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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 이야기 / 잠 9:7-12, 몬 1:1-14
4일전 전주에서 여학생 3명이 시험을 잘못봤다고 선생님이 빨래 방망이로 수십차례 심하게 구타해 허벅지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고 한다. 또한 3일전 강릉에서 여중생 6명이 집단 자살을 시도했다. 후배들에게 금품을 빼앗았다는 이유로 학교 선생님에게 자주 매질을 당해 학교가는 것이 두려워 죽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허벅지에 멍이 시퍼렇게 들 정도로 맞았기에 6명의 학생들이 제초제를 나누어 마시고 자살하려 했다. 사랑의 매가 아니라 죽도록 패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학생들 중에서 성적 때문에 비관하면서 자살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구타와 성적 때문에 생명을 버린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라고 본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너무 소홀히 생각하는 것 같다.
신약성서에서 엡, 빌, 골, 그리고 몬 이 네권을 가리켜 옥중서신이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동안에 이들 교회에 편지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런데 엡, 빌, 골은 구체적으로 교회에 보낸 옥중서신인데 비해서 유일하게 몬은 골로새 지역의 유지이고, 골로새교회에서 신앙생활하던 빌레몬이라는 개인에게 보내진 서신이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유일하게 평신도인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가 바로 몬인 것이다. 빌레몬은 에베소에서 약 160km 떨어져 있는 육상교통의 중심지인 골로새 지방에 세워진 교회의 성도이다. 골로새 지역에는 사도 바울의 제자였던 에바브라와 디모데가 가서 일찍 복음을 전파했었고, 이들에 의해서 빌레몬이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빌레몬은 열심이 대단하고 헌신적으로 복음의 일을 지원하였다. 그래서 자기 집을 내서 교회당으로 사용하도록 할 정도였다. 그러했기 때문에 로마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의 마음은 항상 빌레몬에게 고마움과 감사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본문 말씀에 나오는 이러한 빌레몬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가 몇가지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서 우리들 자신을 결단시킬 수 있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1. 빌레몬의 집이 교회였다는 사실이다.
2절하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초대교회는 거의 다 가정에서 시작하였다. 예루살렘교회도 마가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고린도교회도 다소의 유스도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마찬가지로 골로새교회는 빌레몬의 집에서 시작한 것이다. 신약성서에 쓰여진 헬라어의 단어에 교회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오이코스’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집’이라는 뜻이다. 교회는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집에 대해서 딤전 3장에서는 ‘집은 집이로되 하나님의 집이다’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가르쳐 준다. 빌레몬의 집은 빌레몬의 가족들이 기거하는 집인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집이었다.
오늘 우리들의 집 역시 우리들 가족들이 사는 집인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의 집이 되어야 한다. 조금전 우리가 부른 찬송가 가사에도 말하듯이 ‘한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이 가사처럼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모시고, 주님 중심으로 움직이는 그 가정에 작은 천국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우리 집은 지금 어떠한가? 우리 집이 정말 하나님의 집이 되고 있나? 하나님을 모시는 가정으로서 작은 천국을 이루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벌써 가물가물 거리지만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아들이 부모를 칼로 질러 죽이고 집을 불살라 버린 사건, 너무나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일명 박한상 사건이다. 그런데 돌아가신 부모님은 서울 강남의 어느 교회의 피택장로이며 권사님이었다. 부모가 교인이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부모는 열심히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잘 한다. 피택장로로서 봉사하고 권사로서 봉사를 한다. 그런데 비해서 자식은 딴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여러분들은 이 자리에 오셔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이 순간 여러분의 자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의 형제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의 남편, 여러분의 아내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과연 우리 가정이 하나님을 모시는 하나님의 집이 되고 있느냐 말이다.
오늘날 가정들을 보면 정신적 구심점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몸은 같은 집에 살지만, 정신적으로는 뿔뿔이 흩어져 있는 상태 속에 사는 가정들이 많다. 도시는 이제 가정이 하숙집화 되었다. 각기 생활에 바쁘고 분주하다 보니까 집에 늦게 들어오고, 또 아침에 일찍 나가야 한다. 집에 와도 TV나 들여다볼 뿐이지, 가족끼리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음과 생각을 나누는 그런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가정의 정신적 구심점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각자 자기생활에 급급하다. 가정의 정신적 구심점은 억지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가정의 중심으로 모실 때 모든 가족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가정이 되어질 때 가정의 정신적 구심점이 생기고, 하나의 작은 천국이 마련되어 가는 것이다. 빌레몬의 집이 하나님의 집이 된 것처럼 오늘 우리들 각자 가정이 하나님의 집이 되고 하나님의 가정이 되도록 해야 한다. 가정이 한 작은 교회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온 가족이 한 교회에 나와서 같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곧 우리 교회가 가족 교회가 될 수 있도록 함께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이 우리의 개인이 신앙도 부흥하고, 가정 신앙도 부흥하고, 교회의 신앙도 부흥하게 되어 있다.
2. 빌레몬은 다른 사람에게 평안을 주었다.
7절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빌레몬은 감옥생활을 하는 사도 바울에게 많은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더욱이 빌레몬은 박해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평안과 기쁨과 희망이 되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 이를 가리켜서 Trouble Maker라고 말한다. 또 다른 한 종류의 사람은 가는 곳마다 화평을 이루고 편안을 주고 기쁨을 주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Peace Maker라고 한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편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고 있나?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기 직전 가장 불안하고 고통스럽고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는 그 순간까지도 마음 속에 평안을 품고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요 14장을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하셨다. 기독교 신앙을 가리켜 흔히 십자가의 신앙이라고 말한다. 십자가의 신앙은 하나님께로 향한 믿음의 막대기와 이웃을 향한 사랑의 막대기가 만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한 시간 예배드리는 이 시간 동안 하나님께로 향한 믿음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세워서 같이 만나게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 교회 다니면서 예쁘네 미웁네, 꼴도 보기싫네 등을 말해서는 안된다. 서로 한마음이 되어야 한다. 서로 감싸주고 서로 사랑과 기쁨을 나누어야 한다. 교회는 평안의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
최근 우리나라와 러시아, 중국 등과 외교 관게가 맺어지면서 한국 사람들이, 기업가나 관광객들이 러시아나 중국에 많이 드나든다. 거기에 한국 선교사들이 많이 가 있다. 소련의 극동지역에만도 한 100여명의 선교사들이 있고, 그리고 중국에도 한 100여명의 한국 선교사들이 나가 있다는 비공식적인 통계가 있다. 그런데 이들 한국 선교사들이 대개 두만강이나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곧 북한과 계계지역인 도시에 많이 가 있다. 지금은 러시아에 가 있고, 또는 중국에 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북한을 선교해야겠다는 이런 사명감이 앞서기 때문에 대개 이들 지역에 모여 있다. 현지에 가 있는 한국 선교사들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도 있고 고통도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시베리아 발판에서 벌목을 하다가 탈출해 나온 북한 노동자들, 또는 두만강이나 압록강을 건너서 북한을 탈출해 나온 탈출자들, 이들이 은신처를 찾기 위해서, 또는 남한에 오기 위하여, 당장 먹고 지낼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하여, 먼저 교회나 목사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러시아 선교사로 가 있는 분들 중에 북한 탈출자들이 찾아와서 은신처를 마련해 달라는 호소를 듣지 않은 분이 거의 없을 정도로 누구나 겪고 있는 문제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개인적으로 다 해결할 수 없으니까 한국 공관을 찾아가서 도움을 구하면, 한국 공관에서는 여러 가지 외교적, 정치적 문제를 야기시킨다고 해서 대개 외면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과거 서독이나 서독교회가 했던 일에 비교하면 너무나도 차이가 많다. 서독교회는 동독으로부터 탈출해 오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정부가 하지 못하는 일을 교회가 담당을 하고, 더욱이 서독교회는 체코나 헝가리에 구호소를 만들어서 동독 탈출자들을 돌봐주고 서독으로 들어오는 그 중간 역할을 많이 했던 것이다. 만일 러시아나 중국 만주 땅으로 찾아오는 불한 탈주자들에 대해서 우리 교회들이 관심을 가지고 한 교회가 한 사람씩만 책임을 진다면 탈주자들 전원이 교회에서 안식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안식처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뒤를 이어서 북한을 탈출할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생길 것이다. 왜냐하면 북한을 탈출해 나오면 갈 곳이 있고 살 곳이 있다는 어떤 확신, 희망이 전해지면 많은 탈출자가 올 것이고, 그 다음에는 북한 체제가 붕괴되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적인 생각을 해본다. 선교도 복을을 전파함과 동시에 복음을 받는 사람에게 평안을 줄 수 있고,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빌레몬이 그랬다. 어렵고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평안을 주는 선교를 한 것이다. 얼마나 흐믓한 일인가? 이런 일을 우리 교회가, 우리 성도들이 할 수 있어야 한다.
3. 빌레몬은 사도들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였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에 관한 일을 부탁한 내용이 본문 말씀에 나온다. 10절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오네시모는 원래 빌레몬의 집에서 일했던 노예였다. 구체적인 사건이 성서에 기록되지 않아서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빌레몬 집에 큰 손해를 입히고,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도망쳐서 로마로 갔다. 로마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서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사도 바울의 감옥생활을 도와줬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퍽 고마은 마음을 가졌다. 오네시모가 계속 로마에 남아서 자기를 도와줬으면 했다. 그러나 오네시모를 계속 데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오네시모의 신분은 노에였고, 주인은 빌레몬이었기 때문에 빌레몬의 승인없이는 계속 데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편지를 써서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다시 돌려보낸다. ‘오네시모의 잘못을 용서해 주고 마치 나를 대하듯이, 친구를 대하듯이 반갑게 맞이해 달라’고 하는 당부이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빌레몬은 오네시모에 대해 배신감을 가졌던 사람이다. 자기 집을 도망쳤던 사람이다, 당시 법에 의하면 처형감이다. 그런데 21절에 있는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라는 이 말씀을 보아서 빌레몬은 오네시모에 대한 자기의 감정을 제쳐두고 사도 바울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한, 또는 그 이상의 순종을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사실 신앙은 무조건 순종함으로 성장한다. 롬 10장에 있는 말씀을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다. 삼상 15장에 있는 말씀을 보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라고 했다.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내 감정, 내 판단, 나와의 이해관계 이런 것을 앞세우나 이렇게 하면 신앙에 아무런 발전이 없다. 오리려 마귀의 유혹에 빠질 뿐이다. 반대로 내 생각이나 내 판단이나 내 감정이나 나의 어떤 지식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내가 순종해야 되겠다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그때에 인격의 변화가 오고, 구원의 능력을 가질 수가 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중에 빌레몬처럼 자신의 감정이나 자신의 생각, 자신의 어떤 판단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내가 무조건 순종해야 되겠다는 이런 자세가 꼭 필요하다.
어느 익살스러운 목사님이 자기 교회 교인을 분류한 내용을 글로 적은 것을 흥미있게 보았다. 자기 교회 교인들을 12가지 부류로 분류했다. 첫 번째는 리어커 신자, 곧 앞에서 끌면 오고 그대로 두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신자. 두 번째는 쳇바퀴 신자,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이 제자리에서 맴도는 신자. 세 번째는 냄비 신자, 금방 끓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부흥회식 신자. 네 번째는 미꾸라지 신자, 교회에서 일을 맡기거나 어떤 부담스러운 일이 생기면 몰래 빠져나가는 신자. 다섯 번째는 박쥐 신자, 교회에서는 신자인 것처럼 하고 사회에 나가서는 불신자처럼 행세하는 사람, 여섯 번째는 당나귀 신자, 귀만 높아 설교에 아무런 반응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일곱 번째는 오토바이 신자, 말만 떠들고 실속이 없는 용두사미 신자. 여덟 번째는 염소 신자, 아무나 잘 들이받는 좌충우돌의 신자. 아홉 번째는 소금 가마니 신자, 비가 오거나 날씨가 나쁘면 녹을까봐 아예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 그 다음 열 번째는 감투 신자, 무슨 직분을 맡을 때는 열심을 내지만 그렇지 못하면 뒷짐지고 구경이나 하는 사람. 열한 번째는 유람신자, 도시에나 있는 신자로 오늘은 이 교회 내일은 저 교회로 다니는 사람, 이런 교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교인은, 열두 번째로 양과 같은 신자, 말씀에 순종하고 온유하고 상호 협조하면서 움직이는 신자다. 12종류의 신자 중 아무개는 ~신자이다가 아니라 나는, 여러분은 어디에 해당하는지 한번 점검해 보기를 바란다.
빌레몬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내가 순종하겠습니다’ 하였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깊은 감명이 되었고,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빌레몬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우리 집이,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집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대인 관계는 평안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꾸짖고 욕하기 보다는 격려하고 위로하고 사랑하고 평화를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내가 순종하고 따르겠습니다’ 하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의롭게 보시고 우리의 모든 삶을 합력하여 선하게 인도하여 주실 것이다. (1996-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