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시작과 끝 / 정선례
반바지 면티에 물병을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빛이 어슴푸레 밝아지고 있었다. 운동화끈을 질끈 동여맸다. 청룡이가 어디선가 나타나 바짝 따라붙는다. 머리를 쓰다듬으니 좋은지 꼬리를 높이 들어 흔든다. 산책 길동무가 된 지 오래된 덕에 나보다 앞서 뛰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 에 하는 운동은 한낮의 더위도 피할 수 있고 잡다한 일상에서 비켜나 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 만보기에 7천 보가 찍힌다. 축사 일까지 마치니 온몸이 땀 범벅이다. 씻고 나니 상쾌하기 짝이 없다. 물이 부족한 나라 사람들은 어찌 사나?
어렸을 때부터 아침잠이 유난히 많았다. 새벽에 출발해야 하는 여행을 꺼리고 오전 약속도 되도록 오후로 미룬다. 일찍 일어나는 게 너무 어렵다. 알람을 맞춰 놓아도 손을 뻗어 꺼 버리고 또 잔다. 일부러 휴대전화를 손이 닿지 않는 건넌방에 두기도 한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잠이 깨기를 기대하여 나름 머리를 쓴 이 방법은, 가끔 먹혔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피로해져서 오전에 잠을 보충해야 한다. 일찍 잠자리에 들면 좀 나을까 싶어서 아홉 시에 누워 보기도 하지만 기상 시간은 비슷하다.
그러다 보니 동트기 전에 일어난 날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의지를 굳게 다져도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아침형 인간이 되는 건 내게는 너무 어렵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늦잠 자는 횟수가 줄어 다행이다. 세상 모든 일에 총량의 법칙이 있다더니 잠도 그런 모양이다.
새해가 되면 보험회사에서 받은 새 공책에 올해 이루고 싶은 목표를 적는다. 그러나 작심삼일은 고사하고 하루나 이틀로 그친다. 시작은 좋으나 꾸준하지 못하는 단점이 어김없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나를 경영한다.’ 이 말을 더없이 좋아해서 내게도 적용하려고 자주 떠올리며 되뇐다.
이런 내가 그나마 잘하고 있는 것은 날마다 그날 할 일을 휴대전화에 메모하고, 실행하면 바로 지우는 거다. 오전과 오후로 나눠 일과를 짠다. 이제는 익숙해진 좋은 습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어떻게 하면 내 의지에 동기부여가 될까 싶어서 상과 벌도 스스로 정했다. 오늘의 상은 목욕 1회 이용권이고 벌은 덱 물청소하기다. 오전에 아래 축사 소 사료 주기, 송아지 뿔 나지 않게 약 바르기, 배추밭 물 주기 훌라후프 왼쪽 1,000개 돌리기다. 오후에는 대파 밭매기, 숲길 만 보 걷기, 훌라후프 오른쪽 1,000개 돌리기, 아래 축사 볏짚 넣기를 정했다. 나만의 시간을 온전하게 누리려면 일찍 저녁을 차려야 한다. 잠자기 전까지 세 시간가량은 차 마시며 책을 읽는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여유로운 시간이다. 도서관에서 빌려 온 은유 작가의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를 읽을 생각에 벌써부터 설렌다.
맹위를 떨치던 여름 한낮의 더위도 조금은 사그라지고 아침 저녁은 제법 선선하다. 바람도 살랑거린다. 일 년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가까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내일도 일찍 일어나 농로와 대로변을 지나서 숲길로 접어들어 뛰어야겠다. 고요와 마주하며 새벽에 뛰며 느끼는 새벽 찬 공기의 청량함이 살갗에 스치는 것 같다.
나이가 들면 그 사람이 살아온 내력이 얼굴에 깃든다고 한다. 요즘 들어 거울 보기가 조심스럽다. 그래도 오늘은 일상이 느긋하게 흘러가서 좋았다. 다가오는 내 하루하루가 그저 단순하고 여유롭기를 두 손 모으며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