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시편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 가드왕 아기스라고 불리는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척하다가 쫓겨난 후에 지은 시라고 표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21장 10절에서 15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시편33편은 대체적으로 감사시로 분류가 됩니다. 이전에 어떤 어려움을 겪었지만, 지금을 그 어려움이 지나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응답해 주셨기 때문에이제 어려운 상황이 지나 갔기 때문입니다. 먼저 1절-3절을 보면 시인은 하나님을 항상 찬송한다고 합니다. 자기의 영혼도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고 구해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공로를 하나님께 온전히 돌리는 것입니다. 다윗이 미친 척하는 전략을 잘 짜서 사울과 아기스의 손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는 것을 온전히 인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곤고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고 노래하는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함께 있는 공동체 모두에게 그분을 찬양하자고 초청을 합니다. 이것은 한번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것을 의미합니다. 삶의 전반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4절에서 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어떻게 들어 주셨는지 말합니다. 6절을 보시면 자신을 곤고한 자, 가난한 자로 표현을 합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찾았다는 표현입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께 구할 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7절을 보시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여호와의 천사가 둘러 진치고 그들을 건진다고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공포나 폭력 때문에 생기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과 영광스러움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일회적인 어떤 깨달음이나 감정이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나아가 그 태도를 기초로 세워지는 삶의 양식, 삶을 살아가는 스타일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기 위해서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적인 대리자, 종입니다. 이런 천상적인 존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들을 어려움과 위기와 환란에서 건지시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수호성인, 수호 천사 같은 개념은 아니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를 통해서 확실히 도우심을보여줍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합니다. 우리 말로 보면 맛만보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맛보고 눈으로 보는 것도포함이 됩니다. 하나님이 선하다는 것을 맛보고 눈으로 보라는 것은 그분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자를 실제로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직접경험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모든 다른 두려움에서 건지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9절을 보시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부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젊은 사자는 강력함과 힘을 의미합니다. 강하며 힘이 있는 젊은 사자도 심지어 굶주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이것은 단지 순진하고 철없는 신앙, 맹목적인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허한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부족함 없이 실제로 주십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에서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오늘 시편도 같은 고백입니다. 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만족감을 포함을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교만하고 악한 자들은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더라도 젊은 사자가 굶주릴 때가 있는 것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이 가지고 있고, 의지하고 있는 그 무엇은, 그 힘이 작동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시인은 이런 진리를 자녀들에게 전합니다. 시인이 가르쳐 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고 싸움을 잘하는 장수였고, 음악을 잘하는 음악인이기도 했습니다. 다재 다능하고 최고의 성공의 길을 걸은 다윗입니다. 그런 그가 자녀들에게 전해 주고자 하는 것은 인생의 성공 비결이나 어떻게 하면 백성을 잘 다스리는 지, 어떻게 해야 음악을 잘할 수 있는지 이런 것을 가르쳐주고자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그 자녀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입니다. 또 12절을 보시면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며 복 받기 원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합니다. 한 마디로 장수하면서 복된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혀를 악에서 금하고, 거짓말에서 금하고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따르라고 합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경외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생명은 바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견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진실과 평화를 추구하는 삶을 삽니다. 약육강식의 세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어떤 이상적인 환상에 젖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그의 백성을 돌보시고, 악인들을 벌하십니다. 그분은 의인들의 기도에는 응답하시지만, 악인들의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악인의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눈과 귀는 의인들에게 향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악인들의 흔적을 지우십니다. 17절에서 20절을 보시면 시인은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의인이 부르짖을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환란에서 건지셨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회개하는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이 말은 의인들이 이 땅에서 탄탄대로, 아무 어려움이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의인들도 어려움을 겪고힘든 일을 겪습니다. 심지어 목숨이 왔다 갔다가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인들이 환난 가운데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고,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들을 보살펴 주시고 붙드심을 말합니다. 고난에서 건지신다고 합니다. 그들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고난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께서 붙드심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서 문자적으로 성취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신 예수님은 다리 뼈가 꺾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의인으로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경외했습니다. 예수님은 엄청난 고난과 고통을 당하셨지만, 결국에는 부활로서 그분의 의로우심을 하나님께서 입증해주셨습니다. 그 고난과 고통 속에서 부르짖으셨을 때 최종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이어지는 21-22절은 이 시의 결론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의 다른 결과를 보여줍니다. 악인들은 그들의 악으로 망할 것입니다. 그들의 악행 가운데 망할 것입니다. 의인을 미워하는 자들은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현재 고통 받는 당신의 종들의 영혼을 건져 주십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벌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모든 두려움에서 건짐을 받는다는 것이 오늘 시편의 핵심 주제입니다. 그것이 단지 어떤 허상이나 환타지가 아니라 그것은 맛보고 눈으로 목도할 수 있는 아주 실제적으로 현실적인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3절에서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고 나서 3절에서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인자하심이 바로 오늘 시편에서 말하는 선하심과 같은 말입니다. 또 베드로는 3장 10절에서 13절에서 12절에서 16절을 인용합니다. 혀를 금하고 악한 말을 그치고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야 할 마땅한 삶의 방식입니다.
오늘 시편에서 우리는 두 가지 포인트를 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먼저는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 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방식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서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실제로 역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물려주고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의로운 길을 걸으며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시는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두 가지를 놓고 함께 찬송한 후에 기도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