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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한반도는 또 다시 강대국들의 각축장으로 전락할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초강대국인 미국과 중국의 힘이 부딪치기 시작했으며 일본과 러시아의 시선이 한반도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벌어진 지정학적 위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지난 오천년 동안 우리는 강대국들의 사이에서 무수한 위기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앤드류 램버트/킹스 칼리지 전쟁학과 교수: 작은 나라는 영리하거나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칼아이켄 베리/스탠포드대 아시아 태평양연구소 교수: 국가는 국민에게 안전을 보장해야 하죠.
T.J.펨펠/UC 버클리대 정치학과 교수: 중립은 매우 어려운 입장이에요.
폴 케네디/예일대 역사학과 교수: 서울에는 현명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다시 찾아온 냉혹한 패권투쟁의 시대, 한반도의 역사를 통해 찾아낸 패권교체기의 생존전략, 이제 그 5천년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
전봉준役/동학농민운동 지도자: 내가 여러분이, 우리가, 새시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새시대를 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1894년 1월, 전라북도 고부, 가혹한 수탈을 이기지 못한 농민들이 봉기합니다.-除暴救民 東徒大將-밭을 갈던 곡갱이는 탐관오리들을 향해 분노한 민심은 들풀처럼 번져갔습니다. 파죽지세, 살기 위해 덤벼든 만여명의 농민군 앞에 관군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조선정부 임금, 고종(26대)은 당황했습니다. 동학농민군은 고부를 시작으로 태인, 정읍, 무안, 장성, 전주까지 빠른 속도로 점령지를 넓혀나갑니다. 그런데, 전주성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던 농민군과 관군, 지루한 대치를 벌이던 양측에 뜻밖의 소식이 전해집니다. 청나라 군대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참전한 것입니다.
이주희/다큐프라임: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조선의 임금, 고종 자신이었습니다. 사실 고종은 집권기간 내내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외세를 끌어들여서 문제를 해결하곤 했습니다. 청나라와 일본, 미국과 러시아 사이를 오갔죠.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 신세였던 당시의 조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면 1500년전에 김춘추도 국가위기 상황에서 당나라 라는 강력한 외세를 끌어들여서 문제를 해결하고 삼국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고종은 실패했고 결과는 망국이었습니다. 똑같이 외세를 이용하는 전략을 구사했는데 왜 김춘추는 성공하고 고종은 실패했을까요. 도대체 이 두 사람의 진정한 차이는 무엇일까요?
1894년 1월,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항거하기 위해 일어난 동학농민군은 봉기 넉달만에 호남지역을 장악할 정도로 기세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들의 최종목표는 한성으로 진격하는 것이었습니다. 1894년 6월, 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조정에 전해집니다. 조정은 경악했고 대책마련에 부심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고종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김도형/동북아 역사재단 이사장 연세대 사학과 교수: 진압을 하러온 정부군의 입장에서도 싸워보니까 안되겠다고 판단을 해서 청군을 불러서 해결을 해야되겠다 그렇게 판단을 한 거죠.
고종의 해결책은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고종이 내정에 청나라를 끌어들인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12년전으로 올라갑니다. 1882년 7월 23일 깊은밤, 신식군대와의 차별에 불만을 품은 구식군대 군인들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 군인들이 차별의 배후로 주목한 주인공은 고종의 아내 중전 민씨, 훗날 명성황후로 불리는 인물이었습니다. 궁녀를 가장한 중전 민씨는 궁을 빠져나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리고 권좌에서 쫓겨났던 고종의 아버지 대원군이 집권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청나라 군대 3500여명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한양으로 들어옵니다.
이삼성/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대원군이 임오군란으로 재집권하게 된다. 그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타개책으로 고종과 민씨 세력이 주도해서 청나라를 끌어들여서 대원군을 물러나게 했죠. 결국은 국내 정치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청나라를 불러들인 꼴이 되었습니다.
이주희: 고종은 말하자면 믿을 만한 강대국의 힘에 의존하는 전략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를 강대국 편승전략이라고 합니다. 강대국 쪽에서 지나친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혹은 우리에게 강대국을 제어할 만한 능력만 있다면 나름 합리적인 해결책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서울 중구 명동, 서울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는 명동, 서울 명동에 있는 중국 대사관은 바로 그때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던 곳입니다. 원래는 포도대장 이경하의 집이었던 곳인데 임오군란으로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자 이곳에 주둔지를 마련했던 것이죠. 고종의 목표는 손쉽게 달성되었습니다. 눈에 가시였던 아버지 대원군은 청나라로 납치됩니다.
대원군役: (청군이 대원군에게 총을 겨눔)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고종부부는 다시 권좌에 복귀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고종은 임오군란의 승리자였을까요? 임오군란의 진정한 승리는 고종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자(청나라 원세개)가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주희: 조선은 청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해야 했고 군사뿐 아니라 외교 재정에 이르기까지 노골적인 간섭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고종은 후회했을까요?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바로 이곳(우정총국 중수기념비)에서 고종에게 찾아온 또 다른 위기의 결과를 살펴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임오군란 2년후인 1884년 12월 4일 지금의 우체국인 우정국(서울 종로구 견지동)의 낙성식을 축하하기 위해 조선의 고관대작들이 모였습니다. 이때 갑자기 한 무리의 자객들이 침입해 대신들을 향해 칼부림을 시작합니다. 이른바 갑신정변 (1884년 12월)의 서막이 오른 것입니다. 이 참극을 주도한 김옥균 박영효 등은 서구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던 이른바 문명 개화론자들이었습니다.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고 개화정책이 더디어지자 조정내에 득세하던 친청파 대신들을 제거하고 직접 정권을 잡아 개화정책의 박차를 가하려 했던 것이죠. 청에 기대어 권세를 누리던 중전 민씨 일족은 그들의 척결대상 1순위였습니다.
이삼성: 민씨 세도는 계속되었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상황은 개화파로 하여금 고종의 개혁 의지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에 개화파들이 급진화하게 되는 거죠. 개화파들은 오로지 희망을 일본이라고 하는 또 다른 외세에서 구하게 됩니다. 그것이 갑신정변이죠.
왕권에 대한 조그마한 도전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고종은 물론이고 친족들을 잃은 중전 민씨의 분노는 그야말로 극에 달했습니다. 2년만에 또 다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한 고종, 이번에는 어떤 방법으로 이 위기를 탈출하려고 했을까요.
이주희: 고종의 선택은 2년전과 같았습니다.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한 것입니다.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하려던 청나라로서는 생각하지도 못한 기회가 찾아온 것이죠.
이튿날 청군 1500명이 궁으로 진입합니다. 개화파를 보호해 주겠다던 일본군은 약속을 헌신짝처럼 집어던지고 도주합니다. 고종은 청나라 덕분에 또 왕좌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공짜는 없었습니다.
김도형/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연세대 사학과 교수: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간섭이 아주 심화되고 대표적으로 위안스카이(원세개)라고 하는 사람이 조선에 머물면서 내정 간섭을 하는 거죠. 심지어 고종이 말을 안들으니까 “고종을 폐위해야 되겠다”는 발언도 할 정도로 위협이 되니까 고종의 입장에서는 나라의 자주적인 권리를 위해서 청의 간섭을 가능하면 좀 벗어나려고 노력은 했어요. 그러나 청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서양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방패막이 되니까 그 두가지의 이득 가운데에서 어떤 때는 청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청과 좀 거리를 두려고 하는 태도를 취해요.
이주희: 이처럼 고종은 위기가 닥칠 때 마다 淸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여서 문제를 해결하곤 했습니다. 오랜 세도정치로 재정은 파탄나고 믿을만한 친위군 조차없는 고종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외세는 毒입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이들을 끌어들이더라도 반드시 내부에 이들을 대항할 수 있는 항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희생과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죠. 唐나라 라는 외세를 끌어들였던 신라의 김춘추는 이 사실을 잊지 않았고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고종의 경우에는 항체를 만들어 내는데 실패한 것 같습니다.
동학농민군과 관군의 전주성 대치(1894년 6월), 농민봉기라는 세번째 위기가 닥치자 마자 곧 바로 청을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앞의 두차례 와는 상황이 좀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고종의 파병요청에 난데없이 일본군 역시 조선땅에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사태는 고종의 의도를 완전히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군대가 진주하자 외세의 개입을 우려한 농민군은 관군과 화약을 체결합니다. 그리고는 전주성을 떠나 일상으로 복귀했죠 (전주화약 1894년 6월),
이주희: 청일 양국군이 개입한 원인이 사라진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정부는 양국정부에 이제 그만 나가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하지만 약소국이 끌어들이는 건 마음대로 될지 몰라도 내보내는 건 결코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입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청나라는 철수에 동의 했지만 일본은 완강하게 거부했죠. 생각해 보면 1500년전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였을 때에도 당나라가 나갈 생각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그때의 신라는 당나라를 내보낼 힘을 가지고 있었죠. 고종은 과연 어떨까요?
피터두스/스탠포드대 역사학과 석좌교수: 일본은 조선 왕실에서 첫번째 쿠데타를 일으키고 친일개혁파를 왕실에 투입합니다. 두번째로 중국군을 몰아내는 일에 착수합니다. 기본적으로 이 일이 전쟁의 시작 입니다. 한국 왕실을 장악하고 나서 전쟁을 개시합니다. 일본군은 청과 조선이 숨돌릴 틈도 주지않고 아산만으로 상륙하려던 중국군의 수송선을 공격합니다. 천명이 넘는 청군 병사들은 저항도 못하고 수장됩니다. 한반도를 무대로 한 청일전쟁의 막이 오른 것입니다. (청일전쟁 1894년 7월),
이주희: 당시 일본군의 전력은 청나라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습니다. 비록 아산만에서 기습을 당했지만 청군은 13000명의 병력을 평양성에 집중시키면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고종도 청나라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황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청나라가 자랑하던 북양함대를 궤멸시킵니다. 일본군이 삼면에서 평양을 압박해 들어가자 청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최신 무기들을 버린채 도망칩니다. 일본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북진해 요동반도의 여순과 산동반도의 위해위까지 점령했습니다.
피터두스: 중국군은 규모는 컸지만 내실은 좋지 않았습니다. 최신식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영국이 건조한 우수한 최신 전함을 보유한 해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함을 운행할 승무원과 장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외국 고문에게 의지했습니다. 중국은 규율이 엉망이고 중앙통제가 불가능한 거대한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는 최신식 소규모 군대와 그보다 더 작은 최신식 해군이 있었습니다.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유입니다.
일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청나라에서는 이홍장이 양국 대표로 참여했습니다. 이렇게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는 조선이 완전 무결한 독립 자주 국가임을 확인하고 (중략) 조선의 청국에 대한 조공-헌상-전례 등은 영원히 폐지한다.
김도형: 시모노세키 조약의 제1조에 조선의 독립이 나오게 되는 것은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킬 때에 청일전쟁의 구실로 즉, 명분으로 삼은 게 조선의 독립이에요. 그런데 왜 그랬냐, 역시 조선을 청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해서는 일본이 전쟁으로써, 힘으로써 청을 패배시키고 나면 조선은 독립이 된다. 조선의 독립은 아까 말씀 드린대로 일본의 침략에서 가장 첫째 조건이거든요. 그래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죠.
이주희: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에 의해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에서 청나라는 탈락하고 일본이 급부상합니다. 이 예기치 못한 위기상황에서 고종의 선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고종은 익숙한 방식대로 새로운 외세를 끌어드립니다. 그리고 그 계기는 시모노세키 조약의 제2조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일청양국강화조악(시모노세키 조약) 제2조 청국은 요동반도와 대만 및 팽호섬 등을 일본에 할양한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전리품으로 단지 조선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만주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죠. 하지만 만주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은 일본만이 아니었습니다.
김도형: 중국의 해안가를 중심으로 해서 서양의 열강들이 거의 다 조차지로서 점령을 하고 있는 셈이죠. 그렇게 되니까 중국이라고 하는 큰 시장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지역이 만주지역이에요. 만주지역을 둘러싼 서양 여러나라들의 각축이 이루어지는 거죠. 그런데 먼저 선점한 것은 일본입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만주지역에 있는 특히 중요한 항구지역인 여순과 대련지역을 일본이 장악하는 거죠.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 제일 불만을 가진게 러시아 세력이에요.
만주에 주목하고 있던 또 다른 강대국, 러시아가 나선 것입니다.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까지 끌어들여 일본으로 하여금 만주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고종과 중전 민씨는 새로운 해결사로 러시아에게 손을 내밉니다. 청나라 라는 후견이 사라진 상황에서 일본을 막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이 선택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삼성: 한반도에서 영국과 러시아의 경쟁관계는 상당히 뿌리 깊은 점이 있습니다. 1880년대에 이미 영국은 거문도 점령을 통해서 한반도와 극동에서 러시아의 세력팽창에 대한 경계심을 분명하게 드러낸 바가 있습니다. 고종과 집권 세력이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노력을 하게 되면서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으로 하여금 깊은 경계심을 갖게 만들었죠.
당시 러시아는 19세기의 패권국가였던 영국이 가장 경계하고 있는 가상적국이었습니다. 영국은 동유럽, 터키, 아프가니스탄 등 러시아가 외부로 진출하려는 모든 통로를 봉쇄하고 러시아의 팽창을 제거하고 있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연해주, 그런데 조선이 러시아에 가까이 간다는 것은 아시아에서 러시아에 대한 봉쇄가 뚫린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바로 이 시기에 생깁니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이곳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약 9000km를 잇는 세계에서 가장 긴 이 철도는 지금은 수많은 여행자들의 버킹리스트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1891년 이 철도가 착공에 들어가자 주변국들의 반응은 지금과 크게 달랐습니다.
이주희: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부설은 러시아의 남하에 노심초사하고 있던 영국의 반발을 불러일으킵니다. 일본 역시 청일전쟁으로 다 잡았던 만주를 러시아에게 빼앗긴다는 생각에 분노했죠. 만주에서의 경제적 이익을 노리고 있던 미국도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영국 일본 미국 이 세 나라는 과연 만주가 러시아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까요.
시베리아의 철도로 동아시아를 둘러싼 심각한 긴장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합니다. 초강대국 러시아라는 열차에 올라탄 고종, 그가 행한 종착역은 조선의 부활이었을까요 멸망이었을까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기껏 차지했던 만주를 러시아에 의해 도로 내놓는 것을 본 고종은 러시아 세력을 등에 업고 정국을 주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물러날 일본이었다면 애초에 청일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을 겁니다.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개입이 본격화할 무렵, 간밤에 낭인과 조선군으로 무장한 일본인들이 중전 민씨의 침소인 옥호루에 난입합니다. 이른바 을미사변입니다 (건천궁 옥호루/서울 종로구 경복궁), 러시아와 손잡은 고종에게 처음 일어난 일은 왕비의 참혹한 피살이었습니다.
이주희: 온갖 평지풍파에도 살아남았던 중전 민씨는 치밀하게 준비된 일본의 칼을 끝내 피하지 못했습니다. 고종이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것은 당연합니다. 그는 가만히 앉아있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반전을 도모합니다. 중전 민씨가 살해된지 석달 후 간밤에 가마 두대가 경복궁을 빠져 나옵니다. 가마에 탄 사람은 뜻밖에도 고종이었습니다. 일본으로 부터의 신변위협을 피해 거처를 아예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것입니다. 이른바 아관파천(1896년 2월)입니다. 아관 파천이후 고종은 열강들에게 선물 보따리를 안겨줍니다. 한반도의 이권을 나눠준 것이지요. 철도는 경인선은 미국에, 경원선은 프랑스에, 경부선과 경원선은 일본에 넘어갑니다. 울창했던 조선의 숲은 주로 러시아가 차지합니다. 광산과 전기도 미국을 중심으로 여러나라가 나눠 갖습니다. 조선 전역에 걸쳐 열강으로서 이권양도가 극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고종 나름의 전략이 숨어 있었습니다.
김도형: 그 당시에 이권침탈이라고 하는 그 자체는 서양이 강하게 요구한 것도 있지만, 물론 그 요구와 덧붙여서 우리는 미국에게도 주고 영국에게도 주고 이렇게 해서 일정하게 어쨌든 세력균형을 이루어야 나라의 자주권을 보존할 수 있겠다. 이런 것과 결합이 되어 있어요. 세력균형을 잘 이루었으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중립국이라고 하는 것은 국제열강 사이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혼자 힘만으로는 절대로 안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권 양여를 통한 세력균형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우리가 내부적으로 그것을 유지할 만한 힘을 갖지않는 가운데에 그 이전이라고 하는 것만 통해서만 자꾸 하려고 하니까 결국은 성공할 수가 없었던 거죠.
이주희: 이권침탈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고종의 아관파천이 가져온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공사관이 있던 이곳 정동 일대에 집중된 국제사회의 싸늘한 시선이었습니다.
이삼성: 러시아에 의지해서 왕의 전제권력을 강화하는데 집중했기 때문에 조선이 자력으로 근대국가 건설을 추진함으로써 자신의 독립을 지켜낸 자립적인 능력을 가지기 어려운 그래서 결국은 어떤 세력의 식민지 내지는 보호령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사회라고 믿게 되는 거죠.
덕수궁 (원래명칭 경운궁) 서울 중구 정동, 러시아 공사관으로 떠난지 일년 후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돌아옵니다. 외국공사관이 밀집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서 세계 열강을 등에 업고 국가와 개인 신변의 위기를 벗어나 보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내정개혁에도 박차를 가하고 여러 열강과의 관계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시대의 운명은 고종과 대한제국을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1904년 2월, 일본이 러시아를 기습함으로써 러일전쟁의 막이 오릅니다.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싸고 지난 십여년간 대치했던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은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특히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자 했던 세계 최강국 영국과 미국은 개전부터 종전까지 일본을 전폭적으로 지원합니다.
김도형: 일본을 앞세워서 영국, 그리고 미국이 측면에서 지원을 하고 러시아와 대결을 시키는 것이죠. 그래서 흔히 러일전쟁을 대리전쟁이라고 많이 불러요. 일본이 자체적으로 전쟁을 치를 만한 재정적인 능력이 안되니까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일본 국채를 발행해서 자금 조달도 하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전쟁을 치르고 그 전쟁이 끝나는 것도 결국 일본이 전쟁을 할 수 없는 일본이 전력을 다 소진해서 안되니까 미국이 나서서 두나라를 어쨌든 강화시키는 거죠.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이제 한반도에서 맞설 세력은 없었습니다. 대한제국의 운명은 꺼져가는 등불과 같았습니다. 이렇게 절박한 상황이 되자 고종은 또 다른 강대국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 주목한 나라는 1882년 조선과 수교를 맺은 첫 서방국가, 미국이었습니다.
이주희: 고종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지식인들도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가장 이상적인 국가였습니다. 당시의 신문들을 보면 미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믿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러일전쟁이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고종이 선택한 전략중 하나는 한반도에서 일본을 몰아내달라고 미국 정부에다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말입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서울 마포구 합정동, 고종이 접근했던 미국인 중에는 한국에서 20여년간 영어교사로 근무하던 친한파 미국인 호머 헐버트가 있었습니다. 호머 헐버트(미국인 선교사), 고종이 그에게 한 부탁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친서를 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헐버트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로 향했습니다. 과연 고종의 뜻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잘 전달 되었을까요.
이주희: 그런데 워싱턴에 헐버트보다 먼저 도착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들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서울에 있는 미공사관에서 보낸 급전이었습니다. 헐버트는 한국정부에 지나치게 편향된 인물이다 그의 말을 믿지 말라는 경고였죠. 그런데 먼저 도착한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피터두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가쓰라 일본 수상과 미국의 전쟁 특사 태프트의 회담을 말합니다. 1905년 여름 회담을 가졌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회담에서 미국은 일본이 필리핀을 넘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일본은 미국이 한국에서 일본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이삼성: 고종은 자신이 의존하던 러시아가 전쟁에서 패배하자 미국에 본격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하죠.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나 늦어있었습니다. 당시 주한미국 공사였던 호러스 알렌은 러일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인 1904년 1월 4일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개화된 인종인 일본이 한국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 외교라인의 한국에 대한 생각은 고종이 기대하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죠.
이주희: 가쓰라-태프트 조약이 체결된지 1주일이 지나서야 워싱턴에 도착한 헐버트는 미국무부 장관을 만납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대답은 단호한 거절이었습니다. 그리고 같은해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외교권 마저 박탈당한 고종은 미국무부에 다시 한번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호소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미정부의 대답은 신속한 공사관 폐쇄와 외교관계 단절이었습니다. 그 동안 모든 노력에 실패한 고종과 대한제국에겐 과연 어떤 대안이 남아있었을까요. 수많은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고종의 전략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1907년 고종은 마지막 승부수를 띄웁니다.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조선의 중립국임을 선언하고자 한 것입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1907년), 그러나 조선은 초대받지 못한 나라였습니다. 일본측의 방해는 예상했던 것이지만 미국과 러시아 등 그간 고종이 그토록 환심을 사려한 나라들은 고종의 밀서를 애써 외면했습니다.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고종에게 기다리고 있던 것은 승전보가 아니라 강제퇴위였습니다. 이날 이후로 고종은 더 이상 대한제국의 황제가 아니었습니다. 문명을 앞세운 약육강식과 야만의 시대, 그는 외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 임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외교정책은 하나의 외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른 외세를 끌어들이는 일에 연속이었습니다. 강대국간의 세력균형을 이루어서 독립을 유지하겠다는 고종의 전략은 얼핏 매우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외세는 기본적으로 독입니다. 1500년전에 김춘추가 외세를 끌어들였을 때는 이 독을 제거할 항체를 함께 키웠습니다. 바로 독자적인 군사력입니다. 이 독자적인 힘과 교묘한 외교력을 결합함으로써 신라는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고종은 항체없이 독을 썼습니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망했고 고종은 망국의 군주라는 오욕을 뒤집어써야만 했습니다. 권좌에서 내려와 허망한 세월을 보내던 고종은 어쩌면 깨달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독자적인 힘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는 외교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말입니다. 끝. (EBS 다큐프라임 2화,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고종, 열강의 덫에 빠지다”에서 정리).
① 철종이 후사없이 죽자 흥선군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옹립했는데 그가 조선 26대 고종, 1863년 즉위 1907년에 퇴위 44년간 재위, 즉위초 고종의 나이 12살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10년간 섭정, 성년이 된 후 고종이 친정, 왕비 민비도 정치에 간여,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권력 암투, 문란 부패, 고종 정치적 위기 때마다 외세이용.
② 첫번째 위기 1882년 7월 23일, 구식군대 군인들이 신식군대와의 차별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는데 이를 임오군란, 차별의 배후인 중전 민씨를 공격, 민씨는 궁녀를 가장 궁을 빠져나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이때 고종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 3500여명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한양 입성, 이때 권좌에서 쫓겨났던 대원군이 집권,
③ 두번째 위기는 임오군란 2년후인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에 조선의 고관대작들 갑자기 한 무리의 자객들 침입해 대신들을 향해 칼부림,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고 개화정책이 더디어져 친청파 대신들을 제거하고 개화파가 직접 정치, 청에 기대어 권세 누리던 중전 민씨 일족 척결대상, 이를 갑신정변, 참극을 주도한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 실패 참변 해외도피,
④ 세번째 위기는 1894년 1월,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동학농민군이 봉기, 넉달만에 호남지역을 장악, 이들의 최종목표는 한성으로 진격하는 것, 1894년 6월, 전주성 함락에 이때 고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청병 요청, 세번째 위기에 청을 끌어들이자, 일본도 군대 파병, 외세 개입우려 농민군 관군과 화약체결, 전주성 철수(전주화약 1894년 6월), 청일 양국군이 개입한 원인이 사라졌으므로 고종 양국에 출국요청, 청나라 철수 동의, 일본은 완강 거부,
⑤ 일본군이 인천항에 상륙한지 한달 보름만인 7월 23일, 단 2개 대대로 경복궁 기습, 조선군의 저항 없이 경복궁 접수(갑오변란 1894년 7월), 일본은 조선 왕실에서 첫번째 쿠데타를 일으키고 친일개혁파를 왕실에 투입, 두번째로 중국군을 몰아내는 일에 착수, 일본군은 아산만으로 상륙하려던 중국군 수송선을 공격, 청군 천명 수장, 청일전쟁의 개시(1894년 7월),
⑥ 청군 아산만 기습 당했지만 13000명 병력을 평양성에 집결, 고종 당연히 청나라 승리예상, 황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청나라 북양함대 궤멸, 일본군이 삼면에서 평양 압박, 청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최신 무기들을 버린채 도망, 일본군은 그대로 북진해 요동반도의 여순과 산동반도의 위해위까지 점령,
⑦ 일본군은 한반도에서 청군은 물론 전주성에서 일본군의 폭거에 다시 봉기한 동학농민군도 제거 목표, 농민군의 씨를 말리기 위해 일본군과 조선군은 함께 백성들에게 총뿌리, 고종이 불러들인 외세에 의해 동학농민군은 완전 궤멸당함, 고종은 도대체 어느나라 왕인가?
⑧ 청일전쟁결과 일본 이토 히로부미와 청 이홍장 간에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 조선이 완전 무결한 독립 자주 국가임을 확인하고 (중략) 조선의 청국에 대한 조공-헌상-전례 등은 영원히 폐지한다. 조선은 온 나라가 전쟁터가 되고 수많은 백성들이 학살당하고 일본이 조선의 운명을 결정, 열강들 각축에서 청나라 탈락, 일본 급부상, 이때 청나라는 대만과 만주를 일본에 할양,
⑨ 러시아는 만주에 주목,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으로 하여금 만주를 포기하게, 러시아가만주를 지배, 러시아 싸우지 않고 외교로 만주 점령,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고종과 중전 민씨는 일본을 막기 위해 러시아를 새로운 해결사로 판단,
⑩ 러시아가 조선 개입 본격화할 무렵, 일본 낭인 민씨 살해 이를 을미사변,, 러시아와 손잡은 고종에게 일어난 일은 왕비의 참혹한 피살, 고종도 당연히 생명의 위협, 그는 적극적으로 반전을 도모, 고종 민씨 살해된지 석달 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아관파천(1896년 2월). 헤이그 밀사와 만국평화회의 때 열강 조선이 자주독립 의지가 없는 국가로 판단,
⑪ 1904년 2월, 일본이 러시아 기습, 러일전쟁,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자 영국과 미국은 일본 전폭 지원,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 미국의 중재, 한반도와 만주에서 러시아 탈락 일본이 점령, 1905년 조선은 일본과 을사늑약 체결 외교권 상실, 고종의 외세 편승전략 결국은 멸망의 길 자초,
⑫ 러일전쟁이후 한반도에서 일본을 몰아내기 위한 고종의 선택은 미국 정부에 구원을 요청, 친한파 헐버트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주한공사 알렌은 헐버트에 앞서 루즈벨트에게 고종의 요청을 거부하라고 전보, 1905년 7월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회담에서 이미 조선을 일본에 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