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속 위에 서 있는 성도. 約束の上に立っている聖徒。(2024년 9월 29일 주일예배)
본문 갈 3:15~20
갈 3:15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사람의 관례를 예로 들어서 말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적법하게 유언을 작성해 놓으면, 아무도 그것을 무효로 하거나, 거기에다가 어떤 것을 덧붙일 수 없습니다. 16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을 말씀하실 때에, 마치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후손들에게'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단 한 사람을 가리키는 뜻으로 '너의 후손에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17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맺으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뒤에 생긴 율법이 이를 무효로 하여 그 약속을 폐하지 못합니다. 18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그것은 절대로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유업을 거저 주셨습니다. 19 ○그러면 율법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율법은 약속을 받으신 그 후손이 오실 때까지 범죄들 때문에 덧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개자의 손으로 제정되었습니다. 20 그런데 그 중개자는 한쪽에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15. 兄弟たち、分かりやすく説明しましょう。人の作った遺言でさえ、法律的に有効となったら、だれも無効にしたり、それに追加したりはできません。16. ところで、アブラハムとその子孫に対して約束が告げられましたが、その際、多くの人を指して「子孫たちとに」とは言われず、一人の人を指して「あなたの子孫とに」と言われています。この「子孫」とは、キリストのことです。17. わたしが言いたいのは、こうです。神によってあらかじめ有効なものと定められた契約を、それから四百三十年後にできた律法が無効にして、その約束を反故にすること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18. 相続が律法に由来するものなら、もはや、それは約束に由来す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しかし神は、約束によってアブラハムにその恵みをお与えになったのです。19. では、律法とはいったい何か。律法は、約束を与えられたあの子孫が来られるときまで、違犯を明らかにするために付け加えられたもので、天使たちを通し、仲介者の手を経て制定されたものです。20. 仲介者というものは、一人で事を行う場合には要りません。約束の場合、神はひとりで事を運ばれたのです。
지난 주일에는 그리스도인은 육체의 혈통이 아닌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율법이 유대인들을 얽매던 것처럼... 현재 우리를 얽매고 있는 성공주의 상식과 세속의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영생을 누리는 특권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누리는 영생의 축복과 영혼의 자유를 온전히 소유한 풍요로움을 매일 누리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복음을 믿는 이들은 누구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약속의 값어치와 그 권능에 대해서 율법과 비교하여 논증하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율법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을 훼손할 수 없다는 말씀인데요.
율법은 행동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율법의 준수”라는 눈에 보이는 행동의 유무를 통해 자격을 판단하게 되지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알고, 또한 지킬 수 있어야 의로운 자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오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율법이 오용되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오셨다고 이미 말씀하셨지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5:17)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곧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것이라고 증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4)
따라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하게 성경적인 증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율법을 지키는 열심이나 노력, 혹은 실력이 아닌, 언약(계약, 약속)을 기억하고 믿는 것이 의로운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의 본문은 율법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전달되기 430년 전에 세워진 약속이 먼저라고 증언하는데요. 바울은 현실적인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바로 사람의 유언장입니다. 유언장도 하나의 약속이지요.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언을 통해 약속한 것은 유언을 남긴 사람이 죽더라도 반드시 지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약속한 것은 영원토록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스스로 약속하시는 장면이 나오는 것은 인간을 유혹한 뱀에게 하신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가 뱀으로 나타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라는 일종의 선언이며, 약속이지요.
그리고 다음으로 구체적으로 개인에게 약속을 맺으시는 사례는 노아시대의 타락으로 홍수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시며,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실 때입니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창 6:17-18a)
그리고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와 제사를 드리는 노아에게 하신 언약은 너무도 유명하지요. 바로 무지개 언약이라고도 하는 다시는 이 땅에 홍수로 심판하시지 않겠다는 언약입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창 9:11a, 13)
그리고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언약이 곧 아브라함과의 언약인데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그의 “후손들”이 아닌 그의 “후손”에게 하시는 언약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 17:7)
노아와의 언약은 피조물 전체에게 하신 약속인데요. 아브라함과의 약속은 구체적으로 인간의 영생에 관한 약속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통해 혈통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이 역사에 등장했었지요. 그리고 후에 그들은 출애굽과 사사시대를 지낸 후 왕국까지 세웠지만,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없는 나그네 민족으로 살다가 다시 로마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는 형태로 역사에 다시 등장하였지만, 명목상의 성전도 모두 파괴되었고... 그래서 이제는 혈통이나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세워지는 이스라엘이 등장하는데요.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역사에 등장하는 명목상의 이스라엘을 곧 성경적인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보기에는 합당하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주일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도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대상은 육신적인 혈통의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복수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그 약속에 속한 후손은 단 한 명, 즉 그리스도 예수라는 것. 약속에 속한 단 한 명의 후손인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가 그 약속을 통해 참된 이스라엘 백성에 속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로 예수를 믿고 그와 더불어 하나가 된 믿음이 참된 이스라엘의 정체성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예수님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농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요 15:1)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성도인 우리가 풍성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참된 포도나무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가지인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약속 안에 연결되지 않은 사람들은 스스로 노력하고, 실력을 쌓아서 성공하고 성취하여, 공로를 인정받는 것으로 삶의 보람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은 승승장구하고 자기의 의도대로 일이 이루어지면 흐뭇하고 쾌락을 느끼지만, 실패하거나 혹은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낙심하고 실망하여 절망의 지옥에 빠지고 마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성경의 지혜자는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 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 (전 2:21)
그래서 하루라도 젊을 때, 한시라도 빨리 그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조언하는 것이지요.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전 12:1-2)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사는 것이 곧 우리에게 언약하신 영생을 지킬 수 있도록 주신 유일한 최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생이 예정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엡 3:10-11)
여기서 말씀하시는 예정이란 운명이나 혹은 점괘와 같은 것이 아니라, 영생의 삶이 예약되어 있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구체적으로 모든 인류를 위한 언약이 세워졌습니다. 그 언약의 성취와 완성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어주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멸망이나 지옥을 걱정하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
예수님의 복음을 믿으면 이제 더 이상 육신의 죽음 이후의 운명이나 심판에 대해서 더 이상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일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실도 걱정과 근심의 대상이 아니라, 기뻐하고 즐거워할 재료들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과감하게 이렇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들은 이제 더 이상 세속의 문제를 보고도 크게 문제삼지 않는 비결을 발견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2)
그 비결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 바로 그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과 인류를 위해서 하신 “약속”을 믿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주고 복을 주시기 원하신다는 그 약속 안에서 내가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이 땅에 율법이 존재하고, 여전히 노력하는 일과 실력을 연마하는 일, 그리고 세속적인 가치관과 시대정신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문제도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지요. 그래서 율법에도 유용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19절에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사용하시는 용도가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데요. 우리의 삶에서 바로 잡아야 할 것들이 있음을 율법이 확인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보다 자세한 것은 21절 이하의 말씀을 다음 주일에 함께 나누려고 하는데요. 다만 우리가 율법이나 혹은 교리,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대할 때의 태도와 자세가 바람직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렸을 때 수련회에서 “스무고개”라는 퀴즈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생각 속에 단어를 생각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질문을 통해 맞추는 것인데요. 말그대로 20번의 질문 안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질문의 흐름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게임에 집중하는 못한 친구들이 엉뚱한 질문을 합니다. 예를 들어 앞에 있는 친구가 식물인지, 동물인지를 물어서 동물이라고 대답을 했는데요. 다음 친구가 밭에서 키우는지 화분에서 키우는지를 질문합니다. 방향이 완전히 다른 질문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복음을 믿고, 약속에 속한 삶에서 만나는 문제들에 올바른 질문을 가지고 있어야 바른 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문제들에 올바른 질문을 할 수 있는 지식과 재료가 곧 율법이고, 성경적인 교리이며, 우리 현실의 시대정신과 가치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복음의 약속 아래에 살면서 올바른 질문과 답을 통해 풍성하고 풍요로운 열매를 거두는 인생과 일상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은 율법이 주어지기 훨씬 전에 하나님께서 맺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약속은 우리의 세속적 가치관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깊은 정답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며 쌓는 그 수많은 수고와 노력과 실력, 그리고 소유와 명예도 영생의 약속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그 어떤 문제와 고난과 고통도 복음의 약속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습니다. 율법과 교리의 지식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 거듭나서, 복음의 약속을 믿고 인생을 살며 영생을 사는 우리들이 곧 이스라엘입니다.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으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이 모든 일상 가운에 임재하고 계시는 예수님과 동행하며 행복하고 기뻐하며 평안을 누리는 기막힌 축복 안에 살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