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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찬양하며 사는 삶 / 잠 9-1-6, 엡 5:15-21
이번주부터 대림절 전까지를 창조절이라고 한다. 주보 교회소식 3번을 다같이 읽어보자. 9월의 일기 예상을 보니 장마가 한번 더 있다고 한다. 장마와 창조절, 연관지어 생각하니 노아의 홍수가 생각난다. 이런 홍수가 난다면 어떠하겟나? 준비된 자만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도 주님 맞을 준비에 철저한 신앙인이 되어야겠다. 오늘 본문 증 19절에 ‘서로 화답하며’라는 말씀이 잇다. ‘서로 화답하며’라는 말씀의 의미는 ‘서로 찬양으로 교제합시다’라는 말이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었던 닉슨의 보좌관이었고, 지금은 ‘거듭남’이라는 책을 써서 죄수들을 상대로 전도하는 찰스 콜슨은 이렇게 말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과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을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나눈 교제, 곧 코이노니아를 배우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잘못 알고 있다. 우리는 그저 모여서 요즘 날씨가 어떻고, 요즘 정치가 어떻다느니 조금 얘기하고, 옆집 사는 아무개 얘기와 요즘 사람들이 어떻다는 등 몇가지 이야기만 하다가 헤어지는 것이 고작이다. 깊이 있고 이미있는 대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종류의 아주 유치하고 원시적인, 주님의 기대와 영 동떨어진 교제를 성도의 교제라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행 2:44-47절에 나타난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를 살펴보면, 그들은 날마나 모여서 함께 떡을 떼었다. 교제 가운데 먹는 것이 중요하다. 함께 먹는 것이 교제의 중요한 벙편이다. 그런데 그들은 단지 떡을 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모일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서로 나누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된다. 말씀 안에서 교제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아직도 배우지 못한 교제의 모습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교제 방법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찬양으로 교제하는 것이다. 그들은 쓸데없이 수다 떠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미하는 가운데 진정한 교제를 나누었다. 말씀 속에서 찬양의 비결을 알아보도록 하자.
1. 누가 찬양할 수 있는가?
엡 5: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 다음에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라는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는 것은 성령충만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충만한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이다. 바울이 엡 5장에서 성령충만을 강조하기 전에 1장부터 계속 강조한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헤를 깨닫고 진정한 구속을 체험하는 일이다. 구원받는 것을 최우선으로 강조하고 있다. 찬양할 자격은 목소리 좋고, 노래 잘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를 말이다. 정말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고 성령충만한 사람이라야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할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찬양은 어디에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었다. 속박에서 풀림을 받고 자유로워졌다. 그들은 자유를 얻은 뒤, 하나님의 인도로 광야로 나와 홍해를 건넘으로 얘굽 군대를 따돌리고 참 자유인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넌 뒤에 출 15장에 기록된 감격적인 노래를 불렀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압제, 바로의 압제, 그 사슬에서 해방된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 우리가 죄사함을 받은 구속의 사건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인가! 이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찬양이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찬양할 수 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리는 새로운 노래, 이것이 찬양이다. 이 찬양은 한평생 뿐아니라 천국에서도 계속 된다.
저는 찬양을 잘하는 사람이 제일 부럽다. 목소리가 좋아서 부러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노래 부르는 사람이 제일 부럽다. 저는 천국에 가면 실직자가 된다. 왜냐하면 천국에 가면 설교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에 가면 설교할 일이 없을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 앞에서 설교를 할 수가 있겠나? 막말로 공자 앞에서 문자쓰는 격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영원히 할 일이 있다. 찬양하는 일이다. 주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천국에서 계속되는 일이다. 계 14:3절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저는 구속받은 사람이 반드시 144,000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수요일 밤에도 말씀드리겠지만, 구약시대의 열두지파와 신약시대의 예수님의 열두제자, 이 두 숫자를 곱하여 나온 수가 144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다는 표현을 쓸 때 1,000이라는 숫자를 자주 사용한다. 그래서 앞에서 나온 144에 1,000을 곱하면 144,000이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 신구약 시대를 통틀어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서 노래를 부를 것이다. 우리는 새노래, 구원의 노래를 천국보좌 앞에서 부를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지배를 상실하면 제일 먼저 찬양이 멈춘다. 마음 속에서 찬양이 우러나지 않는다. 그러면 뭔가 잘못된 징조다.
다윗이 죄를 짓고 나서 참회의 시를 읊는다. 다윗의 유명한 참회의 시는 시 51편이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하나님께서 보낸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참회하면서 주님 앞에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는 노래이다. 12절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성도들이 범죄하면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한번 구원받으면 그 구원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 우리가 범죄할 때 잃어버리는 것은 구원의 즐거움이다. 구원은 잃어버리지 않지만, 구원받은 기쁨, 구원받은 감격,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감사가 없어진다. 그래서 다윗은 주께 ‘이 즐거움을 거두어 가지 마소서’라고 기도한다. 그 다음에 다윗이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 보라. 14-15절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다윗은 구원의 즐거움을 빼앗아 가지 말아 달라는 기도 후에 자신의 입술로 주님을 다시 한번 찬양하고 싶다고 한다. 그는 입술로 주를 찬송하며 주님을 전파하겠다고 하며, 다시 찬송부르기를 열망하고 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어보면, 주인공 기독도가 어려움에 빠질 때마다 제일 먼저 겪는 고초가 찬양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나온다.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어려운 궁지에서 빠져나오면 제일 먼저 찬양을 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성령충만하지 못하면 뭘 잃어버리는가? 찬양을 잃어버린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은 성령충만한 상태라고도 볼 수 있다. 여러분의 마음에서 얼마나 찬양이 우러나는지 이 시간 한번 생각해 보라.
2. 어떻게 찬양할 수 있는가?
어떻게 찬양할 수 있는가라는 말은 찬양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다. 오늘 본문에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라고 했다. 그러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가 어떻게 다른가?
1) 시
시의 초점은 감사에 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내용을 실은 것이 시의 본질이다. 시 95:2절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성서가 말하는 시, 시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이다. 감사가 시로 표현되는 것이다.
2) 찬송
찬송의 본질은 고백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다’ 또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찬송이다. ‘하나님은 멋지십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와 같은 고백이 모두 찬송이다. 찬송 형식으로 된 말씀 한 구절을 찾아보면 빌 2:6절이 그 한 예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이 부분은 본래 시 형식으로, 찬송 형식으로 되어 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설명하고 있는 찬송이다. 골 1:15-20절 역시 찬송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이 말씀도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고백한 찬송이다. 딤전 3:16-17절도 찬송 형식으로 되어 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이 말씀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담고 있기 때문에 찬송이다.
3) 신령한 노래
신령한 노래의 본질은 간증이다. 간증은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신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다. 우리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다시 말하면 감사함으로,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높이는 고백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 대한 놀라운 간증으로 찬양해야겠다. 독일의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참된 찬송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묵상에서 비롯된다.’ 어떤 묵상인가? 주님의 은혜가 감사한 것을 묵상하는 것이다. 찬양을 하기 위해서는 감사한 일, 고백할 일, 간증할 일을 묵상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찬양을 할 수 있다. 진정한 찬양은 찬송가를 보고 목청을 높여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묵상에서 나온다.
3. 무엇으로 찬양할 수 있는가?(찬양의 도구)
1) 말
본문에서 ‘서로 화답하며’는 영어 성서에 ‘다른 사람과 말하다’로 나와 있다. 찬양은 말로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데 한 사람이 ‘저는 지난 한 주간 주님이 저를 도와주신 일이 너무 감사했어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상대방이 화답을 한다. ‘저도 지난 주일에 속상한 일이 있었는데, 주님이 제게 평안을 주셔서 참 감사해요.’ 이것은 감사함으로, 곧 서로 찬양한 것이다. 고백의 찬양도 말로 할 수 있다. ‘지난 주에 예수님은 저에게 너무나 멋진 분이셨어요.’ ‘예수님은 지난 주에 제게 사랑을 주셨어요.’ 화답하며 예수님을 높일 수 있다. 간증의 찬양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지난 주에 우리 집에 큰 일이 있었는데 주님이 도우셔서 일을 잘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러세요? 저도 주께서 함께 하셔서 지난 한 주간 별 탈없이 지냈습니다.’ 찬양은 여러 사람이 화답하며 대화로 할 수 있다. 찬송가 곡조를 붙이지 않고 가사를 말하기만 해도 찬양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는 말로 찬양할 수 있다.
2) 마음
본문에 보면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고 했다. 소리를 내지 않더라도 마음 속으로 감사함이나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할 수 있다. 시 19:14절하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
3) 입술
본문에 ‘주께 노래하며’라고 한 것은 곡조 있는 노래를 한다는 뜻이다. 말과 마음으로 그리고 입을 벌려 노래로 찬양할 수 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찬양이 이것이다.
4) 악기
본문 19절에 ‘찬송하며’를 헬라어로 보면 ‘악기를 동반한 찬송’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 목소리 뿐만 아니라 악기를 사용하여 찬양할 수 있다. 우리가 말로, 마음으로, 입술을 열어 노래로, 악기와 함께 주를 찬양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라. 독일의 한 소녀가 혀에 암이 걸려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의사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그러자 그 소녀는 ‘찬양하고 싶어요’ 하면서 ‘나같은 죄인 살리신’과 ‘예수 사랑 하심은’을 불렀다. 다이빙을 하다 사고를 당해 불구자가 된 조니 에릭슨이라는 여인이 있다. 그녀의 간증에 보면 그녀도 사고 직후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가 믿음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하면서 특별히 찬양하는 삶을 살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녀는 몸이 자유롭지 못하므로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가 그린 그림이나 자기가 출연한 광고에는 반드시 ‘PTL(Praise the Lord 주님을 찬양합니다)’라는 문구를 집어넣는다. 전신마비인 이 여인의 입술을 열어 하나님의 은헤를 깨닫게 하고 주님을 찬양하게 만드신 그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들에게도 함께 하기를 바란다. (1995-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