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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을 푸는 사람
2019. 9. 8(주일낮예배) 갈라디아서 1:1-5
갈등은 칡나무 갈과 등나무 등자를 쓴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자 글대로 풀이하면 갈등은 칡나무와 등나무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왜 칡나무와 등나무의 관계를 갈등이라고 부르겠는가? 칡나무와 등나무는 닮은 점이 많이 있다. 제일 먼저 닮은 것은 칡나무와 등나무는 모두 ①콩과에 속하지만, 그 둥지가 굶고 커서 나무로 불리운다. 그리고 칡나무와 등나무는 모두 ②감고 올라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둘 다 ③예쁘고 향기로운 꽃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칡나무와 등나무가 만나면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칡나무는 오른쪽인 시계 반대방향으로 감고 올라가는데, 등나무는 왼쪽인 시계 반대방향으로 감고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칡나무와 등나무가 만나면 서로 뒤엉켜서 풀기 어려운 관계가 되어져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갈등이다. 갈등이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다. 나와 친밀하게 가까이 붙어 있으면서 서로 뒤엉켜 풀지 못하는 고통을 주는 관계를 말한다.
왜 우리는 가까운 사이에 갈등으로 고통하게 되었는가? 최초의 사람 아담에게 하나님의 그의 아내를 주었다. 그때 아담은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가 먹지 말라고 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느냐?고 물었다. 그때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여자 그가 열매를 주어서 먹었다고 이야기 한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동산나무에 숨어있을 때 아담과 그의 아내라고 성경은 기록한다. 그러면 아담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제 아내가 주어서 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아담은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표현한 자신의 아내를 여자 그가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아담이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는 뼈중의 뼈라는 표현을 하며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 상태였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후 둘의 관계는 깨어지고 갈등하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죄악이 가장 사랑하는 사이를 갈등으로 고통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죄악으로 인한 갈등이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을 고통하게 한다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은 죄악으로 인하여 갈등으로 고통하고 있지 않는가? 경제용어 중에 코브라효과라는 것이 있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때 코브라에 물려서 죽는 사고가 많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인명피해를 막기 위하여 코브라를 잡아오면 보상금을 주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랬더니 인도의 많은 사람들이 숲을 다니며 코브라를 잡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숲 속에 코브라가 사라지고, 인명피해가 현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보상금제도는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코브라를 잡아와서 보상금을 요구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졌다. 그래서 정부는 보상금을 받는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더니 어처구니 없게도 코브라를 잡아서 보상금을 받는 대부분의 사람이 코브라 농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람들은 코브라 잡으러 가는 것이 힘들어서 자기 농장에서 코브라를 키운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정부는 보상금 제도를 폐지하여 버렸다. 그래서 이제 코브라를 아무리 많이 잡아와도 보상금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 코브라 농장을 하던 사람들이 더 이상 코브라로 돈을 벌 수 없게 되자 키우던 코브라를 다 숲에 버렸다. 그래서 코브라를 잡아오면 보상금을 주겠다고 하기 전보다 더 많은 사람이 코브라에 물리는 사고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것이 코브라효과이다. 코브라효과는 문제에 대한 대책을 내어 놓을 때는 생각하지도 못한 정반대의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지 못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알고 보면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또 욕심을 부르는 악한 사람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갈등으로 고통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모습 때문이다 우리가 조금만 더 이해하고, 내 욕심과 고집을 버리면 갈등을 쉽게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와 용서의 폭을 넓히지 못하기 때문에 갈등 속에 사는 것이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닌가? 오늘 본문의 배경은 갈라디아는 터키중부지역으로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가 있는 지역이다. 사도바울이 1차전도여행을 통하여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간다. 그리고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였을 때 사람들은 기쁨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다음 주에도 말씀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주에 다시 회당에 갔는데 회당에는 사람들이 가득히 있었다. 아마 바울을 기대와 기쁨을 가지고 신나게 복음을 전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바울의 복음에 대하여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바울이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돌고 쫓아내었다. 그래서 바울은 안디옥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렇게 안디옥에서 쫓겨난 바울은 이고니온으로 간다. 이고니온의 회당에 들어가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와 헬라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드렸는데, 순종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오히려 바울의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그래서 이고니온에는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그때 헬라와 유대 관리들이 바울을 모욕하고 돌로 치려하여서 바울은 루스드라로 도망을 간다. 안디옥에서 쫓겨난 바울은 이고니온에서는 도망을 쳐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서 루스드라로 온 바울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의 다리를 고쳐준다. 그러자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향하여 신들이 내려왔다고 고함을 친다. 그리고 제우스 신전에 있는 제사장들은 소와 화환을 가지고 와서 그 앞에서 제사를 지내려 하였다. 이렇게 사람들이 절을 하려 할 때 바울은 옷을 찢으며 우리가 너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다고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이 루스드라로 와서 사람들을 충동하였다. 이제 방금 바울을 신으로 섬기려 하였던 루스드라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선동을 받고 돌을 들었다. 그리고 바울을 향하여 던지고 쓰러진 바울을 끌고 성밖에 던져 버렸다. 아마 사람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밖에 던져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일어나서 더베로 간다. 그리고 난 후에 바울은 더베에서 자신의 고향인 다소가 아니라, 다시 루스드라-이고니온-안디옥을 지나며 믿음의 형제들을 만났다. 그리고 교회를 견고히 세웠던 것이다. 쫓겨나야 했고, 도망을 가야 했고, 심지어 돌에 맞아서 죽었는줄 알고 질질 끌려서 성 밖에 던져지면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갈라디아 지역에 교회가 선 것이.
그러면 그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사실 바울의 그 헌신과 열정을 갈라디아교회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을 위해서라면 눈이라도 빼서 줄 정도였다(갈 4:15). 그런데 갈라디아교회에 유대교가 침투하여서 바울의 사도성을 부인하게 하고, 또 바울이 전한 복음도 헛되게 하여 버렸다.
만약 여러분이 사도바울이었다면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무슨 말을 하겠는가? 어느 부부가 심하게 부부싸움을 하였다. 그때 속이 상했던 아내는 내가 악마와는 살아도 당신과는 못살아 하고 고함을 쳤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얄밉게 웃으면서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 왜냐하면 근친상간은 불법이거든 하고 말했다. 그러면 그 부부는 함께 사는 것이 굉장히 힘들다.
그런데 다른 부부의 이야기도 있다. 이 부부도 심각하게 싸웠다. 화가 난 아내는 당신 나가! 하고 고함을 쳤다. 그때 남편도 너무 화가 났기 때문에 아내의 말대로 집을 나갔다. 그리고 감정을 추스린 남편은 다시 집으로 들어와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제일 소중한 것을 두고 나갔다고 말한다. 그 말에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아내는 꼴보기 싫으니까 빨리 찾아가지고 나가 하고 말한다. 그때 남편은 아내 손을 덥썩 잡으면서 내 가장 소중한 보배는 당신이야 하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남편이 손을 덥썩 잡고 내 가장 소중한 보물은 당신이야 하고 말하면 더 이상 부부싸움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심각한 싸움을 했지만 말한마디에 완전히 다른 결론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을 향하여 등을 돌린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무슨 말을 했겠는가? 이제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1:2-3을 읽어보기 바란다.
(갈 1:2-3)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은혜(χαρις)는 헬라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이다. 그리고 평강(샬롬) 유대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바울은 자신을 향하여 등을 돌린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저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헬라인과 유대인이 가장 듣고 싶고, 이루고 싶은 단어를 사용하면서 축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아름다운 덕을 세우며 살고, 또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며 살기를 축복한 것이다.
어떻게 바울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의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사생아로 입양되었고, 대학 때 중퇴를 하였다. 그리고 창고에서 애플사를 창업한 후에 펩시콜라 존 스컬리를 찾아가서 애플사로 스카웃 제의를 한다. 당시 최고의 기업인 펩시의 CEO였던 존 스컬리는 스티브잡스를 보고 웃었다. 그런데 스티브 잡스의 한마디에 그는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신은 나머지 인생을 설탕물이나 팔면서 보내고 싶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바꿔놓을 기회를 갖고 살고 싶습니까?
그 말에 스컬리는 애플의 CEO가 된다. 그런데 스티브잡스는 자신이 세운 스컬리에 의하여 애플사에서 퇴출당한다. 스컬리는 괴팍한 성격에 예의없는 스티브잡스를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똑똑하고 실력은 있었지만, 괴팍함과 무례함을 가진 스티브잡스는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퇴출당하는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애플에서 퇴출된 스티브 잡스는 픽스사를 통하여 애니매이션을 만들어 승승장구해 간다. 그런데 애플사가 경영난을 이유로 픽스와 통합하면서 스티브잡스는 다시 애플사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난 후 스티브잡스는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를 만들어 회사를 일으킨다. 그러나 자신의 퇴출시킨 애플사의 많은 사람들에게 스티브 잡스는 책임을 물어 퇴출시켰다. 스티브잡스는 사업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지만, 그의 인간관계는 여전히 최악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티브 잡스가 2005년 스탠퍼드 대학 연설을 한다. 그런데 그 연설은 스티브 잡스의 이전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성공만 알고 있었던 스티브 잡스가 스텐퍼드대학 연설에는 성공이 아니라, 인생에 대하여 강의를 한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어떻게 이런 유명한 연설을 할 수 있었겠는가? 스탠퍼드 대학 연설을 하기 전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죽어가는 육체적 질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질병을 통하여 내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렇게 자신에 대한 고민을 한 스티브잡스는 인생을 강연하는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변화되어서 갈등을 푸는 사람이 되려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갈등을 푸는 축복의 말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내가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자신의 사도성을 의심하며 바울이 전한 복음을 거절하는 그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1절을 읽어보기 바란다.
(갈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바울은 갈라디아지역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엄청난 수고를 하였다. 그리고 또 그러한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은 다시 한번 더 돌아보고 싶은 그러한 교회였다.
그런데 그 갈라디아교회가 바울을 향하여 등을 돌렸을 때 바울이 축복의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착하고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이 세운 사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를 사도로 세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선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저와 여러분은 누구인가? 몇 년 전에 한 잡지가 발간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표지 때문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 잡지 표지에 회색의 나비가 한 마리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표지의 나비에 손을 대면 그 나비가 총천연색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잡지의 표지가 신기해서 관심을 가진 것이다.
그런데 그 잡지표지를 디자인 한 디자이너는 표지를 그렇게 만든 이유가 있었다. 디자이너는 메마르고 회색빛 같은 우리 인생이지만 누군가가 터치를 하면 우리 인생이 총천연색의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가진 사명이 아닌가? 우리는 죄악으로 인하여 잿빛과 같은 인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터치하여 주심으로 이제 우리는 소망이 있는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변화된 우리 인생은 이제 세상을 살아갈 때 잿빛인생과 다투고 싸우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사랑으로 그들을 터치하여 줌으로 그들의 인생에도 기쁨과 소망을 심어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번 명절에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교회와 가정에서 또 직장에서 생활할 때 항상 내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지를 알아서 나 다운 말을 하여서 갈등이 아니라, 소망과 평화를 나누어 주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