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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차이성의 비유 (월간시인, 2024, 3월호)
1). 유사성에서 차이성으로
시의 언어는 비유의 언어이다. 모든 언어가 지시적 의미 외 이면의 의미를 다소간에 갖는 것이다. 예컨대,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이육사,「절정」에서)라는 행간에서도, ‘어디’에는 ‘평안의 시공’ 정도의 주지(主旨)가, ‘무릎 꿇기’에는 ‘잠깐의 평온’이라는 주지가 유추되는 것이다.
비유는 기존의 의미를 변화시켜 새롭고 구체적이며 특수한 인식을 표현한다. 프라이((H. N. Frye)는 비유의 동기를, 인간이 그의 마음과 외부 세계를 결합ㆍ동일화하고자 하는 욕구에 있다고 한다. 좁게는 사물이 자기 자신과 같아야 한다는 욕구이고 넓게는 복수(複數)의 사물 간에 유사성 및 상등성(相等性)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이다.
오늘날 비유는 대체로, 연상적 유사성에 입각한 ‘은유’(직유, 상징, 의인 등 포함)와, 논리적 인접성에 입각한 ‘환유’(제유 포함) 등 크게 둘로 나누어져 논의된다. 이 둘은 새로운 언어생성의 축(軸)이기도 하다는 것이 구조주의언어학과 인지언어학의 논리이다. 비유의 논리를 더욱 단순화 하여, 은유, 환유, 상징의 구분도 없이 통틀어 은유(metaphor)란 말로 대체하기도 하는데, 연상적 유사성에 의하든(은유) 논리적 인접성에 의하든(환유), 주지가 문면에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모든 비유가 심층적으로는 유추에 의한 ‘A=B’의 형식, 동일화를 지향한다는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이들이 기술(記述)의 편의를 제공할는지는 몰라도, 실제 시적 비유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지나치게 단순한 전제라 할 수 있다. 은유론 또는 은유ㆍ환유 양극론 자체가 청중의 선동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는 데 목적을 두었던 고대 변론술의 수사학을 계승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대중들과의 동일화를 손쉽게 이루던 유사성 중심의 웅변술을 계승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시, 개별적이며 복합적인 삶의 내밀한 언어인 현대시의 시성(詩性)을 해명하는 데는 단순성이 주는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근대 시인은 객관화하기 어려운 삶과 특수한 상황을 언어화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반어, 역설, 암호, 비문법 언어, 구체어, 극한의 은유, 상징 등 별로 유사하지도 않은 복합적인 비유체계를 이용한다. 이들은 유사성보다 차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비유양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신진, 「야콥슨의 양극론 비판」,2006]
시의 비유를 형성하는 요소는 주지, 매개어, 유사성, 차이성 등 4가지이다. 모든 비유는 이 네 요소의 길항을 통해 정체성을 확보한다. ‘순정은 물결 같이 바람에 나부끼고(유치환 「깃발」)’라는 시구를 예로 들면, 주지는 순정, 물결은 매개어, 유사성은 ‘바람에 나부끼고’와 관련된다. 차이성은 순정과 물결 간의 현실적 차이로서, 소위 직유에 있어서의 ‘같이’ 또는 ‘처럼’과 같은 부사격조사가 그 증거가 된다.
비유의 네 가지 요소가 다 드러나는 경우(직유)와, 주지와 매개어만이 드러나는 경우(은유)가 있고, 매개어만이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환유, 제유, 상징).[문덕수,『시론, 2002]
이렇게 보면 모든 비유는 의미(sense)와 의미 사이, 실체(entity)와 실체 사이, 의미와 실체 사이에서 차이성을 전제로 하는 유사성을 등치시킴으로써 기존 언어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고, 결과적으로 대상과 시인과 독자 간 동일성(identity)을 이루는 언어양식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비유의 유추에는 유사성(인접성 포함)이 큰 경우가 있고 차이성이 큰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점, 차이성이 완전히 배제된 비유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비유론에는 유사성에 의한 은유, 환유 등은 있어도 차이성 또는 이질성을 중심으로 한 비유에 대한 인식은 부족하거나 결여돼 있고 그 명칭도 마땅히 마련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무릇 모든 언어행위가 타자들과의 동일성을 이루는 데 목적을 둔다 하더라도 삶과 문화적 가치가 전적으로 개인화 내면화 다층화 하는 현대사회, 현대시에 있어서의 시적 발견은 유사성보다 차이성에서 비롯되고 이를 구체화함으로써 새롭고 적확하며 탄력성(tension) 있는 동일화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훌륭한 시인은 현재에서 새로운 삶과 이미지를 발견하고 구체화하여 생명력을 부여한다. 간극이 큰 주지와 매개어 사이, 주지와 매개어의 협동이 예상과 상식에서 어긋나는 바를 진정성 있게 가리킬 때 유사성이 아닌, 차이 중심의 비유가 발생한다. 이는 근대이전 대중 연설의 유사성 중심 수사법에서, 다양한 삶의 발견적 인식과 차이성 중심 언어전략으로의 이동이다.
무척 짧은 시이지만 주목을 받았던 1970년대의 시 한 편을 보자.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섬」
첫 행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명제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니. 둘째 행을 음미한 후에야 조금씩 그 섬이 그려진다.
일반적으로 섬은 외로움의 이미지이지만 이 시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가고 싶은 곳 즉, 연대적 삶의 아름다움이 깃든 곳이란 개인적 상징이다. 동시에, 일반의 예측과는 차이가 나는 아이러니, 또는 불합리한 표현의 이면에 진실을 감춘 역설의 성격도 있다. 무척이나 짧은 시이지만, 복합적인 언어과정을 거쳐 섬은 요동치는 세파를 무릅쓰고 시적 자아의 애틋한 인간애와 외로움과 사랑이라는 다층적 욕구를 구체화 하는 차이성 강한 상징이 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 시에 감각적 실감을 더하면서 나름의 길을 모색한 시도 들 수 있다.
마개를 빼면
화약 냄새가 나는 지구
언젠가
거울 앞에 앉은 아내의 향수병을
채색한 일곱가지 무지개 빛깔
맥주병 안으로 침몰한 태양
어둠이 피부에 기면
피가 나도록 긁는 쾌감, 빈대
카실카실 카시오피아 성좌에서
카실히 지는 낙엽소리
질풍신뢰(疾風迅雷)의 속도로 도는 지구 위에서
현기증과 구토가 메아리 치고
뛰어 내리기 전에
쓰디 쓴 이별의 커피맛.
-, 구연식, 「감각A」전문
첫 연에서 시인은 지구를 둥근 사과나 달걀에 비유하지 않고, 술병이나 꽃병에다 화약을 넣은 화염병 같은 것에 비유하였거니와 이는 이질적 대상 사이의 충돌적 연계, 즉,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 수법을 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6연은 각각 후각, 시각, 촉각, 청각, 기관감각, 미각 등 감각적 이미지가 병치되어 있는데,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에 대한 허무의식을 감각화 하는 외에도 ‘카실카실 카시오피아 성좌에서/카실히 지는 낙엽소리’ 같은 언어감각도 이용된다. 4연의 ‘카’와 ‘실’에는 격음, 마찰음으로서의 성질도 있어 목젖에 걸리는 그 반복은 문명에 대한 허무의식을 은유하는 압운의 효과를 발휘한다고도 할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 시의 창작과 이론은 선후를 가를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으니 그는 조향의 직계 후배인 동시에 한국 초현실주의 시 연구로 처음 박사학위를 받은 초현실주의자이기도 했고, 이 시는 초현실주의 위에 「신감각파와 정지용시 연구」(1982), 「이미지즘(Imagism) 연구-김광균의 와사등을 중심으로-」(1984) 등 두 편의 논문 작성과정에서 정리된 논리를 시작의 배경 이론으로 하고 있다 할 수 있다.[신 진, 「닫힌 초현실주의에서 열린 현실의 일상으로 ― 구연식 시인론」]
물론 이상이나 조향의 시에서 시적 원천을 찾을 수도 있겠으나 이 시의 마개, 화약냄새, 아내, 빈대, 카시와피아 성좌 등등의 이미지는 유사성에 의한 비유나 고정적 관습상징이 아닌, 의미가 모호하면서도 참신한 긴장상징(tensive symbol), 또는 환상적 상징어들로서 고의적으로 차이성 중심의 비유어를 쓰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라 할 것이다.
「섬」이나 「감각A」 두 편 다 이른바‘낯설게하기(ostranenie)’를 실천한 시라고도 할 수 있다. 낯설게 하기는 대상에 대한 표현을 의도적으로 친숙하지 않고 난해하게 해서 지각 과정을 어렵게 하는 20세기 초 러시아 미래파(futurism)의 언어적 특성을 가리킨 말이다. 낯설게하기란 넓은 의미에서 차이성 중심 언어운용의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나저나 시의 언어는 세월이 갈수록 유사성에서 차이성 쪽으로 중심이 옮겨지고 있다 하겠다.
수백 년 전, 비코(G. B. Vico)와 보시우스(G. J. Vossius)는 시의 언어체계에는 네 개의 주요한 원형적 문채(figure)들이 있다고 하고, 그것들을 창안 순서대로 들어 은유, 환유, 제유, 아이러니 등이라 한 바 있다. 맨끝 아이러니는 그 후 표현상의 문채, 다른 말로 가(假) 비유 (pseudo-trope)라고 제외되었고 비유체계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 특히 야콥슨에 이르러 은유, 환유 등의 양극론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김현 편,『수사학』,1985]
현대시인은 한 층 더 개방적인 태도로, 복잡다양하고 개별적이며 내밀한 현대인의 삶과 정서를 탐색한다. 독자 역시 관례나 일반이 아닌 신기(新奇)를 선호하는 한편, 웬만한 깊이의 진정성이 아니라면 신뢰하지도 않는 안목을 갖추었다. 시인에게는 복잡다기한 삶을 개방적 언어로 표현하되 나름의 구체성을 가지는 언어체계, 넓은 의미에서의 아이러니라든지 차이성이 큰 은유와 긴장 상징 등 차이성을 전제로 공통성 또한 확보해야하는 언어운용 상의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2). 또 하나의 비유, 차유(差喩)
한때 가성(假性)의 비유로 취급되기도 했던 광의(廣義)의 아이러니는 20세기 들어 이른바 형이상학시(랜섬)나 로고포에이아(파운드)의 핵심 언어전략으로, 현대시다운 중층적(重層的) 언술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가비유의 위상 격상의 이유로는 첫째, 시적 인식대상 자체가 본질적으로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 상황 때문이고, 둘째, 실제 상황인 듯, 화자(話者, narrator)에 의해 일상에서인 양 연출되는 극적 담화와도 같다는 점, 셋째, 대립ㆍ모순되는 시적 대상들을 단순하고, 배타적인 방법으로 서술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주지적(主知的) 관점에서 받아들이려는 시정신에 부합한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상황적 요소나 문맥적 정황에 의해 생성되는 갖가지 아이러니와 긴장상징, 낯선 은유, 논리가 인접하지 않는 환유(또는 제유) 등 차이성 중심의 비유가 중심으로 격상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차이’의 비유, 다시 말해 모순, 불합리, 비상식 등 매개적 언어가 특정의 주지를 유추하게 하는 경우, 이 역시 비유의 본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이를 차이성의 비유, 차유(差喩, transphore)라 부르기를 제안한 바 있다.차유는 그간의 수사(修辭) 위주의 비유가 실제 삶의 성찰에 닿지 못하는 한계를 넘어서는 언어전략이자, 은유ㆍ환유와 함께 언어형성상의 세 축이 되기도 한다.[신진, 「시적 기능의 세 번째 축, 차유론」, 2003]
물론, 실제 표현에 있어서는 어떤 환유도 다소 은유적이거나 차유적이며 어떤 은유도 차유적, 환유적 색채를 띠기 마련이다. 어느 것도 단독으로 작동되지는 않는다. 셋 중 하나가 단독으로 작동할 때는 가치중립적인 산문이 되거나 비문(非文)의 기표놀이에 떨어지고 만다. 은유, 환유, 차유는 언어 생성의 세 축이요 시적기능의 세 축(軸)인 것이다.
세 축 또는 세 층위의 특징을 간략히 대비해본다.
은유 | 환유 | 차유 |
유사성 유추 연상 서정 선택적 사물시.표현론 직유.은유.의인 외 | 유사성(인접성) 결합 실제 서사 논리적 관념시.효용론 제유.환유.관습상징 외 | 차이성 개방 위트 극 역동적 형이상학시․교언론 아이러니.역설.긴장상징 외 |
형이상학시의 핵심, 기지(wit)와 기상(conceit)은 차유의 태도를 대표한다할 수 있다. 차이, 상반(相反), 모순, 중의(重義), 과장, 축소, 시침 떼기 등 갖가지 이질감을 이용하는 위트 있는 착상이 차유이다. 차이 중심의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언어로 긴장감 있는 의미의 공유를 성취한다. 바슐라르(Gaston Louis Pierre Bachelard)의 상상력 이론을 빌면, 유사성에 의한 종래의 비유가 대상에 대한 표면적이고 감각적인 반응인 ‘형태적 상상’과, 대상에 대한 부피와 무게를 느끼며 공존하는 ‘물질적 상상’의 영역에서 작동한다면, 차유는 그를 넘어 원망(願望)의 무한한 실현가능성에서 우러나는 의지에 의한, ‘역동적 상상력’에 의한다. 역동적 상상력은 자발적이며 무상(無償)한 것이며 인간 원초의 정신기능이고 미래를 향해 열린 존재의 근본적 동력이다.[곽광수, 김현, 『바슐라르연구』,1981]
가령, 김광균의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추일서정」에서)라든지 김춘수의 ‘하나님 당신은 …… 놋쇠항아리다’(「나의 하나님」에서)와 같은 비유는 컨시트, 또는 독특한 은유라 불리고 있지만 ‘차유’란 명칭이 용인된다면 차유의 범주에 든다 할 수 있다. 물론, 유사성과 차이성이란 구별은 궁극적으로 각자의 주관에 달린 문제이다. 원래 문학과 예술의 가치 판단치고 주관성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 경우란 없지 않은가.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들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들을 성자(聖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돠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1960년대 말, 산업화와 부의 축적을 위해 일로 매진하던 시대. 번지(番地) 지정이 조국 근대화의 일환이던 때에, 시적 자아는 주거지를 잃어버린 비둘기를 발견한다.
비둘기가 평화를 가리킨다는 관습적 상징은 부차적인 것이다. 아예 번지를 가질 수 없는 비둘기가 이미 가지고 있던 번지를 잃었다는 진술의 불합리 속에 숨어있는 자연 파괴의 진실 즉, 역설(paradox)을 이해하고, 그 아이러니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실제 시 창작의 중요한 열쇠가 있다. 비둘기는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산업화, 환유)에 살 수 없을 지경이지만 성북동(삶의 터전, 환유)을 떠나지 않는다. 결국 비둘기는 평화의 관습적 상징을 넘어 생태적인 삶 또는 성북동의 원주민을 연상시키는 차유성 중심의 비유어인 것이다.
차유에 대한 각성은 시를 관념시, 사물시, 교언시 등 단순 시형에서 벗어나, 단어들이 그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예기치 못한 관념의 춤을 생성하는 E. 파운드의 로고포에이아, 철학적 내면의 복합경험을 형상화하는 J. C. 랜슴의 형이상학 시, 그리고 자유연상시― 내면적 의식의 흐름을 반영하는 상징어의 자유연상 시 같은, 새롭고 다층적이고 성숙한 모습으로 시를 이끄는 동력이 된다.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의 생명 철학을 대표하는 개념 ‘창조적 진화’의 시적 이행이라 할 수 있다. 생명은 인과론이나 목적론적 당위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쉽게 예단하고 규정할 수 없는 창조적 운동으로 약동하는 것이다.
뇌 과학을 빌자면, 논리와 계산을 담당하는 좌뇌는 예상 밖의 역설적 또는 이질적 정보에 맞닥뜨릴 때 일시적인 고장상태에 빠져서, 그 정보를 직관적 예술적 사고를 담당하는 우뇌에 이월하게 되는데, 좌뇌가 활동정지에 빠진 그때, 사랑의 행위를 할 때와도 같은 엔도르핀이 분비된다고 한다. 시에 있어, 기존의 논리적 예측에서 벗어나는 차이성 중심의 비유도 그와 같이, 독자에게 일시적 당혹감과 동시에 기묘한 쾌락, 엔도르핀을 선물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새로움에 대한 주목은 인간의 본성이자 진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미국 MIT대학교수이자 『하이퍼 머신』(2022)의 저자인 시난 아랄(Sinan Aral)도 성공적인 문화를 일구기 위해서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비판적 사고가 필수적인 것이라 하고, 인간은 정보의 진위와 중요도를 떠나 남이 모르는 새로운 소식, 자극적인 뉴스에 더 열광하기 마련인데 이는 언제 있을지 모르는 돌발 상황에 신속히 대처하려는 오랜 진화의 산물이기도 하다고 한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 윤동주, 「또 다른 고향」
시인의 사후(死後), 1948년 시집 속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시이다. 그의 다른 시들에 비해서도 당대의 다른 시들에 비해서도 그만큼 새롭고, 일상과의 차이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시이다.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거나 ‘쫓기우는 사람처럼’ 같은 유사성 중심의 비유가 부차적인 것이라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든지, 방이 우주로 통한다든지,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본다든지 하는 과장진술(overstatement)의 언어적, 상황적 아이러니들이 인상 깊은 차유를 이룬다.
‘고향에 돌아온 나’ 외 ‘따라온 백골’과 ‘아름다운 혼’ 등 세 인물의 정체에 대해서도 해명이 필요하다. 이들의 주지는 각각, ‘정체성 있는 사유의 결단에 임하는 자아’, ‘어두운 세월이지만 현실에 적응하고 사는(풍화작용하는) 자아’, ‘어둠을 물리치는 지조 높은 자아’ 등이다. 이는 시인의 습작기 열의를 볼 때, 이상(李箱)의 시 「거울」의, 현실적 자아와 내면적 자아의 분열상에서 시사 받은 바를 구체적인 삶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이라 짐작된다. 상대적으로 물리적인 백골은 현실적 육신을 가리키고(환유적), 개가 밤새 짖어댐은 어둠을 경계하는 본연의 생명력을 연상시킨다(은유적). 백골의 주지를 화자의 현실적 육신으로 보면 환유(제유)가 되겠지만 ‘자기정체성이 없는 몸’이라고 보면 연상에 의한 은유에 가깝다. 개도 모든 생명의 일부라는 관점에서는 환유가 되겠지만, 밤새 짖어대는 개의 모습에 지조 높은 선지자의 모습은 연상한다면 은유가 된다. 이렇게 은유의 유사성과 환유의 인접성은 보통 구분이 힘들 정도로 겹치기에 모든 비유를 은유란 말로 대체해 쓰기도 하는 것이다.
‘고향의 방’은 자아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공간이며 ‘우주’는 한없이 열린 진실의 공간, '어둠'은 현실의 고통인 동시에 아름다운 혼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바람'은 나와 백골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아에게 자극을 주는 상징어, '개'는 갈등하는 영혼에 우주의 기운을 불어넣는 상징어, ‘또 다른 고향’은 현실 극복과 자아실현의 시공을 상징한다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당대의 수준 높은 시의 차이성 중심 비유는 일상에 있어, 발화자의 태도나 표정, 몸짓이나 어투가 말보다 더 잘 진의를 전하도 하듯, 표현상의 불합리와 모순을 내세워 문맥이나 문화적 사회적 상황이 담고 있는 발화자의 의도를 핍진성 있게 나타내는 언어전략이 된다. 그것은 몸짓이 보통의 자세에서 차이 나는 몸짓으로 변하여 실감나게 의사를 전달하눈 것과도 같은, 차이성 중심의 표현 양식인 것이다.
인간은 자기와 유사한 것보다는 자기와 유별한 다른 것을 만날 때, 더욱 관심을 갖게 되고 풍부해지는 자연의 섭리를 타고 난 생명체라 할 수 있다. 여성의 수태과정에 있어서도, 인간은 난자(卵子)가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친, 가장 빠른 정자를 받아들인다고 오랫동안 이해해왔지만 근래의 연구는 이를 뒤집었다. 수백의 정자가 난자 주위에 다다라 편모(鞭毛)를 살랑거리며 기다리고 있을 때, 난자는 그 가운데 하나, 자기 것과 가장 차이나는 유전적 특성을 지닌 정자를 고른다는 것이다. 인간의 염색체는 자기와 다른, 차이 나는 것과 결합함으로써 근친결합을 피하고 더욱 풍요해지는 것이다. 그와 같이, 차이성 중심의 비유가 생래적으로 유사성 중심의 비유보다 감동을 크게 울릴 수 있는 언어전략이라고 한다면 논리의 지나친 비약이 될까?
차유에는 새롭고 극적인 비유나 아이러니는 물론, 효과적인 대조, 대구, 인유, 알레고리 등 수사적 방법이 동원된다. 언어적인 차이를 극대화하는, 표현적 전략만이 아닌 것이다. 차이남이 타자의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독자적(獨自的)인 동시에 공동체적인 시 정신, 그 내면의 가치를 구현한다. 여전히 언어는 존재의 집이요 시는 영혼의 표현인 것이다. 만일 비유, 내면적 의의를 갖거나 통일적 맥락 이해가 가능한 비유가 아닌, 이해불가의 시가 있다면, 그것은 매명을 위한 억지이거나 차이성만을 내세운 착오라 할 것이다.
시인은 비본질적이고 비인간적인 현실에 대해 그때그때 본질적이고 인간적인 순수성으로 대응하는 시간에 시인이 된다. 차유의 능력은 현실에 타협하고 적응하는 관행 이전에, 현실의 이면을 선입견 없이 성찰하고 명상하는 시간에 성숙한다. 시적 성찰과 명상에는 동서고금의 인문학과 문화사에 대한 이해와 성찰이 밑받침이 됨은 물론이다. 인간과 문화사에 대한 이해는 실제 삶의 순간순간에 창의적 지성으로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시와 시인에게, 세계내 존재로서의 자기정체성을 부여하고 갈증과 긴장을 풍부히 하며 그를 언어적으로 실천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차유의 구사력은 물리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 양면의 세련을 요구하므로, 기존의 시구(詩句)를 자신에 맞추어 패러디해보는 놀이도 숙련을 위한 과정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를 “얼음판 함부로 깨지 마라/ 너는 한번이라도 투명하고 냉철하였느냐”로, 나태주의 「풀꽃」을 “대충 보아도/예쁘다//잠깐 보아도/사랑스럽다”와 같이 패러디 놀이를 이어가는 것이다. 놀이라 할지라도, 혀끝 말놀이 자체에 열중하기보다는 상황에 부합하는 언어, 가능한 자신의 정체성에서 우러나오는 독자(獨自)의 놀이가 즐거움과 신선함을 더하지 않을까 한다. 이때, 기성작품에 대한 패러디 작품이 자신의 명리를 위해 쓰인다면 ‘표절’이라는 부덕(不德)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