하는데, 나의 가치관‧세계관은 내가 커온 사회적 맥락, 과정 속에서 결정되고, 그러한 사회적 맥락과 과정은 다시 전체 사회의 구조, 법칙, 관계, 즉 한국 자본주의의 전체 역사와 현재의 운동과정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태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어떤 사회문제를 파악하는 위와 같은 견해의 차이는 어디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 사람의 삶의 조건(부자 혹은 빈자라는)에 기초한 사회적 이해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자신이 현실에 만족할 수 있는 사회적 권력을 가지고 지배하는 자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은 현실의 폭력성·억압성을 알 필요가 없다. 심지어 현실에 대한 객관적 파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자신이 사회에서 지배당하는 쪽보다는 지배하는 쪽에, 피해받는 쪽보다는 누리는 쪽에 있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배가,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는 부가 정말 정당한 것인지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은 당장 자신들 눈앞에 떨어진 이익만 좇고 살아도 사는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의 노동과 자연이 인간 사회를 근본적으로 작동시키고,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원천이라는 본질에 대한 인식을 가지기 어렵다.
반면 현실의 적대적 관계‧성격에 의해 억압받고 지배당하며 사는 노동자들에게는 자신에게 미치는 현실의 적대성 때문에, 현실의 본질적 측면을 파악하는 것이 요구된다. 노동자들은 사회의 모든 것을 생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주인은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인데,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이 노동자로 하여금 사회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 부당한 지배‧억압질서에 기초해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사회 전체를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는 과학적 관점을 소유할 수 있는 자는 바로 오늘날의 피지배계급, 노동자계급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서민들의
근본적 처지
자본가와 다르게, 노동자들은 당장 자기 눈앞의 이익만 좇는다면, 계속해서 불행해질 뿐이다. 그들에게 떨어지는 이익이란 결국 사회의 지배계급인 자본가가 주는 월급, 일자리, 복지이며, 이는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의 결과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이 사회의 참된 모습을 다각도로, 전면적으로 파악할 필요성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처지가 어떠한지 살펴봄을 통해 왜 그런지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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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노동자가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노동이 자기를 위한 것이 되는 게 아니라 더욱 자본가에게 예속되게 된다는 점; 노동자는 자본가를 위해 노동하는 것이지 자신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가 하는 노동(작업활동)은 그 자체로 자본가의 이윤을 위한 것이며, 노동자가 노동하는 이유는 오직 임금을 받아 살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된 것은 노동자가 생산수단에 대한 권리가 없기 때문에,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의 목적에 자신의 노동이 예속되기 때문이다.
(2)다른 노동자들과의 관계가 자본이 도입한 경쟁시스템에 의해 파탄된다는 점; 같은 일터 안에서도 다른 노동자들을 경쟁(성과, 시험 등)에서 패배시켜야 자신이 더 많은 이익(성과급, 승진)을 받게 된다. 이는 노동자들이 서로 단결하지 못하게 하고, 경쟁강요를 통해 노동강도를 높이려는 자본가의 목적이 담겨 있다.
(3)생산력이 발전할수록, 노동자의 처지가 더 비참해진다; 기술 및 설비가 고도화되면, 더 적은 노동시간으로 더 많고, 더 좋은 재화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도 노동자는 더 적게 일하고, 더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무인화, 자동화에 의해 일자리를 잃고 만다. 그들은 저임금, 비정규노동 구조로 편입되게 된다.
*{노동자는 생산수단을 빼앗긴 농민의 후손이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자유롭게 고용하고 해고하기 위해, 토지와 농기구를 가진 농민들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그 생산수단들을 빼앗았다. 생산수단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자신이 먹고, 입고, 잘 곳을 마련할 수 있는 토대이다. 하지만 이것이 없다면, 인간은 이것을 가진 누군가에게 예속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자기 몸 하나 가지고 도시로 쫓겨난 노동자들을 자본가들은 고용하여 공장을 돌렸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다양한 정책적, 폭력적 수단들을 사용해서 농민들로부터 생산수단을 수탈하였다. 이것이 예외 없이 모든 자본주의가 거치는 본질적 과정이다.}
2. <어떤 학생의 자살>를 둘러싼 비과학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 간의 대립
1. 현상적 인식에 머무는 관점들과 그 비판
현상적 인식에 머무는 사고는 사태의 본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현상적 인식은 어떤 사태에 대해서 (1) 주관적으로 하나의 현상을 취사선택해서 원인이라고 규정한다. (2) 본래의 사태의 구조, 법칙, 내용과 무관하게 주관적 목적에 따라 사태의 현상들을 재구성한다. (3) 사태들 서로가 객관적 관계를 맺지 못한 채로 개별적인 사태들을 무질서하게 난립시켜 인식한다.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 현상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이 서로 구별되지 않고 인식된다.
먼저 <어떤 학생의 자살>이라는 개별적인 현상·사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각종 관점들을 봐보자.
학교의 관점
선생님 X 왈: 학교에서 적응하기에는 특수성이 매우 강한 아이였고, 정신질환도 겪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모든 학교들, 학생들이 다 똑같은 조건에 있는데, 그 친구만 자살을 선택한 것이라면, 그 친구에게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해설: 이는 당장의 책임을 회피하고자하는 학교의 이해관계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학교 역시 교육부의 교육정책, 교육부의 교육정책은 지금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단계 및 사회 세력들 간의 힘 관계에 의해서 궁극적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학교에 책임을 전적으로 지우는 것도 잘못된 파악이다.
의사의 관점
⒜ 사망의 원인은 낙상으로 인한 과다출혈
(내과의)
⒝ 기존의 정신질환이 자살로 이어졌음
(정신과의)
해설: 의사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의사는 자신의 전공분야의 내용과 사태를 인과적으로 연결짓고 있는데, 이는 사태의 객관적 연관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오류에 가까운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 위의 병리적 현상들의 원인이 되는 사회적 원인이 존재한다.(참된 의사)
해설: 사태의 원인이 사람의 신체 내적 문제에 국한해서 바라보는 현대 자본주의 의학의 한계를 인식하고 생리적 메커니즘 외부의 문제가 오히려 생리적 현상의 원인이 됨을 인정하는 것이 과학의 입장이다.
우생학론자
양육강식의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양육강식’은 사회질서를 규제하는 영구불변의 법칙이며,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과도 합치하는 사회질서이다. 이를 잘 반영한 사회가 바로 자본주의 사회이다.
약한 학생들은 걸러지고 강한 학생들이 남는 것이 사회발전 방식에 조응하며, 경쟁에서 지면 경제력의 차등을 주는 것이 사회를 움직이는 근본동력이다. 만약 경쟁이 없다면, 또 빈곤이 없다면, 사회는 정체되고 낙후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법률의 관점
형법에 저촉되는 누군가의 가해행위의 존재여부가 관심사가 된다. 그 학생이 자살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에서 관련되는 법제도의 적용, 시행여부가 관심사가 될 것인데, 이러한 관점은 다음의 모순을 가진다.
법률의 관점은 사태의 진행에서 법률 위반은 없었는지 보는 것이다. 법률은 현존 사회질서를 관념적으로 형식화·고정화시킨 것이다. 기존의 사회질서를 고정시키고, 형식화하는 것에는 사회의 지배계급의 의도가 반영된다. 법률에는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왜곡없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가 보고싶은 것만 반영된다. 즉 (1)자본가들 간에 돈 벌려고 계약할 때 지켜야 할 규범의 규정, (2)국가와 자본가의 관계; 국가가 얼마만큼 자본가에게 간섭할 수 있는지의 범위의 규정, 혹은 국가는 어떻게 자본가를 도와줘야 하는지의 방법을 규정, (3)자본주의 사회가 작동되기 위해 국가기관들은 어떤 규범을 따라야 하는지의 규정, (3)돈 벌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가 안정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국가가 간섭해야하는지의 규정, 등등. 물론 법체계 안에 노동자의 권리도 삽입되었는데(원래는 없었다), 이는 자본주의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려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인 투쟁을 무마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것을 체제내화하고 자본가 국가가 규율할 수 있게 형식화한 것이다.
계급사회에서 사회질서는 곧 지배질서이다. 지배계급은 노동하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의 노동의 성과를 ‘합법적’으로 강탈한다. 지배계급은 자신의 계급지배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천명하고, 자신들만의 이익을 사회전체의 이익으로 둔갑한다.
그들은 예로부터 이 지배질서를 유지할 폭력을 독점해왔는데, 그것이 국가이다. 국가는 사실 중립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지배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지배계급의 도구이다. 법률은 다시 말해서 지배질서를 관념적으로 형식화·고정화시킨 것이고, 더 나아가서 법률은 자본가계급이 독점한 폭력에 기초하기 때문에 그 효력을 유지된다.
따라서 이러한 법률의 관점에서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들의 총체가 낳은 자살이라는 사회적 결과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2.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관점
과학적 관점은 어떤 사태를 그 사태이게끔 성립시키는 객관적 연관들을 전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어떤 사태는 그 개별적인 사건으로서 단순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개별적 사건은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의 관계에 의해서 성립한다.
<어떤 학생의 자살>이라는 사태를 설명할 때, 어떤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라고만 설명한다면, 말 그대로 동어반복이다. 그 원인을 구성하는 사회적 맥락들의 총체가 그 사건의 내용을 결정짓고, 그 사건 자체가 된다. 이때 부모와의 관계,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 교사와의 관계 등등 그 학생과 타인의 감정적 교류가 어땠는지라는 매우 직접적인 것으로부터, 앞의 모든 관계들의 성격을 규정하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라는 총체적이고, 본질적인 것으로까지, 어떤 사태의 진상을 과학적으로 고찰한다는 것은 말그대로 사태 그 자체의 참모습을 전면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사태 파악의 목적이다. 이 목적에 따라서 인식의 한계범위가 결정된다. 만약 분석의 목적이 사태의 본질을 가리고 책임 회피를 하고자 함이라면 사태의 전면적 면모는 파악될 수 없다. 반면에 우리는 위의 사태가 부당한 일이라고 보고, 그러한 사태가 궁극적으로 더 이상 일어날 수 없게 하고자 한다면 그 사태를 궁극적으로 규정짓는 조건들, 법칙들, 관계들이 무엇인지 전면적으로 파악하고, 그것으로부터 우리의 실천적 개입 가능성을 타진해야 한다.
사태의 진상을 파악함에 있어서 인식자의 목적의식이 개입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인식자의 목적의식은 결국 그 사람의 사회적 존재조건, 위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과학적 입장도 가치중립적인 것일 수 없으며, 오히려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사태의 진상을 더욱 전면적으로, 깊숙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생산력과 풍족함(물론 구매가능성은 별개의 문제)도 보지만 거대한 실업과 빈곤, 병폐도 보며, 양자의 관계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
사태에 대한 객관적 연관의 전면적 파악
과학적 사고에서 <어떤 학생의 자살>은 어떻게 이해될까? 이는 어떤 사태의 객관적·총체적 연관을 개별적이고 직접적인 것으로부터 역추적하는 식으로 파악된다.
그 학생의 자살에서 가장 직접적인 것은 그의 심리적인 상태이다. 그것을 결정짓는 것은 동급생들과의 관계, 교사와의 관계, 부모와의 관계이다. 하지만 고등학생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적이고, 그에게 가장 스트레스였던 것도 성적과 경쟁, 상대적 박탈감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결국 이것은 고등학교에서 다른 학생들을 짓밟고 올라가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과 성적이 상대적으로 낮을 때 드는 상대적 박탈감, 건강을 포기하고 학업에 매진해야 내신을 딸 수 있는 환경 등등이 그의 정신과 육체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이 틀림없다.
특히 고등학교 내부에서의 경쟁상황은 학생들의 정신건강 악화와 필연적 연관을 맺는다. 또한 인간의 생체리듬과 위배되는 방식으로 조직될 수 밖에 없는 고등학생의 삶은 그 조건대로 한다면 건강악화를 필연적으로 야기한다.
하지만 한 고등학교 내부의 경쟁상황 그 자체로 완결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전체 사회의 보편적 관계의 개별적 표현에 불과하다. 이 보편적 관계란 과학기술혁명에 대한 자본주의적 이용으로 인해 실업문제가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안정적이고 고임금의 일자리는 극히 적어지며, 대다수는 평균 이하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처지에 굴러떨어진 우리 사회의 대다수 노동자들의 처지라는 일반적 내용이다. 바로 이러한 우리 사회의 보편적 내용이 교육정책과 매개되고 이는 한 고등학교의 극한의 생존을 위한 경쟁상황을 직접적으로 규정한다.
결국 사태의 객관적 본질은 자본주의 사회의 관계들의 총체, 자본주의 법칙이 영향을 미치는 모든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가 여러 관계들을 경과하여, 어떤 한 학생의 자살을 결과짓는 사태를 야기한 것이다. 이때 누가 자살할 것인가는 우연적이다. 개개인을 규정하는 사회적 힘들은 무한하게 복잡하다. 따라서 누가 자살할 것인가는, 자살의 사회적 조건이 형성되었으며, 따라서 누군가 자살할 것이라는 것은 필연적임에 반해, 우연적이다.
민주적·진보적 사고
사태의 원인은 학생들 간의 적대적인 경쟁관계과 그 원인인 실업을 전반적으로 야기하는 현존 사회질서에 그 원인이 있다.
우리는 그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우리가 힘을 모으면 그것을 바꿀 수 있다. 또한 근본적인 사회질서가 문제라면 또한 그것도 우리는 개혁·개조·변혁할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1)인류의 역사는 피억압자들의 투쟁과 노력에 의해 진보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고, (2)사회란 고정불변하는 돌덩이가 아니라 운동·변화·발전하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며, (3)만약 우리가 사회의 발전법칙을 파악하고 그것을 이용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모은다면, 사회변화를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적유물론의 관점
자살은 자연도태에 의한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운동법칙을 반영하는 사회적 현상이다. 생물학적 운동법칙과 사회적 운동법칙은 서로 다른 본질을 가지며, 그 내용, 구조, 체계에 있어서 상의하다. 하나는 다른 하나로 환원될 수 없다.
본 자살의 원인을 규명하는 힘, 즉 자살을 둘러싼 연관들의 모든 내용을 규정하는 것은 현 사회의 지배적인 사회관계인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이다.
이때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는 영구불변의 사회형태가 아니라 역사적 생성물이며, 소멸하여 다음 사회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게 되는 일시적인 사회형태이다. 과거의 모든 사회형태들은 그 사회 내부의, 더 이상 그 사회의 존립을 방해하는 모순, 즉 특정 사회를 유지하려는 힘(생산수단의 소유관계; 계급관계, 지배질서)과 사회의 내용을 계속 바꾸어나가는 힘(생산력; 과학기술의 발전, 노동하는 사람들(노예, 농민, 노동자의 투쟁) 간의 모순의 발전으로 인해 몰락하고 새로운 모순 구조, 새로운 대립물을 갖는 사회를 창출해왔다. 자본주의 사회 역시 자신을 유지하려는 힘(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가의 독점)과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려는 힘(과학기술혁명, 노동자들의 투쟁)이 충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