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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파 백정기 의사(鷗波 白貞基 義士) 약력〉
1896.1.19.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지금의 부안읍 신운리 운기)에서 출생.
본관 수원(水原), 초명 문기(文基), 자 용선(溶善). 호 구파(鷗波).
부친 수원 백씨 남일(男一, 士順)과 모친 파평윤(坡平尹)씨 옥문(玉文)의 2남 2녀 중 장남..
- 정기·조팔락, 복순·박방원(자 상선), 복근·김한섭(자 규환·규권), 용기·정애자(자 계현·재현)
1903. 7세 때 부안읍 신흥리 여술 마을로 이사.(여우실, 狐谷, 禮洞), 어렸을 때 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독학.
1907년 12세가 되던 해 외가가 있는 고부군 흔랑리(欣浪里, 현 정읍시 영원면)로 이사
1908.8. 13세 8월 부친(32세) 별세,
10월 창녕 조씨 성승(盛承)의 맏딸(팔락八洛)과 결혼.
-장인의 주선으로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 갈선마을로 이사. 처가는 천석을 하는 부호.
1909.(14세) 장인 조성승 별세
1909.(14세) 정읍군 소성면 흑암리 189-2
-영주정사(瀛州精舍)에서 간재 전우 문하생인 응원 고인주 학감 문하에서 5년간 수학.
1910.(15세) 한일합병 시 영주정사에서 동문수학하던 학동 12명은 학감 고인주(高麟柱) 주도하에 정읍 천변 이심정(怡心亭) 뒷산 소년봉에서 亡國祭를 지냄.
<응원 고인주(38세, 유학자, 독립운동)·운재 고응중(36세, 유학자)·근촌 백관수(22세, 독립운동가, 전 국회의원) ·인촌 김성수(20세, 고려대학교, 동아일보 설립자, 2대 부통령)·수당 김년수(15세, 삼양사 설립자)·일여 박승규 17세·치관 박봉규(20세, 유학자)·익중 김기홍(昞洪), 17세, 유학자, 독립운동)·삼농 한성수(17세, 유학자, 독립운동)·구파 백정기(15세, 독립운동가, 의사)·민식 최동규(14세, 유학자, 독립운동)·자천 박방원(13세, 유학자)>
1914.(19세) 조선총독부가 남면북양(南綿北羊:남쪽에는 따뜻하니 목화를 재배하고 북쪽은 추우니 양을 목축하라)이라는 구호 아래 일본 경찰은 구파가 사는 인근 농가에서 목화 씨앗을 짓밟고 물레를 부수는 악행을 저지르자 이를 목격한 구파는 분함을 참지 못하고 일본 경찰을 구타했다. 이 事件으로 일본 경찰의 수배령이 내려지자 구파는 5년간 도피생활을 함.
이때 금둔 박승규가 구해준 권총(六穴砲)를 소지하고 다녔다.
1915~1918(20~23세) 도피생활로 행적이 불분명하나 윤병수(尹炳守)라는 가명을 쓰다(고희석에게 겉봉을 윤병수로 표기하여 보낸 편지). 담양군 창평면 「창흥의숙(昌興義塾)」(인촌 김성수의 장인 고정주(高鼎柱)가 세운 호남 최초의 근대학교)에 은둔(隱遁)하며 수학한 것으로 추측됨.
1919.(24세) 서울에 상경하여 3.1운동을 목격하고, 시골로 돌아와 동지규합과 자금염출을 함,
서울과 인천 등을 오가며 일제기관의 파괴와 요인암살 등 행동이 노출되어 일경의 추격을 받고
8월 중국 봉천(심양)방면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 홍범도 장군부대와 연결되여 활동함.
1920.(25세) 중국을 근거지로 국내를 수차례 왕래하면서 독립자금을 마련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서울 중부경찰서에 수감되었으나,
신분을 일제광부로 위장하는 기지로 무사히 방면됨.
1921.(26세) 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나시현(山梨縣) 고부시(甲府市) 조천수력발전소에서 노동현장에 종사하고
5월 도쿄 신주쿠(東京府 下新宿)로 가서 서점 평문사를 운영한 마명(馬鳴, 鄭宇洪)과 이헌(李憲) 등과 생활하며 노동단체지원도하고 사회주의사상을 섭렵.
1922.(27세) 일시 귀국하여 중국 북경을 다녀옴.
※1923.(28세)-유품편지. "희석형님께“ 편지를 쓴 것으로 추측되며, 편지의 내용을 보면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쓴 것으로 보아 이 전에도 독립자금이 수수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돈은 도일자금을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1923.(28세) 8월 10일경 박승규, 최동규, 김기홍과 일왕 살해를 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사전답사하려 하였으나,
9월 1일 "관동대지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박승규 최동규 김기홍은 먼저 귀국하고.
11월 말경 백정기는 “세계사상대전집"을 소지하고 귀국하였다.
1924.(29세) 4월 중국 북경으로 들어가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英)의 집에 거주하며 이을규, 이정규, 류자명, 정화암 동지들과 뜻을 모아
6월「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기관지「정의공보」를 발간(이회영·유홍식·이을규·이정규·정현섭·백정기 등. 창간 회원)
9월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 등과 상해로 이동하여, 중국동지 노검파, 진위기, 대만동지 번본량, 옹택생, 장홍수 등 [화남(華南)아나키스트연맹]과 제휴하여 노동자의 사상계몽에 심혈을 경주하였으며, 당시 지하로 만연하는 이립삼 일파의 적색노동운동을 제지하고자 중국 동지 육불여, 모일파 등[교통노동조합, 인쇄공조합]을 중심으로 조직된 「상해공단연합회」 확충에 진력하였다.
- 독립운동의 사상은 신채호·이회영·김창숙 등의 영향을 받았다.
1925.(30세) 3월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과 상해 전차공사 검표원으로 就職하였다.
중국 상해의 영국인 철공장에서 공인생활 중 폭탄제조 技術을 習得하고,
5월 30일 상해 총파업이 일어나자 중국인 아나키스트들과 더불어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10여 만 명 단위의 대노동자조합(大勞動者組合)을 만들어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이용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8월에 의열단원 계택수 등과 독립운동가 들의 동정을 일본영사관에 밀고한 첩자 김창수 처단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11월 성암 이광과 하남 독군 호경익의 자금지원 제의를 검토하기 위해 폭탄과 권총을 구입하여 천진으로 거처를 옮긴 우당 이회영 집에 모였으나 성과없이 끝남,
1926.(31세) 1월 우근 유자명(友槿 柳子明)과 광동성 광주에서 열린 "義烈團" 改組會議에 참석하였으나 의견 차이로 도보로 상해로 갔음.
4월 상해에서 백범 김구 찾아가 만남.
-임정관계 정보를 누설(漏泄)한 "여운형(呂運亨)"과 일본 첩자의 포섭대상으로 알려진 "김규식"을 응징함.
6월 연맹 동지들과 천진(天津)으로 옮겨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을 중심으로 젊은 동지 규합과 활동자금 조달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다.
11월 상해로 이동함.
1927.(32세) 1월 백범의 알선으로 허열추(許烈秋, 본명 鄭致和), 진수방과 함께 전차회사에 다시 취직함.
-이때 “... 의렬단원 김태규(金泰奎)가 북경에서 폐병에 걸려 상해로 돌아왔다. 그때는 의렬단의 주력이 남방으로 옮겨 가 있는지라 북경 쪽의 사정이 안 좋은 데다 전염성이 강한 폐병(폐결핵) 환자이고 보니 받아 주는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김태규 단원이 상해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백정기가 그를 동료들의 합숙소로 데려와 같이 있도록 하고 간호도 해 주었다. 전차회사 비번일 때는 시내로 데리고 나가 밥을 사 먹이고 조용한 여인숙을 찾아내 재워 주기도 했다. 그렇게 정성들여 간호했음에도 병세가 점점 나빠지자 백정기는 여비를 마련해 그를 귀국시켰다. 그 후 백정기도 그만 전염되고 말았다. 몸이 점점 쇠약해지면서 기력을 잃어 갔고 각혈까지 하게 되자 병원에 가 진찰해 봤더니. 폐병 진단이 나왔다. 그러자 백정기는 매사 처신을 조심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다.”
1927년 여름 중국 동지 진망산(秦望山)·양용광(梁龍光)·진춘배(陳春培) 등의 제청으로 농촌의 자치운동을 한·중·일 3개국 동지들의 합작으로 일으키게 되었다. 복건성(福建省) 천주시(泉州市)에 민단훈련소(民團訓練所 : 단장, 중국인 진망산(秦望山))가 설립되고 항일독립투사가 이곳에서 양성되었다. 의사는 이정규 형제와 정화암 등 동지들과 농민자위군(農民自衛軍)을 조직하여 농촌계몽과 조직화에 힘썼으며 후에 조직이 확대되어 3,500명 규모의 대오를 정비하고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33세) 2월 상해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 대외책임자는 류자명이다.
4월 중국 천진에서"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5월 한.중.일 합작으로 복건성 농민자위운동을 하던 동지들이 모두 상해로 철수하여 생계대책으로 김두봉(金枓奉)의 부인, 정화암, 신현상 등과 프랑스 조계 약방 건물(안공근 소유) 1층을 빌려 아이스크림 매장을 열고 밤새워 일하다 건강이 악화됨.
6월14일 상해 프랑스 조게지인 이매로(李梅路)에 위치한 화광의원(華光醫院)에서 한·중·일 동지들이 회합을 가졌다. 이들은 조직준비회를 만들고 ‘제국의 국체를 변혁할 목적으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O.A.F)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연맹은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인도 필리핀 6개국 지방의 유지대표를 소집해 개최했으며, 중국인 친왕산(秦望山) 한인 이을규 류자명 백정기 이석규 위혜림(衛惠林) 일본인 다케 료우지(武良仁) 시라야마 히데오(白山秀雄) 사노 이치로(佐野一郞· 田華民·吉田·玉奇) 야다베 유지(谷田部勇司· 吳世民) 미국인 하워드 등이 참여하였고 기관지 <동방>을 창간, 조선대표 백정기가 편집위원으로 참여.
1928(33세) 12월~ 1930(35세) 4월 상해, 폐결핵 악화로 1년간 상해 근교 서가회(徐家匯)의 결핵전문 공공병원에 입원 치료.
※ 1929년 1년간은 서가회 결핵전문병원에서 치료하며 보냄.
1930.(35세) 5월 북경에서 열린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대표회의에 참석함.
10월 오면직(吳冕稙,楊汝舟)과 북만주 길림성 하이린(海林)으로 가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및 「한족총연합회」조직, 일원이 되어 교육 계몽 활동
-조선족 소학교 청년훈련과 동포 자녀를 敎育함
-독립군과 관련된 희곡을 쓰고 "소인극"을 공연함
-이후 상해로 돌아와서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여 동지들과 연락망을 구축함.
1931.(36세) 3월 폐결핵 재발. 4월 병석에 누워 고열, 기침, 각혈.
5월 정화암(鄭賢燮)이 상해로 대려가 재입원하여 3개월간 치료받음.
- 화암 정현섭과 백정기가 만주에서 상해로 가던 중 하얼빈을 통과할 때 미행하는 일본 경찰을 유인하여 사살함.
11월 상순 -한·중·일 아나키스트 연합조직인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聯盟)’ 결성. 기관지 "자유신문" 발행.
-활동계획-경제부(중국인), 선전부(일본인, 정보부(한국인, 행동대))를 두어
-‘적 군경기관 및 수용기관 조사와 파괴, 적 요인암살, 중국인 친일 분자 숙청’.
-이회영과 아나키스트 정화암이 지휘하고 중국인 왕아초가 재정과 무기 공급을 맡았던 비밀결사 단체
11월 중순 프랑스 조계 포석로 계락리(蒲石路 桂洛里) 정원방(亨元坊) 백정기 숙소에서 왕야차오(黃亞樵), 화쥔시(華均實), 사노 이치로(佐野一郞) 4인이 회동하여 「파괴와 숙청의 행동 조직」을 별개로 설립 가동키로 합의-백정기가 책임자로 하는 극비조직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이 이듬해 1월까지 남화한청연맹의 맹원들 중에서 오면식, 김지강, 엄형순, 리용준, 리달, 박기성 6인에게 한 명씩 따로 권유해 비밀리에 입단시켰다. (李康勳은 1933.2.20. 추가입단 총 8명)
-재정 주관자 왕야차오(王亞焦)는 1931년 12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11월간, 대리인 격인 정화암을 통해 매월 40원~300원까지 도합 1,200원을 백정기에게 지급했다. 그 돈의 일부로 백정기는 프랑스 조계 정해리(鄭海里) 집 2층(福履里露 亨元坊 6호)을 전세 내서 독신 단원들과 합숙 생활을 시작했다. 이회영이 만주로 떠난 후 그 아들 규호(圭虎, 圭昌)와, 1933년 2월에 신입 단원 이강훈이 함유하였다.
1932.(37세) 4월 29일 홍구공원의 일본 천장절 및 전승 축하식 폭파계획을 세우고 거사를 준비했으나, 중국 동지와 약속한 출입증을 전달받지 못해 실행하지 못했다.
-그날 같은 시각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애국단 소속 윤봉길 의사가 실행했다.
10월 일본 경찰 주구 3명을 상해에서 교외 남상으로 유인하여 처단함
12월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英)"의 만주행을 밀고한 이규서(李圭瑞), 연충렬(延忠烈)을 처단함.
-중국 동지 전화민, 진수방. 한국 동지 유기문, 원심창, 이강훈, 이용준 등이 천진으로 가서 1만 톤급 일군 수송선 1척을 대파하고, 일본군 병영과 천진 빅토리아공원 안에 있는 일본 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1933.(38세) 3월 5일 상해 육삼정(일본음식점)에서 본격적인 중국 본토 침략을 위해 일제 군수뇌부와 중국 친일 세력들이 모인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 전원(8명)이 백의사의 숙소인 상해 프랑스조계 복이리로(福履理路) 정원방(亭元坊)에 모여 회의장 습격을 결의하고 실행의 주역으로 백정기· 이강훈· 원심창이 선정되어, 백정기와 이강훈은 폭탄 투척 임무를 원심창은 현장 안내 임무를 맡았다.
3월 17일 오후 8시경 이들 3인은 육삼정에서 200m 떨어진 "송강춘(松江春)"(중국음식점) 2층에 모여 거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일본인 아나키스트 오끼(玉奇)의 밀고로 미리 정보를 탐지한 일경에 의해 이강훈, 원심창, 백정기가 체포되었다.
※ 이 의거가 있은 후 양일동(梁一東)이 일본으로 건너가 이 사실을 일본에 있는 동지들에게 알리고 최학주(崔學柱)·정찬진(鄭贊鎭)·정철(鄭哲)·홍성환(洪性煥) 등과 협력하여 압송지를 알아내고 구원운동(救援運動) 비용을 마련하였다. 홍성환이 장기(長崎)까지 찾아가 백 의사 등 3인을 면회하고 변호사를 선정하는 등 구원운동을 폈으나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4월 18일 살인예비, 치안유지법 및 폭발물 취채벌칙위반, 기물손괴죄로 기소됨.
7월 5일 예심종결, 나가사키 지방재판소 공판에 회부됨.
7월 11일 나가사키로 호송되어 우가미구치소에 수감됨.
11월 24일 백정기· 원심창은 무기징역. 이강훈은 징역 15년 선고 받았다.
1934.(39세) 6월 5일 오후 11시 일본 나가사키시 부근의 이사하야 형무소 수형실에서 향년 39세 지병으로 순국했다.
- 동생 백용기(白龍基)가 일본으로 건너가 형무소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 이강훈 『민족해방운동과 나』 제삼기획 1994, 162~163쪽
백정기 의사는 나의 졸문으로 표현할 수 없는 청념결백, 의리, 강직, 신뢰, 의용 등 미덕을 갖춘 자유혁명가의 전형적 인물이었다. 그는 사지로 나갈 때는 항상 앞장서기를 원하였으며 동지를 아끼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씨는 최고의 휴머니스트라고 표현해도 지나친 평이 아니다. 어느 의미에서는 성인(聖人)에 가까운 점도 없지 않았다. ...중략... 백 의사는 같이 옥고를 치르면서도 자기는 폐병으로 얼마 살지 못할 사람이니 모든 것을 자기에게 떠넘기고 동지는 가벼운 형을 받도록 하여 빨리 사회로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의 목적과 이상을 위해 다시 한번 더 노력해 달라고 하며 꼭 그렇게 해야 한다고 우겨댔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1945년 10월 주일 미군정에 의해 석방된 이강훈이 동지들의 약력 보고를 위해 일본에서 건너와 김구를 방문한 자리에서 구파를 3의사에 건의하였고,
1946, 백범 김구가 중심이 되어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여 국내로 이송하기로 한다,
-2월 도쿄 재일본한인건국청년동맹(在日本韓人建國靑年同盟)의 후계조직으로 갓 발족한 신조선건설동맹(新朝鮮建設同盟)(위원장 朴烈, 부위원장 李康勳)의 주도로 3 의사 시신 매장지 탐색 확인 유골 수습이 진행되었다. 가나자와(金澤)시 육군훈련소 터에서 윤봉길 유해, 동경 우라와(浦和)형무소 묘지에서 이봉창 유해, 나가사키 이사하야(간조:諫早) 감옥 묘지에서 백정기 유해를 차례로 수습되었다. 도쿄 육군대학 건물 내의 본사무소로 유해를 옮겨 임시 봉안하고,
2월 29일 가미다(神田) 공회당에서 봉환회를 엄숙히 거행하였다.
5월 15일 3 의사를 선두로 하는 7 의사의 유골이 대한순국열사유골봉안회(大韓殉國烈士遺骨奉安會) 회장 서상한(徐相漢) 외 18인의 호위로 대한해협을 건너 부산으로 옮겨진 후 대창동(大倉洞)의 남선고등학교(南鮮高等學校)에 임시 봉안되었다. 서울에서 삼열사봉장위원회(三烈士奉葬委員會)(위원장 조완구(趙琬九)가 조직되고 부산에서 유골 발인 후 서울로 봉송 안치 및 국민장 거행에 관한 계획과 일정이 만들어 지고. 그 일정계획에 따라
6월 15일 정오에 부산공설운동장에서 김구 일행이 임석한 수만 군중이 참여하여 「순국3의사추도회(殉國3義士追悼會)」가 거행되었다.
6월 16일 아침 8시 특별열차로 지정된 해방자호(解放者號)로 서울행 봉송이 시작됐다. 중간에 大邱, 大田, 天安驛에 정거 간단히 봉환식을 거행했고, 빗길을 달려 하오 5시 40분 서울역에 도착 7시에 유골이 백정기(白貞基)는 이강훈(李康勳)의, 윤봉길(尹奉吉)은 안경근(安敬根)의, 이봉창(李奉昌)은 서상한(徐相漢)의 품에 각각 안겨 수송동 태고사(太古寺, 曺溪寺)로 옮겨 안치되었다.
-1946.6.30. 서울에서 거행될 것으로 예고되었으나 호우 성 장마로 각처의 교통두절로 1주일 연기되었다.
7.6. 3 열사 봉장위원회 주관으로 국민장이 거행되었다.
-10시 태고사 발인, 안국동, 종로, 남대문, 서울역, 용산서 앞을 지나 12시에 효창원(孝昌園) 장지 도착.
- 1시 개식되어
- 3시에 하관. 이로써 효창공원에 국민장으로 3 의사 묘역에 봉장하였다.
※ 이승만, 김구, 여운형 등 정치지도자가 모두 나왔고 한독당, 한민당, 조공, 민전, 독촉, 전평, 부녀자총연맹 등 각 정당, 단체의 대표자와 지역 유지 외 5만여 명의 국민이 운집하였다. 장례식에서 이강훈(李康勳)이 개회사를, 신현상(申鉉商)이 제문을 봉독했다.
1956년 구파 백정기 의사 순국기념비건랍추진위원회(위원장 최규영) 결성.
-이후 4년간 도내 기관 및 초, 중, 고등학교와 영원면의 협조로 총공사비 74만 환의 기금을 확보.
1959년 7월 20일 구파 백정기 의사 순국기념비 건립, 재막식 거행(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605-4번지),
* 비문 글 우관 이정규(又觀 李丁奎)가 찬(撰)하고, 성암 이광(星巖 李光)이 비문 글씨를 씀.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 추서(追敍)되었다.
1996년 8월 30일 백정기 의사 기념사업회 발족.
10월 기념관 건립 착수.
2003년 1월 현충시설로 지정,
9월 5일 구파 백정기 의사 순국 기념비를 기념관 경내로 옮겨 세움.
2004년 6월 5일 기념관이 완공, 개관
10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지정
※기념관 소재지 : 정읍시 영원로 1049(영원면 은선리 928번지)
2007. 백정기의사 고택 복원 등 유적지 조성사업(정읍시 영원면 갈선1길 17-13)
※ 정리-청강 김성실(서양화가, 전북문화관광해설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