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시작 / 백현
그게 시작이었다. 20여 년 전의 그날, 그 순간의 정적과 미묘했던 기분이 생생하다.
밥을 먹거나 먹고 나서 가끔 명치 쪽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꽤 오래 계속되어 병원에 갔더니, ‘역류성 식도염’이라고 했다. 식후에는 적어도 두 시간이 지나서 누워야 하고, 커피나 밀가루 음식 등을 삼가야 한다며 자세한 주의 사항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그걸 받으면서 무심코 이것을 지키면 얼마 만에 낫느냐고 물었던 것 같다. 의사는 “안 나아요. 이 병은.” 했다. 생각지 못한 답에 허를 찔린 것 같아 멈칫했다. 내 마음을 눈치라도 챘는지 그는 “한 번 나빠진 식도괄약근은 좋아질 수 없어요. 이제 관리하면서 사셔야 해요.” 했다.
나는 건강한 편으로 병원에 가는 일이 일 년에 한두 번쯤이었다. 그것도 치료하면 곧 나았다. 드물게 오래가도 보름이면 털고 일어났다. 감기, 독감, 눈병, 중이염이 그랬다. 쇠도 씹어 먹을 만큼 소화기관도 좋은데, 역류성 식도염이라니. 그 사소해 보이는 병이 낫지 못한다니.
집으로 가는 길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내 주제를 파악하게 되었다고 할까? 그전에는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슈퍼맨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다’고 낙관적으로 믿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세계관에 젖어 살다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날이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병을 또 얻었다. 출산한 여자나 오랜 시간 서 있어야 하는 사람에게 많이 생긴다는 하지정맥류로 뒤쪽 허벅지에 핏줄이 선명하게 비쳤다. 정맥이 튀어나올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지만, 핏줄이 아주 어지럽게 다 비쳐서 미니스커트는 입지 못하게 되었다. 어차피 그럴 나이는 지났지만, 하지정맥류를 낫게 하는 치료는 없다는 말에 그날이 떠올랐다. 쉽지 않은 시술로 보기 싫은 그 핏줄을 태워 없앨 수는 있다는 설명을 듣고 권하는 압박스타킹을 사 들고 돌아오는 길이 쓰디썼다.
몇 년 전부터는 발뒤꿈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누워서 뒤꿈치가 이불에 닿으면 짜릿짜릿했다. 그리고 발바닥도 가만있지 않았다. 직설적이기로 소문난 동네 재활의학과 의사가 족저근막염이라고 했다. 원인을 찾아 잘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갔는데, 그게 노화란다. 노화는 수십 가지 아니 모든 병의 원인이 된다는 말까지 덧붙이며 정형외과에 가도 특별한 치료법이 없다며 조심해서 생활하라고 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바쁜 일상에서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역류성 식도염의 증상이 심해졌다가 약 먹고 신경 쓰면 좋아진다. 하지정맥류도 천천히 진행되고 있으며, 발바닥과 발뒤꿈치에도 늘 통증이 있다. 아마 끝까지 나랑 함께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동행자를 더 얻을 수도 있다. 삶은 끝이 있고, 누구든지 예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포기할 것은 포기하는 것도 지혜로 받아들이며 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