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학 시절(1970년대)부터 개혁신앙인은 아니었다. 신대원 시절(1980년대)을 지난 후 목사 직책을 받고 유학을 떠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가운데 개혁 신앙에 이르게 됐다. 그러는 동안 칼빈 선생의 <기독교강요 > 내용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다. 먼저 공부했던 Covenant Theological Seminary는 개혁신앙에 입각한 학교였고,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은 복음주의 계통의 학교였고, 다시금 University of Pretoria는 개혁신앙에 입각한 학교였다. 오랜 유학생활과 이민 목회를 통해 난 자신의 전체적 신앙이 개혁신앙임을 확고하게 견고하게 다지게 됐다. 어설픈 개혁 신앙이었다. 개혁신학에 입각한 신아의 구별을 이따금 하지 못하고 지냈다. 귀국하여 교수 활동을 하면서 개혁신앙의 실체를 점차 파악하게 되고, 개혁신앙인이 돼가는 나의 삶에 관해 하나님께 감사했다. 또 개혁 신앙을 통해 개혁신학이 견고해짐을 느꼈다. 그때부턴 개혁신학의 진수인 언약 신학, 개혁 신앙의 핵심인 언약신앙을 실제로 살고 발굴하고 알리는 일에 앞장서야겠다고 결의했다. 교수직과 목회를 함께하면서 더욱 절실해졌다. 그러면, 일반 신자에겐 개혁 신앙, 아니 모든 자에게 개혁 신앙이 실제로 어떻게, 무엇을, 왜라는 질문에 답하는 근거와 터전을 마련해야겠다는 사명감이 불타올랐다. 그래서 난 개척 교회를 시작하면서 출판사를 개업하게 된 것이다. 내가 전국을 다니면서 알릴 수 없다면, 문서로 알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렇게 하여 2012년에 페텔출판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제 목회 생활에서 실제로 성도를 양육하고 훈육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됐다. 성인만 아니라 자라나는 어린이에게도 관심과 배려 및 훈계가 필요 하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꿈과 인도를 통해 미랴를 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다운 자로 인격을 갖추게 해야겠다는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신앙 교육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자녀의 성장 발육을 경험하고, 대학교에서 교육가로서의 경험과 이론을 바탕하여 인격교육이 뭔지를 명확해져 갔다. 그래서 상습적이고 웨슬리주의에 근거한 주일 학교 제도를 과감히 없애고 초등 학생 시절부터 아이들에게 신앙 교육을 위한 신앙 교리만 아니라 인문 교육을 위한 3학, 즉 쓰고, 생각하고, 말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봤다. 세속 교육에 자라나는 아이들을 전적으로 맡기는 데서 오는 위험성을 피해야만 한다. 상대적 평가이지만 점차 한국 사회의 교육은 방향도, 이상도, 미래도, 신앙도 아닌 어정쩡한 방식과 방향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 신앙은 도구가 아니다. 바른 신앙이지 좋은 신앙도 아니다. 도구란 성장을 위한 수단이라는 의미이고, 좋은 신앙이란 세속성을 띠는것을 의미한다. 개혁 신앙을 성경의 신앙이고, 숭고한 신앙이고, 실제적 신앙이다. 말과 행위가 다르지 않고 아는것과 배우는 것이 다르지 않다. 누가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누가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받으려 할까? 정말 더물 정도로 만나기 어렵다. 개혁 신앙을 답이 아니다.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공식이나 도구가 아니고 실제 삶이다. 특이하지만 특별하지 않고, 이상하지만 사실적이다. 나는 이런 측면을 이론으로만 주장하거나 팔아먹고 싶지 않기에 탐사를 지속하고 있다. 탐사를 통해 나의 정체성, 개혁 신앙의 정체성을 도서관 지식에 머물거나 바리새파로서 방황하고 싶지 않다. 탐사가 유일한 답이라고도 고려하지 않는다. 하나의 노력이고 양심의 가책에 대한 도전일 뿐이다. 할 수 있는 한 바른 정체성을 찾고, 쓰고, 알리고, 가르쳐야 하는 책임과 의무라고 본다. 나는 오늘도 그것을 찾기에 힘쓸 뿐이다. 이것이 양심적 신앙과 성경적 신앙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라 본다. 일락이고 안락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투쟁하면서 허물어 가고 퇴색해 가는 자신을 강건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