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파불법(佛法)과 상좌부 수행체계
부파불법(佛法)이란 초기교단이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한 이후의 전통적인 보수적 교단의 불법을
말한다. 불멸 100년경에 초기교단에 십사(十事)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 이로부터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나뉘었는데 이를 근본분열이라고 한다. 이어서 상좌부와 대중부 각각에서 다시
분열을 되풀이한 것을 지말 분열이라고 한다.
상좌부는 7회의 분열에 의해 11부로 나뉘었고, 대중부는 본말을 합해 9부이기 때문에 상좌부와
합해서 20부가 된다. 그래서 근본의 2부를 제외하고 18부의 분열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가장
발달한 것이 설 일체유부로서 부파불법의 교리는 대개 이 부파의 교리를 말한다.
당시에 재가신자는 교단 밖에 있었지만 그들이 어떠한 종교 활동을 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불타가
탄생한 곳, 성도한 곳, 초전법륜한 곳, 반열반한 곳 등이 일찍부터 영장(靈場)으로써 존숭되고
불타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순례하는 성지로서 각광을 받았다. 초기불법시대부터 신자들의 종교
활동은 활발했던 것이다.
또한 불멸 직후 팔왕분골(八王分骨)에 의해서 중인도의 각지에 불탑이 세워졌는데 그 때 불타의
유해를 화장하고 사리를 분배하여 탑을 세운 것은 모두 재가신자였다. 그 불탑들은 비구들이
거주하는 정사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사대로(四大路)에 여래의 탑을 건립하라’고 설해짐으로써
탑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에 건립되었다. 이 탑들은 신자들이 자주적으로 관리하고 신앙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육왕경> 등에 의하면 아쇼카왕은 팔왕분골의 탑을 개방하여 불타의 사리를 인도전역으로
분산시켜 많은 탑을 세웠다고 한다. 왕이 많은 불탑을 세운 것은 당시 불법 신도들 사이에
불탑신앙이 성행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 요구에 부응하여 왕은 불탑을
건립했을 것이다.
후세의 대승불법(佛法)의 발전의 원류를 생각하는 경우에는 근본불법(佛法)시대부터 불탑교단에서
배양되고 있던 불타신앙과 불덕찬양운동을 더듬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자들의 신앙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불법(佛法)교단의 정계(正系)는 초기교단을 계승하는 부파교단이었다. 즉 불타의 직제자인
대가섭이나 아난 등에 의해 수지된 불법(佛法)은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계승되어 부파교단으로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부파교단의 불법은 ‘제자의 불법, 배우는 불법’이며 남에게 가르치는 입장의 불법(佛法)은
아니다. 이러한 수동적인 불법(佛法)이였기 때문에 대승불법(佛法)도들로부터 성문승(聲聞乘)
이라고 불렸다. 성문이란 불타의 말씀을 들은 사람, 즉 제자라는 뜻이다.
부파불법(佛法) 교리의 특징은 출가주의라는 점이다. 출가하여 비구가 되고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수행한다. 재가와 출가의 구별을 엄격히 하고, 출가를 전제로 하여 교리나 수행형태를
조직하고 있다. 다음으로 부파불법(佛法)은 은둔적인 승원불법(佛法)이다. 그들은 승원에서
금욕생활을 하고 학문과 수행에 전념하다 따라서 거리의 불법(佛法)은 아니었다. 타인의
구제보다는 먼지 자기의 수행의 완성을 목표로 삼았다. 그 때문에 대승교도로부터 소승(小乘)이라고
불리고 천시되었다. 이처럼 그들이 생활대책 때문에 걱정하는 일이 없이 오로지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승원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불법의 출가교단을 국왕이나 왕비 혹은
대상인 등의 귀의와 경제적 지위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상인계급도 불법(佛法)승단을 지원하였다. 상인은 커다란 밀림을 지나고 사막을 가로질러 먼
곳에 있는 도시와 교역을 하거나 혹은 배를 타고 큰 바다로 나가 다른 나라와 통상을 했다. 이러한
통로에는 수많은 곤란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한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냉철한
판단력과 용기와 인내가 필요하였다. 이성적인 종교인 불법이 그들의 취향과 합치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타국으로 가서 이민족이나 다른 계급과 자유로이 교제해야만 했기 때문에 카스트제도를
엄격히 지키는 바라문의 종교는 적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농민은 바라문교와 강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상인계급 중에는 부파교단 뿐만 아니라
대승교단에 귀의한 사람들도 많은데 그들 중 부상(富商)이나 지도자를 장자(長者)라고 한다.
장자로서는 불타에게 귀의한 급고독(給孤獨)장자나 우그라장자 등이 유명한데 초기불법시대부터
불법신자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장자는 많다. 대승경전에서도 장가가 불타의 설법의 대상으로
종종 등장한다. 그들은 부파교단도 지원했을 것이다. 이처럼 국왕이나 장자들의 원조에 의해 승단은
생활 걱정 없이 출세간주의를 관철하여 연구와 수행에 주력했으며, 이로써 분석적이고 치밀한
불법(佛法)교리를 완성시켰다. 이것이 아비달마(阿毘達磨,아비달마:Abhidharma;법에 대한 연구)
불법(佛法)이다.
상좌부 아비달마(阿毘達磨) 불법(佛法)의 발달 과정을 보면, 일반적으로 아비달마 논서는 세 가지
발달 단계가 있었다.
그 첫째 단계에서는 경장(經藏) 가운데서 이미 교법을 정리, 조직하기도 하고 해설이나 주석을
하기도 한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비달마는 아니며 경장 가운데
아비달마 적 경향을 띠고 있다고 할 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발달하여 두 번째 단계에 이르면 아비달마(藏) 즉 논장(論藏)으로서 경장에서
독립하는데, 거기에서는 교법의 조직이나 해석이 더욱 더 촉진되었다. 다음 세 번째 단계에서는
그것이 촉진된 결과 아비달마는 단순히 아함경(阿含經)을 해석하거나 조직하는데 머물지 않고
나아가 그러한 기초 위에서 장대한 교의체계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아함경전의 내용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즉흥적, 우연적 요소가 많았던 석가세존의 교설을 부처님
입멸한 후 정리하여 전승한 것이기 때문에 본래 짧고도 단편적인 경의 집성이다. 그러한 비체계적인
아함의 경설이 점차 정리되고 조직화되어 하나의 교의체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아함 가운데 나타나는 아비달마 적 요소로서는 대개 두 가지 종류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교설
속의 어구에 대해 주석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갖가지 교설을 정리하고 배열, 조직하는
것이다. 석가세존의 교법은 일반적으로 쉬운 말로 이야기되며 특이한 용어나 난해한 어구가 사용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 석가세존 자신이 청중을 위하여 그가 사용한 말의 의미를
설명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며 또 어떤 때에는 석가세존이 설법을 마친 후 청중 가운데 선배가
후배에게 스승의 말씀에 대하여 해설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석가세존이 입멸한 후 시대가 지남에 따라 또 불법(佛法)이 전파된 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교설 속의
어떤 어구에 대해 주석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더욱 더 많아지게 되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아함부 경전에서는 석가세존 자신이 그러한 주석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설법을 마친 후
제자 가운데 뛰어난 사람이 그것을 해설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 두 사람의 유력한 제자가 서로
대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 어느 것이든 그렇게 이루어진 설명과 해석을 옆에서 듣고 있는 자가 훗날 그 상황을 이야기하는
형식을 기술하는 것이 아함경전의 원칙이다. 그러나 형식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설명과 해석
모두가 석가세존 재세시대에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중 상당부분은 석가세존이
입멸한 후 승단 내부에서 점차로 발전한 아비달마 적 연구에 의해 부가되어진 해석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부가된 부분이 점점 더 증대하여 마침내 아함부 경전 속에 도저히 포함시킬 수 없을 만큼
되었을 때 아함으로부터 분리 독립되었으며, 여기서 아비달마라고 하는 불법(佛法)성전의 새로운
장르가 성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교설이 정리, 조직되었다고 하는 측면에서 볼 때 그러한 방식으로서 두드러진 것은 숫자와
관계있는 교설을 그 숫자대로 정리하여 일법(一法), 이법(二法), 삼법(三法)과 같은 순서로 배열하는
방법과 교설을 내용에 따라 분류, 구별하여 동일한 주제를 가진 것들을 모아 한 곳에 정리, 배열하는
방법이 있다. 전자를 ‘법수(法數)’에 의한 정리라 하고, 후자를 ‘상응(相應)’에 의한 정리라고 한다.
각각의 짧은 경 가운데에는 법수에 의해 정리되고 있는 경우도 있고, 몇 개의 짧은 경을 모은
경전군에다가 그러한 방법을 적용시킨 것도 있다.
또 다수의 경전군을 모아 동일한 방법으로 전체를 정리한 것이 증지부(增支部), 증일아함(增一阿含)
이다. 상응에 의해 정리하는 방법은 짧은 경안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경전군상에는 그것을 적용시킨
예는 많은데 다수의 경전군을 그 같은 방법으로 정리한 것이 상응부(相應部), 잡아함(雜阿含)이다.
경장(經藏)은 그것이 승단 안에서 전승되는 동안 거기서 아비달마 적 연구가 고조됨에 따라 점차 이
같은 부가, 증가, 정리, 안배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경장을 보면 그 중에는
원초적이고도 간결한 교설을 그대로 전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비달마
적 경향이 진전되어 이제 거의 하나의 아비달마 논서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내용이나 형식을
갖추고 있는 부분도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경장 안에서 점차 아비달마 적 경향이 발달하여 마침내 독립된 아비달마 논서가
형성되었다. 즉 아비달마발전의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성립한 최초기의
아비달마는 아함 속의 아비달마 적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 부분과 비교할 때 질적으로 그다지 큰
차이는 없다.
주로 아함에 나타난 그러한 경향을 각 부파에서 그대로 연장, 발전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내용에 있어서도 각 파 사이에 공통된 점이 많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이미 각 부파의
독특한 교의학설을 반영한 특수한 용어나 특수한 해석이 적지 않게 드러나 있다는 사실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단 독립한 아비달마 경장은 순조롭게 발달하여 마침내 아함 경전의 연장적인 입장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나 서서히 새로운 형태의 논서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부파적 색채는 점차 농후해지고
술어를 독특하게 해석, 정의하였으며 여러 가지 개념들의 상호관계에 대한 극단적일 정도의 자세한
분석적 고찰이나 개개의 문제에 대한 전문적 연구 등이 두드러지게 발달하였다. 그리고 아비달마
발전의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 그러한 교설을 조직적으로 논술하는 웅장한 구성을 지닌 논서가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