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8일차 코스
베네치아
( Firenze )
산 마르코 광장
( 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
산 마르코 대성당
( 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
베네치아(이탈리아어: Venezia, 베네토어: Venesia, Venexia, 영어: Venice, 문화어: 베네찌아)는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베네토주 베네치아 광역시에 속하는 도시로, 베네토 주의 주도(州都)이다. 과거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도였다. 또한 세계적 관광지이며, 수상 도시이자 운하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베네치아의 명소: 왼쪽부터 산 마르코 광장, 카날 그랑데, 라 페니체, 산조르지오마조레섬 |
베네치아의 원도심은 베네치아 석호 안쪽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으며, 육지로부터 약 3.7 km 떨어져 있다. 인구는 2018년 집계 당시 260,897명이며, 이 중 55,000명이 구시가(Centro storico)에 거주하고 있고, 나머지 인구는 베네치아와 인접한 육지에 거주하고 있다.
'베네치아'라는 이름은 기원전 10세기까지 이 곳에 살던 '베네티인'들에게서 유래하였다. 베네치아는 옛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도로서, 중세와 르네상스 기간 동안 유럽의 해상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다. 또한 십자군 전쟁과 레판토 해전에 휘말리며 유럽의 중앙 정세의 한가운데에 서있었던 도시이기도 했다. 베네치아는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비단, 향료, 밀을 거래하는 주요 창구였고,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들 중 하나였다. 나폴레옹 전쟁과 빈 회의 이후,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에 합병되었고, 1866년에 이탈리아가 통일되며 이탈리아로 돌아오게 되었다.
베네치아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 중 하나로 꼽힌다. 베네치아의 아름다움은 중세부터 유명했고, 물의 도시, 아드리아해의 여왕, 가면의 도시 등 다양한 별명들을 가지고 있다. 베네치아는 또한 예술, 건축 분야에서도 매우 지명도가 높은데, 르네상스 시대에 문화 발전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유명한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의 고향이다. 다만 지구 온난화로 인해 수면이 올라가며 도시가 물에 잠기고 있고, 관광객들이 밀려 들어오며 환경 오염 등에 시달리고 있지만 베네치아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매혹적인 도시이자 상징으로 한 손에 꼽힌다.
산마르코 광장(이탈리아어: Piazza San Marco)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위치한 광장으로, 베네치아의 가장 유명한 광장이며 베네치아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 역할을 하던 광장이다. 베네치아에서는 산 마르코 광장을 단순히 '광장' (la Piazza)라고 지칭한다. 산마르코 광장과, 피아제타, 그리고 로마 광장을 제외한 다른 모든 공공 공간들은 광장이라고 불리는 대신에, 들판들이라는 뜻을 가진 캄피 (Campi - Campo의 복수)라고 불렸다. 작은 광장이라는 뜻을 가진 피아제타 (la Piazzetta)는 베네치아 석호 방향 남동쪽으로 산 마르코 광장이 연장된 것이다. 산마르코 광장은 피아제타와 함께 베네치아의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를 형성했고, 보통 하나처럼 여겨졌다.
산마르코 대성당(이탈리아어: Basilica di San Marco)은
이탈리아 베네토주 베네치아의 성당이다. 비잔틴 건축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산마르코 광장과 두칼레 궁전과 인접해 있다. 원래 두칼레 궁전에 소속된 성당이었으나, 1807년에 베네치아 대주교가 이 곳으로 주교좌를 옮기며 바티칸 소유의 대성당으로 승격되었다.
대성당의 기본적인 골격은 1060년과 1100년 사이에 대부분 완성되었고, 후에 추가적으로 이루어진 공사들은 대부분 대성당 건물을 장식하거나 더 화려하게 꾸미는 것에 그 중점을 두었다. 대성당은 고딕 양식의 돔으로 꾸며져 있으며, 성당을 덮고 있는 황금 모자이크를 만드는 데는 몇 세기나 걸렸다. 13세기에 원래 돔 위에 철골로 새로운 돔을 만들어 씌웠다. 내부의 돔 공간 자체의 크기를 확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안으로 들어가보면 밖에서 볼 때보다 훨씬 더 낫다.
대성당의 아름다운 디자인, 황금 모자이크, 베네치아의 부와 명성으로 인해, 산마르코 대성당은 11세기에 '황금 교회'라고도 불렸다. 당시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독창적인 방식으로 비잔틴 양식과 이슬람 양식을 섞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역사
초기 건축
대성당의 원형은 828년에 상인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훔쳐온 성물을 보관하기 위해 두칼레 궁전 옆에 지어진 건물이다. 976년에 일어난 반란 때 불탔고, 당시의 모습은 현재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건물은 1163년에 지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1163년에 새로운 대성당을 짓기 위해 대공사를 벌였고, 성당을 모든 방향으로 확장, 특히 남북쪽으로 크게 확장하였다. 성당의 목조 돔들은 석조로 바뀌었고, 이를 지탱하기 위해 더 두꺼운 벽들을 세웠다.
대성당은 기본적으로 이탈리아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어우러져 있다. 일반적인 성당과 다르게, 산마르코 대성당은 성당의 동쪽 날개를 중요시하여, 제단과 사제석을 이 곳에 두었다. 13세기에 이르러, 몇 개의 파사드가 더 추가되었고, 성당의 모자이크들이 대부분 다 덮였다. 또한 두칼레 궁전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돔을 나무 재질로 크게 증축하였다.
베네치아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들같이, 대성당은 벽돌로 지어졌다. 아치들은 테라코타와 벽돌로 장식되었고, 기둥, 점토로 이루어져 있다.
후기의 증축
대성당의 기본 구조는 초기에 비해 크게 바뀐 바가 없다. 다만 그 안의 장식은 처음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호화롭게 장식되었다. 내부의 벽과 천장에 황금으로 만든 모자이크들을 촘촘히 깔아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했고, 이 것이 없었다면 대성당 내부의 분위기는 지금보다 많이 황량했을 것이다. 대성당은 끊임없이 보물들로 치장되었는데, 특히 1204년에 일어난 십자군 전쟁에서 베네치아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의 예술품들을 대규모로 약탈, 이 곳에 전시하며 큰 변화를 겪었다. 대성당은 심지어 자신보다도 오래된 대리석 조각들과 장식들로 꾸며졌고, 또한 베네치아의 예술가들은 비잔틴 예술품들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형식의 예술을 시도했고, 거의 완벽한 수준에 달하는 작품들을 쏟아냈다.
총독의 개인 성당에서 베네치아의 대성당으로
13세기 산마르코 대성당은 총독의 개인용 성당에서 대주교가 머무는 대성당으로 승격되었다. 이로 인해 당연히 산마르코 대성당의 권위와 명성 또한 높아졌다. 이 곳에서 도시의 공공 행사들이 열렸고, 총독의 장례, 즉위 등이 이루어졌다.
외부 모습
성 마르코의 말
이 조각상은 청동으로 이루어진 4마리의 말들을 표현하고 있다. 본래 트라야누스 개선문을 장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후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대경기장에 서있었다. 그러던 중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고, 콘스탄티노플이 대약탈을 겪으며 이 동상도 약탈되어 베네치아로 옮겨져 1254년 성당 정면의 발코니 위에 설치되었다. 1797년 나폴레옹이 기념으로 이 동상을 가져갔으나, 1815년에 다시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시간이 흐르며 동상의 훼손이 우려되자 동상은 1970년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동상이 서있던 자리에는 복제품이 대신 세워져 있다.
사두정의 황제들
3세기 경 로마제국이 대혼란에 빠지며, 당대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를 4명으로 만들어 각자 제국을 통치하는 새로운 정치 형태인 '사두정'을 만들어냈다. 이 조각에 묘사된 황제들은 그 사두정을 이루었던 4명의 황제들이다. 1204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되어 대성당의 남서쪽 모서리에 설치되었다. 자세히 보면 동상 중 1명의 발이 부서져 있는데, 이 발 조각은 1980년에 이스탄불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스탄불 시에서는 이 동상의 원래 주인이 자신이었음을 주장하며, 이 발 조각을 내어주지 않고 있다.
내부 모습
황금 모자이크
대부분의 이탈리아 성당들과는 다르게, 산마르코 대성당에는 프레스코화가 많이 그려져 있지 않다. 이는 프레스코 대신 유리를 이용하여 대성당을 장식함으로써, 베네치아의 유리 산업과 보수적인 경향을 지키기 위해서인 것으로 풀이된다. 내부의 상층은 8,000제곱미터의 밝은 황금빛 유리 모자이크로 덮여 있다. 다만 베네치아 시에서 19세기에 오래된 중세 모자이크들을 대량으로 떼 버리고 새로운 모자이크들을 채워넣어, 중세의 모습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모자이크들은 전체의 3분의 1 밖에 남아있지 않다.
내부 모자이크를 채워넣는 작업은 127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추가적인 작업은 그 후 20년을 끌었다.
https://maps.app.goo.gl/1rh9dWE5wc6SKbTVA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천주교 광주대교구
남동 5.18 기념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